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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5월21일(5월19일)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Fratello sole e sorella 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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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5-05-22 ㅣ No.1891


축일 :5월21일(5월19일)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
San Crispino (Pietro Fioretti) da Viterbo Religioso Cappuccino
Viterbo, 13 novembre 1668 - Roma, 19 maggio 1750

Saint Crispin of Viterbo, OFM Cap 
Also known as :  Crispinus of Viterbo,  Crispinus von Viterbo, il Santorello,  Peter Fioretti,  Pietro Fioretti 
Born : 13 November 1668 at Viterbo, Italy as Pietro Fioretti
Died : 19 May 1750 of pneumonia at the fri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n Rome's Via Veneto; entombed under a side altar in the Capuchin church at Rome; body found incorrupt in 1959
Beatified : 7 September 1806 by Pope Pius VII
Canonized : 20 June 1982 by Pope John Paul II 
 

 



   이탈리아 라치오(Lazio) 지방의 비테르보 태생인 피에트로 피오레티(Pietro Fioretti)는 어려서부터 성모님을 특별히 공경하였다. 그는 삼촌의 지도하에 견습 제화공으로 있던 중 수도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는 25세 때까지 구두 수선하는 일을 하다가 1693년 오르비에토(Orvieto)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크리스피누스(Crispinus, 또는 크리스피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성 크리스피누스는 수도원의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비테르보에서는 정원사, 톨파(Tolfa)에서는 주방 요리사로서 봉사했다. 톨파와 브라치아노(Bracciano)에서 유행병이 돌 때에는 그의 주위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는 요르비토에서 재무를 담당하였는데, 사실 이런 일보다는 그의 기적과 예언 그리고 지혜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는 1750년 5월 19일 병든 몸으로 휴양 중이던 로마(Roma)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1806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82년 6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시성식 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단순하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지상 순례의 참된 가치를 이해한 아무 경력도 없는 겸손한 형제”라고 칭송하였다. 그의 축일은 지역에 따라 5월 19일 또는 23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가톨릭홈에서)




모든 이의 친구, 민중의 형제,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    
 

몇 마디의 격언으로 인생관을 요약하다
“마차를 타고 ‘낙원’에 가는 일은 없다!”,
“‘낙원’은 안락의자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하루하루 또 한 하루가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살펴주십니다.”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사랑하십시오. 말은 그만 두고 선행을 하십시오.(Ama Dio e non fallire, fa pur bene e lascia dire)”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아드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은 가짜 사랑을 하는 자입니다.”
“수도공동체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하면 다른 것들 중에서 이 세 가지를 지켜야 하세요. 즉, 고통을 받는 거. 침묵을 지키는 거, 기도하는 거.”
“날 기다리는 선익 커져 가고, 내 모든 고통은 쾌락 돼요. (Tanto è il bene che mi aspetto, che ogni pena mi è diletto).”
"내 아들들이여, 젊을 때 할 수 있는 만큼 좋은 일을 하고 기꺼이 고통을 감내해요. 사람이 늙으면 남는 것은 호의 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슬리퍼를 신고 ‘낙원’에 가는 일은 없다!”
“고통을 한 순간이지만 기쁨은 영원합니다.”
“죽음은 세속에 집착하는 미치광이들에게 상식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위와 같은 표현들은 카푸친 성인이 된 비테르보의 크리스피노 형제가 자신의 그리스도교 인생관을 능수능란하게 요약했던 함축성 있는 격언 중 몇 마디일 뿐이다. 자기 자신은 몸소 그런 금언들대로 살았고, 자주 재치가 있는 말투로, 만나게 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쳐주었다.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라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한 명의 꼬마, 두 분의 어머니
1668년 11월 13일, 크리스피노 형제는 이탈리아의 비테리보(Viterbo)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발도 피오레티(Fioretti)’이고, 그의 어머니는 ‘마르치아 안토니(Antoni)’였다. 그들의 결혼 당시 마르치아는 이미 딸 한 명을 데리고 있는 과부였다. 11월 15일,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간난 아기를 세례자 성 요한의 본당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하지만 베드로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 우발도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의 어머니 마르치아는 또 과부가 되어 버렸다. 때문에 베드로의 작은 아버지 프란치스코가 꼬마인 베드로의 양육을 도와주게 되었고, 예수회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나중에 자신의 제화점에서 베드로를 견습생으로 삼았다.

매우 경건했던 베드로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깊은 모성애를 품었다. 한번은 오크나무의 성모 성지를 방문했을 때, 다섯 살짜리 베드로에게 성모상을 가리키면서 “보렴. 너의 어머니이시고 너의 여주인이시란다. 나중에 저 분을 너의 어머니, 너의 여주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렴.”이라고 말했다. 어린 베드로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어디에서나 성모님의 제대를 만들어 ‘가장 아름다운 꽃’들을 봉헌하곤 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여 가푸친 되다
베드로의 청년시절, 오르비에토(Orvieto)에 가뭄이 심한 관계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보속의 행렬이 시내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행렬에는 팔란자나(Palanzana)의 카푸친 수련원에서 나온 수련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카푸친 형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오르비에토에 머무르고 있었던 로마의 관구봉사자는 25살인 베드로를 보고 즉시 입회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가족, 특히 어머니의 반대를 극복해야만 했는데, 베드로는 어머니에게 어린 시절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한 그 기억을 상기시켜 결국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할 허락을 얻어냈다. 하지만 베드로 성소에는 또 한 사람의 반대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의 입회를 반대했던 수련장이었다. 나약한  베드로가 카푸친들의 터프한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을 샀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관구봉사자의 마지막 결정이 날 때까지 베드로가 팔란자나 수련원에서 손님으로서만 머물러야만 했는데, 관구봉사자는 수련장에게 본인의 결정을 분명하게 밝히고 베드로를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시켰다.

베드로는 착복식 때, ‘크리스피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성 크리스피노는 원래 제화공들의 수호성인이었고 베드로도 제화 기술을 배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수도회에서 그 기술을 쓸 기회는 없었다.


초기 카푸친 봉사활동
어쨌든 그때로부터 일 년 후 1694년 5월 22일, 크리스피노 형제는 수련기를 마치고 서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톨파(Tolfa)의 지역 형제회(즉 ‘톨파의 수도원’)로 파견되어 3년간 요리사로 봉사했다. 그리고 로마와 알바노(Albano)와 모테로톤도(Monterotondo)인 라치오(Lazio) 주의 여러 지역 형제회에서 간호사와 과수원지기, 요리사로 봉사했다.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된 구걸자
1709년, 크리스피노 형제는 오르비에토로 보내져 동냥자의 소임을 임명 받았는데 그곳에서 38년 동안 충실히 이 의무를 다했다. 57년간의 그의 수도생활은 끊임없이 하느님과 형제들과 이웃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이었다. 그는 그 지역의 모든 주민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주민들도 크리스피노 형제를 좋은 친구로서 사랑했다. 전염병 환자를 돌볼 때는 자신의 안전은 등한시 한 채 자발적이고 열성적으로 임했고, 카푸친 형제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큰 오르비에토 가족’을 위해서도 음식을 구걸하곤 했다. 그러나 카푸친 형제들을 위해서는 필수품만 구걸했기 때문에 동료 형제들에게서 환심을 사진 못했다. 사실 몇몇 형제들은 크리스피노의 유명세로 조금은 편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기도 했는데, 크리스피노 형제가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자 점점 그에게 분개를 표출하기도 했다.

 

카푸친 Vita Mixta - 기도와 사도직 활동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직물
아무튼 크리스피노 형제는 사도직과 관상이 서로 보완되는 카푸친들의 혼합생활(vita mixta)에 탁월한 모범으로서 활동사도직과 기도생활을 놀라울 정도로 잘 통합시켰다. 성모상을 모신 제대를 꾸며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며, 아름다운 꽃들을 자주 봉헌하기를 좋아했던 크리스피노 형제는 형제회에 되돌아오면 무엇보다도 기도에 열중했다. 먼 곳에서 하루 종일 힘든 동냥에 시달린 크리스피노는 가대석(즉 chorus - “기도소”라고도 한다는 형제들이 성무일도를 바치는 성당 제대 뒤에 위치한 경당)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는 특별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밤기도에 참석했다. 항상 첫 번째로 성당에 들어갔고 늘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왔다. 그리고 감실 앞에서 긴 시간 성체조배를 했고, 자유 시간에도 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냈다. 집을 나가기 전에 그는 반드시 짧은 명상곡을 노래하고 나갔다. 그런 때에는 성모상 앞에서 “Ave Maris Stella(바다의 별이시어, 기뻐하소서)” 같은 성모 성가를 항상 불렀고, ‘Ecce Homo’의 예수님 성상을 지날 때에는(그의 독방은 ‘성가정’ 성화와 ‘Ecce Homo’라는 ‘수난의 예수님’ 성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걸음을 멈추고 엎드려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다. “주님,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오! 주님,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식당에서의 독서 낭독 중에 특히,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와 식마링겐의 성 피델리스, 레오네사의 성 요셉과 아씨시의 성녀 글라라의 전기에서 따온 부분을 주의 깊게 듣곤 했다. 

그는 평생을 살면서 한가함을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외부에서는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말을 많이 아끼는 편이었다. 특히 형제회 안에서 종교적인 주제로 논쟁할 때 더욱 그랬다.


그 동시대의 카푸친 수도생활에 대한 관점
크리스피노는 그 시대의 카푸친 수도생활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푸친 성소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카푸친 수도생활에 대한 그의 금언이 매우 많은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를 이 거룩한 수도생활에로 불러주신 주님께 얼마나 신세를 지고 있는지요!” 자신의 ‘십자가’인 동냥자루와 포도주부대들 그 멍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경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얼마나 더 큰지요!”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도자들의 십자가는 “평신도들의 십자가에 비하면 지푸라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지는 십자가들은 비록 쇠로 만들어져 있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십자가와는 결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절에 만연된 수도생활의 문제들을 비탄하는 마음과, 헌신적이며 선행으로 구체화된 엄격한 수도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의 금언들로 인해 잘 드러났다.

크리스피노 형제가 훈계를 할 때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갖추었으나 수도자들의 경우에는 매우 직선적이었다. 한번은 수호자에게 화를 내는 비테르보의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형제에게 “시골뜨기야, 너는 네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한다면 이 세 가지를 지켜야 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거, 모든 사람에 대해 잘 말해주는 거, 모든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거.”라며 직접적으로 혼을 냈다. 다른 동료형제에게도 그와 같이 권했다.

 


모든 면으로 순종했지만 회칙을 위반하지 못했다
수호자의 명령들에 대한 순종을 우선시한 크리스피노 형제였기에, 그는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수도자들은 특별히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곤 했다.“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 아버지 성 프란치스코 앞에 죽은 영혼이요, 수도회에 아무 쓸모없는 몸입니다.”, “그런 자는 가족 안의 정신이 이상한 분별없고 변덕스러운 청년 같습니다. 그는 단지 남을 귀찮게 방해하고 혼선을 초래하는 일에만 능합니다.”, “그런 자는 제 구린내로 온 집 안에 악취를 풍기는 일이 아니면, 그 어떤 일에도 쓸모가 없는 집안에 죽어 있는 시체와 같습니다.”

크리스피노 형제의 순종 정신은 다음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카푸친 형제회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동냥자들의 편리함을 위하여 크리스피노 형제는 한 두 명의 동료 형제와 함께 주중에는 오르비에토 시내에 있는 작은 거처에서 숙박을 했다. 그러나 규칙 준수에 엄격한 수호자는 크리스피노 형제를 비롯한 모든 형제들이 매일 저녁식사를 위해 형제회로 돌아와야 한다고 명령했다. 많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고령의 크리스피노 형제는 그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힘든 오르막길에 따라 귀가했다가 한 입의 빵만 먹고 잠시 쉬는 것이 전부였지만 자신의 안위보다는 순종이 늘 먼저였다.

하지만 양심에 거스르는 일이나 성 프란치스코 회칙을 위반하는 명령은 거부했다. 한번은 어느 수호자가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회칙에서 금지된 돈을 모으는 일을 명령했다. 이 명령을 거부한 크리스피노 형제는 오르비에토에서 쫓겨나 바사노(Bassano) 형제회로 옮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오르비에토 주민들은 크리스피노 형제 말고는 다른 동냥자들에게 구호품을 주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크리스피노 형제는 3개월 만에 다시 오르비에토로 돌아와야 했다. 그 일을 명령한 수호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고 결국 나중에는 수도회를 떠나게 되었다. 크리스피노 형제가 수도자들을 다룰 때에 비록 딱딱하긴 했지만 수도회에 대해서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았다. 수도회에서 하느님을 섬길 기회를 크나큰 은혜로 여겼기 때문이다. 

 


무슨 도움이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그는 동냥자의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사회복지와 영성 분야에도 많은 선행을 했다. 병자들과 죄수들, 미혼모들, 가난한 사람들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활기차게 봉사했고, 형제회 안팎의 여러 일도 능수능란하게 잘 대처했다. 특히 수도원 출입문으로 다가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도움에 대해 그는 “우리가 두 개의 문, 즉, 주님의 더욱 더 큰 영광을 위하여, 가대석의 문과,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형제회 현관의 문을 늘 열어둔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늘 너그럽게 부양해 주실 거예요.”라고 말했고, 또 “정문은 형제회를 지탱해요.” 라고도 말하곤 했다.

그는 매일 병자들을 방문했다. 죄수들도 자주 찾아가 그들을 옹호해 주기도 하고, 교도관에게는 죄수들의 인권을 존경하도록 권고하곤 했다. 죄수들에게 빵과 군밤과 담배를 나누어 주었고, 형편이 나은 가족들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게 하여 그들에게 전해주도록 했다. 형제회 정문 앞에 버림받은 아기들은 직접 고아원으로 데리고 주었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이기들에게 관심을 보여,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연락하고 지냈다.


그의 유머감각, 불같은 성질에 대한 해결책
크리스피노 형제는 재치가 뛰어나고 명랑한 사람이었는데, 어떤 증인들에 의하면 그는 재치가 넘치는 발언으로 자신의 타고난 불같은 기질을 완화시키고 다스렸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재치와 유머 감각을 잘 이용하여 천차만별의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봉사활동은 언제나 기쁨이 충만했다. 특히 사람들의 필요를 잘 파악했고, 그 어떤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


크리스피노와 그의 '여주인이신 어머니'
그리고 크리스피노 형제는 어떤 임무라도 시작하기 전에 꼭 먼저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곤 했다. 성모님께 대한 거룩한 금언들도 자주 크리스피노의 입술에서 흘러 나왔다. 성모님을 ‘내 여주인이신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께 신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멸망할 일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또는 “아드님을 불쾌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으로 인해 하느님이신 성모님의 아드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은 마리아님의 진정한 신봉자가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외워 반복해 비치도록 가르쳐주곤 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 죽을 때에 저에게 빛이 되시옵고 저와 함께 하시옵소서.”

누군가가 위독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면(일반적으로 그런 경우에는 사람들은 기적을 바란다) “나의 여주인이신 어머니와 잠깐 이야기 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이야기를 한 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혹은 “내 여주인이신 어머니께 메모를 보낼 테니 답장을 기다려 봅시다.” 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가끔 그 답장은 사람들이 받기를 바랐던 답장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라스키(Laschi)의 경우가 바로 그런 예인데,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건강에 관하여 내가 보낸 메모에 나의 여주인이신 어머니께서는 뒷보증하시지 않았습니다.”


‘유식한 평형제’이자 현명한 영성지도자
크리스피노 형제는 교육을 받은 덕택에 그 시절의 카푸친 평형제 성인들과는 달리 읽고 쓸 줄을 알았다. 강론을 듣고 영성생활에 필요한 책들을 섭렵하여 여러모로 상당한 수준의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유식한 평형제’라고 불린 그는 통찰력과 지혜로 가득 차 있었고, 클레멘스 11세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과 학자들과 귀족들이 그에게 충고나 영성지도를 청하곤 했다.  그가 교구 사제들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세심증과 같은 영성 생활의 문제들을 매우 정교하게 다루고 있다. 영적인 불안감에 시달리는 한 교구 사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영적 권고가 잘 드러난다. “대담하고 남자다운 마음으로 힘을 내십시오. 동요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마시고, 종종 가장 까다로운 당신의 의무에도 명랑하게 나아가십시오. 여전히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당신 마음에 드는 일, 당신의 성소에 어울릴 만한 그 일들에 종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전쟁입니다. 허나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낙원’에서 위대한 왕자들이 될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크리스피노의 금언, 몇 마디 더
크리스피노 형제의 영성지도는 장문의 긴 편지들보다는 짧은 글과 짧은 시로 잘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 순심으로 사랑하는 자, 즐거이 살다가 기꺼이 죽으리라.(Chi ama Dio con purità di cuore, vive felice e poi contento muore)”, “주님 뜻을 이루는 이에게는 역경에 처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과연 그분은 사랑 받으실 만하십니다.” 한번은 심각한 기근이 일어났는데, 크리스피노 형제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심을 고무했다. “당신 희망 하느님께 둬요. 매 풍요를 누리실 거예요.(Poni in Dio la tua speranza, ché averai ogni abbondanza)”  비테르보의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형제에게는 “시골뜨기여,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과 완수해야 할 모든 임무를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합시다.. 나로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지푸라기 한 닢도 줍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를 위한 순교자’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피노 형제는 "지옥에 가는 것이 거룩한 활동으로 거룩한 ‘낙원’에 이르는 것보다는 더 힘든 것입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기지도록 강조하곤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에, 그는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이 있으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잘못 사는 어느 귀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사님, 하느님의 자비는 위대합니다. 한 ‘좋은 고해성사’로 악습을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하느님의 권능은 우리를 창조합니다. 그분의 지혜는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분의 자비는 우리를 구원합니다.” 세심증에 심각하게 시달리고 있었던 바오라 스키아베티(Schiavetti)에게는 “사람이, 알고 있는 것만큼 또 할 수 있는 것만큼을 다했다면, 나머지는 하느님 자비심의 바다 속으로 송두리째 던져버려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사회정의에 목말라하다
또한 크리스피노 형제는 인간 사회에 만연된 물질적, 영적인 불행은 자주 불평등의 결과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사회적 불평등과 맞서 싸웠는데, 상업가들에게는 깨끗하고 정당한 수익 활동을 권했고, 노동자들에게는 그들의 합당한 권리를 옹호해 주었다. 그의 타고난 유머감각과 재능이 이러한 상황에 잘 맞는 금언을 만들어 냈는데, 통풍을 고쳐 달라는 어느 한 사람에게 “당신의 병은 발의 통풍인 것보다 손의 통풍입니다. 당신은 품삯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지분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일꾼들과 하인들이 울고 있습니다.”라고 질타했고, 특히 상업가들에게 “하느님께서 계약서도 물건도 모두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또는 “멍청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라고 경고했다.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빚을 탕감해주도록 청했고, 분쟁이 일어나면 언제든 망설임 없이 중재하는 데 힘을 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세속의 것들은 하느님께 이르지 않습니다.”


크리스피노의 비평가들
이 모든 그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비평가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카푸친 수도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비판자들에게 공격을 받아 왔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독선적이며 공격적이라고 불만을 드러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 그가 자주 찾아갔던 한 수녀원의 어느 수녀는 30년 동안이나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를 모욕하곤 했다. 자선을 베풀기 싫어한 어느 한 시민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총봉사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크리스피노 형제의 해고를 요구하기도 했고, 주교좌 성당의 어느 사제는 길거리에서 아예 대놓고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너는 위선자야.” 라고 외치곤 했다. 자신의 모자람을 잘 아는 겸손한 크리스피노는 이 모든 것을 훌륭하게 참아냈다.

 
크리스피노의 겸손과 자신을 비하하는 유머
크리스피노 형제는 자신을 늘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겼다. 한번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세빌랴 오렌지(광귤)보다 더 못한 놈입니다. 적어도 그 세빌랴 오렌지는 사람들에게 주스를 재공해 주지만 나로부터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또 크리스피노 형제는 대중의 칭찬과 찬사를 피해 가려고 재치 있는 비유들을 자주 사용했다. 퍼붓는 빗속에서 다니는 크리스피노 형제를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기자 “친구야, 나는 빗방울 사이로 걸어 다녀.”

감사하는 마음에서 특히 그의 겸손이 잘 드러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불쌍한 죄인, 이 가엾고 조그만 놈, 작은 빈자’로 칭했고, 또 그러한 자신을 기억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리고 늘 은인들과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했고, 그 사람들도 자신들의 기쁨과 고통을 기꺼이 이 ‘민중의 형제’와 나누려고 했다.

크리스피노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였지만, 그에게 일어난 기적과 치유들은 과학자들과 의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크리스피노 형제의 기적에 대해 감탄해 하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세요, 놀랄 것이 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기적을 하실 수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친구야, 성 프란치스코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 몬테퍄스코네(Montefiascone)에서는 그의 망토 조각을 잘라 거룩한 유물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혼냈다. “아아! 불쌍한 사람들이여, 뭐 하고 계십니까? 개 꼬리털을 잘라내는 일이 오히려 낫겠습니다. 미치셨습니까? 지나가는 당나귀 때문에 이토록 소란을 피우시다니요. 차라리 성당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십시오.”




주님의 수염을 잡아당기려는 거야?
그리고 그는 즉효의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치곤 했다. 바르바리니(Barberini) 공주가 아들 카롤로를 고쳐 달라고 급하게 요구했을 때에 크리스피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이! 나중에 성년(聖年)에 낫게 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모양이지? 어이! 주님의 수염을 잡아당기려는 거야?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자 할 바로 그때에 은혜를 받아야지.”


그가 예언한 카푸친 성소
그리고 크리스피노 형제는 막달레나 로사티(Rossati)의 아들 히에로니모를 만나서 “빵도 포도주도 없이, 크리스핀의 조그만 형제지.(Senza pane e senza vino, fraticello di fra Crispino)”라고 노래하여 그가 카푸친이 되리라는 예언을 했다. 그리고 사실 그 아이는 ‘오르비에토의 히아친토 형제’라는 카푸친이 되었으며, 사제 지망자였으나 1749년, 스물한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에서 선종했다.



크리스피노의 보통 하루 일과
오르비에토에서 생활하는 동안 크리스피노 형제는 일반적으로 형제들이 빌려준 작은 시내 거처나 여행자 휴게소(hospitium)의 2층 골방에서 숙박하곤 했다. 그곳에서의 대표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의 작은 골방이나 1층의 공동방에서 기도를 하고, 주교좌성당의 문이 열리면 여러 미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거처로 돌아와 아직까지 미사에 참석 못한 늦잠 자는 동료가 있으면 성당에 데려다 준 다음 동냥을 나갔다. 그 다음엔 병자를 방문하고, 감옥의 죄수들을 만났다. 점심으로 야채국물 조금이나 물에 찍은 빵 한입 정도를 먹고 난 뒤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때로는 거처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했는데, 그들에게 덕담을 해 주고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저녁에는 성당에 가서 설교를 듣거나 성체조배를 했고, 한 두 시간 정도 라틴어 성경과 ‘그리스를 본받기’와 같은 영성 서적을 읽고 묵상에 빠졌다. 그리고 임종하는 신자들이 있을라치면 병자성사를 주는 사제와 꼭 함께 갔고, 그들의 장례식 또한 놓치지 않았다. 또 형제회안의 아픈 형제들이 양로원에 가기 싫어하면 늘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와서 몸소 돌보았다. 이러한 생활양식 때문에 그는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기쁨과 슬픔에 긴밀히 동참하는 진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여름이 되면 별들이 쏟아지는 옥상에서 잠을 청하곤 했던 그는 노년에 이르자 많은 편지들도 쓰고 이탈리아 문학의 시조들도 외우곤 했다. 통풍에 시달렸던 오르비토 출신인 프란치스코 바르바레스키(Barbareschi) 약사에게 다음과 같은 초대장을 써서 보냈다.“아킬레스의 창을 들고(삽을 들고) 크리스피노의 별장 마땅(villa Crispiniana)’에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크리스피노는 은인들을 위해서 직접 일군 작은 채소밭을‘villa Crispiniana’라고 불렀다) 또, 범람한 강물을 건너다가 빠질 뻔한 어느 카푸친 형제를 기적적으로 살린 다음, 크리스피노는 직접 쓴 다음의 짤막한 시조를 노래했다. “탁수(濁水)로 보면 그냥 탁수로 두지, 건넌다면 미치광이요.



로마에서 보낸 그의 말년
1747년 겨울, 크리스피노 형제는 심각한 병이 들어 로마에 있는 카푸친 양로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명성이 로마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터라, 그를 면회하러 비아 베네토(Via Veneto)에 있는 로마 형제회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어느 형제가 그에게 고통중이라도 기쁨을 잃지 말라고 위로 했을 때, 그는 자신의 병보다는 자신을 돌보는 형제들에게 폐가 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고통을 주셨고, 하느님께서 나에게서 고통을 덜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뜻이 이루지소서!” 라며 거룩하게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았다. 그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자네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언제 고통 받아보겠나? 죽고 난 다음에?”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어이! 우리가 묘지('pilozzo') 안에 있을 때 고통 받기를 기다리려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
다행히 크리스피노 형제의 병은 어느 정도 회복됐다.  그러나 1750년 5월, 크리스피노 형제는 폐렴에 걸려 다시 양로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로마에서 1750의 성년의 대사(大赦)를 받고 죽겠다고 예언한 적 있었는데, 이제야 베르바리니 공에게 "저는 이사 가야지요... 우리 영원한 거처로 이사 가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한 형제가 크리스피노 형제에게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라고 위로하자 그는 “아 예, 안젤로 아노니오 아버지! 바로 거기에 나의 모든 희망을 걸어 왔던 거지요.”라고 말했고, 간호사 형제가 그에게  죽음이 임박하고 있었다고 알려주자 그는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라는 시편의 말씀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의 축일에 방해되니 5월 17일이나 18일에는 죽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그 전 며칠 동안에 해왔던 대로, 19일에도 그는 반복하여 기도를 바쳤다. “오! 나의 하느님, 당신 자비의 활동을 완성하시고 저의 주 예수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공로로 이 저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죽기 전, 그를 괴롭히는 악마에게 “이 추한 짐승아,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내 여주인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의 보호와 나의 세라핌적 아버지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굳게 믿으니까!”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1750년 5월 19일, 오후 2시30분, 로마 ‘비아 베네토(Via Veneto)’에 위치한 무염시태의 카푸친 형제회에서 비테르보의 크리스피노 형제는 82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러자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거룩한 시신에 자기들의 성물을 대려고 로마 카푸친 형제회로 몰려왔다. 크리스피노 형제의 시신은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의 유해가 안치된 무염시태 성당에서 묻혔다. 모든 이의 친구, 민중의 형제였던 크리스피노 형제는 1806년, 비오 7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그는 시성되었다. 그 즈음에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의 시신은 오르비에토시의 카푸친 성당으로 옮겨져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베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첫째 복자였다.

 
"사랑스러우신 우리 주님께서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그 거룩한 금언들을 마음껏 당신이 받아들이셨다고 들었기에 저는 기뻐했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복음말씀 안에서, 그리고 또한 주님의 뜻을 묵상하는 일과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생애와 수난을 묵상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뜻에 따라 걸어가기 위하여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의 수난은) 착오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덕행들을 훈련하기 위한 믿음직한 학교입니다. 그리고 신부님 자신의 편으로는 하실 수 있는데 만큼 주님 안에서 계속 기쁘게 사십시오." -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


 

♬Fratello sole e sorella luna-Claudio Baglioni

 

 

*카푸친작은형제회 성인들 Capuchin Franciscans:

비테르보의 성 크리스피노(축일:5월21일(19일),게시판1773번.1891번)
단순성과 기쁨.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1587년.축일:5월18일.게시판1770번.1166번)
만디츠의 성 레오폴드 사제(축일:5월12일,게시판1759번,1890번)
라코니의 성 이냐시오 수도자(축일:5월11일.게시판1757번)
신앙을 수호하다 순교한 식마린겐의 성 피델리스 사제(축일:4월24일.게시판1727번,1119번)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축일:4월21일.게시판1722번)
성 요셉 레오네사(축일:2월4일.게시판1601번)
꼬를레오네의 성베르나르도 수도자(축일:1월12일(19일),게시판1564번)
아크리의 복자 안젤로(축일:10월30일.게시판1444번)
성 세라피노(축일:10월12일.게시판1417번,691번)
캄포로쏘의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축일:9월20일(25일)게시판1384번)
오상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축일:9월23일.게시판1379번)
복자 오피다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6일(23일)게시판1334번)
복자 아가탄젤로와 카시아노 동료순교자(축일:8월7일.게시판1305번)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 사제 학자(축일:7월21일.게시판1283번)

니코시아의 성펠릭스 수도자(축일:6월2일.게시판179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참고 자료 : 가톨릭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크리스피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시절 탄생한 최초의 성인

송영웅(바오로, 영일고등학교 재단이사)

 

크리스피노(Crispino da Viterbo, 1668-1750년) 성인은 1668년 11월 13일에 이탈리아의 한 지방도시인 비테르보(Viterbo)에서 태어났다. 그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어른이 된 크리스피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Ordinis Fratrum Minorum Capuccinorum) 수사들이 행렬을 지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수도 생활에 일생을 투신하겠다는 영감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693년 7월 22일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평수사가 되었다. 수도회에서는 그에게 머슴들이 하는 비천한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는 비테르보에 있는 카푸친 수도회의 주방에서 일하였다. 그 후 톨파(Tolfa)와 로마 그리고 알바노(Albano)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크리스피노는 모자를 쓰지 않고 일을 하러 다녔는데 그가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왜 모자를 쓰지 않고 맨머리로 일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짐수레를 끌고 가는 작은 짐승’이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자를 쓰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그가 “당나귀에게는 모자가 필요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피노는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점점 더 깊고 심오한 거룩함 안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리하여 곧 수도원 밖에 있는 저명한 남녀 인사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많은 사회 저명인사들이 크리스피노를 찾아와 그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지도를 받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주교들과 추기경들 그리고 유명한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면담을 했고 나중에는 교황님께도 불림을 받아 조언을 해드렸다. 그러나 크리스피노는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떤 직함을 갖고 있고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크리스피노는 그들 모두를 구원을 갈망하는 삶으로, 끊임없이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하느님의 자녀로 보았고, 자신에 대한 자각(自覺)과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크리스피노는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하고 있는 인간적인 인들이 천상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하여 눈뜨게 해주었다.

크리스피노는 나이가 들어 연로해진데다가 그동안 수도자로서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였으며 힘든 노동일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쇠약해지고 병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휴양을 취할 수 있도록 로마로 보내졌다. 1750년 5월 19일 로마에서 크리스피노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동료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이 겸손한 평수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자신을 찾아온 한 사람 한 사람과 마주앉아 그들에게 자신의 지혜와 열정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전해주었다. 그는 영성적인 측면에서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샘(泉)과 같은 존재였다. 후에 사람들은 그의 시신이 부패되지 않고 돌아가실 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시신은 로마의 카푸친 수도회 성당 측면 제대 밑에 안치되었다.

1806년 교황 비오 7세는 크리스피노를 복자품에 올렸고 1982년 6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재위 시절 제대 위에 올려진 최초의 성인이었다. 교황은 시성식에서 이 겸손한 수사야말로 영신 생활에서는 거인으로 성인들의 신비와 완덕의 의미를 깨우친 온화하고 다정한 영혼을 지닌 분이었다고 상찬하였다. 크리스피노 성인의 축일은 5월 19일이다.

[교회와역사, 2010년 1월호]

 

 

 

 

6월 20일 ‘바티깐’서 현 교황 첫 시성식 주도

크리스핀 수사 시성

 

[바티깐市NC]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는 6월 20일 카푸친회 소속 한 이태리人 수사를 성인품에 올릴 것이라고 2월 27일 바티깐 라디오 방송이 전했다.

카푸친 회원인 ‘비텔보’의 복자 크리스핀 수사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는 첫 성인이 되는데 교황은 재위 3년 반 동안 몇몇의 시복식만을 거행 했었다.

크리스핀 수사는 1668년 이태리 ‘비텔보’에서 태어나 제화공으로 일한 후 1693년 카푸친회에 입회했다. 이태리 ‘올비에토’에서 수도회를 위한 기부금 모금가로 46년간 일한 크리스핀 수사는 탁월한 솜씨로 수도회에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공급했을 뿐 아니라 그 도시 내 모든 걸인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수도회 생활의 초창기에서 조차 기적들이 크리스핀 수사에게 행해졌으며 그의 기쁨과 행복의 정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고 전해 왔었다. 2년간 투병생활 후 1750년 ‘로마’에서 선종한 크리스핀 수사는 1806년 교황 삐오 7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한편 시성식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될 것이며 또 카푸친회의 원조인 프란치스꼬회 창설자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탄생 8백주 기념 행사의 하일라이트가 될 것이라고 바티깐 라디오 방송은 밝혔다.
[가톨릭신문, 1982년 3월 2일]

 

 

복자 4명 금년 중 시성 - 24일 추기경단 회의서 최종 승인

 

[바티깐시NC] 24명으로 구성된 추기경단은 지난 5월 24일 추기경단 회의에서 금년에 성인 · 성녀품에 오르게 되는 4명의 복자ㆍ복녀들의 시성을 승인했다. 이 날 추기경단은 추기경단 회의실에서 6월 20일 이태리 카푸친 수도회 크리스핀(베테르보의 크리스피노) 수사의 시성식을 선두로 10월 10일 폴란드 출신의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 막시밀리아노 꼴베(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시성 그리고 10월 31일 17세기 카나다 미개척지에서 활동한 프랑스 출신의 마르게리뜨 부르지이(마르가리타 부르주아) · 프랑스 ‘하느님의 성 안나 수녀회’ 창설자인 쟌느 델리누에(요안나 들라누) 등 4명의 시성을 승인 했던 것. 그런데 이날 회의에서 또한 교황청 국무원 관리가 성인품에 오르게 되는 4명의 복자ㆍ복녀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키도 했다. 이들 4명 복자들의 생애ㆍ업적을 간단히 살펴본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4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친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는 1895년 1월 6일 폴란드 ‘즈둔스카볼라’에서 출생했다.

1919년 ‘파두아’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꼴베 신부는 매스콤을 통해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전파하는 신심단체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했으며 1930년부터 36년까지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후 39년 귀국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폴란드가 나찌 독일에 점령 당한 직후 체포된 꼴베 신부는 41년 2월 ‘아우슈비츠’에 억류되었다. 그런데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도망병이 발생하자 수용소장은 이에 대한 대가로 닥치는 대로 10명을 지적, 아사형(餓死形)에 처하도록 명령 했는데 이때 꼴베 신부가 아내와 자식이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인 프란치스젝 가요브니젝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기로 했다.

아사형 감옥에 감금돼 2주간을 보낸 후 살아남은 꼴베 신부 등 4명은 41년 8월 14일 석탄산의 주입으로 죽음을 당했다. 한편 꼴베 신부는 71년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다.

현 교황에 의해 첫 번째 성인품에 오르게 될 크리스핀 수사는 1668년 이태리 ‘비테브’에서 출생했으며 1693년 카푸친회에 입회했다. 그는 46년간을 이태리 ‘오르비에또’에서 카푸친 수도회를 위한 기부금 모금가로 수도회의 필요한 자금을 충분히 공급했을 뿐 아니라 그 지역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도움을 주었다.

그의 수도생활 초기에서 조차 기적들이 행해졌으며 그의 깊은 영성은 주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년간의 투병 생활 후 1750년 ‘로마’에서 선종한 그는 1806년 삐오 7세에 의해 시복됐다.

1950년 성년에 교황 삐오 12세에 의해 복녀품에 오른 마르게리뜨 부르지이는 1620년 4월 12일 프랑스 ‘트로이’에서 태어났다. 고아로 어린 시절을 보낸 부르지이는 ‘가르멜회’ 등에 입회하려 했으나 번번이 좌절됐다.

1652년 뉴프랑스(現카나다) 통치자가 ‘트로이’를 방문, ‘몬트리올’에서 프랑스 수비대 자녀들을 가르칠 교사를 구하고 있었다. 그대 나이 32세이던 부르지이는 이를 받아 들여 미개척지로 인디언들이 사는 카나다로 건너갔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환자를 돌보고 자선 사업을 벌이기 시작한 그녀는 몇 년이 지난 후 마구간에서 ‘몬트리올’의 첫 학교를 개교했다. 그녀는 또한 인디언을 위한 학교 · 불우 청소년을 위한 훈련원 · 상인 자녀들 위한 기숙사 학교 등을 설립했으며 1658년 귀국했다.

귀국 후 동료들과 함께 노뜨르담 수녀회 설립자로 활약하던 그녀는 1700년 1월 12일 선종했다.

1666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난 자는 델라누에는 어린 시절에는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주의자로 성질도 괴팍했다. 어머니로부터 작은 가게를 돌려받은 그녀는 근처의 성모 성당에 순례자 유치 계획을 세워 돈 벌 궁리를 했다.

그러나 순례자들과 가까워지고 또 강론을 들으면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 그녀는 가난한 자를 돕겠다는 주님의 성소를 받고 즉시 내핍과 고행의 생활에 뛰어 들었다.

‘하느님 섭리의 집’으로 알려져 있는 그녀의 집에 1704년 수도회가 정식 설립됐다. 그녀는 또 ‘브레즈’와 ‘삐 · 노뜨르담’에 하느님 섭리의 집을 창설했고 집 없는 수천의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1736년 8월 17일 ‘소뮈르’에서 가난하게 일생을 마친 델라누에는 1947년 11월 9일 복녀품에 올랐다.
[가톨릭신문, 1982년 6월 13일]





 

 

 

 

 

 

 

 

 

 

 

 

 


 

 

 

 

 

 San Crispino (Pietro Fioretti) da Viterbo Religioso Cappuccino
19 maggio 
Viterbo, 13 novembre 1668 - Roma, 19 maggio 1750
 
 

Fratello laico cappuccino noto per le sue estasi contemplative e il suo amore per la natura.
E’ stato il primo santo canonizzato a Roma da Papa Giovanni Paolo II, il 20 giugno 1982.
Festa il 19 maggio.

Martirologio Romano: A Roma, san Crispino da Viterbo,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che, mentre viaggiava tra i villaggi montani per mendicare l’elemosina, insegnava ai contadini i rudimenti della fede. 


Crispino nacque a Viterbo, nella contrada detta del Bottarone, il 13 novembre 1668; fu battezzato il 15 dello stesso mese nella chiesa di S. Giovanni Battista con il nome di Pietro. Il padre Ubaldo Fioretti era un artigiano e aveva sposato Marzia (la mamma) già vedova e con una figlia. Pietro rimane orfano di padre in ancor età, e la mamma vedova per la seconda volta si sposa con il fratello di Ubaldo Francesco, un calzolaio a lui molto affezionato e che al nipotino fece frequentare le scuole dei gesuiti e che quindi accolse come apprendista nella sua bottega di calzolaio.

Pietro indossò l'abito cappuccino nel convento della Palanzana di Viterbo il 22 luglio 1693, festa di S. Maria Maddalena, assumendo il nome Crispino da Viterbo, dopo l'anno di noviziato, il 22 luglio 1694, fu trasferito a Tolfa, dove rimase tre anni, per qualche mese rimase a Roma e fino al 1703 dimorò ad Albano, da qui fu trasferito a Monterotondo dove rimase per oltre sei anni, fino 1709; da quest'anno e per quaranta anni rimase ad Orvieto, dove fu ortolano fino al gennaio de1 1710, e poi questuante.

Fra Crispino era veramente esigente con i religiosi, ma non era pessimista nei confronti dell'Ordine Cappuccino: reputava una grande grazia poter in esso servire Dio. Incontrando un fanciullo orvietano, Girolamo, figlio di Maddalena Rosati, gli prediceva che sarebbe stato cappuccino, cantarellandogli: "Senza pane e senza vino, fraticello di fra Crispino". Il ragazzo si fece frate col nome di Giacinto da Orvieto e mori ancor chierico a Palestrina, appena ventunenne, nel 1749.

Vi sono poi degli aforismi adatti all'indole di fra Crispino. Con essi egli scherza allegramente su fatti e situazioni spesso penosi, con un inesauribile senso di humour: Il droghiere orvietano Francesco Barbareschi, tormentato dalla podagra, era da fra Crispino invitato lepidamente "a prender l'asta d'Achille, cioè la vanga, e faticare nella villa Crispigniana, chiamando così il suo orticello, ove seminava l'insalata e piantava gli erbaggi per i benefattori". Bruciante come una frustata in faccia, la risposta data ad un altro che gli chiedeva di esser guarito dallo stesso male: "Il vostro male è più di chiragra che di podagra, perché... non pagate chi deve avere: li vostri operai e servitori piangono...". Alla principessa Barberini, che voleva veder guarito subito il figlio Carlo rispose: "Eh, non ti basta che guarisca nell'Anno Santo? ...Eh, che vuoi pigliare il Signore per la barba? Bisogna ricevere da Dio le grazie quando lui le vuol fare". A Cosimo Puerini, dispiacente di dare in elemosina una fiasca di vino buono, Crispino dice: "Eh, che vuoi fare il sacrificio di Caino?". Dopo che un cappuccino era scampato per miracolo alla morte nel tentativo di attraversare un fiume in piena, fra Crispino cantarellò: "Torbida si vede, torbida si lassa; son un gran matto, se si passa".
A fra Crispino capitava spesso di dover parlare di se agli altri, per aiutarli a farsi sul suo conto un'idea più rispondente alla realtà. Diceva spesso: "Sono peggiore dei merangoli, da' quali pure se ne ricava un poco di sugo, ma da me cosa vogliono ricavare?". Per sottrarsi a lodi ed ammirazione, fra Crispino ricorreva spesso ad immagini e similitudini. A chi gli diceva di non rovinare la minestra con l'assenzio rispondeva: "Ogni amaro tenetelo caro", oppure "Questo assenzio se non è secondo il gusto, è secondo lo spirito". A chi lo commiserava vedendolo camminare sotto la pioggia, diceva: "Amico, io cammino tra una goccia e l'altra", oppure tirava in ballo la sua "sibilla " che gli teneva "l'ombrella sopra il capo" o gli portava le pesanti bisacce.
Essendo andato a visitare il cardinale Filippo Antonio Gualtieri, questi gli chiese perché mai, per l'occasione, non avesse indossato un abito e un mantello un poco migliori. E Crispino rispose, allargando il mantello, che questo riluceva da tutte le parti, volendo significare che era logoro e sbucato. A chi si esaltava per i suoi miracoli, diceva: "Eh via, di che vi meravigliate? Non è già cosa nuova che Dio faccia miracoli"; "E non sai, amico, che san Francesco li sa fare i miracoli?". A Montefiascone, al popolo che gli tagliuzzava il mantello per farne reliquie, gridava: "Ma che fate, o povera gente! Quanto sarebbe meglio che tagliaste la coda ad un cane! Che siete matti? Tanto fracasso per un asino che passa! Andate in chiesa a pregare Iddio!". L'umile bestia da soma tornava spesso nei discorsi di fra Crispino. Un giorno disse al p. Giovanni Antonio: "Padre guardiano, fra Crispino è un asino, ma la capezza che lo guida sta nelle vostre mani; però, quando volete che vada o si fermi, tirategli o allentategli la capezza". Quando si faceva aiutare a porsi sulle spalle le bisacce, tutto allegro e gioviale egli diceva: "Carica l'asino e va alla fiera"; e a chi gli chiedeva perché mai non si coprisse il capo contro la pioggia o il sole, rispondeva: "Non sai che l'asino non porta il cappello? E che io sono l'asino dei cappuccini?". Ma alcune volte soggiungeva con serietà: "Sai perché non porto la testa coperta? Perché rifletto che sempre sto alla presenza di Dio".

Il peregrinare di fra Crispino per le campagne orvietane durò quasi quarant'anni, con due brevi interruzioni che lo portarono per alcuni mesi a Bassano e per altri a Roma. Lasciò definitivamente Orvieto il 13 maggio 17, diretto verso l'infermeria di Roma dove morì il 19 maggio 1750.

Fra Crispino fu beatificato il 7 settembre 1806 da papa Pio VII, canonizzato il 20 giugno 1982 da papa Giovanni Paolo II (è stato il primo santo canonizzato da questo papa).


Autore: Carmelo Rand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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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1-12-31

 

 

 




Saint Crispin of Viterbo
 
Also known as
 Crispinus of Viterbo
 Crispinus von Viterbo
 il Santorello
 Peter Fioretti
 Pietro Fioretti 
 

Memorial
19 May

Profile
Son of Ubald and Marsha. His father died when Pietro was very young, and his mother consecrated the boy to the Blessed Virgin Mary when he was five years old. Pietro developed an early devotion to Our Lady, calling her his other mother, and displayed such a simple and honest piety that led his neighbors to call him il Santorello (the little saint). He worked as a shoemaker for the uncle who provided for his education.

The sight of a procession of Friars Minor Capuchin woke within Pietro the realization that he was called to religious life. He became a Franciscan lay brother on 22 July 1693, taking the name Crispin because of his craft. Cook at the Viterbo Capuchin monastery. Transferred to, and worked tirelessly at, Capuchin houses in Tolfa, Rome, and Albano. He developed a devotion to, and modelled himself after, Saint Felix of Cantalice.

Crispin's simple, humble holiness brought many local lay people to him for spiritual guidance. As word of his wisdom spread, his visitors became priests, bishops, then cardinals, and even a pope. Crispin was noted for paying little attention to the rank or status of a visitor, either high or low, but concentrating on talking to them all as equal children of the same God.

Reputed to work miracles, heal by touch, and prophesy. The cause for his canonization began in 1923. He was the first Saint canonized by Pope John Paul II.
 

Born
13 November 1668 at Viterbo, Italy as Pietro Fioretti
Died
19 May 1750 of pneumonia at the fri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n Rome's Via Veneto; entombed under a side altar in the Capuchin church at Rome; body found incorrupt in 1959
Beatified
7 September 1806 by Pope Pius VII
Canonized
20 June 1982 by Pope John Paul II
 

Additional Information
 New Catholic Dictionary
 Be A Friar
 Capuchin Franciscans
 Capuchin Franciscan Friars of Australia
 Catholic Encyclopedia
 Catholic Online
 Franciscanos [español]
 Kirken i Norge [norwegian]
 For All the Saints by Katherine Rabenstein
 John Paul II's Book of Saints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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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Let us love God who deserves it!
- Saint Crispin 
 




DIRECTORIO FRANCISCANO
SANTORAL FRANCISC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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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de mayo
De San Crispín de Viterbo (1668-1750)
Un santo alegre

por Julio Micó, o.f.m.c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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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sar de que me consideran un santo alegre, la impresión que me queda de mi infancia es la muerte de mi padre, Ubaldo. Menos mal que mi tío Francisco -su hermano- me quería mucho y me envió, primero, a la escuela de los Jesuitas para que aprendiera gramática y, después, me acogió como aprendiz en su taller de zapatero, donde estuve hasta los 25 años en que me fui a los frailes.

Recuerdo que, de pequeño, me daba por ayudar misas y ayunar; y como era de natural delgaducho y enfermizo, mi tío solía decirle a mi madre: «Tú vales para criar pollos, pero no hijos. ¿No ves que el niño no crece porque no come?» Y en adelante él se encargaba de hacerme comer; pero al ver que seguía igual de pequeño y escuchimizado se dio por vencido y le dijo a mi madre: «Déjalo que haga lo que quiera, porque mejor será tener en casa un santo delgado que un pecador gordo».

Capuchino como San Félix

La gota que colmó el vaso para que me decidiera a hacerme Capuchino fue el ver a un grupo de novicios que había bajado a la iglesia con motivo de unas rogativas para pedir la lluvia; pero en realidad ya lo había pensado mucho y había leído y releído la Regla de San Francisco, por lo que mi opción era madura. Además no quería ser sacerdote, sino como San Félix de Cantalicio, hermano laico.

Inmediatamente me fui a hablar con el Provincial, quien me admitió en la Orden, pensando que ya estaba todo superado, pero no fue así. Los primeros que se opusieron fueron mis familiares, empezando por mi madre. La pobre ya era mayor y con una hija soltera a su cargo; además, no comprendía que, habiendo hecho los estudios con los Jesuitas, no quisiera ser sacerdote sino laico. Sin embargo, la decisión estaba tomada. Procuré que las atendieran unas personas del pueblo y me marché al noviciado.

Cual no sería mi sorpresa al comprobar que, a pesar de haberme admitido ya el Provincial, el maestro de novicios se negaba a recibirme. Ante mi insistencia me contestó: «Bueno, si al Provincial le compete el recibir a los novicios, a mí me toca probarlos».

Y bien que me probó. Lo primero que hizo fue darme una azada y enviarme al huerto a cavar mañana y tarde. En vista de que resistía, me mandó como ayudante del limosnero para que cargara con la alforja, a ver si aguantaba las caminatas bajo el sol y la lluvia. Y las aguanté. Por último, no se le ocurrió otra cosa que nombrarme enfermero para que atendiera a un fraile tuberculoso. Parece que no lo hice del todo mal, pues tanto el enfermo como el maestro de novicios se ufanaban, cuando ya eran viejos, de haberme tenido como enfermero y como novicio.

Una vez profesé me enviaron por distintos conventos, hasta que recalé en Orvieto. Allí estuve durante cuarenta años de limosnero; es decir, toda mi vida, pues sólo me llevaron a Roma para morir.

Durante los cincuenta años que estuve con los frailes hice de todo menos de zapatero, que era mi profesión. Fui cocinero, enfermero, hortelano y limosnero; y es que yo no era una bestia para estar en la sombra, sino al fuego y al sol; es decir, que debía estar o en la cocina o en la huerta. Sin embargo la mayoría de mi vida se quemó buscando comida para los frailes y atendiendo las necesidades de la gente.

Pidiendo pan y dando cariño

Lo primero que hacía antes de salir del convento era cantar el Ave, maris stella; después, rosario en mano, me dirigía a la limosna, que, de ordinario, solía hacer pronto. Para ahorrar tiempo le pedía antes al cocinero qué necesitaba, y así me limitaba a pedir solamente lo necesario.

Como había muchos pobres, procuraba dirigir las limosnas que sobraban a una casa del pueblo para que desde allí se redistribuyeran; así satisfacía la solidaridad de los pudientes y la necesidad de los pobres.

Tan convencido estaba de que gran parte de la miseria proviene de la injusticia, que no me podía contener ante los abusos de los patronos para con los trabajadores. Cuando alguno tenía que venir al convento procuraba que lo trataran bien, porque al trabajo hay que ir de buena gana.

Una vez que un defraudador me pidió que rogara por su salud, le contesté que cuando pagase lo que debía a sus acreedores y a su servidumbre entonces pediría a la Virgen que lo curara. Y es que me gustaba visitar a los enfermos y encarcelados; no sólo para darles buenos consejos sino para remediarles, en la medida de mis posibilidades, sus necesidades.

No sé por qué, la gente acudía a mí en busca de remedios y se iba con la sensación de que hacía milagros. Incluso me cortaban trozos del manto para hacerse reliquias; hasta que no pude más y les grité: «Pero ¿qué hacéis? Cuánto mejor sería que le cortaseis la cola a un perro.. . ¿Estáis locos? ¡Tanto alboroto por un asno que pasa!»

Sin embargo no todo era pedir limosna y atender a la gente. Esto era la consecuencia. Mi opción había sido seguir a Jesús y eso conlleva mucho tiempo de estar con él y aprender sus actitudes. Mi devoción a la Virgen me ayudó mucho. Me gustaba exteriorizar mis sentimientos para con ella adornando sus altares. Cuando estuve trabajando de hortelano coloqué una imagen de María en una pequeña cabaña. Delante de ella esparcía restos de semillas y migajas de pan para que se acercasen los pájaros, se alimentasen y cantasen, ya que hubiera querido que todas las criaturas del universo se juntasen para alabar en todo momento a la madre de Dios.

El reuma y la gota acabaron conmigo. Ya no podía casi andar y tuve que retirarme a la enfermería de Roma. Pero allí también la gente venía a buscarme. ¿Por qué la gente acudía a mí si no era ni santo ni profeta?

En el mes de mayo la enfermedad fue a más. Para no estropear la fiesta de San Félix le aseguré al enfermero que no me moriría ni el 17 ni el 18. Y, efectivamente, el Señor me escuchó y me llevó en su compañía el 19 de mayo de 1750.

[El Propagador de las Tres Avemarías
(Revista Mariana de los Capuchinos, Valencia), n. 818, mayo-junio de 1999, pp. 7-9]

 

 

 


St. Crispin of Viterbo, OFM Cap
(1668-1750)

His feast is celebrated on May 19. Peter Fioretti was born at Viterbo, Italy, on November 13, 1668. His father, Ubald, died when Peter was very young. The raising of the boy and his stepsister was left in the hands of his mother, Marsha, who had already been widowed once when she married Ubald. When Peter was five years old, his mother dedicated him to the Virgin Mary at the shrine of Our Lady of the Oaks near Viterbo. "Look," she told her son, "this is also your mother. I have made you a gift to her." Peter never forgot that experience, and throughout his life referred to Mary as his "momma." Since his mother could not afford to educate him, Peter's paternal uncle, Francis, provided for his schooling. After working as a cobbler for his uncle, the frail, lean 25-year-old Peter asked to join the Capuchins, desiring to imitate Felix of Cantalice.

The provincial minister, Angelo of Rieti, immediately accepted him for the novitiate. However, Peter met with opposition from his family, especially from his mother. Reminding her that she had already given him to the Virgin Mary, she consented to his going to "serve the Madonna." Having gotten to the novitiate, Peter also met with resistance from the novice director who, seeing how frail Peter appeared, advised him to return home. The novice director allowed him to remain as a guest while awaiting a decision from the provincial minister.

The provincial minister reminded the novice director that it was the provincial minister's prerogative to accept novices and the director's responsibility to discern the vocation of those accepted. Peter was received into the Roman Capuchin province on July 22, 1693, taking the name, Crispin (after the patron of cobblers). Despite his prior training as a cobbler, in all his 57 years as a Capuchin, Crispin was never assigned as cobbler for the friars. After professing vows on July 22, 1694, he was assigned to Tolfa, as cook for three years, and then passed through a series of assignments: infirmarian at Rome, cook at Albano, orchard keeper at Monterotondo, and finally, questor at Orvieto for 38 years.

Crispin knew everyone and everyone knew him, considering him a close personal friend. He possessed an amazing ability to integrate a life of feverish activity, on the one hand, with a solid interior life. Without concern for his own wellbeing, Crispin cared for those stricken during the epidemics at Farnese, Gallese and Bracciano. As questor, he begged for food, not only on behalf of his Capuchin brothers, but also to provide for all the needy of his "big Orvietan family." For the friars, he would only beg for necessities, nothing more.

Crispin accomplished a remarkable amount of good in the area of social and spiritual assistance, energetically ministering among the sick, the imprisoned, sinners, unwed mothers, families experiencing hardship and those on the brink of despair. He was a skilled peacemaker both within his own Capuchin community and with others. Before beginning any task, Crispin always prayed first to Mary, his mother. He possessed a contagious joviality and his ministry was marked by a profound sense of joy. Nothing escaped his notice, particularly in discerning what people really needed. Daily he visited the sick and local prisoners, pleading their cause, urging the guards to respect their human dignity, bringing them bread, chestnuts and tobacco, and arranging for families to take turns providing the prisoners with good, home cooked meals. Babies were often abandoned on the doorstep of the friary and then placed in the care of Our Lady of the Star Shelter. Crispin took a personal interest in these foundlings, arranging for their being apprenticed in one or the other trade, and keeping in touch with many of them well into their adult lives. Crispin was filled with intuition and insight which prompted many learned people to seek his counsel.

Crispin was convinced that much of human misery, both material and spiritual, was due to injustice. He therefore set about to confront social injustice by admonishing merchants, reminding people of workers' rights, and asking forgiveness of debts whenever possible. He used his sense of humor to lighten people's burdens. Every little occurrence found its way quickly to Crispin's ears. Without hesitation, he would offer himself as a mediator, friend, and counselor. Nonetheless, he was not without his critics and crosses, both within and outside the friary. Some called him opinionated and aggressive; others, a hypocrite. Some friars expected Crispin to make their life easier. When their expectations were not met, they became embittered. Besides many letters, Crispin left a treasury of maxims, among them, "One doesn't get to heaven in a taxi."

During the winter of 1747-48, Crispin fell gravely ill and was transferred to the provincial infirmary at Rome. Recovery was but temporary, and on May 19, 1750, the 82-year-old Crispin died of pneumonia at the Friar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located near the Piazza Barberini on Rome's famous via Veneto. Among the many sayings attributed to him was the exhortation, "Let us love God who deserves it!"

Beatified by Pius VII on September 7, 1806, Crispin was canonized by Pope John Paul II on June 20, 1982.

 .

 
Den hellige Crispin av Viterbo (1668-1750)

Minnedag: 19. mai

 Den hellige Crispin (lat: Crispinus) ble født som Peter Fioretti (it: Pietro) den 13. november 1668 i Viterbo i Lazio i Italia. Han kom fra en fattig, men svært from familie og var sønn av Ubaldo Fioretti og Marzia Antoni. Han ble døpt den 15. november og fikk en svært from oppdragelse. Hans far døde tidlig, og moren ble da enke for andre gang og måtte oppdra sønnen og hans stesøster alene.

Da han var fem år gammel, tok hans fromme mor ham med til Maria-helligdomen Vår Frue av eikene like ved Viterbo, og der viet hun ham til Guds mor og satte ham under hennes spesielle beskyttelse. Han fikk dermed tidlig stor ærefrykt for Jomfru Maria. Til tross for svak helse påla han seg tidlig harde botsøvelser med det mål å bli fullstendig forbundet med Gud og leve et liv viet til Gud. Hans enkle og oppriktige fromhet gjorde at naboene kalte ham il Santorello (den lille helgenen).

Peter fikk sin skolegang i jesuittenes kollegium og ble satt i lære hos onkelen Frans Fioretti, som var skomaker. Etter læretiden var han svenn hos onkelen. En dag han så kapusinernoviser som gikk i prosesjon, inspirerte Gud ham til å gå i kloster. I en alder av 25 år trådte han den 22. juli 1693 inn som legbror i kapusinerordenen (Ordo Fratrum Minorum Capuccinorum - OFMCap) i Viterbo. Som ordensnavn valgte han Crispin, skytshelgen for skomakere. Hans novisiat var i Paranza, hvor han virket for liten og sart til å overleve det strenge regimet. Protestene ble overhørt og han fikk avlegge løftene etter ett års novisiat den 22. juli 1694. Han var gartner i Viterbo, kokk i Tolfa ved Orvieto og arbeidet noen ganger som på sykestuen med en viss suksess. Men han arbeidet aldri som skomaker, det faget han hadde lært.

 Crispin ble flyttet til flere klostre som Roma, Albano, Tolfa og Bracciano. Overalt utførte han sin tjeneste med ekte fransiskansk munterhet. Han skal ha foretatt mange mirakuløse helbredelser under epidemier i Tolfa og Bracciano. Da han ble overført til Orvieto, ble han utnevnt til questor, embetet med å tigge almisser fra de troende. Han var så elsket av folket at da en annen ble utnevnt i hans sted, nektet husmødrene å motta ham. Guardianen i den sultende kommuniteten ble tvunget til å gjenoppnevne Crispin til oppgaven, som han hadde i til sammen 38 år.

Crispin utmerket seg gjennom hjelpsomhet, munterhet og en forkjærlighet for poesi, dessuten var han svært from og skal ha utført tallrike undere, blant annet mangfoldiggjøring av mat. Han hadde også profetiske evner og var berømt for sine kloke utsagn. Mange av tidens personligheter oppsøkte den begavede rådgiveren. Han offentliggjorde flere skrifter som fortsatt er bevart. Han elsket å kalle seg selv «kapusinernes lille lastedyr». Han var også kjent for å ha lært troens grunnsetninger til fjellbøndene i løpet av sitt arbeid.

Fra 1748 tilbrakte Crispin sine siste år i Roma, utslitt og trett etter de mange anstrengende oppgavene, tiggereisene og alle forpliktelsene. Der døde han den 19. mai 1750 av lungebetennelse i en alder av 82 år. Hans påkledde skjelett ligger i en glassarkofag i venstre sidealter i kapusinerkirken Santa Maria della Concezione de Cappuccini ved Via Veneto i Roma, tvers overfor den andre hellige kapusinerlegbroren, den hellige Felix av Cantalice («Broder Deogratias»).

Crispin ble saligkåret den 7. september 1806 (dokumentet (Breve) var datert den 26. august) av pave Pius VII (1800-23). Hans helligkåringsprosess ble innledet i 1923, og han ble helligkåret den 20. juni 1982 av pave Johannes Paul II i Peterskirken i Roma. Det var den første helligkåringen i dette pontifikatet. Hans minnedag er dødsdagen 19. mai, men 21. mai nevnes også.

Kilder: Attwater/Cumming, Butler (V), Benedictines, Delaney, Bunson, Schauber/Schindler, Holböck (1), Index99, KIR, CE, CSO, Patron Saints SQPN, Bautz, Heiligenlexikon, vatican.va, beafriar.com, capuchinfriars.org.au - Kompilasjon og oversettelse: p. Per Einar Odden - Sist oppdatert: 2003-06-1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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