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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7일(2월3일) 아그리젠토의 복자 마태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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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26 ㅣ No.2083



축일 1월7일(2월3일)
아그리젠토의 복자 마태오 주교, Observant
Beato Matteo Guimerà di Agrigento Vescovo
Blessed Matthew of Girgenti
1376(1377 ?) - Morì in Palermo il 7 gennaio 1450
Etimologia: Matteo = uomo di Dio, dall'ebraico
Morì in Palermo il 7 gennaio 1450. la gente lo onorò subito per la sua santità e tale cultò continuò nei secoli seguenti tanto si iniziò il processo diocesano di beatificazione nel 1759 ed il culto venne riconosciuto dalla Chiesa con decreto del 21 febbraio 1767, approvato da papa Clemente XIII.




   시칠리아(Sicilia)의 지르젠티(오늘날의 아그리젠토, Agrigento) 태생인 마태오(Matthaeus)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일찍이 포기하고, 18세 때에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으나,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5월 20일)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콘벤투알회를 떠나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성 베르나르두스와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하였는데, 특히 성직자의 규율이 극히 해이하고 성직매매가 극성을 부리던 시칠리아의 성직자들에게 개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르젠티 주민들은 그가 주교로서 봉직해 줄 것을 바라고 호소하여 교황의 동의를 받았다. 그가 첫 번째 수행한 임무는 규율 이완을 막고 성직매매를 금지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적을 만든 결과, 그는 평화를 깨트리고 불화를 조성한다는 누명으로 인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으로 갔으나, 그 수도원의 원장조차도 그를 배척하므로 하는 수 없이 팔레르모(Palermo)에 있는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옛 친구에게서 피신처를 얻어 지내다가 선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67년에 승인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참고 : 
 베르나르디노는 프란치스코회에 있어서 위대한 개혁가이기도 했다.그는 이태리의 Observant 개혁 계열의 총봉사자 대리였으며, 요한 카피스트라노와 같은 다른 위대한 개혁가들과 함께 일하였다.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복자 Matteo d’Agrigento이다.  Matteo는 시실리에서 Observant 개혁 운동을 전파한 형제이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칸 개혁자들과 설교가들’ 중에서)

 옵세르반테스의 개혁에 발전한 것은 옵세르반테스의 네 기둥 - 네성인의 영향이다. 1402년에 옵세르반테스의 참된 지도자요 스승이 될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입회했다. 1414년에는 카피스트라노의 성 요한이 이 운동에 가세했고, 1415년에는 살테아노의 성 알베르토가, 1416년에는 마르카 관구의 성 야고보가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옵세르반테스의 장래 방향을 결정지을  인물들이다.
(간추린 프란치스칸 역사,2006 프란치스칸 영성학교 강의록 55쪽에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S. Bernardino degli Albizzeschi di Siena (1380-1450) 축일: 5월20일)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S. Giovanni da Capestrano (1386-1456) 축일 : 10월23일,
*살테아노의 복자 알베르토 Beato Alberto di Sarteano (1385-1459) 축일 : 8월15일
*마르카관구의 성 야고보 S. Giacomo della Marca (1394-1476) 축일 : 11월28일
*아그리젠토의 복자 마태오  Beato Matteo di Agrigento (1376-1450) 축일 :1월7일(2월3일)
 





                                 THE SAN DAMIANO CROSS



* 참고

3) 옵세르반트의 확장

요한 22세의 교황기가 끝나자 공동체 형제들의 대수도원주의(Con- ventualismo) 를 반대하여 회칙의 ‘총체적인 준수’를 열망하는 여러 그룹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과 프랑스에 나타났다. 영적 형제들과 그들의 ‘개혁’ 의지가 암암리에 각 지역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1334년 발레의 요한은 교황의 회칙을 준수하며 살 수 있는 허락을 총봉사자로부터 얻어냈다. 이것은 초기 단순성으로 돌아가려는 운동의 시발이었다. 1350년 스폴레토의 젠틸레는 회칙 준수 보장과 수련자들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클레멘스 6세로부터 얻었다. 그러나 1354년 총회는 개혁운동과 반대노선을 지향했다. 젠틸레는 이단자로 고발되었고 쇄신의 첫 시도는 무산되었다. 젠틸레 그룹의 바올루쵸가 은둔소 생활을 하자 움브리아 지방의 버려진 은둔소에 형제들이 살기 시작했다. 1373년에 이 개혁운동은 12개의 집을 갖게 되었다. 이 운동은 1390년경 이탈리아 전역에 확산되어 있었다. 개혁운동의 초기형제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평형제들이었다. 그러나 우수한 개혁자들이 직접 회칙 준수파에 들어왔다.  

이탈리아에서의 개혁 그룹인 리포르마티(Riformati)는 1402년에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414년에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1415년에는 살테아노의 성 알베르토, 1416년에는 마르카 관구의 성 야고보가 입회를 했다. 이들은 모두 옵세르반트의 방향을 결정짓는 인물들이었다.  

스페인에서의 옵세르반트(Alcantarini, Discalceati, Guadalupesi)는 통합성은 부족했지만, 아비뇽의 교황 보호 아래 이탈리아보다 더 열정적으로 일어났다. 이 개혁 그룹들은 제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은둔소 칩거의 형태로 살았다. 1415년에는 12개나 되는 은둔소가 설립되었다. 알칼라의 성 디에고(+1463)가 1441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도 이 은둔소였다.  

프랑스에서의 옵세르반트(Recollect) 개혁 운동은 은수적 생활이 아닌 학문과 사도적 활동에 큰 비중을 두었다. 또 교황은 회칙의 영적 준수를 위해 집짓는 일을 허락하였다. 15세기 초에 프랑스 관구의 여러 수도원은 개혁을 받아들였다.  

그 후에 개혁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관구봉사자들로부터 큰 고통을 당했다. 이들은 1415년에 자신들의 사정을 콘스탄츠공의회에 상정하여 교황들의 초기 해석을 가지고 회칙을 준수할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관구의 옵세르반트 수도원들에게 개혁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수도자들을 받을 수 있는 자유와 독자적인 장상을 달라고 요청했다.  

공의회는 1415년 9월 23일 칙서 <Supplicationibus personarum> 에서 옵세르반트에게 그들이 요청한 모든 것을 허락해 주었다. 더구나 관구 내 속관구들은 해당 관구봉사자들의 재치권 아래에 있지 않으며 나름의 총장 대리를 가지고 총봉사자는 시찰할 권한만 있다고 선언했다. 어떤 수도자라도 본인이 원하면 회칙 준수파 형제들에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옵세르반트 조직 체계를 확장시켜나간 그룹들 외에도 많은 다른 개혁 그룹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는데, 그들은 자치를 누리면서도 법적으로는 형제회에 속한 채 남아 있었다. 프랑스 북부와 독일의 콜레타니(Coletani), 이탈리아의 아매디테(Amaeditae), 클라레니(Clareni) 등이 있다.

4) 옵세르반트 운동의 프란치스칸 이상
옵세르반트 운동의 독립적이고 분파적인 성격 때문에 다양한 그룹들의 열망을 종합하기란 쉽지 않다.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개혁(Riforma) 정신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형제회가 프란치스코의 이상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 하는 깊은 우려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공동체 형제들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적당한 교황청의 회칙 해석에 대한 항의 형식으로 표면화되었으며, 마침내 참된 ‘회칙 준수’를 찾아 분리된 그룹을 형성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다.‘회칙 준수’는 옛 교황칙서에 따른 회칙 준수의 의무를 의미한다.
(김창재다미아노ofm,이현주ofs 엮음,재속프란치스코회역사,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출판부,2011,123-125쪽)
 



Compagni di San Francesco

 
 ◆ 수도회칙엄수파 ◆        한자  修道會則嚴守派 ,  영어  Observantines 
   1368년 이탈리아 영성주의자들에 의해 생겨난 1897년 공식적으로 폐지된 일부 프란치스코회의 명칭으로 원시회칙파라고도 한다.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에 의해 공인된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Regula II)을 문자 그대로 엄수하고 꼰벤투알회에서 채택한 복음적 청빈의 완화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레고리오 9세, 니콜라오 3세, 글레멘스 5세 교황들의 회칙의 권위 있는 해석을 기준으로 삼았다. 성 레오 10세는 대칙서 (1517)를 통하여 이 수도회에 총회장직과 수도회의 표지를 주었고, 꼰벤투알회는 대칙서 (1517)를 통하여 자체의 총회장직을 받드는 독립 수도회로 분리되었다. 원시회칙파는 ‘원시회칙 준수’(regularis observantiae)라는 명칭을 덧붙여 쓰거나 또는 그냥 프란치스코 수도회(Fratres Minores)라고 불렸으며 원시회칙파에 소속되어 있던 단체들은 이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얼마 뒤 원시회칙파 중에서도 개혁파가 생겨 1518년에 카푸친회는 독립된 수도회로 갈라져 나갔으며, 개혁파인 아르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선족파’(Discalceati), ‘대원시회칙파’(Recollecti Strictiosi)는 이 수도회에 남았다. 1897년 10월 4일 레오 13세는 교황령으로 특별한 칭호를 모두 없애고 모든 단체들을 프란치스코회(Ordo Fratrum Minorum) 즉 이른바 ‘갈색의 프란치스코회’로 통일시켰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Beato Matteo Guimerà di Agrigento Vescovo
7 gennaio 

Etimologia: Matteo = uomo di Dio, dall'ebraico

Martirologio Romano: A Palermo, transito del beato Matteo Guimerá, vescovo di Agrigento, dell’Ordine dei Minori, cultore e propugnatore del Santissimo Nome di Gesù.

Il Beato Matteo Gallo de Gimena nacque in Agrigento, nel quartiere detto Rabbato, e, probabilmente, nell'attuale via Arco di S. Francesco di Paola - ove tradizionalmente una casa, quasi addossata alla abside della chiesa dei Minimi, veniva e viene indicata come quella nativa tra gli anni 1376 e 1377.
Entrò nell'Ordine serafico nel 1391-92 nel convento di S. Francesco d'Assisi di Agrigento dove emise la professione religiosi nel 1394.
Inviato a Bologna per gli studi teologici, li coronò a Barcellona dove probabilmente conseguì il titolo di Magister e fu ordinato Sacerdote nel 1400. Cominciò il suo apostolato di predicatore in Tarragona nello stesso anno; negli anni 1405-1416, come maestro dei novizii o magister professionis, visse nel convento di S. Antonio in Padova donde poi tornò in Spagna e vi dimorò sin verso la fine dei 1417, come risulta dalla lettera del re Alfonso, data il 28 novembre 1417, che spiega anche il motivo del suo rientro in Italia: il suo desiderio di incontrarsi con S. Bernardino da Siena, di conoscere il movimento dell'Osservanza e di parteciparvi.

Il movimento francescano dell'Osservanza (perché si intendeva osservare la primitiva regola di S. Francesco, senza attenuazioni), sorto nel secolo XIV, si organizzò e diffuse nel secolo seguente, sotto la guida di S. Bernardino degli Albizzeschi di Siena (1380-1450) che ebbe come suoi validi cooperatori S. Giovanni da Capestrano (1386-1456), Alberto di Sarteano (1385-1459), S. Giacomo della Marca (1394-1476), e il Beato Matteo di Agrigento (1376-1450).

S. Bernardino e il Beato Matteo si incontrarono in Italia nel 1418, forse a Mantova durante il Capitolo Generale e il nostro aderì all'Osservanza.
"Egli era allora sui 40 anni - come nota il p. Serafino (nel pieno vigore delle sue energie, temprato nella pratica della virtù a tutta prova, ricco di un non comune patrimonio culturale e religioso, e soprattutto di una grande esperienza umana e religiosa per cui, alla sequela del Senese, non gli fu difficile progredire... distinguendosi per santità e zelo per la salvezza delle anime".
Fino a pochi decenni addietro, pur conoscendosi la fama del Beato Matteo come predicatore, si ignoravano i suoi scritti, perfino le lettere che certamente egli aveva indirizzato ai sovrani di Aragona, a S. Bernardino e ad altri.
Nel 1960 il p. Agostino Amore ofm pubblicò i "Sermones varii” che erano stati inseriti in un codice di S. Giovanni da Capestrano e venivano a lui attribuiti". In tutto sono 33 discorsi.
Altri 44, in seguito, ne sono stati scoperti dal p. Serafino M. Gozzo nel codice 18-II-3 della Biblioteca vescovile di Nocera.
Il p. Serafino li trascrisse e li preparò per la stampa, ma non potè pubblicarli perché prevenuto dalla morte.
Nel suo volume "Ricerche e Studi” più volte citato, ne fornisce un elenco.
I sermoni, parte scritti in volgare, parte in latino, commentano, in genere, un testo biblico dividendone la trattazione in due, tre o più punti.
A volte il sermone è tutto svolto, esteso nelle argomentazioni e corredato anche da alcune didascalie sul modo di recitarlo; a volte si tratta di appunti e quasi di una scaletta degli argomenti più importanti.
Mostrano però tutti la scienza del predicatore, la logica delle sue argomentazioni, la praticità delle conclusioni, lo zelo apostolico e molto spesso anche l'intimo sentire del santo.
Nel 1425 il papa Martino V concesse al Beato Matteo di fondare dei conventi dell’Osservanza. Tra questi citiamo quello di S. Maria di Gesù di Messina, di Palermo, di S. Nicolò di Agrigento, di S. Vito ivi, di Cammarata, di Caltagirone, di Siracusa. Così anche in spagna fondò due conventi a Barcellona.
Nel suo ordine fu vicario provinciale nel 1425-27, poi nel 1428-30. Nel 1432 fu nominato Commissario Generale della provincia di Sicilia, carica durata fino al 1440.
Nominato vescovo di Agrigento da papa Eugenio IV il 17 settembre 1442, venne consacrato il 30 giugno 1443 nella chiesa madre di Sciacca dal vescovo Nicola ausiliare dell’arcivescovo di Palermo.
Per la sua generosità verso i poveri venne accusato, da una parte del clero che lo avversava, presso la Santa Sede di dilapidare i beni della Chiesa, infatti secondo varie testimonianze egli rinunciò a tutti i proventi ecclesiastici in favore dei poveri, riservandosi soltanto lo stretto necessario per se e per quelli che lo coadiuvavano. Oltre a questo venne accusato calunniosamenti di godere di una donna carnalmente. Nel processo svoltosi alla corte pontificia si dimostrò l’innocenza del Beato e il papa lo assolse da ogni accusa e gli confermò la sua fiducia restituendogli la sede episcopale.
Ma la persecuzione non cessò, tanto che il Beato, dopo essersi consigliato anche con S. bernadino da Siena, rinunziò al vescovado.
Morì in Palermo il 7 gennaio 1450. la gente lo onorò subito per la sua santità e tale cultò continuò nei secoli seguenti tanto si iniziò il processo diocesano di beatificazione nel 1759 ed il culto venne riconosciuto dalla Chiesa con decreto del 21 febbraio 1767, approvato da papa Clemente XIII.
La memoria si celebra l’8 febbraio.


Autore: Raimondo Lent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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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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