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8월호_특집[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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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07-19 ㅣ No.19

['쁨람'의 날개]

 

지난 봄 서울의 어느 가톨릭교회 여성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월례모임에 와서 미사를 드리고, 좋은 말씀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떤 모임’인지 물어 보았더니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기쁨과 보람’을 찾고, 해방된 삶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본당을 초월하여 매월 한 번씩 신부님을 초대하여 미사도 드리고 좋은 말씀도 듣는 모임이라고 했다. 교회의 공식적인 모임이 아니었기에 선뜻 대답을 할 처지가 아니었지만 평소에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하는 분의 부탁이라 약속을 했다.

마침내 때가 되어 그 모임을 찾아갔다. 중년 부인네들이 20여 명 모여 있었다. 행여 본당에서 딴전을 펴고, 서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파벌을 만드는 모임일까 내심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선량한 분들의 열린 모임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미사도 드리고 강의도 하고 점심도 함께 먹었다. 그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설교에 등장하는 ‘풀밭에 있는 목자 없는 양’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 침체되어가는 오늘 이 시대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더욱 무거웠다.
이 시대 사람들은 ‘오늘의 교회’ 안에서 해방된 삶의 기쁨을 맛보고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얻을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교회의 틀 안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 그 모임을 주관했던 자매님이 “신부님 저희 모임의 이름을 하나 지어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교회 안에 그렇게 많은 모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 하나의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이들 앞에서 내가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목적과 뜻이 불분명한 단체의 이름을 짓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들의 영적 지도신부도 아니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닌, 그야말로 ‘지나가는 나그네’이기 때문이었다.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었지만 점심 얻어먹은 죄도 있고 하여 ‘5분 퀴즈’를 푸는 학생처럼 잠시 헤매다가 기발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를 주시하는 그들에게 마침내 입을 열어 “‘쁨람’이라고 하시면 어떨까요?” 라고 했다.
모두들 한참 동안 조용했다. “뭐라고예? ‘쁨람’이 멉니꺼? 라틴말입니꺼?” 하고 경상도 아줌마가 침묵을 깨뜨렸다. 나는 조용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쁨’은 ‘기쁨의 뒷글자’이고 ‘람’은 ‘보람의 뒷글자’입니다. 이 모임이 ‘기쁨과 보람’을 추구하는 모임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없는 듯한데요”라고 했다. 모두들 박장대소로 좋아들 했다. 늘 준비하고 다니던 붓펜으로 로고까지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고 나는 훌쩍 그 자리를 떠났다. 

녹음이 짙어가는 서울 한강변에는 오월의 햇살이 눈부셨다. 주일 오후, 식사 후에  운전을 하니 졸음이 몰려왔다. FM음악을 틀었다. 그러나 음악이 자장가로 들려서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잠시 수면을 청했지만 졸음은 간데없고 내 머릿속에 조금 전에 만났던 그들의 눈빛이 어른거렸다. ‘그들이 찾는 기쁨과 보람, 해방’은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는 너무나도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가? 예수의 행복론,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진복팔단은 예수시대는 물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 관점과 가치가 가히 혁명적이다. 철저히 소유할 것과 영광스럽고 화려하고 칭송받는 삶을 추구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일찍이 바오로 사도가 말한 “희랍인에게 스캔들이 되고 유다인에게는 수치와 모욕이 되는 예수의 십자가”는 그때도 오늘도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스캔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소유함으로써 행복하리라는 인간의 기대는 끝이 없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는 모순된 인간실존은 때때로 처절하리만큼 비극적이고 비참하다. 원죄와도 같은 욕망의 굴레와 그 늪에서 아무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을 앞둔 어느 시인이 “자유가 나를 구속했구나!”라는 유언을 남겼듯이 인간의 자유는 언제나 한계 앞에서 좌절을 맛보게 하며, 하느님의 은총을 외면한 ‘인간의 해방 의지’는 언제나 시지프스적인 추락을 경험하게 한다. 시공에 갇혀, 유한한 삶을 살면서 죄와 죽음의 한계 앞에서 때때로 인간은 철조망에 갇힌 새처럼 존재하지만 자신의 해방을 위해 비상과 초월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날 저녁 예수를 몰래 찾아와서 삶의 의미와 참행복의 길을 묻던 유다 산헤드린의회 의원 니고데모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람은 누구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한 3장 참조)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다시 태어남은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 우리가 평범하게 생각하는 행복, 그 ‘기쁨과 보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 기쁨이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그 보람이 어떤 것인지를 성찰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늘 한 푼 감소하며 중용의 길로 돌이켜 나만을 위한 것, 우리만을 위한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는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일까? 이러한 지혜를 ‘쁨람의 지혜’라고 한다면 망상이 될까?
참행복의 길이 곧 ‘해방의 길’이요 그 해방의 길이 ‘십자가의 길’로 연계되어 있음을 그 누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의 제자들, 프란치스코와 데레사와 샤를르 후코가 걸었던 그 해방의 길을 내가 어찌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분의 도우심으로 그 어디에서 언젠가 또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그들이 걸어갔던 그 해방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오늘 이 자리에까지 내 무거운 몸에 지녔던 ‘쁨람의 날개’는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며 석상처럼 강변에 서서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오월 하늘을 가득히 담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바람을 몰아 찬란한 저녁 놀빛 속으로 흐르고 있었다.


조광호/시몬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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