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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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1-11 ㅣ No.2120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를 다시 보게 됩니다. 세례는 우리와 그리스도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을 물에 잠그는 방식이 아니라 이마에 물을 붓는 방식으로 세례식을 하므로,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라는 말이 쉽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물에 오래 잠겨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죽는 것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로마 6,23)인데 이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더 이상의 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은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 로마서 6장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

1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2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가 어떻게 여전히 죄 안에 살 수 있겠습니까?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12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종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 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1절(“은총이 많아지도록 우리가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은 5장 20절(“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과 연관된 질문입니다. 은총을 많이 받으려면 계속해서 죄를 지어야 합니까? 물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로마 6,2). 죄와 결별해야 합니다. 죄의 습관, 죄의 문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로마 6,2)라는 말은 7장의 ‘율법에서 풀려났다’(로마 7,2),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로마 7,3),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었다’(로마 7,4.6)는 표현들과 상통합니다. 율법이 죄는 아니지만, 율법으로 죄가 밝혀지므로, 율법과 관련해서 죽었다는 것은 더 이상 죄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율법과 상관이 없을 경우 죄는 죽은 것입니다”(로마 7,8). 이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지어 설명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으므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이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덕분에 율법과 관련해서는 죽음으로써”(로마 7,4) 죄에서는 이미 죽었습니다(로마 6,2).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죄에서는 이미 죽은 우리”(로마 6,2)로서 죄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위한 열매”(로마 7,4)를 맺어야 합니다. 죄에서의 완전한 해방은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생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율법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끊을 수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끊는 방법은, 우선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지 않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폭로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이 담배를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끊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여러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담배를 끊으려고 하니 여러분이 기도해 주십시오.’ 하였다고 합니다. 신자들이 그 사람을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었고, 그날밤 그는 40도의 고열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고열 후유증 때문인지, 담배 맛이 너무 써서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결국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죄도 형제자매들이 기도로써 도와주면 훨씬 더 쉽게 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밝히기가 어렵다면, 적어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19).


남의 죄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합니다. 마술 안경과 마술 거울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술 안경은 남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고, 마술 거울은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어떤 청년도 아마 여러분처럼 마술 안경을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과 속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약혼녀의 마음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울해졌고, 더 이상 마술 안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불결함을 보고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마술 안경 대신에 마술 거울을 선택하고는, 자신의 마음이 남들에게 보여도 좋을 만큼 깨끗하게 간직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합니다.


로마서 5장 20절 앞부분에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로마 5,20 앞부분)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율법 덕분에 죄가 분명히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마술 거울처럼 사람들의 죄를 비춥니다. 죄를 용서해 주지는 못하지만, 죄를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죄는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때에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죄는 밝은 곳으로 나오면 힘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죄는 드러나기를 싫어합니다. 죄가 드러날 때에는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자신의 죄, 자신의 추악함을 보고는 자신도 깜짝 놀라고 죄책감을 느끼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거짓과 죄를 드러낼 용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고해성사를 자주 봅시다.


로마서 6장 3절과 4절에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6장은 죄와 은총, 죽음과 부활 또는 생명이라는 중요한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전체를 관통하는 말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죄의 삶을 청산하고 은총의 삶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은총의 삶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듣기 좋고 기운도 나게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은 죄의 삶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 육과 욕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 5,24). ‘세례’는 죽음과 부활을 모두 상징합니다. 물에 잠김으로써 우리의 “옛 인간”(6절)은 죽습니다. 그래서 세례식은 어떤 의미에서 장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을 ‘세례’로 간주하십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38) 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나옴으로써 새롭게 태어나 새 인간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4절).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세례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우리 몸에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성사는 단지 예식이 아닙니다. 세례성사는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변화된 삶이어야 합니다. 세례성사는 죄를 청산하는 삶, 욕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죄와 욕정과 욕망을 한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까지는, 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도 힘이 남아 있습니다. 때로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때로는 우리의 못질이 약해서인지 다시 달려들어 물어뜯으려 합니다. 기도와 극기로 힘을 길러 대못질을 해야 합니다.


세례로 우리가 겪는 죽음은 단지 우리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살리시려고 인간과 결합하셨고, 인간을 살리시려고 죽으셨으며, 마침내 부활하심으로써 당신과 결합한 인간들을 부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결혼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동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결혼했으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받아 마시고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잔’을 받아 마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순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서 6장에도 ‘종’이라는 말이 열 번 정도 나옵니다. 로마인들에게 ‘종’은 인간 가치도 자격도 없는 당나귀와 비슷한 존재, 곧 ‘말하는 당나귀’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종’이라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쓴 것은, 그만큼 로마 신자들이 “의로움의 종”(18절), “하느님의 종”(22절)이 되어 거룩해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열망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2절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는 명령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희망 사항이 아니라 요구입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죄에 기우는 경향을 지니고 살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죄를 이길 수 있게 되었으니, 몸의 욕망에 순종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시비하지 말고 서로 시기하지 맙시다”(갈라 5,25-26). 사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아주 어려운 것들도 있지만, 우선 쉬운 것들부터 해 나갈 수 있습니다.


17절의 “표준 가르침”은 다양하게 풀이됩니다. 세례 때 부여받은 복음적 생활 지침, 또는 신앙 규정을 가리킨다고 하기도 하고, 누가 선포하든 내용이 동일한 공통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하지는 않았지만 로마 신자들이 전해 받은 가르침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성화’는 과정입니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은 의로움의 실천으로 성덕을 키워 가고, 완덕에 이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는 거룩함의 완성이라기보다는 거룩함 삶의 시작이며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의 공개 서약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세례로 몸을 씻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깨끗해진 몸을 하느님께 바쳐 의로움의 도구로 쓰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로마 6,13). 몸을 깨끗이 하려고만 하면 손에 흙을 묻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기꺼이 손에 흙을 묻혀야 합니다. 시간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또 아이를 다섯 명 이상 키운 사람 중에는 정신 병원에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일에 발 벗고 나서면, 사탄의 유혹 소리는 저절로 멀어집니다. 그만큼 쉽게 죄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 의로움의 종이 궁극적으로 받는 선물은 “영원한 생명”(로마 6,22)입니다. 죄의 종에게는 ‘죽음’이 품삯이지만, 하느님의 종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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