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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7일 이괄라다의 복자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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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25 ㅣ No.2082



축일 : 5월27일
이괄라다의 복자 요셉, OFM Cap.
Beato Giuseppe da Igualada (Giuseppe Tous Soler) Sacerdote cappuccino
31 marzo 1811 - 27 febbraio 1871
Blessed Josep Tous Soler
Also known as : José Tous Y Soler, Josep de Igualada
Born : 31 March 1811 in Igualada, Barcelona, Spain
Died : 27 February 1871 in Barcelona, Spain of natural causes while celebrating Mass
Venerated : 22 December 2008 by Pope Benedict XVI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 25 April 2010 by Pope Benedict XVI




카푸친 사목사제 겸 교육자, 이괄라다의 복자 요셉  

수염이 없는 카푸친!
오늘날 말쑥하게 면도를 한 수많은 카푸친들에게는 이괄라다의 요셉 형제의 2010년 시복은 어느 정도 안도감을 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염이 없는 동료 형제인 이괄라다의 복자 요셉 형제(요셉 토우스 이 솔레르’라고들 함)의 모습에서 이제 그들은 그들만의 천상 모델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카푸친회 회헌에서는 수염을 기르는 것이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언급되어 있지만, 초창기부터 1967년까지는 수염을 기르는 그 관습이 보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법률상으로도 강요된 일이었다. 1528년에 반포되어 카푸친 개혁을 인준한 'Religionis Zelus'라는 교황칙서는 수염을 기르는 것이 카푸친 형제들에게 베풀어진 '카말돌리회의 특권'인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1529년의 알바치나(Albacina) 정관은 수염을 가위로 다듬는 것조차 금지했고, 1536년의 수도회 최초 회헌에서는 그 금지령 강요에 대한 영적인 동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우리 초기 형제들의 모범에 따라 수염이 길러질 것입니다. 수염을 기르는 것은 남자답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거칠고 천하고 또한 터프한(가끔 '엄한', 그리고 '엄격한'이란 말로도 번역되는 라틴어의 austerus는  카푸친회만의 특성이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이후 회헌이 개정될 때까지, 1536년 회헌에 따른 모든 카푸친 법률은 그 금지령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최근 시복된 카탈로니아 출신인 카푸친의 사진은 수염을 기르지 않고 말쑥하게 면도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셉 형제의 이러한 현저한 특징, 그의 복장과 그 속세 이름(요셉 토우스 이 솔레르)의 관용(慣用)은 19세기 반성직주의적인 에스파냐 안에서 그가 보내야 헸던 대부분의 카푸친 생활을 잘 시사해 준다. 그는 정상적인 카푸친으로 살지 못하고, 사목사제수가 부족한 바르셀로나 교구의 본당에서 재속 사제로 신자들에게 직접 봉사해야만 했었다. 수도회의 기관들 바깥에서 살아가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 형제는 자신의 카푸친 은사적 삶을 전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겸손, 침묵에 대한 애정과 기도생활에 대한 충실성을 기르며 가난하고 엄격하게 살았으며, 그와 동시에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의 물적, 영적 필요에 자기 자신을 헌신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 요셉 형제의 인생과 카푸친 생활의 요람
요셉 형제의 카푸친 생활은 바르셀로나에서 시작되었다. 요셉이 만 아홉 살 때에 그의 가족은 경제상의 이유로 그 도시로 이사했다. 바르셀로나는 요셉이 카푸친들을 처음으로 첩했던 도시였으며, 만 15살 때에 수도회에 입회를 청한 곳이었다. 1827년 2월 27일, 그 도시 근교에 있는 사리아(Sarriá) 수련원에서는 요셉이 수련자로 받아들여졌다. 그 순간부터 그는 수도회 안에서 '이괄라다의 요셉 형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더 알려지고 바로셀로나 시민들로부터 더 사랑받게 될 이름은 그의 속세이름 '요셉 토우스 이 솔레르'였다.

후일 카푸친회의 복자가 될 요셉 토우스 이 솔레르는 1811년 3월 31일 카탈로니아 주의 수도인 바르셀로나의 근교 이괄라다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그리스도교 부부 '니콜라우 토우스 이 카레라'와 '프란치스카 솔레르 이 페레르' 사이에서 태어난 열 한 명의 자녀들 중 아홉 번째의 아이였다. 그는 태어난 다음 날, 본당성당에서 거행된 세례식에서 ‘요셉 니콜라우 야고보’라는 본명을 받았고, 후일 카탈로니아의 가장 유명한 기업가들 중 한 사람이 될 자신의 형 ‘니콜라우 토우스 이 솔레르’는 그의 대부였다. 신앙의 기본 진리를 가정에서부터 배워왔던 요셉은 1817년에 견진성사를 받았고 1818년에 첫 영성체를 했다. 1828년, 수련기를 만료한 이괄라다의 요셉 형제는 카푸친 형제로서 서약을 한 뒤, 카탈로니아에 위치한 여러 형제회에서 학업 과정을 밟았다. 그런 다음 1833년,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유배당하게 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의 정부는 수도회들을 폐쇄했고, 그곳의 재산을 모두 압수했다. 그리고 1835년, 요셉 형제를 비롯한 몇몇 동료형제들이 체포되어 18일 동안 바르셀로나의 한 요새에 갇히게 되었다. 석방된 후 그는 유배되었고, 1836년에 프랑스로 되돌아오기 전까지 북이탈리아로 향하는 프랑스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몇 달 동안 헤매고 다녔다. 프랑스 마르세유(Marseilles) 근교 그러노블(Grenoble)에 위치한 분도회 수녀원으로 도피한 그는 그곳에서 수녀들의 지도사제로 봉사하면서 설교권한 자격을 얻기 위한 윤리신학 학업과정을 마쳤다. 1843년, 에스파냐로 완전히 복귀하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수녀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또한 그곳 지역 주교의 진심어린 존경을 얻게 된 상태였다.


 

귀향 후 그의 숨은 카푸친 봉사
요셉 형제가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당시 반가톨릭적인 국법으로 인해 수도생활에 대한 외적인 상징들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수도원에서 살지도 못했고 수도복을 입을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교구 성직자의 복장으로 자신의 가정집에서 살면서 바르셀로나 에스차라구레(Esparragure) 본당 보좌사제로서 신자들에게 봉사했다. 1848년, 그는 그 도시의 다른 지역에 있는 산 프란시스코 데 파올라(San Francisco de Paola) 본당으로 이동되었고, 그곳에서 마음을 다하여 같은 사목에 헌신했다. 도시 젊은이들의 어려움에 늘 관심을 가졌던 그는 1850년, 젊은이들의 교육과 복지를 도모하기 위해 '신성하신 목자의 어머니의 카푸친 수녀회'를 창설했다. 또 몸소 창설시켰던 그 수녀회의 교사 수녀들의 도움으로 그는 그 지역 전역에 학교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학생들의 복지를 촉진시켰다. 클라렛 선교수도회의 창설자인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이 프로젝트의 조언자 중에 하나였다. 수녀들은 성녀 글라라의 회칙을 따랐고, 복녀 마리아 안젤라 아스토르츠의 카푸친 글라라회의 회헌을 적용했다. 수녀들은 가난한 어린이들의 그리스도교 교육에 헌신했고, 아이들의 가족들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는 동안 요셉 형제는 비록 자신의 가정집에서 살아야 했지만, 가난과 겸손, 침묵과 기도로 이루어진 카푸친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특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성체성사 및 성찬례, 신성하신 목자의 어머니 마리아님께 대한 깊은 신심을 품었는데, 자신이 봉사하는 본당 신자들에게도 이 신심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자신이 창설한 수녀회의 수녀들에게는 ‘혼합 생활’을 하도록 격려했는데, 그것은 관상 기도의 생활과 가난한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사목이 결합된 것이었다.


 

"하느님께 충실하고 사람들에게 충실한 이"
본당사목 봉사에 헌신하면서도 요셉 형제는 '신성하신 목자의 어머니의 카푸친 수녀회'의 영적지도자로서 꾸준히 봉사했다. 그리고 실제로, 수녀들이 운영하는 바르셀로나의 대학 경당에서 미사를 바치다가 1874년 2월 27일, 요셉 형제는 선종하게 되었다. 선종했을 때의 그 장소와 정황들은 요셉 형제의 카푸친 생활의 핵심을 요약하고 강조하는데 기여해주고 있다. 그것은 성체성사와 성찬례에 대한 사랑, 신성하신 목자의 어머니 마리아님께 대한 신심, 그리고 가장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특히 바르셀로나의 못 배운 어린이들 안에 계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기꺼운 봉사이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전해주시는 그 거룩한 생각들과 신심 깊은 애정을 어린이들의 연약한 마음속에 부어넣어 주십시오.", "여교사들의 엄격함보다는 어머니들의 사랑으로 가르치십시오.", "비록 모든 것이 어두워지더라도, 우리는 하느님께 충실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충실해야 합니다." - 이괄라다의 복자 요셉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Beato Giuseppe da Igualada (Giuseppe Tous Soler) Sacerdote cappuccino
27 maggio 
31 marzo 1811 - 27 febbraio 1871

Chiamato da Dio

Nato ad Igualada (Barcellona) nel 1811, aveva 16 anni quando entrò nell'Ordine cappuccino. Con un'intensa vita spirituale silenziosa, di studio e piena di abnegazioni, fr. José passò per vari conventi del suo Paese preparandosi all'ordinazione sacerdotale, avvenuta nel 1834.
Un anno dopo dovette affrontare una delle prove più dure della sua vita: l'esilio a causa della persecuzione vissuta in Spagna nel XIX secolo, quando molti religiosi furono esclaustrati.
Per vari mesi viaggiò per la costa mediterranea, andando in nord Italia fino a che nel 1837 arrivò in Francia e si stabilì nel monastero delle Benedettine di Tolosa. Lì si dedicava alla contemplazione e all'adorazione eucaristica, così come all'assistenza spirituale delle giovani religiose.
Tornò in Catalogna nel 1843, iniziando a lavorare nella Chiesa locale come sacedote secolare, visto che non poteva mettere in pratica la vita conventuale né vestire l'abito cappuccino. Per questo viveva con i genitori e lavorava in varie parrocchie lì vicino.
Padre José scoprì così di avere una particolare sensibilità verso l'educazione dei bambini. “Come Gesù davanti alla folla, provò compassione perché le pecore erano senza pastore”, ha detto il suo postulatore. Questa stessa sensibilità la trovò anche in tre ragazze che conosceva: Isabel Jubal, Marta Suñol e Remedio Palos.
Per questo, padre José Tous accettò di orientarle. Studiò la regola di Santa Chiara d'Assisi e adattò le Costituzioni cappuccine della beata Maria Angela Astorch per le Cappuccine Terziarie dell'Insegnamento. Nacque così la Congregazione delle Suore Cappuccine della Madre del Divin Pastore.
La prima comunità si stabilì a Ripoll nel marzo 1850, e il 27 maggio dello stesso anno venne aperta la prima scuola.
Padre Tous esortava le sorelle a “spargere nel tenero cuore dei bambini i santi pensieri e i devoti affetti che Dio comunicava loro nella preghiera”.
“Visse la sua donazione a Dio e la sua consacrazione alle suore con l'animo posto nel Buon Pastore, e disse che bisognava trattare le bambine con affetto materno”, ha detto a ZENIT padre Ramírez.
Attualmente le Cappuccine della Madre del Divin Pastore hanno comunità in Catalogna, Murcia, nei Paesi Baschi e a Madrid. In America Latina sono presenti in Nicaragua, Costa Rica, Guatemala, Colombia e Cuba.
Padre Ramírez segnala che la vita del futuro beato è esemplare, soprattutto in questo Anno Sacerdotale, “per la sua fede accesa che vive nel quotidiano senza voler spiccare”.

Una Messa che lo portò all'Eternità

Al momento della sua morte, padre Tous non aveva alcuna malattia terminale. Ad ogni modo, ricorda il suo postulatore, si crede che per le tensioni che doveva affrontare soffrisse di un forte esaurimento fisico, al punto da morire durante la Messa, proprio dopo la consacrazione, mentre pronunciava queste parole del Canone Romano: “Volgi sulla nostra offerta il tuo sguardo sereno e benigno, come hai voluto accettare i doni di Abele, il giusto...”. In quel momento si chinò e cadde.
Il parroco di San Francesco di Paola andò a raccogliere il suo corpo esanime e a terminare la Messa.
“La vita dei santi suscita stupore perché vediamo come la grazia di Dio sia capace di realizzare queste opere ammirevoli di fronte ai nostri stessi occhi. Il cammino è aperto per quanti vogliono seguirlo con sincerità di cuore come ha fatto padre Tous”, ha concluso il postulatore.

La Memoria Liturgica viene celebrata il 27 maggio inizio dell’attività apostolica della prima scuola dell’Istituto a Ripoll.

Autore: Carmen Elena Villa

Fonte:  
 ZENIT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10-09-23

 

 

Josep Tous Soler

Also known as
José Tous Y Soler
Josep de Igualada

Profile
Joined the Franciscan Capuchins at age 15, and professed his vows on 19 February 1828. Josep was ordained on 24 May 1834 in Barcelona, Spain; two months later, amidst anti-clerical violence in Catalonia, he was exiled from Spain and spent the next nine years ministering in France. He was able to return to Spain in 1843, but the government had outlawed religious orders, and Father Josep spent the rest of his life as a parish priest; he tried always to live his Franciscan ideals. In 1850 he led a group of young women who, on 22 December 1858, would become the Capuchin Sisters of the Mother of the Divine Shepherd, a congregation devoted to pastoral care and teaching young children.

Born
31 March 1811 in Igualada, Barcelona, Spain


Died
27 February 1871 in Barcelona, Spain of natural causes while celebrating Mass


Venerated
22 December 2008 by Pope Benedict XVI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25 April 2010 by Pope Benedict XVI
recognition to be celebrated in the Basilica of Santa Maria del Mar, Barcelona, Spain by Cardinal Tarcisio Bertone


Canonized
if you have information relevant to the canonization of Venerable Josep, contact
   Fra Florio Tessari, OFMCAP
   Caputxines de la Mare del Diví Pastor
   Bailèn 40
   08010 Barcelona, SPAIN


Additional Information
Caputxines de la Mare del Diví Pastor
Hagiography Circle
Madre del Divino Pastor, Diriamba, Nicaragua
Martyrs et Saints

MLA Citation
“Venerable Josep Tous Soler”. Saints.SQPN.com. 28 February 2010. Web. {today’s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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