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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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1-11 ㅣ No.2119

 

 

믿음이 강한 나와 믿음이 약한 나... 이 둘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어떤 나를 더 사랑하실까요? 저는 둘 다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제 아이가 착한 일을 하건 나쁜 일을 하건, 시험을 잘 보건 못 보건, 변함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그런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보다 훨씬 더 가깝고 아름답습니다. 이미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들이니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왜 우리의 믿음이 약한 것을 안타까워하시고 때로는 야단까지 치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약하면 헛된 것에 의존하게 되고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엄마를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엄마 젖을 빨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습니까? 엄마를 믿지 않는 아기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인간은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느님을 떠난 사람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최민순 신부님 역, [고백록], 성바오로출판사, 1984, 1면).


우리 믿음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분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수많은 성인들이 삶으로써 보여 준 길, 곧 신앙의 증거입니다.


로마서 4장의 마지막 절(25절)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살짝 언급한 뒤, 5장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통한 평화, 은총, 구원, 화해에 관하여 다룹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로마서 5장 1-11절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의 삶과 희망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 로마 4,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 로마 5,1-11 (의롭게 된 이들의 삶과 희망)


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단순히 말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계입니다. 엄마 품의 아기는 자신이 엄마를 믿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 엄마 품이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좋아하고 그곳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관계는 좋아하는 관계, 함께 있기를 바라는 관계입니다. 곧 믿음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요 희망의 관계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풍성합니다. 믿음으로써 의로움을 인정받습니다. 의로움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음을 뜻합니다(로마 4,6-8 참조). 로마서 5장에 따르면, 믿음으로 평화를 누립니다(1절). 은총 속으로 들어가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2절).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3절).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집니다(5절).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9-10절). 하느님과 화해합니다(11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평화를 누릴 특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평화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우리 모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쟁이 끝나야만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중에도 평화가 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야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강력합니다. 평화의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십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오로와 실라스가 감옥에서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들은 필리피라는 도시에서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여러 날 동안 그들을 쫓아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사도 16,17) 하고 소리치자, 바오로가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사도 16,18) 하여 내쫓았습니다. 이에 하녀의 주인들이 돈벌이할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관리들에게 끌고 갔던 것입니다.


* 사도 16,22-26


22 군중도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바오로와 실라스가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른 때는 감옥에서 나온 다음이 아니라 감옥에 있는 동안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리스트라라는 도시에서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사도 14장 참조). 그러나 그는 또다시 다른 도시로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 사도 14,19-20


19 그런데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바오로 사도에게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는 영광스런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였기에 예수님 때문에 겪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3).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그는 바리사이였고 지식인이었고 로마 시민이었지만, 환난을 선택하였습니다. 환난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로써 수양하고, 수양으로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드디어 눈이 열렸습니다. 영원한 가치가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환난 중에 인생의 보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환난 가운데 인생의 보석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주는 평화는 환난 중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환난 가운데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믿음의 시련, 믿음의 단련을 겪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아브라함도 믿음의 시험을 거치면서 더욱 순수하고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환난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환난에서 희망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으로써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행위(선행)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희망은 자랑할 만합니다(로마 5,2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언제나 믿음에서 오는 평화를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느낌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느낌은 일시적이고 흘러 지나갑니다. 평화는 느낌이나 영혼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그러므로 평화를 느끼는 것보다 평화를 바라고 믿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평화가 이미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충만하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을 상속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죄의 용서와 구원, 하느님 나라의 영광은 아직 믿음과 희망의 대상입니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믿음과 희망의 대상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발표하신 두 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는 2000년에 시성되신 요세피나 바키타(1869-1947년, 축일 2월 8일)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행 한글 번역 12-13면 참조). 이분은 아프리카 수단 출신으로 9살의 어린 나이에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피가 나도록 매를 맞고 수단의 노예 시장에서 다섯 차례나 팔려 갔다고 합니다. 그녀는 매일 매를 맞아 평생 144개의 흉터를 몸에 지닌 채 살았다고 합니다. 1882년에 이탈리아 공사였던 칼리스토 레냐니에게 넘겨지고 이탈리아로 오게 된 요세피나 바키타는 여기에서 그동안 자신을 소유해 왔던 무시무시한 ‘주인들’과는 전혀 다른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분 앞에서는 다른 ‘주인들’도 그저 비천한 종이 되고 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셨는데, 이분께서 그녀를 알고 사랑하시고 맞이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성부 오른쪽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계신 그분을 알게 되면서, 그녀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분명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이 사랑이 저를 기다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삶은 행복합니다.” 이러한 희망으로 그녀의 삶은 변화하였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 5절(“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은 신약성경에서 사랑과 성령 사이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실망시키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진 거룩한 사랑(로마 5,5 참조)으로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하느님의 성전에서 솟아 흐르는 강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에제 47,9). 금세 당장 느끼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믿고 바라면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이사 58,9)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부르짖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7)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고, 생명의 물이 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 이사 58,9-11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다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무엇이 다를까요? 세상이 주는 평화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7).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반석 위의 집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5).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 이야기는 말씀의 실행과 연관된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평화가 아닙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가운데 누리는 평화입니다(이사 58,7 참조). 예수님 말씀처럼, 남을 심판하지 않으며,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않고,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가운데 누리는 평화입니다(마태 7,1-12 참조).

 

 

 


우리는 오랫동안 “하느님의 원수”(로마 5,10)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은 우리 삶의 일부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전부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시 말해서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죄, 예수님께서 치르신 죄 값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지른 죄의 용서를 의심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하고 주님 앞에 고백한 다음,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평화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물론 완전한 평화는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21절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강조합니다.

 

 

 


* 로마 5,12-21 (아담과 그리스도)


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 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14절)이라고 하였지만,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훨씬 더 큽니다. 히브리어 ‘아담’(adam)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아담’은 흙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다마’(adamah)에서 옴). 하느님께서 흙으로 만드신 유일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하느님께서 단 한 사람만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담이 첫 인간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의 맏이”(콜로 1,15)이시며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마 8,29)이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1코린 15,47). 아담은 사람이고, 그리스도는 사람인 동시에 하느님이십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고 죄인이 되었으며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마 5,18) 곧 “순종”(로마 5,19)으로 모든(많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아무리 이리저리 설명해도, 아담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왜 나까지 받아야 하는가 불만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불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아담 안에서 하나로 여기셔도, 각 개인으로서는 서로 다른 인격, 서로 다른 권리와 책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스칼도 [팡세]라는 책에서 “원죄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이성을 가지고는 이것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성은 자기의 방법으로 그것을 생각해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매우 많습니다. 일제시대에 우리 국민, 특히 젊은이들, 여성들이 겪은 엄청난 고초는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젊은이들, 여성들의 탓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소홀히 한 지도층, 어른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면 온 가족이 고생합니다. 식구 중에 한 사람이 독감에 걸리면 온 식구가 돌아가면서 독감을 앓습니다.

 

 

 


대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세 아들은 셈, 함(가나안의 조상), 야펫이었습니다(창세 9,18 이하 참조). 그런데 첫 포도 농사꾼인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천막에서 누워 있을 때에, 함은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밖에 있는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셈과 야펫은 겉옷을 집어 둘이서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알몸을 덮어 드렸다. 그들은 얼굴을 돌린 채 아버지의 알몸을 보지 않았다”(창세 9,23). 노아는 술에서 깨어나 작은아들이 한 일을 알고서, 그를 다른 아들들의 종이 되라고 저주하였습니다. 함의 후손은 오늘날 함족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아프리카 동부와 북부에 사는 이집트 인, 소말리아 인, 에티오피아 인 등이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큰 고생을 한 것을 보면 노아의 저주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로마 5,12-21에서는 죄의 역사와 은총의 역사가 대립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첫 범죄 후에 벌을 내리시면서도 곧바로 구원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에 하느님께서는 뱀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이 구절은 악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를 예고하는 구절로 읽혀져 왔습니다. 그래서 ‘원복음’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탄과 죄에 굴복한 사람에게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고 선언하시면서도, 악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를 통한 사면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죄와 죽음의 역사가 끝나고 은총과 생명의 역사가 펼쳐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로마 5,21 참조).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보니,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악마를 가두었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묵시 20,13). 그날이 오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처럼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날 것입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아담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메시지는 단지 로마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기 때문에, 이 로마서가 성경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특히 ‘한 사람을 통하여 모두 죄를 지었다’(로마 5,12 참조)고 하였으므로, 로마서 5장의 말씀은 바로 ‘나 자신’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속으로 ‘내가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죽을죄를 지은 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죽을죄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로마서를 읽으면서, 우리 대신에 죽음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할 따름입니다. 어쩌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먼저일 것 같습니다. 나의 죄를 깨달을수록, 나의 죄에 대한 자비로운 용서를 생각할수록,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께 더 큰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5장 20절에서 은혜로운 말씀, 은총이 충만한 말씀을 듣습니다. 아무리 읽고 아무리 읽어도 은혜의 감격이 그침 없이 밀려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갈라놓은 무엇이 아직도 우리 마음, 우리 생각, 우리의 말과 행동 안에 있다면, 우리 자신이 바로 ‘죄가 많아진 그곳’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나의 죄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한다면, 그곳은 ‘은총이 충만히 내리는 자리’가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죄가 많은 곳에는 유황불의 심판이 있는 것이 마땅한데, 어떻게 은총이 충만히 내릴 수 있을까요? 이것도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18).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 20-23).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 순종으로 모든 사람(많은 이)이 의로운 사람이 되고 생명을 받습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 아드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이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18절의 ‘모든 사람’과 19절의 ‘많은 이’에 주목합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연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을까요, 아니면 단지 ‘많은 이’만 그렇게 될까요? 어떤 학자들은 19절의 ‘많은’은 ‘모든’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내리지만, 그 은총의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성찬례를 제정하시면서,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7-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으면 예외 없이 구원을 얻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되고, 생명에 속하는 사람이 됩시다. 생명의 주님을 찾고 부르며,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갈라집시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 가운데 거니시기를 빕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 가운데에서 거닐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저들 가운데에서 나와 저들과 갈라져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더러운 것에 손대지 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맞아들이리라. 나는 또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에게 아들딸이 되리라”(2코린 6,16-18).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는 말씀은 바오로 사도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다음에도 죄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비참한 인간’, ‘죽음에 빠진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로마서 7장으로 가보겠습니다.

 

 

 


* 로마 7,23-25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의 신비의 일면을 봅니다. 하느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마치 병에 걸린 자식에게 어머니가 더 신경을 쓰고 더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풍성한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죄 짓는 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무서운 독사를 피하듯이 죄를 피해야 합니다. “뱀을 피하듯이 죄를 피하여라. 죄에 다가서면 그것이 너를 물 것이다”(집회 21,2). 아주 어린 아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이대면 낯선 얼굴에 놀라 엄마 쪽으로 고개를 획 돌립니다. 또 반대 방향으로 가서 얼굴을 들이대면 다시 엄마 쪽으로 고개를 획 돌립니다. 우리는 이렇게 죄를 피해야 합니다. 사탄이 유혹하려고 가까이 오기만 하면 하느님께 고개를 획 돌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의 이빨이 우리 영혼을 파괴할 것입니다.

 

 

 


* 집회 21,1-2


1 얘야, 죄를 지었느냐? 그러면 더 이상 죄짓지 말고 지난날의 죄악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라.


2 뱀을 피하듯이 죄를 피하여라. 죄에 다가서면 그것이 너를 물 것이다. 죄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 그것이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리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용서를 비는 사람에게는 죄가 은총의 통로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과 평화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을 눈물로 적시고 향유를 부어 바른 여인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 루카 7,36-50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 )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카 복음 사가는 마태오나 마르코에 견주어 바리사이에 대하여 호의적입니다. 여기처럼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기도 하고, 헤로데의 살해 위협을 미리 알려 주기도 합니다(루카 13,31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마도 함께 선교여행을 다닌 바오로 사도가 바리사이였고, 바오로는 자신이 바리사이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필리 3,5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37절의 “죄인인 여자”는 창녀를 뜻합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고 하였는데, 발치(누울 때 발이 가는 쪽)라는 말이 알려 주듯, 그 당시에는 식사를 할 때에 식탁 앞에 비스듬히 드러누워 음식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 뒤쪽으로 발치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38절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을 낮추며, 예수님께 존경과 감사와 사랑을 드러내는 몸짓입니다. 아마 이 여자는 예수님의 행적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들었고 직접 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부정한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으며(루카 5,12-16),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실 때에는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라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는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을 듣고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릅니다. 또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37)는 말씀을 듣고는 자신을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예수님이 대신해 주셨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병자를 고쳐 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며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을 격려하시는 예수님을 지켜 본 그 여자는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향유를 준비해 두었다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용기를 내어 찾아갔을 것입니다.

 

 

 


44절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발 씻을 물을 주는 것은 고대 근동의 손님 접대 관습의 일부이기는 하였으나 의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 시몬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 시몬은 잘못이 없었기에 예수님께 그렇게 감사할 것이 없었고, 그 여자는 죄가 많았기에 죄인에게 너그러우신 예수님께 극진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시몬이 아니라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구원와 평안을 얻고 싶다면, 바리사이 시몬 쪽이 아니라 죄 많은 여자 쪽에 줄을 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47절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는 예전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다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공동번역 성서). 둘 다 깊은 뜻이 있지만, 새 번역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문장(“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과 조화를 이루려면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어야 하는데, 새 번역이 그런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장 41-43절의 비유에서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42절)라는 질문에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43절)이 답이므로, 이 비유와 연결지어도 새 번역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요컨대,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의로워지고), 죄를 용서받음으로 사랑이 커지고, 사랑이 커짐으로 구원과 평안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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