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색성당 게시판

어느 말라버린 꽃씨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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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현 [paul] 쪽지 캡슐

2000-07-04 ㅣ No.528

  어느 말라버린 꽃씨의 회고

 

예전에 난 누구보다 예쁜 작은 꽃씨였다.

처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엄마 꽃의 한가운데 자리 잡았을때 사람들은 나의 예쁜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난 내가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 또한 행복

했다.

어느날 이제 나와 내 형제들은 독립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엄마에게 들었다.  다른 형

제들은 서운해 했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난 이제껏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던 행복의 미소를 이젠 나 혼자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밤엔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 설레이고 행복하기만 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나와 내 형제들은 드디어 땅으로 내려왔다.

처음 밟는 땅의 느낌은 거칠고 차가왔다.

난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그들의 집에서 내 아름다움을 뽐내고 싶었다.

그래서 차갑고 거친땅에서도 나의 몸을 예쁘게 꾸미기 위해 단장하는 일을 게을리 하

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어느 누구하나 날 이끌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러던 어느날 난 어느 작은 꼬마 아이의 손안에 들어갈 수 있었고 소원이 성취되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 없었다.

그 아이는 엄마에게 손을 벌리고 날 자랑하기 시작했다.  난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난 한 순간에 아이의 손에서 다시 거칠고

차가운 흙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예쁜 꽃씨야.  내년 봄에 더 예쁜 모습으로 보자꾸나!"

난 한없이 슬프고 외로움이 엄습해 왔지만, 내년 봄에 보자는 아이의 말에 위안을 삼

으며 차가운 눈속에 나의 몸을 묻었다.

정말 그해의 겨울은 나에겐 너무도 춥고 가혹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내가 사람들의

마음에 다시 행복을 줄 수 있는 봄을 말없이 기다렸다.

내가 긴잠을 깨어나 하늘을 보았을때 봄하늘은 높고도 깨끗했다. 날 행복하게 한건 푸

르른 하늘도 아니요, 싱그런 봄바람도 아니었다.  난 지난 가을 그 아이의 목소리를

가슴에 새기며 이 날을 기다렸다.  날 진정 행복하게 한 것은 바로 그 약속이었다.

난 어느날 가벼운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날 부르는 지난 가을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꽃씨야, 예쁜 꽃씨야, 어디있니?"

난 크게 소리쳤다.

"아이야, 난 여기있단다.  날 어서 너의 품에 안아주련?

난 정말 춥고 지쳐 있단다..."

하지만 아이는 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꽃씨야, 어디있니?"

"화진아!  지난 가을 엄마가 얘기한 것이 생각나지 않니?"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이내 손뼉을 치며 이렇게 얘기했다.

"아참,  그렇지!  엄마, 저기에 있어요."

아이는 그말을 남긴채 달리기 시작했다.  난 큰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아이야, 가지마.  난 여기 있단다.

난 추운 겨울을 너만을 기다리며 차가운 눈속에서 보내야 했단다."

아이가 발을 멈춘 곳은 나의 엄마 꽃 옆이었다.

내가 처음 땅에 내려왔던 곳.  아이의 손에 들려 행복감을 느끼던 곳이었다.

"엄마, 여기 있어요!  이렇게 예쁜 새싹으로 자라 났군요?  아!  정말 예쁘다."

"그래 화진아, 네가 지난 가을에  이 꽃씨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너의 품속에서만 자

라게 두었다면 아마도 이렇게 예쁜 새싹으론 피어나지 못했을 꺼란다."

"엄마, 여기서 정말 예쁜 꽃이 피나요?"

"그래, 여름 따사로운 햇빛을 받고 비를 맞으면 가을엔 예쁜꽃을 피울 수 있단다."

"그럼 내가 매일 아침마다 물도 주고 예쁘게 자꾸어 줄래요."

"그래, 그러면 이 새싹도 화진이의 정성만큼 예쁜 꽃으로 환히 웃어 줄꺼란다."

아이는 매일 아침 자그마한 주전자를 들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내 형제

꽃씨, 아니 지금은 새싹이 되어버린 내 형제가 있는 곳으로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

다.  난 뒤늦게 생각했다.  날 바라보며 행복해하던 모습은 내 이 몸 하나 때문이 아

니라 저렇게 가지를 뻗고 자라나 가을에 한송이 예쁜꽃으로 피어나는 우리들의 모습

때문이라는 것을......

난 땅에 내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늦었지만 나도 싹을 튀우고 꽃으로 자라나고 싶었

다.

하지만 이른 봄의 얼어붙은 땅은 쉽게 나의 뿌리내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다가온 여름의 뜨거운 태양은 나의 몸을 거칠고 메마르게 했다.

가을은 또 그렇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이가 매일 바라보던 새싹은 커다란 꽃나무로 자라 예쁜꽃을 피웠다.

아이는 매일 행복의 대화를 나누곤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어느날 난 갑자기 나의 몸의 들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난 힘없이 눈을 들어 앞을 보

았다.  난 지난 가을 날 처음 어루만져 주었던 그 아이의 손안에 다시 들어와 있었다.

"엄마, 여기 벌써 꽃씨가 떨어졌어요!"

"저런, 화진아 이건 지난 가을의 꽃씨로 구나?  가엽게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모양이

구나?"

"엄마, 그럼 이 꽃씨는 죽은건 가요?"

"글쎄, 그런것 같구나..."

"하지만, 여기 이렇게 버려두는건 너무 가여워요.  새들이 쪼아 버리면 어떻게 해요?"

난 차라리 새의 먹이가 되고 싶었다.

절망이 엄습해 왔고 난 힘없이 눈을 감았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때 앞은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여 보려 해

도 쉽지 않았다.

난 이런것이 죽음이구나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따뜻했고 매일 아침 촉촉한 물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

던 것이다.  난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 모든것이 궁금했다.  난 빨리 이 땅속에서

나가보고 싶었다.

어느날 난 힘을 다해 흙을 뚫고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었다.

차가운 한기도 느낄 수 없었다.

빛의 눈부심에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었다.

잠시 눈을 껌뻑이며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곧 아주 맑은 눈망울을 볼 수 있었

다.  아주 오래전에 날 바라보던 눈이었다.

"엄마, 싹이 돋았어요.  어서와서 이것 좀 보세요."

"정말이로구나!  화진이의 정성이 마른 꽃씨를 살렸구나."

"이 새싹도 꽃을 피우겠죠?  그때까지 제가 매일 물도 주고 예쁘게 키울꺼예요."

"그래, 가을이면 화진이 만큼 예쁜 꽃이 피겠구나."

나의 가지엔 예쁜 꽃망울이 자라났다.

난 내가 피울 꽃망울속의 내 씨앗들에게 매일 저녁 자장가처럼 들려주는 말이있다.

"너희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깨어지고 자라나 피어나는

결실은 더 아름답다.

이 세상엔 더 이상 나와 같은

메마른 꽃씨의 회고는 필요 없단다.

잠시의 고통에 힘들어 하지 말고,

아름답게 자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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