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펌글]보수의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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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규 [vegabond] 쪽지 캡슐

2008-07-24 ㅣ No.6580

 

[시평] 보수의 색깔



   '진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학생에게 물었다. “구멍 난 청바지 입은 미디어 아티스트요.” 그럼 ‘보수’는? “골프 치는 대머리 사장님요.”


   지난 정부에서 장관까지 지낸 한 지식인은 TV에서 진보의 반대말은 파시즘이라고 주장했다. 군사정부가 반공과 민족 도약을 지상 목적으로 삼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를 통제하던 독재체제 말이다.


   대한민국 보수의 가장 큰 숙제는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이러한 보수의 이미지들을 걷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보수의 원류는 자유주의다. 인문학 공부를 게을리 한 경제학자가 꺼내기 두려운 얘기지만 필자는 자유주의를 사회의 각 개인이 국가, 종교, 집단의 권력에서 자유로울 때 인류가 가장 현명해지고 행복해진다는 믿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간섭이 최소화되고 경쟁과 무역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때 경제가 가장 힘차게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직결된다. 그리고 필자는 서양이 과학과 경제에서 동양을 압도하고 세계 최초의 ‘선진화’에 성공한 것은 이 자유주의 덕분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한 신뢰는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발발로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주의와 파시즘이다. 이 둘은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싸웠지만 사실 DNA 구조로 보면 친족관계에 있다. 둘 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가가 시장을 대체하거나 강력하게 통제하는 국가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식민 상태에서 벗어난 저개발국들이 대부분의 경우 선택한 것은 사회주의건 파시즘이건 이러한 국가주의의 한 변형이었다.


   우리가 경제성장의 신화를 이룩한 것도 국가주의적 체제하에서였다. 기업 간 경쟁과 무역이 성장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지만 경제개발계획, 은행의 국유화와 주요 산업의 국가 육성, 가격과 공급량의 직접 통제라는 국가주의적 요소도 가득 담은 체제였다. 우리 민족이 두고두고 자랑해야 할 경제 기적의 바탕이 된 체제였지만 동시에 선진국으로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체제이기도 했다.


   많은 논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선진 대한민국 경제에서 국가가 차지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세계 경제의 2%도 안 되는 소국 경제에서 영·미식 자유방임의 위험도 걱정해야 하고, 북한이 자괴의 길을 걷고 있고, 일본과 중국이 땅 따먹기 게임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서 시장을 넘어선 정부의 역할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문턱에 선 한국에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수의 정신은 국가주의를 극복한 자유주의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보수 정신에는 국가가 너무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유교의 영향도 있겠고, 현재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과거 압축성장의 시대와 끈끈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필자는 보수를 자처하는 주위 사람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추측해 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다른 사람이 싫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 늘 일행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회식 장소를 정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체의 효율성을 위해 개인의 다양성과 자존심은 쉽게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들은 자유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고려했거나 선택한 정책에도 자유주의와 거리가 먼 것들이 많이 섞여 있다. 계획경제를 연상시키는 ‘747’ 공약, ‘메가 뱅크’를 통한 금융선진화, 저금리와 고환율을 통한 경기부양, 국책연구소와 공기업 장의 강제 퇴진, 52개 생필품의 가격 관리, 승용차 요일제와 유흥업소 영업시간 단축,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 등등. 각각의 정책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좋은 정책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이 국민들에게 주는 총체적 이미지다.


   촛불집회에서 위협을 느낀 보수의 일각은 오른쪽 끝에 서서 보수의 대동단결을 외치고 있고, 국가의 어른들은 볼셰비키 혁명은 1% 소수의 지지로 성공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법의 엄정한 집행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묘한 정치적 움직임은 경제정책과 한데 포개져 필자의 망막에 어린 시절 극장에서 바라보던 흑백의 대한뉴스를 떠올리게 한다. 5년 전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던 한국의 중도는 지난겨울 보수 경제정책에 희망을 걸고 이명박 정부를 밀어주었다. 우리의 보수는 대운하와 신도시 건설이 아닌 새로운 성장의 비전을 제시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 송의영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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