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6월8일 제스투리의 복자 니콜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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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23 ㅣ No.2080



축일 6월8일
제스투리의 복자 니콜라오,OFM Cap.
Beato Nicola da Gesturi (Giovanni Medda) Cappuccino
Gèsturi, Cagliari, 5 agosto 1882 - Cagliari, 8 giugno 1958
Papa Wojtyla l'ha beatificato il 3 ottobre 1999.






침묵 형제, 제스투리의 복자 니콜라오   

침묵은 그의 성덕의 비결이었다
"쉿! 니콜라오 형제가 기도하고 있어요." 바로 이 말은 늙은 그 카푸친 형제가 전차를 타고 자리를 잡았을 때에 칼랴리(Cagliari)시의 전차 승객들이 서로에게 수근거리던 말이다. 니콜라오 형제의 침묵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시민들은 단순히 그를 '침묵 형제'라고 불렀다. 그의 성덕은 '침묵'이었다. 그의 침묵 기도는 베푸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감사였고, 할 수 있었음에도 베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그의 나무람이었고, 대답이 필요치 않은 쓸데없는 질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단지 그는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뜻을 상기시키려고 할 때에만 침묵을 깼다. 니콜라오 형제의 침묵은 특이한 침묵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었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며, 그리고 분심 없이 지극히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니콜라오 형제에게 침묵은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목적지였다. 그의 동냥 동료인 사르디카(Sàrdica) 라우렌시오 형제는 니콜라오 형제의 침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의 침묵은 나에게 전혀 부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을 간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그가 한 마디라도 하게 된다면, 내면적으로 결코 결실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침묵, 내면 깊숙한 그 침묵은 성덕으로 가는 나콜라오 형제의 특별한 길이었다. 그리고 십대 초기 때부터 이미 그의 성덕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미천한 출신
1882년 6월 4일, 제스투리(Gesturi)는 '사르데냐'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장 일꾼이었던 요한 메다(Medda)와 그의 아내 프리아마 커고니 제다(Cogoni Zedda)의 칠남매 중 두 번째로 어렸다. 태어난 다음날, 그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께 봉헌된 본당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았고 ‘요한 안젤로 살바토레’라는 본명을 받았다. 1886년 6월 2일, 요한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모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다. 때문에 요한의 누나와 매형이 그를 맡아 기르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요한은 부유한 누나의 시아버지 농장에서 머슴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공짜로 숙식을 제공받았지만, 봉급은 전혀 받지 못했다. 어린 요한은 밭일을 하고 가축을 치면서 그의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누나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요한은 동일한 조건으로 누나와 매형을 위해계속 일하게 되었다. 그는 늘 품행이 단정한 아이였지만, 어릴 시절 그는 특별한 것이 없는 아이었다. 하지만 1896년 12월 18일, 요한이 첫영성체 모신 뒤로 그의 생활은 완전히 바뀐것 같았다. 그는 기도를 많이 하기 시작했고, 성체를 자주 영했으며, 보속행위로 고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속의 모든 유혹을 피함으로써 자신의 영적인 삶을 보호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에게 영혼의 어떠한 고결함과 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타고나게 했다. 그는 판단력이 좋았으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서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성숙했다. 그는 현세의 재산에도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부모에게 받은 상속 유산도 모두 자신의 형제자매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매형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것은 본당성당에서 매일 아침미사와 저녁 신심행위에 참석하는 것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요리는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요한이 수도원 성소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친지들에게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사제가 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지만, 아마도 부족한 재정과 낮은 학력 수준으로 인해 사제가 되는 것 대신 평수도자가 되기로 생각을 바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성소는 천천히 자라날 소명이었다. 고통스러운 류머티즘 질환이 나은 후에라야, 그는 자신의 성소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박차가 가해질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만 29살이 된 요한은 1911년 3월, 칼랴리에 위치한 부온카미노(Buoncammino)의 카푸친 형제회의 문을 두드려, 카푸친 평형제로서 입회를 신청했다. 그는 형제회 안에서 머물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단지 삼회의 형제로써였다. 2년이 지난 후에야 카푸친들은 요한을 수련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13년 10월 30일, 그는 카푸친 수도복을 입게 되었고, ‘제스투리의 니콜라오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칼랴리 형제회에서 수련기의 첫 8개월을 보낸 뒤, 동기 수련자들과 함께 산루리(Sanluri)에 위치한 새 수련원으로 이동되었다. 1914년 11월 1일에 그는 유기 서약을 했고, 1919년 2월 16일에 종신 서약을 했다. 니콜라오 형제는 요리사로 임명받아 사사리(Sassari)와 오리스타노(Oristano), 그리고 산루리에 있는 형제회로 차례로 이동되었다. 하지만 니콜라오 형제는 원래 요리사로서의 자질이 없었고, 형제들은 그의 요리 수준과 실력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한때 그는 오리스타노 형제회의 넓은 마당에서 원예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농사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리를 했을 때보다 더 성공하지 못했다. 비록 성공률이 낮긴 했어도 그는 늘 자발적이고 순종적이었다. 결국 그에게 꼭 맞는 일자리를 찾는 데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것 또한 스스로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의 봉사자들이 그를 위해 찾아낸 것이었다. 1924년 1월 25일, 그는 갈랴리 부온카미노에 있는 광대한 형제회로 이동되어 동냥자로 임명받았다. 이는 니콜라오 형제의 마지막 임무였고, 1958년 선종할 때까지 그는 이 부온카미노 형제회에 남을 운명이었다.




'늘 복음을 선포하되 필요하다면 말들을 이용하라.'
34년 동안 그는 칼랴리의 거리를 터벅터벅 돌아다니며 형제들을 위한 예물을 청했다. 나날이 그가 동냥을 하러 거리를 나설수록, 그의 분명한 거룩함과 겸손과 침묵은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그가 무엇을 청할 필요도 없이, 자발적으로 예물을 주기 위해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곤 했다.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고 침묵과 묵상에 잠겨 도시를 돌아다니기만 했다. 니콜라오 형제의 성덕이 그토록 마음을 끄는 것이었기에, 사회 각층의 사람들은 곧잘 그에게 다가가 기도를 부탁하거나 영적 충고를 청했고, 혹은 단순히 그의 수도복이나 밧줄 띠를 만지려 했다. 예물을 받을 때 그의 유일한 반응은 대표적인 사르데냐인의 감사 표시인 "하느님께서 선생님의 자선에 보답해주시기를"이었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시켜 니콜라오 형제에게 예물을 전해주게 했는데, 아이들에게 답례로 보내준 니콜라오 형제의 미소나 기타 애정표시를 그들은 늘 축복으로 여겼다. 그는 병상으로 불림을 받아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는데, 하느님께서는 매번 니콜라오 형제의 기도를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방식으로 들어주셨다. 기이한 여러 치유들로 인해,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 겸손한 형제를 통해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복음을 늘 선포하되 필요하다면 말들을 이용하라."고 권하곤 했는데, 이것은 니콜라오 형제의 생활양식이자 삶의 태도였고, 하느님과 이웃에 봉사하고 사랑하도록, 또 회개하고 기도하도록 모든 이들을 초대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하느님 말씀을 들었고, 침묵 안에서 응답했다!
하느님께 대한 니콜라오 형제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침묵의 기도로 표현되었다. 밤이 되면 그는 수 시간 동안 성체 앞이나 티 없으신 마리아님의 경당 안에서 기도하곤 했다. 탄탄한 영적독서는 그의 기도생활을 뒷받침했다. 그가 애독하는 영적독서 중에는 복음서는 물론이고 프란치스코회 삼회원인 폴리뇨의 복녀 안젤라의 저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복녀 안젤라의 저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것을 여러 번 읽었어요. 하지만 다 읽으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어져요. 정말 아름다운 글이거든요!" 니콜라오 형제의 저작물은 상당히 드물다. 종잇조각 여기저기에 끼적거렸던 몇몇의 짤막한 권고나 한 줄 밖에 안 되는 몇몇 짧은 기도문이 다이다.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더 많았던 구걸자
칼랴리 시민의 영적, 물질적 복지에 대한 관심은 니콜라오 형제의 기도와 실제적 활동에서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시민들이 폭격당한 도시를 대피해야 했을 때, 모든 형제들이 부온카미노 형제회를 떠나버린 뒤에도 니콜라오 형제와 다른 세 명의 형제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를 부양하기 위해 뒤에 남게 된 그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먹이고 입혀주기 위해 그 집에 남았다. 니콜라오 형제는 그들을 위해 음식과 옷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공습 때이면 부온카미노 형제회가 지어진 언덕 밑 동굴 안으로 그들을 대피시키기도 했다. 그는 항상 동굴 입구 바깥쪽을 지켰고,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 밑에서 햇볕과 비바람을 피했다. 그는 큰 돌 위에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며 난민들도 함께 기도하도록 설득하려 했고, 또 도처에 폭탄들이 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이 마음의 평화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곤 하였다. 실제로 딱 한 번,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는 동굴 안으로 그가 들어간 적이 있었다. 갑자기 안으로 돌진한 그가 입구 안쪽으로 사람들을 밀어 붙였는데, 그러자마자 큰 폭탄이 그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떨어졌다. 머리 위 선반 같은 그 바위는 파괴되었지만, 다행이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어쩌다 공습이 잦아질 때면, 니콜라오 형제는 갇히고 다친 사람들을 구하고, 사망한 사람들을 묻기 위해 맨 처음으로 돌무더기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었다. 전쟁 후에도, 그의 자선은 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재건설하는 쪽으로 지향되었다.



난 더 이상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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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민들은 니콜라오 형제에게 똑같이 너그러움으로 보답했다. 그를 향한 그들의 존경은 1958년, 그의 장례 행렬에 동행한 6만 명의 인파로 입증되었다. 죽기 몇 일전, 그는 수호자에게 가서 "난 더 이상 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그 후로 8일 동안 형제회의 요양원에서 하느님을 만날 준비하며 기도에 전념했다. 그는 응급의 탈장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자주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라고 말했다. 6월 7일 저녁, 눈물 젖은 기도를 바치는 동료형제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십자고상을 손에 든 채 임종상 위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리고 뒷날 1958년 6월 8일 오전 12시 15분에 제스투리의 리콜라오 형제는 숨을 거두었다. 시당국과 성직자들은 그의 관을 운구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고, 신문은 마지막 경의를 표하러 형제회에 모여든 어마어마한 추모 인파에 대해 보도하였다. 6월 10일, 니콜라오 형제는 공동묘지에 묻혔고, '니콜라오 형제, 카푸친, 1882년~1958년'이라는 간단한 비문이 새겨진 그의 무덤은 곧바로 순례지가 되었다.



부온카미노 형제회 – 성인들을 만드는 공장!
니콜라오 형제는 1999년,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의 시신은 1980년에 이미 발굴되어, 형제회 성당 안 '티 없으신 마리아님'의 경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 경당안의 그의 이웃은 또 다른 거룩한 카푸친 평형제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이었다. 성 이냐시오는 덕행과 생활양식에 있어서 니콜라오 형제가 늘 본받으려고 했던 성인이었다. 또 니콜라오 형제가 묻혀 있었던 보나리아 옛 무덤에는 그의 뒤를 이은 칼랴리의 카푸친 동냥자, 이미 시복시성운동이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 '풀라(Pula)의 나자레노 형제'가 1992년에 묻히게 되었다! 이렇듯 칼랴리의 부온카미노 형제회는 말하자면 '성인들을 만드는 공장'인 셈이다.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축일 : 5월11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주시도록 그분께 기도합시다. 우리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이 날들 안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이미 보게 됩니다. 그 다음에 부활이 오는데,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는 데에 있어,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그분을 모방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사고 우리가 기도한다면, 그것은 한층 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천국 낙원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도록 하느님을 신뢰하며 기도합시다. 예수님과 마리아님은 찬미 받으소서!" – 제스투리의 니콜라오 형제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Beato Nicola da Gesturi (Giovanni Medda) Cappuccino
8 giugno 
Gèsturi, Cagliari, 5 agosto 1882 - Cagliari, 8 giugno 1958

L'umile figura di un questuante. Elevato alla gloria degli altari da Giovanni Paolo II. E' la storia di fra' Nicola da Gesturi, al secolo Giovanni Medda (1882-1958), che consumò tutta la sua vita tra il paese natale (Gesturi, appunto, nell'arcidiocesi di Oristano) e il convento di Cagliari. La sua fu quella che oggi definiremmo una vocazione «adulta»: rimasto orfano giovanissimo, aveva vissuto in maniera molto semplice, lavorando da contadino. Sempre più attratto da una vita interamente donata al Signore bussò alla porta dei cappuccini a 29 anni, assai maturo dunque per l'epoca. Vestito il saio, per 34 anni svolse l'umile incarico di questuante. Senza alcun risalto esteriore, ma aiutando spiritualmente un gran numero di persone. Con il suo esempio di virtù e di bontà incoraggiò infatti molti alla carità verso i poveri. Morì nel 1958 a 76 anni. Papa Wojtyla l'ha beatificato il 3 ottobre 1999. (Avvenire)

Martirologio Romano: A Cagliari, beato Nicola (Giovanni) Medda da Gesturi,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che, sempre pronto ad aiutare i bisognosi, con il suo esempio di virtù e di bontà incoraggiò molti alla carità verso i poveri.

È l’ultima figura francescana, in ordine di tempo e vissuta a Cagliari, a raggiungere la gloria degli altari, dopo s. Salvatore da Horta (1520-1567) frate Minore, taumaturgo e s. Ignazio da Laconi (1701-1781) cappuccino e questuante.
Nello stesso convento di Cagliari e con lo stesso compito della questua di s. Ignazio, visse santamente il cappuccino fra’ Nicola da Gesturi, beatificato il 3 ottobre 1999 da papa Giovanni Paolo II.
Il suo nome da laico era Giovanni Medda, nacque il 5 agosto 1882 a Gesturi (Cagliari) archidiocesi di Oristano, sesto dei sette figli di Giovanni Medda e Priama Cogoni Zedda, di umili condizioni sociali ma onesti e religiosi.
A quattro anni nel 1886, secondo le usanze del tempo, ricevette la Cresima; nella famiglia entrò ben presto il lutto e la miseria, Giovanni aveva appena cinque anni quando morì il padre e tredici anni quando morì la madre.
Il ragazzo allora venne affidato al suocero di sua sorella Rita, il benestante padrone lo tenne come servo, senza paga alcuna e ricevendo solo alloggio e sostentamento, Giovanni trascorreva le sue giornate tra il lavoro dei campi e il custodire il bestiame.
Morto il suo padrone, passò stabilmente in casa della sorella, sempre come servitore puntuale ed onesto; dopo le prime classi elementari iniziò la vita del contadino.
A 14 anni, il 18 dicembre 1896 Giovanni Medda ricevette la Prima Comunione e da allora prese a vivere tutto teso verso la virtù e la santificazione.
Anche dal cognato per il quale lavorava, non volle ricompensa in denaro, accontentandosi del poco vitto e dell’alloggio in un bugigattolo. La mortificazione in cui viveva fu lo stimolo ad aspirare alla vita sacerdotale, ma la povertà era un’ostacolo insormontabile.
Trascorsero così altri anni, lavorando e coltivando in sé la vocazione che avvertiva sempre più forte; Giovanni Medda aveva 29 anni quando nel marzo 1911, presentato da un’ottima relazione del parroco di Gesturi, entrò nel convento cappuccino di S. Antonio a Cagliari, come Terziario oblato.
Dopo due anni, il 30 ottobre 1913 vestì l’abito cappuccino prendendo il nome di fra’ Nicola; qualche mese dopo fu trasferito al convento di Sanluri, dove fece l’anno di noviziato ed emise la prima professione solenne, fu altalenante fra il convento cappuccino di Sanluri (CA), quelli di Sassari, Oristano, Cagliari, di nuovo a Sanluri; era sempre addetto alla cucina, anche se non suscitava la soddisfazione dei confratelli.
Infatti su segnalazione di un frate, fu esonerato dalla cucina e nel 1924 trasferito a Cagliari, con l’incarico della questua in città.
E per 34 anni svolse questo delicato compito con tenacia e pazienza; sempre percorrendo a piedi con ogni tempo, pioggia, freddo, caldo, chilometri e chilometri; chiedendo la carità in nome di s. Francesco, sempre con le stesse parole, ricevendo l’offerta per i bisogni del convento e per la carità francescana, ma anche offese, ingiurie e prese in giro, da chi vedeva nel questuante un fannullone e un buono a nulla.
Dopo i primi tempi, fra Nicola da Gesturi non chiese più nulla, perché i cagliaritani avevano compreso che quel silenzioso umile frate era una persona eccezionale e le offerte in denaro o in natura, venivano date spontaneamente.
Man mano che gli anni passavano la sua figura divenne sempre più popolare per Cagliari e paesi vicini; molti lo avvicinavano per chiedere consigli, domandavano preghiere, lo invitavano ad entrare in casa e negli ospedali, per dare conforto agli ammalati; si verificarono guarigioni improvvise e aumentò così la sua fama.
Era diventato l’amico e il confidente di tutti e fermato in continuazione, per cui non riusciva più a coprire l’intero territorio, che di solito prima percorreva in un giorno.
La sua era diventata ormai una “presenza” indispensabile; ascoltava tutti ma i privilegiati erano i poveri che visitava anche nelle loro misere case.
Durante la Seconda Guerra Mondiale, la città di Cagliari divenne una delle più bombardate d’Italia, tutti quelli che potevano se ne allontanavano, anche i frati del convento di S. Antonio furono trasferiti altrove, meno quattro fra i quali il Superiore e frate Nicola che non volle allontanarsi.
Tolta la clausura al convento, furono accolti sfollati e persone rimaste sole, curate e sfamate e frate Nicola da Gesturi si faceva in quattro per aiutare e consolare tutti.
Ma la sua benemerita opera non fu circoscritta al convento, andò a soccorrere la folla di miserabili e cenciosi che si erano rifugiati nelle tante grotte sparse per la città; come dopo ogni bombardamento egli accorreva sui luoghi disastrati per portare aiuto ai feriti, consolare i danneggiati, seppellire i morti, per i cittadini di Cagliari egli assunse la figura silenziosa di una visione.
Il silenzio fu la sua costante caratteristica, sia quando riceveva che quando dava, l’interrompeva soltanto per ricordare la volontà di Dio. Il 1° giugno 1958, stremato nel fisico, si presentò al Padre Guardiano e gli disse: “Padre non ne posso più” e chiese di essere esonerato dalla questua.
Il Superiore intuì subito che frate Nicola si avvicinava alla fine; il giorno dopo fu ricoverato in clinica e operato d’urgenza.
Ma tutto fu inutile, dopo quattro giorni, dopo aver ricevuto l’unzione degli infermi e il Viatico, si spense serenamente l’8 giugno 1958 a 76 anni.
La fama della sua santità era grande e i funerali videro l’imponente partecipazione del popolo; decine di migliaia di persone di ogni ceto sociale, resero omaggio alla sua salma e i funerali del giorno 10 furono un’apoteosi.
Dal 1966 al 1971 si ebbe il primo processo per la sua beatificazione avvenuta nel 1999; il 6 giugno 1980 i suoi resti furono traslati e tumulati nella Cappella dell’Immacolata della Chiesa di S. Antonio del Convento dei Cappuccini a Cagliari. La sua celebrazione liturgica è l’8 giugno.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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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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