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성당 자유 게시판

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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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옥 [whitestar63] 쪽지 캡슐

2000-01-25 ㅣ No.873

건망증이 지독한 바보가 있었다.  정도가 어찌나 심한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어제 저녁에 벗어 놓은

자기 옷이 어디 있는지 찾는 일로 골머리를 앓곤 했다.

 

그러니 출근 시각을 지키기도 힘들었고, 밤에 돼서도

다음날 일어날 걱정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바보의 머릿속으로도 문득 번쩍하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메모)였다!

 

그는 먼저 종이와 펜을 준비한 다음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자 옷을 하나

하나를 벗으면서 그 옷가지 별로 이름과 놓아둔 장소를

메모해 두었다.

 

다음날 아침잠에서 깬 그는 먼저 첫 번째 메모지를 찾아

읽었다.  거기에는 (바지)라고 쓰여 있었고, 바지는 마침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는 얼른 바지를 입고 나서 다시

메모지를 읽었다. 다음은 (셔츠)였다.  셔츠 역시 제자리에

있었다.  그는 셔츠를 걸쳐 입고 다음 메모지를 찾았으며,

(모자)도 마찬가지로 제자리에 있었다.

그는 빨리 그것을 머리에 눌러 썼다.  넥타이, 양말, 손수건도

모두 그런 식이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바보는 자신이 고안해 낸 방법에 대해 무척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이어 매우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옷가지를 비롯한 다른 모든 것들은 모두 찾을 수 있었지만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을 적어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끝내 그 스스로를 찾지 못했다.

 

*****

(나)는 어디에 있는가.  수천 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

라는 관념을 전부 지워 버리고 마음을 넘어선 존재, 개체라는

감각을 넘어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나다.

그대는 정녕 어디에 있는가.

  

--------소금 (지혜의 바다에서 건저올린 짭짤한 알갱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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