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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호(도미니꼬) [morningnews] 쪽지 캡슐

2002-08-18 ㅣ No.638

 

 

   †찬미예수

 

 

 

   聖書에서는 惡의 후손 유다와 善의 수제자 베드로가 등장한다.

 

 

 

   베드로는 직업이 어부였으며 일자 무식한 사람으로서 성격 또한 매우 급하여 개판 오분전의 성향으로 치닿던 사람이었는데 반하여 유다는 매우 계산적이고 때로는 진지한 모습을 보이며 주도 면밀한 자아를 축적해 온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두 나그네 모두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자주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드러 내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이는 결국은 또 하나의 부부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감성과 이성의 모양새와도 흡사하였음을 고백할 수 있겠다. 만약에 글을 읽는 사람이 총각이나 처녀라 하면 마냥 보라빛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부관계가 다만 하느님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와도 같아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자연법칙에 의해 살고 악령은 영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였던가? 문제는 감성이 육이고 이성은 정신과이기에 악령 또한 어리석기를 원하는 후계자들의 모집을 위해 이들의 정신과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인이 되기 위하여 자신 안의 이 두 객체가 서로 나눠주고 보완 해 나갈 때 한 몸안에서의 동지애가 더욱 굳건 해짐으로써 결국, 이들의 일치로서 얻는 자녀와도 같은 지고 지순한 (사랑의)의지가 탄생 되어 다시 세상에 파견 됨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는 지금 이 순간부터 다만 주님의 도구일 뿐인 스스로를 갱신시키는 의지의 삶을 각오하며 이미 세상 벗들과 자연의 주파수를 맞추고 상대의 영혼을 먼저 바라보며 기도하는 꽃과 나비의 대화를 갱신하여 즐기고 시작한 사람이라면 더욱 합당한 주님의 편지를 받으심이라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만유 위의 으뜸이신 주님께 먼저 나를 봉헌하며 또한 주님을 믿고, 닮고, 따르려 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또한가지 중요한 진리를 새삼 발견할 수 있는데 감성이나 이성의 편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의지로 무장되어야 할 우리의 자녀들은 결코 나의 소유물이 아니고 하늘이 내게 주시는 가장 고귀한 선물임을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감성홀로 의지를 만들 수도 없고, 이성 홀로 사랑의 의지를 전혀 생성시킬 수 없으니 완전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기도=대화)모뎀을 제대로 운영치 않으면서 자녀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일자무식했던 구약때의 베드로처럼 나무에서 고기를 찾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구약시대는 삼초전도 뜻하고 있음을 기억해 두기로 하자.

 

 

 

   불행히도 이제 W(월드컵)세대로 접어드는 이 싯점에서 세계 1위의 교통 사고율의 오명을 안고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급진적인 성향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가정 중 한가정이 나약한 감성이나 이성적 편견에 휩쌓인 채 쉽게 이혼을 결정하거나 또한 조장받고 있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여러가지 판단 착오로 세계 2위의 처참한 살인 행위인 낙태 왕국의 슬픔속에 발만을 동동 구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나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선호하는 가톨릭 신앙인들조차도 전체 신자 비율의 8%의 가정만이 아침 기도, 삼종 기도(마니피캇), 저녁 기도 및 양심 성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세가정중 한가정이 그나마 무늬만 신자임을 드러내는 냉담의 올무를 벗어나고자 주일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 선데이 신앙인들 중에 다시 8%만이 교회안에서 봉사하고 있다는 현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매우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헌신적인 생활로 하루의 여정을 보내거나 즐기고 있음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내 몸 속안의 유다와 베드로를 닮은 감성과 이성을 고찰 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세상은 더도 덜도 없이 내가 변한 만큼만 변해 보이며 부자는 때묻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원하는 것이 적은 사람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매사에 신중한 유다보다 세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발뺌을 하였는데, 왜 베드로는 훗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가톨릭 교회를 세우고 순교하였으며 천국 문지기가 되었겠는가?

 

 

 

유다인에게는 주입식 교육을, 바리사이파나 율법 학자들에게는 심오한 진리를, 이방인들과 이들에게 때로는 열가지 교육보다 한가지 처방을 위하여 작은 기적을 베푸신 탁월한 교사 예수님의 권능을 옆에서 보고, 듣고, 믿던 유다의 오류는 간단하다.

 

 

 

계산에 밝았기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나타난 유다는 만왕의 왕으로 모셔야 할 예수를 인간의 왕으로 추대하고자 또한 경리부장이었던 자신이 한나라의 재무부장관을 꿈꾸는 떡고물에 연연하며 율법 학자들에게 그분을 고발함으로써 예수께서 쉽게 빌라도와 로마제국을 쳐부수고 권좌를 차지할 것이라 계산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상대를 쉽게 무시하는 위선적인 침묵, 상대에게 이야기를 하면 손해를 볼 것 같아 접어두는 계산적인 침묵, 된소리가 나올까봐 참아내는 바보같이 아름다운 침묵, 그리고 역시 가톨릭 신자들에게 매우 어렵게 다가오는 사랑이 담긴 말을 행하는 움직이는 이러한 침묵은 분명 유익한 과정이지만 스스로의 판단을 앞세우는 유다의 신앙은 참으로 위험 천만한 나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불가에서 말하듯 인생은 고행의 수도승의 길이요, 가톨릭의 외로운 순례의 여정과 상통한다. 이는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의 거룩한 침묵을 닮아내는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의 그리스도 신앙(성호경)을 망각하면 쉽게 유다처럼 유혹을 받고 심지어 악의 도구가 되어 영원한 죽음에로 전락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역시 내가 먼저 걱정할 일은 아닌것 같다. 천사와 마귀는 원래 한 집에서 산다 하시지 않는가? 다만 내가 교만할 때 타인이 마귀로 보이고 내가 겸손할 때 나의 거울 이면의 수은도 보일 것이다.

 

 

 

   욕심이 다만 번뇌와 죽음을 낳는다 하시고, 불가의 비구니처럼 결혼하지 않은 여자 승려가 우리의 수녀님인 것처럼, 결혼하지 않은 남자 승려를 비구(비우다)승이라 하는데 우리들 마음속의 신부님과 같고 일본에서 유래 되었다는 결혼한 승려, 즉 대처(모든)승은 목사님과도 같으며 세속의 모든 수도자이니 성직자를 포함한 지금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지나친 율법 성향으로 흐르기 쉬운 예수 없는 십자가론의 개신교 형제들과 또한 쉽고 편안함의 기도 생활에 젖을 수 밖에 없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적지 않은 가톨릭 형제들은 과연 누구를 닮고자 하고 있겠는가?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살길이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아들이신 예수님의 입으로, 또한 성령의 의지로 결코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는 하루살이의 단단한 평화를 구가하기 위하여 성호경을 봉헌하고 있는데 과연 이를 완성하는 지혜는 무엇일까?

 

 

 

우선 이론적으로는 저녁이면 거룩한 죽음을 맞는 하루살이의 삶이 이어진다면 새아침이면 새롭게 태어나는 지극히 나약하신 우리 가슴속의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인간에게 가장 깊은 축복은 항상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주님의 은총임을 재삼 기억해 두자.

 

 

 

   유다의 계산은 이로서 처절하게 빗나가고 십자가위의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의 발아래서 그분을 세번이나 배반하였기에 깊은 회심으로 슬피우는 베드로를 바라보며 또한 누구보다도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전히 유다였던 것이다.

 

 

 

사랑 자체이시며 전능하신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너를 심판하시고 또한 너 그때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실 때 여기서 우리는 유다처럼 처신할 것이냐? 베드로처럼 처신할 것이냐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이때의 유다의 심리안을 살펴보기로 하자.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이자 씻을수 없는 오류를 범한 장본인임을 자각한 유다는 당장이라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발아래에서 꺼이 꺼이 우는 베드로에게 달려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함께 서로를 끌어안고 울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의 수제자인 이 때의 유다를 어찌 사탄이 가만 내버려두랴?

 

 

 

사탄은 이미 영적으로 유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유다는 이윽고 예수를 체포하러 온 병사들의 귀를 단칼에 잘라버린 구약 시간의 무지막지한 베드로에게 또다시 연연하고 있었으니 그는 결국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주의 사랑을 망각한 채 연이어 내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하시고 내가 기쁠 때 함께 뛰노시던 주님에 무관심해져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이 위기(위기와 기회)에서의 성사를 저버리고 영원히 어리석은 계산속으로 스스로 나무에 목을 묶고 죽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진리가 단순함으로 귀결됨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유다는 앞서 서술한 나약한 인간의 이성적 오류들로서 신앙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수많은 감성의 오류들로 점철된 이 위기의 순간에서 비로소 자신의 자아을 버리는 회심으로 진화하는 생명체!!! 사랑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다가 즐기던 과학은 먼저 보고, 듣고, 믿지만 베드로가 추구하던 사랑은 먼저 믿고, 듣고, 봄인 것이다.

 

 

 

또한 과학도 사랑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미 베드로식 전략으로 내안의 감성과 이성을 닮았던 이 두 주인공들을 비교하자는 이야기보다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과의 의사 소통을 위한 대화가 기도이고 곧 호흡으로 연결 됨을 고백함으로써 연이어 베드로식의 전략으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밤,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기 전에 이 세상에서 내안에 가장 가까이 있기에 쉬운 문제이며 또한 등잔밑에 있었기에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베드로식 산수 문제 한가지를 풀기로 하자.

 

 

 

당신은 과연 기도의 필수 요소인 대화와 이에 대한 장애로 신앙 생활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대화의 반대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의 문제이다.

 

 

 

참고로 이 문제의 답은 성령 기도회를 주관하시는 이범주(바오로=꾸르실료 주보 성인) 신부님께서 일전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제시한 문제이기도 한데 청중 모두가 맞추지 못한 추억이 있는데 어떤이는 "침묵"이라고도 하나 침묵중 대화도 소중하고, 오히려 움직이는 침묵이 부족한 우리 교회 현실을 자각하기 위하여 답을 모르는 도구들은 오늘밤 베드로 성인의 그것처럼 주님께 신앙고백을 통하여 여쭤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의 답을 알게되면 허무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유다적 관점에서는 천기누설이라 그런지 우리안의 더큰 교만과 게으름, 불안의 회색안개가 밀려올 지도 모름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께서 정녕 베드로의 신앙을 믿고, 닮고, 따르시겠다 하면 잠시 스스로를 성인처럼 갱신한 후

 

이 문제의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대화의 답을 알고 싶으면 굳뉴스(http://www.catholic.or.kr/goodnews)내의 386 밀알선교동호회의 기도 묵상란을 열람하여 보라.

 

 

 

당신의 가정의 평화를 빌면서 건강한 하루 이루어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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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꾸르실료=짧은 코스=레지오 크리스티라고도 함(레지오 마리애와 聖母子 지간으로 본당내에서 가장 겸손하고 희생적이어야 할 단체로서 제속회를 모델로 하며 그리스도 병사라고도 칭하는데 주로 게릴라 전으로 임하며 누구나 꾸르실료 이전과, 꾸르실료, 꾸르실료 이후로서 동참함)

 

 

 

본당의 성전 완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청년 꾸르실료의 활성화가 기대됨. 이를 위하여 교회와 사회안에서 가장 깊은 의미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와 공동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적성을 가진 청년들의 관심과 기도가 요구됨.

 

 

 

2002년 8월 17일(토) 좋은아침 02)351-4588~9

 

’사랑이신 주님, 어두움의 나의 육신에 빛으로 다가오시니 다만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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