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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2] 그리스도교 세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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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근배 [worker] 쪽지 캡슐

2000-03-10 ㅣ No.582

 

 

세속화는 신앙을 질식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승리하시는 것이 우리들의 진정한 목표이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적 종교의 무미건조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부터 떠나 세속으로 눈을 돌리며,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불길을 세속적 열광으로 대체하며, 성인들의 초자연적인 활력을 잊어버리고 현대 세계의 불안하고 병적으로 열광적이며 속된 관심거리들을 포용한다면, 우리는 크리스챤적인 신앙과 크리스챤적인 생활을 매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필요한 단 한 가지"(루까 10:42)를 망각하고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세속적인 일들에로 집중한다면 스스로 활동적이고 자유스럽다라는 느낌이 들기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빈민굴을 정리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 활력에 흘러 넘친다라는 느낌이 쉽게 들 수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가톨릭 게토(ghetto)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상은 "가톨릭"은 포기하고 "게토"는 그대로 지니는 것이다. 그들은 보편적인 교회를 세속주의의 게토로 대체하며, 숨막히는 범신론으로 대체하며, 죽음의 그림자 속에 처해있는 세상에 안에 격리됨으로써 대체하려고 한다. 신앙을 세속에 적응시킴으로써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신앙과 우리의 일상 생활과의 일치를 가져오기는커녕 신앙을 세속적인 목표들의 추구에 종속시키게 될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따르는 길의 오류는 명백하다. 신앙은 우리의 생활 속으로 배어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성소이며 우리 삶의 근본 의미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속적인 관심거리를 세속적인 기준에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의 우리 자신의 봉헌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 안에서 울려퍼져야 한다.

 

 

 

 

능률과 거룩함은 같지 않다

 

 

만약 크리스챤이 해야할 의무의 전부는 세속의 삶에서 통용되는 논리에 의거해서 판단되는 의무들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참된 신앙을 우리의 일상 생활과 일치시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활동들 속으로 신앙이 흡수되어버리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의무들을 시행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모두 다 하는 것이라고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대면을 기피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이름뿐인 크리스챤들이다.  

 

오늘날 신앙의 활성화를 위한 결정적인 질문은 그리스도의 빛을 통하여 우리들의 매일의 삶이 깊이 변화되고 그분께 적응될 것인가 아니면 크리스챤 신앙이 세속적인 관심사들에 적응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크리스챤 신앙을 우리의 생활 전체와 일치시킴에 있어서 잘못된 접근 방식은 거룩함보다도 능률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 오류의 사상은 초자연적인 감성의 상실을 초래한다. 따라서 성성(聖性)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계시는 볼 수 없게 되며, 혹 볼 수 있다하더라도 오해되거나 격하된다. 진보적인 쇄신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화나 크리스챤 계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는 되도록 인도주의적인 자선가와 다르지 않아야 된다라는 것이다.

 

 

 

 

신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초자연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지향했던 신앙의 활성화는 바로 이러한 종교에 대한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의 배경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공의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롬바르디 신부는 이러한 필요성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공의회의 과업 중의 하나는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 안에서 덜 관리자가 되게 하고 더 영적인 아버지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진보적인 가톨릭들이 신앙의 활성화가 신앙의 세속화를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신앙이 우리들의 생활 속에 침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신앙이 참된 신앙일 것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활성화로 향한 첫 단계는 크리스챤 신앙의 눈부신 우월성에 눈을 뜨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인식되어야 하며, 세속적인 충성은 거룩한 순명과 교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뿐 아니라, 지난 세기들에 교회 안에 발생했던 편협성과 율법주의를 악의적으로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기간 동안에 배출된 수많은 성인들에게로 우리의 주의를 돌려야 한다. 성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생명력의 모범들이며, 가톨릭 게토(ghetto) 심리를 가진 이들과는 정반대이다. 그들의 모범은 종교를 경직화하는 건조하고,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경향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돈 보스꼬, 라꼬르데르, 그리고 뉴먼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진정한 신앙의 활성화에로 이끌어주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활성화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정신이 충만하게 부각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얼버무리는 짓을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진보적인 가톨릭들은 그 차이를 더욱 더 얼버무리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활성화가 세속화를 통하여 성취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들의 영역을 더 확장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신앙 생활의 형식화를 가져왔던 그 원인들을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전적이고도 의도적인 세속화를 주장하면서 세속적인 활동과 방종한 자유을 권장하고 있다. 그들은 추상화로 인하여 그리고 자연적인 것들에 대한 지나친 양보들로 인하여 성령께서 밀려나신 것이야말로 건조하고 형식주의적인 방식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오늘의 풍조들은 내일 바뀌어질 수 있다

 

 

진보적인 가톨릭들이 교회가 현대의 세계에 적응할 것을 요구할 때, 그들은 대개 그것이 미래의 세계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들은 오늘의 흐름과 풍조들이 내일 거센 반항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컴퓨터 이상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의 무도덕주의 및 철학과 예술에서의 현재의 유행에 대한 강력한 반항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명백한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무시하는 것은 혀용 될 수 없다. 계몽주의 기간의 합리주의는 낭만주의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역사에는 이러한 예들이 아주 많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미래가 그들에게 속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역사나 계시에 의하여 지탱되지 않은 하나의 잘못된 신앙의 행위일 뿐이다. 교회가 현 시대 또는 "미래"에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헛된 일이며 교회의 사명을 배반하는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국가들과 역사적 시대들에 자신의 영향을 새겨주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계시는 모든 시대들의 인간, 즉 변하지 않는 본성을 지닌 본질적인 인간 인격체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역사적 시대들의 내적 동질성을 받아들이고 다른 시대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과대 평가한다면, 그는 현 시대의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에 의해야 한다라고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아마츄어적인 해석, "현 시대의 인간"에게 다가가야 한다라고 하는 선입견 때문에 그는 모든 시대들의 인간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신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며 구체적인 사실들을 흐리게 한다

 

 

하이데거의 영향은 일부 신학자들이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는 신비들을 모호하게 하고 난해한 추상론으로써 대체하려고 하는 데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가장 핵심적인 신비인 강생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니케아 신경에는 이 불가해의 신비를 간단명료하게 선언되어 있다. 반면 예수회 신부인 칼 라너(Karl Rahner)는 이 신비를 애매하고 추상적인 공론(空論)들로 대체한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인간들 안에서 드러내시며, 스스로 그분의 피조물임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는 강생에 비유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게 된다 라는 주장을 한다. 확실한 사실과 절대적인 신비를 융합하는 것은 계시 진리의 징표이다. 그러나, 라너의 공론(空論)들 안에서는, 사실들은 그 구체성을 잃으며, 신비들은 혼란스런 합리화로 대체된다.

 

더군다나, 신비들을 모호하게 하고, 신비스런 계시 진리들을 불투명하고 난해한 추상론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종교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져가겠다라고 외쳤던 구호와는 노골적으로 상반되는 것이다.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불가해한 신비에 대한 계시의 사실은 지난 2천년에 걸쳐서 가장 단순한 사람들 그리고 가장 세심한 사람들의 영혼들을 감동시켜왔다. 그러나, 그 계시들을 대체하겠다고 제시되는 애매하고 난해한 추상론들은 그리스도의 참 메시지가 아닐 뿐 아니라 건전한 철학도 아니며, 비 지성인들에게는 아무런 뜻도 전달해주지 못한다.

 

이러한 모호한 공론(空論)들은 진보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지성인들이 크리스챤 신앙을 최대한 구제하려는 간절한 소망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세기들에 걸쳐서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순수한 크리스챤 신앙, 성 프란시스 드 살레즈, 소화 테레사, 아르스의 본당 신부가 가졌던 신앙을 완전히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들의 노력이 아무리 진지하고 열심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거룩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는 절대적으로 상치되는 것이다.

 

 

 

 

과학 만능 주의는 복음서로부터 기적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미 언급되었던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가톨릭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침투되어 있다. 이것은 특히 데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의 경우에 있어서 명백하다. 그러나 데이야르의 영지(靈知, gnosis)에는 별로 끌리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암시적으로 진리와 "과학적인" 진리를 동일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크리스챤 신앙이 설 자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진리의 개념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복음서로부터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을 뺌으로써 복음서의 의의를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종교를 인간에게 적응시키고저 한다

 

 

시몬스 주교가 주일 미사 참례의 의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한 것 역시 매우 불행스런 일이다. 그는 말하기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므로, 그 법령은 폐기되어야 한다라고 한다. 즉,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가 교회의 계명들을 폐기해야 할 기준이 된다라고 하는 가정에서 우리는 또 다시 우리 시대의 극심한 세속화의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즉 사람이 종교에 적응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사람에게 적응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생각이다.

 

 

 

 

권위와 순명은 중요하다

 

진보적인 가톨릭들은 반항을 통하여 공의회의 진정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권위의 남용을 올바로 시정해야 함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남용되었던 것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완전히 내다버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것이 악한 것이라면 그것을 남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남용이 발생했다면 남용된 것이 가치있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권위와 순명의 남용이 권위와 순명의 본질을 왜곡시켰다면, 그 남용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순명과 참된 권위의 고귀한 가치를 밝혀주게 될 것이다.

 

도량이 좁음과 권위주의적인 횡포는 수도회나 신학교의 장상의 신성하고도 사랑에 찬 권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 영혼에 대한 존중에도 맞지 않으며 장상이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사이를 명백히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아량과 너그러움과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진보적인 가톨릭들은 신성한 권위 및 거룩한 순명을 내다버리고 단순히 기계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충실로써 대체하려고 한다. 그들은 거룩한 순명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하며, 그러한 순명이 순명인에게 부여해주는 내적인 자유,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아름다운 자기 봉헌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속화는 권위의 남용에 대한 올바른 처방이 아니다

 

 

최근 로스앤젤레스 교구에서 창설된 사제들의 조합은 공의회의 정신을 잘못 이해한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그 회원들은 주교들의 권위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합을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속화가 수도회나 신학교나 교계 제도의 편협함과 권위주의적인 남용들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이라면, 그리고 만약 사제직이 성소(聖召)가 아니라 의사, 변호사, 교사와 같은 하나의 직업으로 간주된다면 수도회들이 더 이상 존속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순명의 허원을 해야 할 이유는 어디 있겠는가?

 

참으로, 세속화는 수도회나 교구의 운영에 있어서의 남용들을 극복하는 바른 길이 아니다. 진보적인 가톨릭들이 추진하는 세속화는 수도회와 교구의 존재 이유 자체를 와해시킬 것이다. 그러한 남용들을 극복하는 진정한 방법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발표한 문서 "신앙의 자유에 대한 선언"에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진리는 어떤 사상이 한 시대 안에서 활기를 가진다라는 것과는 무관하다      

 

 

어떤 이데올로기들과 태도들이 사회를 풍미하고 활기를 띤다라는 것과 그것들이 진실되고 유효하고 가치있다라는 것과를 혼동하는 것이 현 시대의 치명적인 오류이다.  진리인가 오류인가를 구분하는 대신에 현 시대 안에서 활동적인가 아니면 지난 시대에 속한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가, 살아있는가 죽었는가를 따지게 되었다. 무엇이 살아있고 활동적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 참되고 선한 것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적 및 도덕적인 부식(腐蝕)을 의미한다.  이전에도 어떤 개념들과 이상들이 그 시대적인 활력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들은 그 개념들과 이상들의 진실성과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떤 개념이 한 시대의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써 이를 격찬하며 그 안에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활력이라고 하는 애매한 개념에 의한 진리의 축출에는 실용주의의 영향이 역력하다. 진리와 가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진부하고 추상적이며 흥미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은 어떤 개념이 살아있고, 활력에 차있고,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 과학에서 가정들에 대하여 그에 관한 실제 작동을 관찰함으로써 검증하는 방법을 형이상학에 적용하려는 것이다.  

 

 

 

 

현 시대에서는 자주 구호들이 사고를 대체하고 있다

 

 

우리들 시대의 미성숙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상은 슬로건, 즉 구호들에 많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구호들이 주로 정치 분야에서 대중적 열광을 유도해내기 위해서만 사용되었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분야들에서 구호들을 사용한다. 점점 더 구호들은 토론과 증명을 대신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심각한 지적 퇴보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구호들이 지혜와 진리에 대한 가장 큰 적들이기 때문이다. 구호들이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이 지적 타성에 젖기를 원하며, 사람들에게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려는 수고를 하기보다는 사물들을 간단하고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선전에 있어서 구호들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놀라울 정도이다. 국가 사회주의의 선전은 구호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공산주의도 구호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모두들 "식민주의"라든가 "제국주의" 등의 용어들이 어떤 나라들을 매도(罵倒)하기 위하여 무분별하게 사용되어왔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럽의 그 어느 제국이 외국의 식민지들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자국의 시민들을 노예화해온 공산 국가들의 대변인들이 성의없이 지껄인 구호들조차 효력을 발휘한다.  히틀러가 했던 말, 즉 "거짓말을 되풀이해라. 그것이 믿어질 때까지,"라는 것이 그들이 지키는 원리원칙이다.

 

이러한 구호들은 사람들에게 신비스러운 영향력을 가지며, 진리나 오류의 문제와는 격리된 상태에서 죄악과 적의에 찬 반응을 북돋아준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현대적인 사람," "진보적인 사람," "성숙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터무니없는 내용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호들의 마력은 그 구호들이 담고 있는 의미들이 전혀 공허하며 변덕스런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내일에 대하여 말하는 예언자들은 금방 신용을 잃고 말며, 어제의 진보주의자들은 오늘의 "복고(復古)주의자들"이 된다.  오늘날의 진보주의자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 저

                                             하느님의 성에 들어온 트로이의 목마중에서

                                  나주의 성모님발현 사이트 "은총은 강물처럼"에서 퍼옴

 

 

*가끔은 자신이 악이라고 알고 있던 곳에서 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선입견 없이

 읽어주시길 바라며...wo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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