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골 자유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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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근 [bosco99] 쪽지 캡슐

2000-05-28 ㅣ No.770

피로 물들인 석가탄신일 (21일)

 

 

 

수요일 밤은 미사가 있는 날이다. 그러나 오늘밤은 틀렸다. 어떻게 할까 기다려 보자. 어젯밤 악몽 때문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 전화벨이 울리고 남 신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 신부들도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느냐. 호남동 성당에서 모이자"는 내용이었다. 남 신부는 지난 19일(월) 농민회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남아 있던 무안 본당의 젊은 신부였다. 그런데 머리가 깨어지는 것같이 아프고 잠이 쏟아진다. 얄미울 정도로 몰려오는 잠을 이길 수 없다. "아 곧 가겠소. 조금 쉬고 갈테니 먼저 가시오..."가 전화가 갑자기 끊어진다. 노해서 끊는 것일까? 도청장치에 의해 끊겼을까. 얼마나 지났을까. 오전 11시다.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헐적으로 도청쪽에서 총성이 들려 왔다. 죽어도 가야 한다. 시위대원이 탄 각종 차량이 때때로 시내를 질주한다. 주의깊게 집을 나왔다.

 

 

 

시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청 앞을 향하고 있었으며,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도청으로 향했다. 100m 전방이나 될까 전봇대 같은 나무가 타다 남아 있었으며, 차가 왕래하지 못하게 장애물이 세워져 있었다. 흑색 자가용차에 탄 시위대가 달려 왔다가는 또 돌아간다. 도청 앞 세 갈래길 모퉁이에 방독 마스크를 착용한 계엄군과 전투경찰관이 피로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으며, 가운데는 서 있는 자도 보인다.

 

 

 

충장로에 발을 들여 놓았다. 숨이 가빠졌으며, 다음에는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면서 눈을 뜰 수 없었다. 헬리콥터에서 약을 살포한 모양이다. 눈물을 닦으며 호남동에 닿았다. 신부 4-5명이 모여 있었다. 안면 있는 신도들도 모여서 책망을 한다. 이런 곤란한 시기에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민중의 지도자로서 신부들이 앞장서줘야 하지 않느냐. 한시라도 대주교님을 모시고 프랑카드를 선두로 수습에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부끄러운 일이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그러나 이 중대사태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무나 무기력하고 초라한 나 자신을 돌아다본다. 광주 시내에 있는 한국인 신부 전부를 모아도 9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본당과 각 센터에 분산되어 있어 위험이 가득찬 시가를 빠져 나와야 한다.

 

 

 

오후 2시경이 되어서 겨우 모인 신부는 8명이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의견을 교환한다. 결국 태극기를 선두에 프랑카드를 들고 장백의를 입고 데모를 하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장백의는 세 벌밖에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프랑카드 준비가 되었다. 수녀원에 가서 대주교님을 모시고 초라한 행렬이라도 결행해야 한다. 하나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합시다.' 또 하나는 '계엄 철폐, 민주 인사 석방' 이라고 썼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총성이 하늘을 찢어 댔다. 헬리콥터로부터도 사격해 온다. 아래에서도 헬리콥터를 향하여 총을 쏘는 것 같다.

 

 

 

5분이나 지났을까 여교우 한 사람이 새파랗게 질려서 달여들어 왔다. 방금 학생 하나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내장이 튀어나와 피투성이가 되어서 적십자병원에 운반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있다 또 남교우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무차별 사격으로 총탄에 맞은 학생 10명을 적십자병원에서 확인했다는 것이다.

 

 

 

20분 정도 지나서 박 신부가 들어왔다. 센터에 가려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도중 개인병원에 운반되는 3명의 학생을 보았는데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피로 물들인 석가 탄생의 날, 살생을 단죄한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무자비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니 어찌된 일인가. 자위권마저 포기하고 발포하지 않았다는 계엄사령부의 허위보도는 어느 외신가자가 말하는 것같이 '한국'은 몰라도 광주의 80만 시민은 알고 있다.

 

 

 

총성은 멎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의인의 피가 흘렸을 것인가. 자유를 위하여, 짓밟힌 인권을 도로 찾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려졌을 것인가. 회한과 분노, 걷잡을 수 없는 가슴의 아픔을 안고 본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후 5시 아직도 총성이 들리는 뒷골목 길을 통하여 본당에 돌아왔다. 하늘도 우리들의 피맺힌 슬픔을 알았는지 빗방울이 내렸다.

 

 

 

본당에 들어오자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YMCA 형제 자매와 민주인사들이 나를 맞이하여 주었다. 하늘에서도 펑펑 눈물을 쏟아 주었다. 민주 인사들이 모일 수가 없다. 안타까운 심정이다. 내일을 약속하고 헤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방에 돌아오자 이제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이얼을 돌렸다. 광주의 3대 악인 주의 한 사람인 박철웅 조선대학교 총장에게 집을 빼앗기고 이미 수년간 천막에서 지내고 있는 노엘라 자매의 아들이 도청 앞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인하여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기독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나 위독하기 때문에 병자성사를 해 달라는 것이다. 3일전 직장이 있는 부산에서 돌아와 오늘 도청 앞에 갔다가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총탄에 맞았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말을 잊었다. 계엄사령부 허위보도로 그늘에서 죽어가는 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피로 물들인 석가탄신일.

 

 

 

(내일 계속 이어집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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