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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6일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복자 아니체토와 동료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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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20 ㅣ No.2079

 

축일 6월16일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복자 아니체토와 동료 순교자들
    
나치 홀로코스트의 무수한 희생자들 가운데 순교한 5명의 카푸친 형제들,

Beati Cinque Frati Cappuccini Martiri Polacchi
Senza Data (Celebrazioni singole)    m. 1941/42
Fu beatificato da Giovanni Paolo II il 13 giugno 1999.

- Anicet Wojciech Koplinski, Sacerdote, 16 ottobre 1941
- Florian Jozef Stepniak, Sacerdote, 12 agosto 1942
- Henryk Jozef Krzysztofik, Sacerdote, 4 agosto 1942
- Fidelis Jerome Chojnacki, Religioso, 9 luglio 1942
- Symforian Feliks Ducki, Religioso, 11 aprile 1942




바르샤바의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복자 아니체토 사제 순교자
Beato Aniceto Adalberto (Anicet Wojciech) Koplinski cappuccino
Debrzyno, Polonia, 30 luglio 1875 - Auschwitz, Polonia, 16 ottobre 1941
Blessed Anicet Koplinski
 
Died : martyred on 16 October 1941 at the Auschwitz, Poland concentration camp
V
enerated : 26 March 1999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 : 13 June 1999 by Pope John Paul II at Warsaw, Poland



"수용소의 햇볕"
짜리의 복자 플로리아노 사제 순교자
Beato Floriano Giuseppe (Florian Jozef) Stepniak Sacerdote e martire
Zdzary, 3 gennaio 1912 - Linz (Austria), 12 agosto 1942




순교한 카푸친 지식인
자허르주프의 복자 헨리코 사제 순교자
Beato Enrico Giuseppe (Henryk Jozef) Krzysztofik Sacerdote e martire
Zachorzew, Polonia, 22 marzo 1908 – Dachau, Germania, 4 agosto 1942



죽음 자매와 화해하게 된 쾌활한 카푸친 학생 운동가
우치의 복자 피델리스 평형제 순교자
Beato Fedele Gerolamo (Fidelis Jerome) Chojnacki Religioso e martire 
Lòd, Polonia, 1° novembre 1906 – Dachau, Germania, 9 luglio 1942
Blessed Fidelis Jerome Chojnacki
Also known as :  Jerome Spurinska,  prisoner 22473
Born : 1 November 1906 at Lodz, Poland as Jerome Spurinska
Died :  martyred on 9 July 1942 at the Dachau concentration camp due to assorted abuse
 body burned in the camp's crematorium ovens
Venerated : 26 March 1999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 : 13 June 1999 by Pope John Paul II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강복해 준 평형제!
바르샤바의 복자 심포리아노 평형제 순교자
Beato Sinforiano Felice (Symforian Feliks) Ducki Religioso e martire
Varsavia, Polonia, 10 maggio 1888 – Auschwitz, Polonia, 11 aprile 1942 
Blessed Symforian Ducki
Also known as : Felix Ducki
Memorial : 11 April, 12 June as one of the 108 Martyrs of World War II
Born : 10 May 1888 in Warsaw, Poland as Felix Ducki
Died : 11 April 1942 at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in modern Poland)
Venerable : 26 March 1999 by Pope John Paul II (decree of martyrdom)
Beatified : 13 June 1999 by Pope John Paul II



 

 

최종적 해결책
운터멘셴! 나치주의의 이론가들은 유대인들과 집시들과 폴란드인들, 그리고 러시아인들 벨로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과 같은 다른 슬라브 민족들을 구분하고, 궁극적으로 몰살시키기 위해 ‘운터멘셴(열등 인간들이나 인간 이하의 것들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의 ‘Untermenschen’의 음역인)‘이란 용어를 사용하곤 했다. 나치들의 선전에서는 그러한 인종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든지 비방을 받게 했으며, 다음과 같은 주장이 펼쳐졌다. “열등 인간은 비록 인간과 비슷한 생김생김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동물보다도 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등급이 낮다. 그 생물 안에는 사납고 억제되지 않은 욕정들, 그리고 끊임없이 파괴하고픈 마음과 원시적인 욕망들과 혼란과 냉담한 악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열등 인간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실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라고 모두 그런 것은 어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비극적으로도 이 내용은 단지 말로써만 그치지 않았던, 인류 역사 상으로 전무후무할 정도의 흉포함과 냉혹한 효율성으로 실제로 시행되었던 그 흉계를 표현한 말이었다. 이것의 결과는 쇼아(Shoah), 즉 홀로코스트였는데, 그 홀로코스트로 인해 천백만 명 이상이 그들의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잃었고, 억류되고, 노예가 되고, 실험 대상도 되었으며, 나치들이 점령한 유럽과 특히 독일군에게 점령된 폴란드에 산재된 강제수용소와 몰살수용소들에서 일제히 전멸되었다. 그들의 소유물과 옷, 금니 보철물들과 장기들은 상품으로 재활용되거나 재사용되었다. 또 나치들은 그들의 이름들에 대한 기억조차 말살시키는 데에 최대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누구보다도 유대인들이 그 대상이어서 10년 이내에 600만 여 명의 유대인이 몰살을 당했다. 그리고 나치들 제삼제국(das Drittes Reich, 나치들의 통치하의 독일을 이르던 말) 범위 밖에 사는 유럽의 나머지 유대인들까지 쫓아가서 몰살시킬 계획이 이미 서 있었다. 나치들의 보기에 유대인들은 해충에 불과했다,

아우슈비츠의 몰살수용소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최종적 해결책’의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나치들의 행위는 하느님에 대한 증오심과 인간의 힘을 드높이고자 하는 열망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모든 유대인들이 하느님과 그분의 율법의 살아있는 증인들이므로 홀로코스트는 그 하느님과 그 율법에 대한 증거를 없애는 수단이라고 추정했다. 유대인들은 제거 대상인 이른바 주된 ‘운터멘셴’ 혹은 ‘열등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이 유일한 ‘운터멘셴’이나 ‘열등 인간’이 아니었다. 사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집시들도 열등 인간의 분류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유럽 전역의 집시들 중 수백만 명이 일제히 포박되어 고문을 당하고 무의미한 과학적, 의학적 실험들의 실험 대상으로 이용된 다음 전멸을 당했다. 또 폴란드 사람들과 그 밖의 다수 슬라브 민족들이 장기적으로는 전멸되도록 운명이 지어졌지만, 단기적으로는 새 독일 제국을 위해서 충분한 노동력의 공급을 보장해주기 위해 독일 지배민족(Herrenvolk)의 노예들이 될 운명이었다. 오직 지속적인 노예 노동력을 보장해 주는 폴란드인들에게만 아이를 가질 허락이 주어졌고,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최소한의 폴란드 민족주체성과 인간적 존엄성의 흔적마저 상실되면서 죽기까지 일만 했어야했다.

독일인들은 가톨릭교회가 모든 어려움과 억압받음 가운데에서 폴란드 민족의 민족성과 종교심을 이어갔다는 것을 알고서는 무엇보다도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다. 성당과 신학교들, 수도승원과 수도원들이 폐쇄되었고, 수천 명의 사제들과 수사들과 수녀들이 살해되었고 수감되었으며 추방당했다. 1939년과 1945년 사이, 폴란드 성직자들 중 18퍼센트가 살해되었다. 1999년 6월 13일, 그 희생자들 중 101위의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폴란드 동포인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순교자로 시복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신학생으로서 그 자신도 무신론적 나치주의의 모든 참상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었다. 시복된 순교자들 중에 5명은 카푸친 형제들이었다. 이들은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복자 아니체토, 짜리의 복자 플로리아노, 자허르주프의 복자 헨리코, 우치의 복자 피델리스, 바르샤바의 복자 심포리아노이다.

  

바르샤바의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복자 아니체토
Beato Aniceto Adalberto (Anicet Wojciech) Koplinski cappuccino
Debrzyno, Polonia, 30 luglio 1875 - Auschwitz, Polonia, 16 ottobre 1941


순교자가 된 근육질의 아마추어 선수
자정 때에 거행되곤 한 조과(지금의 철야기도나 독서기도)의 전 후, 카푸친 수련자였던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Preußisch-Friedland)의 아니체토 형제(별칭은 데브르즈노(Debrzno)의 아니체토 형제)는 자신의 방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역도에 전념하곤 했다. 젊었을 때부터 운동 애호가였던 그는 체력 관리를 잘 했고, 실제로 상당한 근육질의 남자가 되어, 자신의 보디빌딩 기량으로 자주 동료 형제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혹은 자선사업을 위해 돈을 모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가구뿐만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완전히 다 자란 성인인 남자를 머리위로 들어올리기도 했다.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는 어느 경찰이 있었는데, 그는 반복되는 자신의 죄를 아니체토 형제에게 여러 차례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학대하는 자신의 버릇을 고치고자 하는 노력을 성실히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 날 하루, 몹시 짜증이 난 그 카푸친은 그 고해자를 제의실로 끌고 가 바지 허리띠를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보이세요? 당신이 계속해서 폭력을 휘두르면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어떻게 하실 것 같으세요?” 말할 필요 없이, 공포에 질린 그 경찰은 곧바로 자신의 행실을 고칠 줄을 배우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나치들의 폴란드 침략 후, 역도를 즐겨하는 반 독일인이면서 반 폴란드 사람인 이 카푸친 형제는 폴란드의 오시비엥침(Oświęcim) 마을에 위치한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순교의 십자가를 견뎌내는 데에 자신의 모든 육신적, 정신적, 영신적 힘을 집중시켜야 했다.



민족적 도가니의 결과물
(도가니 – Melting Pot, 인종 문화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융합 동화되는 현상)
성이 폴란드어로는 코플린스키(Kopliński)이며 독일어로는 고플린(Koplin)이었던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아니체토 형제는 1875년 7월 30일 서프로이센에 위치한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현 데브르즈노)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은 독일 제국 속지(屬地)였으나 지금은 폴란드 영토이다. 그는 독일 국적을 가진 폴란드 사람이었던 라우렌시오 코플린과 독일 사람이었던 그의 아내 베르타 몰하우젠(Molhausen)의 12명의 자녀 중 막내였다. 세례 때에 폴란드 이름 ‘보이쪠크(Wojciech)’의 독일어식 표현인 ‘아달베르토(독어로 Adalbert, 아달베르트)’라는 본명을 받았다. 독일 문화와 폴란드 문화로 된 ‘이문화주의(二文化主義)’는 아달베르토 코플린의 고향뿐만 아니라 가정환경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였고, 또 향후 그의 봉사직무와 박해와 선종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였다. 그가 어렸을 때에 그의 고향에서는 독일 출신의 소수민족과 폴란드 출신의 다수민족의 관계가 비교적 좋았는데, 그것은 주로 양쪽 민족의 공통적인 가톨릭 신앙 덕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베르토라고 불렸던 아달베르토는 경제적으로 힘든 형편에서 자라났고, 저임금 노동자였던 아버지 라우렌시오의 박봉에 의지하는 그의 가족은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카푸친으로서 초기 시절
아달베르트 코플린은 자라나면서, 그 지역 내 카푸친들의 사회복지 활동과 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그들의 사목을 직접 알게 되었다. 그리고 1893년 11월 23일, 그는 스스로 알자스(Alsace), 지골즈하임(Sigolsheim)에 위치한 카푸친 수도회, 라인베스트팔렌(Rhein-Westfalen) 관구(현재 통합된 독일 관구에 소속된) 수련소에 입회했다. 그에게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아니체토 형제’라는 수도명을 주어졌다. 1894년 11월 24일, 아니체토 형제는 유기 서약을 했고, 5년 후, 1897년 11월 24일 종신 서약을 했다. 1900년 8월 15일,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다. 

물질적이며 영적인 가난을 덜어주는 일
아니체토 형제의 첫 사도직은 독일 남서부에 있는 디부르크(Dieburg)의 노동자들에 대한 봉사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북부에 위치한 루르(Ruhr)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봉사하였다. 그가 봉사해 주었던 대부분 사람들은 폴란드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었고, 아니체토 형제의 반 폴란드인의 혈통과 노동자 계층의 그의 가족 배경은 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폴란드 말을 배우고 싶다는 다소 비성과적인 그의 의향 또한 도움이 되었다. 사실, 아니체토 형제의 폴란드 아주 초보적인 말 실력 때문에 그는 폴란드 말로 설교할 부탁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롭게 독립을 되찾은 폴란드 국가의 국민들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이바지하는 카푸친들 형제들을 돕기 위하여 그는 바르샤바로 이동되었다. 매일 그는 바르샤비의 도시 거리를 누비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음식과 다른 생활필수품들을 구걸했다. 그는 부자들에게는 그들의 여유 물품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도록 권했고, 역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자들과 또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무거운 꾸러미를 어때에 지고 나르거나 빵과 소세지, 과일과 채소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사탕 같은 음식이 가득 찬 여행 가방을 끄는 모습이 거리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그는 또한 수많은 장례식을 거행했고, 특히 죽은 친척을 매장할만한 재력이 없는 가족들을 직접 도와주기도 했다. 그 외, 그의 다른 봉사 직무는 고해사제의 사도직이었는데, 매일 3시간이나 3시간 이상 동안 고해성사를 주곤 했다. 그는 인기가 좋은 사제여서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은 그의 고해실 앞에 줄지어 섰다. 대주교 추기경을 포함한 사제들과 주교들, 그리고 향후 교황이 될 아킬레스 라티 주 폴란드의 교황청 대사도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곤 했다. 그가 그들에게 준 보속은 보통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선행의 실천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추기경에게 보속으로 어느 가난한 가정에 겨울 내내 사용할 만한 석탄 짐을 공급하라고 했다!



“히틀러가 해 온 것을 보면 내가 독일인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폴란드 국민과 그들의 소박한 가톨릭 신앙에 대한 아니체토 형제의 사랑은 어쨌든 그가 지닌 독일에 대한 애국심을 절대 식히지 못했다. 제1차 대전 동안, 그는 독일의 전쟁 노력을 기리는 시조를 쓴 적도 있었다. 히틀러의 정책들로 인해 독일인들에 대한 평판이 몹시 나빠지고 있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독일 국적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치주의를 매우 경멸했고, 독일의 폴란드 침략과 그 침략에 따른 결과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히틀러가 해 온 것을 보면 내가 독일인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하고 말했다. 당시 폴란드의 사람들은 이미 아니체토 형제를 자국의 시민으로 삼은 상태였고, “코플린”리는 그의 성조차 “코플린스키”로 바꾸기도 했다. 그는 곧 바르샤바의 나치 점령군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점령당한 폴란드의 시민들과 특히 유대인들에게 대한 그의 무분별한 도움은 나치들에게 용납할 수 없는 배반 행위였다. 1941년 6월, 아니체토 형제와 20명의 동료 카푸친들이 체포되어 파비아크(Pawiak)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형제들은 머리와 수염이 깎였고, 수도복 대신 죄수복을 입어야 했다. 당분간 그들에게 성무일도서를 지킬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들이 체포된 이유는 나치주의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의 팸플릿들을 읽었다는 혐의였다. 아니체토 형제가 독일 국적을 가졌다고 호소했다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론 그는 이러한 법률적 구멍을 이용하지 않았다. 심문관들은 강제 자백을 받아내려고 아니체토 형제와 그 형제회의 수호자를 고문했지만, 그들을 음모에 연루시키려는 노력은 모두 다 헛수고였다.



우리는 이 성작 맨 바닥까지 마셔야 합니다.”
9월 초, 형제들은 가축 운반용 차에 실려 아우슈비치 수용소로 호송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죄수 번호를 낙인 받았으며, 모든 수감자들이 다 입어야 했던 그 악명 높은 줄무늬 죄수복이 그들에게도 지급되었다. 66세가 된 아니체토 형제는 너무 약해 일을 할 수 없는 자로 여겨져 병약자용 건물로 배치되었다. 그 후 5주 동안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과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모욕을 견뎌야 했는데, 그는 전적으로 침묵의 기도에 전력을 다했다. 사형당하기 전, 그가 어느 친구에게 “우리는 이 성작 맨 바닥까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듯이, 그는 실제로 주님 수난의 잔을 끝까지 마시게 되었다. 1941년 10월 16일, 간수들이 개최한 모의재판 후, 그는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구덩이에 던져졌고 생석회로 덮여졌다. 생석회는 살아있는 몸의 살을 부식시키는 산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다른 점에서 보면,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복자 안체토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자기 자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다. 순교의 영관을 얻었던 그의 자헌적인 사랑은 독일 사람들과 폴란드 사람들 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간, 천주교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 간, 그리고 빈부 간의 차이를 화해시키는 데에 이바지하고 싶어 하는 그의 숙망(宿望)의 표현이었다.

 

“나는 사제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든 폴란드인들이든, 그리고 특히 그들이 고통을 받거나 가난한 사람들이라면, 나는 그 사제직을 수행할 것입니다.”-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의 복자 아니체토



  

 


"수용소의 햇볕"
짜리의 복자 플로리아노
Beato Floriano Giuseppe (Florian Jozef) Stepniak Sacerdote e martire
Zdzary, 3 gennaio 1912 - Linz (Austria), 12 agosto 1942


사형수 수감건물의 영성동반 신부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 테살리니카서 2,8 참조). 이는 짜리(Zdzary)의 폴로리아노 형제가 1938년에 자신의 사제서품 기념카드에 자필로 쓴 성경기반의 정념(情念)이다. 2년이 채 되기도 전에, 즉 1940년 1월 25일, 좌우명이 된 그 성경 말씀은 극적으로 새롭고도 개인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바로 그 날짜에 독일 점령군의 게슈타포 경찰이 루블린(Lublin) 동료형제들과 그를 체포하여 루블린 성에 수감했던 것이다. 그 체포는 플로리아노 형제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의 타고난 낙천주의와 쾌활함은 그리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1940년 6월, 그가 베를린 근처에 위치한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을 때, 그 곳에서 맞닥뜨린 그 열악한 상황을 무릅쓰고서도 그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1940년 12월 14일, 그는 뮌헨 근교에 위치한 다하우(Dachau) 소용소로 다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사목적 배려와 쾌활한 기질은 동료 수감자들로 하여금 그를 사형수 수감 건물의 “영성지도자 신부”, “수용소의 햇볕”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1942년 이른 8월 혹은 늦여름 무렵, 플로리아노 형제는 최후의 순간까지 동료 재소자들을 한결같이 위로하며 가스실에서 제거됨으로써, 자신의 사제수품 때에 했었던 그 다짐에 함축된 모든 의미를 실현하게 되었다.



카푸친 수도복을 입게 된 폴란드 농부의 아들
약 30년 전인 1912년 1 월 3일, 짜리의 폴로리아노 형제는 폴란드, 노베 먀스토(Nove Miasto)의 근교 ‘짜리’라는 마을에서 요셉 스테프니아크(Stepniak)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바오로 스테프니아크와 안나 미슈탈(Misztal)은 농부였다. 그들은 갓난아기가 태어난 바로 그 다음 날 세례를 받게 했다. 요셉이 아직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였을 때, 그의 어머니는 요절했으며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짜리에서 초등교육 과정을 밟고 난 요셉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고, 노베 먀스토에 위치한 카푸친 중고등학교에 등록한 후, 1927년에 그는 롬자(Lomza)에 위치한 성 피델리스의 카푸친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실력은 보통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이를 보충했다. 한 명의 동기생은 요셉이 학교 친구들에게 준 인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했다. “거룩한 영혼으로서, 그는 믿음직하고 숨김없었으며 기쁨이 가득했는데 공상에 잠겨있는 나머지 우리들과는 이미 약간 달랐습니다.” 그는 학창시절 동안에 성 프란치스코의 재속 삼회 (현재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었는데, 당시 카푸친회 지망자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1931년 8월 14일, 그는 노베 먀스토 수련원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해, 수도복을 받으면서 또한 ‘플로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수련자로서 그는 열성과 너그러움과 신심으로 유명했다. 1932년 8월 15일, 그는 유기서원을 발원했고, 철학과목을 이수한 후 1935년 8월 15일에 종신 서약을 했다. 이어서 루블린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938년 6월 24일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단기간의 강렬한 사제직 활동
서품 후에 그는 성경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루블린 가톨릭 대학교의 신학학부로 보내졌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따른 그 위태로운 여러 날들과 여러 달 동안,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형제회를 포기하고 떠나지 않고 루블린에 머물렀다. 박해 때문에 많은 사제들은 피신해버렸기 때문에 죽은 이들의 장례식을 거행할 성직자가 없었다. 플로리아노 형제는 대단한 용기로 몸소 이 임무를 맡았다.

체포, 투옥, 순교
1940 1월 25일, 게슈타포는 폴로리아노 형제와 수많은 동료 형제들을 체포해 루블린 성에 수감했다. 그 체포는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그의 낙천주의와 쾌활함은 그리 쉽게 극복될 것이 아니었다. 같은 해 여름, 그는 독일 동부에 위치한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6개월 후 1940년 12월 18일, 그는 독일 남부의 뮌헨 근처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수형번호 22,738번을 받았다. 그는 원래 건강하고 기골이 장대해서 식욕이 다른 이들보다 왕성했지만, 추위의 영향으로 그의 육신건강 상태는 점차 나빠졌다. 사실,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제도 때문에 가장 튼튼한 재소자들조차도 결국 무릎을 꿇기 십상이었고, 1942년 여름, 플로리아노 형제마저 병이 들어서 이른바 “추월 차선”이라고들 불렀던 수용소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일할 수 없는 사람들과 병자들은 “보다 나은 환경”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압송되었는데, 플뢰아노 형제도 그들 중에 포함되어 되었다. 몇 주 후, 기아식과 같은 배급식량을 받으며 병원에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퇴원할 수 있는 정도로 충분히 회복했다. 하지만 그는 원래 수감되었던 건물로 되돌려 보내지지 않았다. 오히려 회복기 환자로서, 1942년 8월 12일 그는 병약자 분관인 29호 건물로 옮겨졌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그 이름을 아시는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악명이 높은 그곳 수용소 가스실에서 몰살되었다.

끝까지 쾌활하고 애덕이 높은 이
수용소 동료였던 카에타노 형제는 플로리아노 형제가 지상 인생의 말기를 맞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상기했다. “그 병약자 건물에서 겨우 나온 몇몇 사제 친구들은 플로리아노 스테프니아크 형제가 그 비참한 막사 건물을 밝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억류된 이들은 모두 사형당할 운명이었습니다. 고생으로 인해 그들은 한 다스(12명)씩 죽어 나갔고, 무수한 또 다른 이들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떼 지어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뮌헨 근처의 가스실에서 제거되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수용소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구도, 죽음의 바다에 빠져진, 피골이 상접한 병약자 건물의 그 사람들에게 위로의 겸손한 말씀 한 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스스로 똑같은 극단에 처하게 된 어느 카푸친의 한 사람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것입니다.” 프로리아노 형제를 죽인 다음, 수용소 당국은 그의 부모에게 아들이 협심증으로 사망했다는 메모와 함께 그의 수도복을 다시 돌려보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짜리의 복자 플로리아노

 



순교한 카푸친 지식인
자허르주프의 복자 헨리코

Beato Enrico Giuseppe (Henryk Jozef) Krzysztofik Sacerdote e martire
Zachorzew, Polonia, 22 marzo 1908 – Dachau, Germania, 4 agosto 1942

국내외 공부
‘요셉 크르지스토비크’라는 세속명을 가지고 있었던 자허르주프의 복자 헨리코는 1908년 3월 22일에 태어났고, 1908년 4월 18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초등교육의 과정을 이수한 다음 그는 2년 동안에 롬자에 위치한 성 피델리스의 카푸친 소신학교에 다녔고, 바르샤바 카푸친회에 합류했다. 1927년 8월 14일, 그는 노배 먀스토의 카푸친 수련원에서 수도복을 받아 입었고, 자허르주프의 헨리코 형제라는 수도명이 주어졌다. 1년 후 1928년 8월 15일, 그는 유기서원을 발원했다. 그러고 난 뒤, 그는 브르스트-에이즈덴(Breust-Eysden)에 위치한, 파리 카푸친 관구에 소속된 네덜란드 형제회로 보내졌다. 이어서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한 다음에 그는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 로마로 보내졌다. 로마에서 그는 1931년 8월 15일에 종신 서약을 했고, 1933년 7월 30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의 카푸친 국제 대학숙소에 살면서 그레고리아노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갈 임무를 받았다. 1935년, 그는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루블린 카푸친 신학교의 신학 교수, 양성장, 수호자
폴란드에 귀국한 다음 그는 루블린 형제회로 보내져 그 지역의 카푸친 신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칠 임무를 받았으며, 그 다음 신학교의 총장과 형제회의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형제회의 성당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하곤 했다. 그러는 동안 1939년 9월 1일, 전쟁이 발발했다. 루블린 형제회의 수호자는 제수알도 형제라는 네덜란드 출신의 형제였다. (당시에 네덜란드에서 온 형제들이 폴란드 형제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제수알도 형제는 수호자 임무를 사임해야 했고 강제로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그를 이어 헨리코 형제가 수호자로 임명되었는데, 수호자이면서 총장인 그는 너무나 미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전쟁 때문에 1939년-1949년의 신학교 수업은 평소보다 늦게 시작되었고, 분위기도 몹시 불안하고 긴장이 가득하였다. 독일군은 몹시 사나웠고, 주변 사람들은 거침없이 연이어 체포되고 있었다. 이토록 힘겨운 분위기에서 헨리코 형제는 자신의 신학생 형제들을 격려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결국, 1940년 1월 25일, 독일의 게슈타포경찰은 루블린 카푸친 형제회로 들이닥쳤고, 당시 그곳에 사는 20명의 카푸친 형제들을 체포했다. 이들 중에는 형제들의 수호자인 자허르주프의 헨리코 형제도 있었다. 그들의 첫 수용소는 루블린 성이었는데, 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그곳에 갇혀 있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헨리코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직 능력이 있으니, 이러한 목표를 세워봅시다. 장차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 각자는 그 일을 하느님께 바치는 속죄의 봉헌물로 만들어 드립시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이루어진 빵의 떼어나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헨리코 형제는 모든 사람들을 주의 깊게 돌보곤 했다. 그는 반드시 미사가 새벽에 거행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1940년 6월 18일, 그는 동료형제들과 함께 베를린에 가까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동료 재소자 중에 하나였던 고 암브로시오 야스트르잽스키(Jastrzebski) 형제는 헨리코 형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재아무리 상황이 나빴더라도 그는 우리 각자를 돌보았습니다.” 1940년 가을, 그가 처음으로 돈을 약간 받았을 때에, 그는 수용소 가게에서 빵 두 덩어리를 샀다. 그리고 그는 카푸친들의 수대로 그것들을 25개로 나누었다. 그가 말했다. “형제 여러분, 와서 주님의 선물을 먹읍시다. “있는 데만큼 마음껏 드세요...” 위에 언급된 암브로시오 형제는 그 형제적 행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의 행위는 매우 숭고한 행위였습니다. 자신은 굶어 죽어가면서도 두 덩어리의 빵을 혼자서 곧바로 먹어치우지 않고, 나누어주는 데에 얼마나 큰 자기희생, 아니 얼마나 큰 영웅주의가 필요한지 오직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1940년 12월 14일, 헨리코 형제와 그의 카푸친 동료형제들은 다하우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다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22,637번의 수형번호를 받았다. 수용소 생활의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는 몸을 전혀 사리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리 기력이 쇠약하고 발을 뒤뚱거리며 걷고 있더라도, 그는 자기 자신보다 병약한 이들, 특히 나이든 그 형제들을 도와주곤 했다. 

구속적 고통
1941년 7월이 되자, 헨리코 형제는 탈진으로 매우 쇠약해지고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어 수용소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입원’은 사형 선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 8월 4일 다하우에서 그는 선종했고 12번 수용소의 오븐에서 화장되었다. 병원에서 그는 자신의 신학생 형제들에게 비밀 메시지를 몰래 발송했는데 그 메시지를 통하여 그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 당하고 있었던 학대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기도와 고통도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고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다른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헨리코 형제도 자신의 선종하는 태도로 타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학대와 죽음을 견디어,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자신의 잔인한 순교가 참다운 ‘구속적 고통’이 되게 했다고 입증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나는 7호 건물의 ‘추월 차선’에 있어요. 나는 탈수 증세를 겪고 있느라 몹시 말라버렸어요. 내 체중은 35 킬로그램이에요. 내 모든 뼈들이 아파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듯 나는 침대에 뻗어 누어버렸어요.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어서 난 기뻐요.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고, 또 여러분을 위해서 나의 고통을 하느님께 바치고 있어요.”- 자허르주프의 복자 헨리코

 

  

죽음 자매와 화해하게 된 쾌활한 카푸친 학생 운동가
우치의 복자 피델리스
Beato Fedele Gerolamo (Fidelis Jerome) Chojnacki Religioso e martire 
Lòd, Polonia, 1° novembre 1906 – Dachau, Germania, 9 luglio 1942


전쟁으로 중단된 카푸친 양성
제2차 세계대전의 반발로 인해 카푸친 신학생이던 ‘우치(Łódź)의  피델리스 형제’의 양성이 돌연 중단되었다. 그의 외삼촌 스타니슬라오 스프루신스키(Sprusinski) 신부에게 보낸 1939년 12월 18일자 편지에서 그는 더 이상 신학교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되므로 느껴지는 실망감에 대해 썼다. 그때로부터 한 달 후, 즉 1940년 1월 25일에 그는 독일 점령군에 체포되어 루블린 성에 투옥되었다. 처음에 그는 침착하게 반응했고, 움직일 틈조차 없는 통풍이 나쁜 감방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유머감각을 유지했다. 그러나 1940년 6월 18일, 그가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베를린 근교의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강제수용소에서 바이에른에 위치한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을 때, 그는 수용소 재소자들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위를 보고 이내 풀이 죽게 되었다. 오직 자신의 순교 전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만, 그는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타고난 평온함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어떠한 잔인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리하실 것이고, 또 그분은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하늘에 있는 거주지로 갚아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들어 뒤늦게 발견한 성소
복자 피델리스는 모든 성인들의 대축일, 1906년 11월 1일에 (한글로 ‘루지’ 혹은 ‘로지’라는 글자로도 번역될 수 있는) 우치에서 태어났고, 1906년 11월 4일에 세례 받았을 때에 ‘히에로니모’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벤세스라오 허이나츠키(Chojancki)와 레오카디아 스프루신스카(Sprusinska)의 7명의 자녀 중 막내였고, 성 십자가의 본당에 다니면서 가정 내에서 부모로부터 뛰어난 수준의 그리스도교 교리 교육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육군 사관학교에 등록했으나 학업과정을 마친 뒤 잠깐 동안 실업자가 되었다. 그 뒤, 그는 폴란드가 점령하고 있었던 벨로루시의 슈츄친 나바흐루다크(Ščučyn Navahrudak)시의 사회보장부에서 1년 동안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바르샤바의 우체국에서 일했다. 직원으로서 그는 신뢰성으로 유명했다. 그동안 죽 그는 가톨릭 액션 운동의 활발한 회원이었고 금주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히에로니모는 카푸친 형제들의 바르샤바에 위치한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재속 삼회(오늘날의 제속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고, 그곳에서 프로이시쉬-프리드란트(Preußisch-Friedland)의 복자 아니체토와 친해졌다. 결국 그는 스스로도 카푸친 더욱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에 입회시켜달라고 신청했고, 1933년 8월 27일에 노베 먀스토(Nowe Miasto)의 수련원에서 수련자로 받아들여졌다. 그 순간부터 히에로니모 허이나츠키는 ‘우치의 피델리스 형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수련기 동안에 비록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그는 자신보다 10살 정도 어린 대부분의 동기 수련자들과 잘 어울렸고, 카푸친 수도자로서 자신의 영적 성장에 집중했다. 1934년 8월 28일에 유기 서원을 발원하고 나서 그는 자크로침(Zakroczym)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도 여러 사도직에 참여했는데, 특히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재속 삼회의 봉사에 몰두했다. 그리고 양성장의 허락을 받아 그는 두 개의 대학 동아리, 즉 지식인 협력 동아리와 금주자 동아리를 설립했다. 1937년 초반,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철학 졸업시험을 통과했고, 1937년 8월 28일에 종신 서약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그는 이미 루블린에서 신학생 3년차였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1940년,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루블린 성에 수감된 그는 같은 해 6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 그 수용소는 시범의 수용소, 즉 잘 통솔되고 개인의 개성을 파괴하기에 효율적으로 조정된 수용소로 여겨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타고난 낙천적인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학대로 인해 그는 망연자실했으며, 비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1950년 12월 14일, 그는 다하우의 강제수용소로 다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팔에 22,473번 수형번호의 문신은 새겨지게 되었다. 배고픔과 막노동, 박해와 독일군 승리에 대한 끊임없는 선전의 뉴스 보도는 피델리스 형제를 우울하게 했고, 다른 동료 재소자들처럼 그도 점차적으로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다. 나날이 그의 정신적 우울증은 심해졌고, 곧 고되고 억압적인 감옥 제도가 가져온 극심한 병으로 인해 더욱 더 악화되었다. 1942년의 겨울 어느 날 아침, 그와 또 다른 수감자 한 명이 부엌에서 무거운 커피포트를 나르다가 그는 미끄러져 넘어지게 되었다. 이미 끓는 커피에 극심한 화상을 입은 그는 교도관이 가한 체벌로 인해 큰 타박상을 입어 결국 병약자 건물로 이동되었다. 사실 산 채로 그 병약자 건물로 되돌아온 수감자들은 매우 적었다! 좀 있다가 그는 수용소 병원으로 이동되었다. 수용소의 동료 재소자였던 카예타노 암브로즈키에비차(Ambrozkiewica) 형제는 살아있는 피델리스 형제를 목격한 마지막 때를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피델리스 형제가 우리 막사 건물을 떠난 그 1942년 여름의 일요일 오후를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평정의 희미한 빛들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그의 눈빛은 이미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반영이었습니다.” 얼마 후, 즉 1942년 7월 9일, 그는 수용소 병원에서 선종했고, 그의 시신은 수용소 화장터에서 태워져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 우리 서로서로 하늘에서 다시 만나볼 때까지!”- 우치의 복자 피델리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강복해 준 평형제!
바르샤바의 복자 심포리아노
Beato Sinforiano Felice (Symforian Feliks) Ducki Religioso e martire
Varsavia, Polonia, 10 maggio 1888 – Auschwitz, Polonia, 11 aprile 1942


구명의 강복 성호
1942년 4월 11일 저녁 무렵, 폴란드 오시비엥침시 근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독일인들은 수감자들의 두개골을 곤봉으로 박살내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대량학살을 시작하고 있었다. 만 54세가 된 폴란드 카푸친, 바르세바의 심포리아노 형제는 일어서서 살해자들의 무리를 마주보고 그들 머리 위에 십자가의 성호를 그었다. 이를 직접 목격한 동료 재소자 체스라오 오스탄코비츠(Czeslaw Ostankowicz)는 그 살해자들이 잠시 동안 기가 막혔다고 했으며, 곧 이어 "그를 때려"라는 폭도 우두머리의 명령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심포리아노 형제는 곤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독일군들 발 앞, 즉 독일군과 수감자들 사이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나치들은 현장에서 그를 죽여 버렸다. 하지만, 그의 극적인 선종은 그날 저녁의 무서운 사형집행을 돌연 멈추게 했고, 그 형제의 개입 덕분에 그 건물에 있었던 15여명의 수감자들이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단순하고 우호적인 카푸친 동냥자
바르샤바의 심포리아노 형제 본인은 1888년 5월 10일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17일 후에 그의 부모 율리아노 두트스키(Ducki)와 마리안나 레나르트(Lenardt)에 의해 펠릭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바르샤바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그는 바르샤바에 있는 형제회에서 카푸친들과 함께 ‘지원자’ 또는 ‘문의자’로서 살게 되었다. 그의 초기 생애가 어땠는지, 또 그가 어떻게 처음 카푸친들을 접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 한다. 사실 카푸친들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오랜 기간 폐쇄되었다가, 그 후 1912년 바르샤바로 돌아와 펠릭스 두트스키의 가정집 근처에서 상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18년, 만 24세 된 펠릭스 두트스키는 청원자가 되었고, 2년 후에 노베 먀스토 형제회에 수련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부터 펠릭스는 바르샤바의 심포리아노 형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1년 후, 1921년 5월 20일에 심포리아노 형제는 유기 서약을 했고, 1925년 5월 25일 그는 성대 종신서원을 발원했다. 그 종신 서약은 1년 늦어졌는데 그것은 그에게 수도자다운 정신이 없었다고들 했기 때문이었다. 이 젊은 카푸친 평형제는 바르샤바의 형제회에 동냥자로 파견되었고, 그의 임무는 형제들의 새로운 세라핌적 학교, 즉 카푸친회 소신학교를 위한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심포리아노 형제는 키가 크고 튼튼하며 외모적으로 남자다웠다. 타고난 지능을 가졌지만 사람들과 관계에 있어서 직설적이고 단순하고 우호적이었다. 그는 외향적인 친근성과 사교성 덕분에 수도회를 위한 새로운 친구들을 쉽게 사귀었고, 때문에 바르샤바의 시민들은 얼마 안 있어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말기에 그는 관구봉사자의 동료(socius)로 임명받았는데, 그 임무에는 종자(從者, 남자 상전의 수발을 드는 하인)나 개인 조수의 직무와 비슷한 직무들이 수반되었다. 매우 바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결코 잃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신심어리고 열심한 기도로 유명했는데, 비록 열심한 심심어린 기도이긴 했지만 그의 기도가 짧았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사실 그는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줄 때문에 길게 기도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제2차 대세계전이 발발한 후, 그는 도시를 누비며 구걸함으로써 형제들도 궁핍한 사람들도 생활필수품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을 확인했다.



타락한 비인간적 행위 한가운데서의 영웅적인 용맹성
1941년 6월 27일, 바르샤바의 카푸친 형제회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던 바로 그 날까지, 그는 충실히 이 동냥자의 봉사를 수행했다. 그 형제들과 심포리아노 형제는 처음에 파뱌크(Pawiak) 감옥에 억류되었다가,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심포리아노 형제는 육체적으로 튼튼했지만, 폴란드 수감자들을 죽을 때까지 지치고 굶주리게 하는 나치들의 정책 때문에 그는 다른 재소자들보다도 더욱 더 큰 고생을 견뎌야 했다. 그는 이 모든 학대를 침묵으로 참아냈지만, 독일 당국이 제공하는 그 보잘것없는 식량 배급은 보통 사람의 신체적인 요구 조건에 충분하지 못했기에, 극도로 쇠약해진 심포리아노 형제는 단 7개월 만에 서서히 죽을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가 아우슈비츠의 악명 높은 몰살 건물 중의 한 곳에서 쇠약해져가고 있는 동안, 1941년 4월 11일, 무분별하고 잔인한 대량학살이 시작되었다. 곤봉으로 두개골이 박살나는 주변 건물들의 수감자들의 비명소리에 그의 감방 동료들은 모두 공포에 빠져버렸다. 살의를 품은 나치들이 심포리아노 형제가 누워 있는 건물에 다가오자, 그는 그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일어섰고, 저항과 용서의 대담한 몸짓으로 자신을 죽일 그 자들을 향해 십자성호를 그었다. 그는 성삼위일체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방 동료들에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곧바로 하늘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정신을 바수어버리는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제도의 비인간적 행위 한가운데에서, 참으로 보기 드문 그의 이러한 인간적, 신적 존엄성의 몸짓에 살인자들은 충격을 받고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심포리아노 형제를 죽을 때까지 곤봉으로 때렸다. 그들이 그 나이든 형제를 죽이는 것을 끝내자 피에 대한 그들의 갈증도 누그러졌고 이 때문에 나머지 동료 재소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동료 수감자들은 할 수 있는데 만큼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심포리아노 형제의 시신을 수레에 실어 다른 시신들과 함께 화장터로 호위했다. 바르샤바의 복자 심포리아노는 자신의 순교로서 위대한 영웅적 행위를 드러냈고, 성삼위일체 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으며, 불행으로부터 수많은 동료들의 목숨을 구해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죽어가는 모든 이에게, 이곳에서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는 여러분 모두에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사죄를 베풀어 주십니다.” - 바르샤바의 복자 심포리아노
 


 

그들의 죽음은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통하여 빛나는 하느님의 힘을 드러낸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선종한 이 5명의 카푸친 순교자들은 20세기 초반에 바르샤바에서 살고 있었던 카푸친들의 대표적 본보기이다. 순교의 비범한 영웅행위를 제외하고 그들은 모든 점에 있어서 평범한 형제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는 당시 대부분의 유럽 나라에서 대부분의 카푸친들이 살아왔던 그 생활양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적 삶을 바쁘게 살아왔고,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공부하는 것이든 가르쳐주는 것이든, 위로해주는 것이든 동냥하는 것이든, 성사를 집전하는 것이든 그냥 기도하는 것이든 모두 그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그러나 그들 각자에게는 제 약점 또한 있었다. 한 사람은 형제들의 주목을 끌기를 좋아했으며, 가끔 짜증을 참지 못했다. 또 한 사람은 오래 동안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바빴고, 수도자다운 정신이 부족한 이로 여겨졌다. 또 다른 한 명은 완전히 우울하게 되어 잠시나마 절망의 희생자로 추락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 두 명의 형제에게는 사제직을 수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 각자에게 순교의 시련을 겪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증거를 보여줄 힘을 베푸셨다. 그들은 믿음이 정말로 필요한 그 최후의 순간까지 믿음직했다. 거룩한 순교자들을 위한 감사송의 말씀 의미를 환언해보자면, 그리스도의 피처럼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기 위해 흘린 하느님의 복된 순교자들의 그 피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들어낸다. 그런 일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 속에서 당신의 힘을 완성시키시며, 약자들에게 힘을 베풀어주시어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 대한 증거를 보일 수 있도록 해주신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아직 능력이 있으니, 이러한 목표를 세워봅시다. 장차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 각자는 그 일을 하느님께 바치는 속죄의 봉헌물로 만들어 드립시다.”   - 자허르주프의 복자 헨리코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Beati Cinque Frati Cappuccini Martiri Polacchi
Senza Data (Celebrazioni sing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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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1941/42

“Nel nostro secolo sono ritornati i martiri, spessosconosciuti, quasi militi ignoti della grande causa di Dio. Perquanto è possibile, non devono andare perdute nella Chiesa leloro testimonianze”:così scriveva il grande papa GiovanniPaolo II nella memorabile lettera apostolica “Tertio Millennioadveniente”.
Tra gli innumerevoli testimoni della fade elevati agli onori deglialtari nel suo lungo pontificato, il 13 giugno 1999 toccò aduna folta schiera di martiri polacchi vittime del regime nazista, trai quali cinque Frati Minori Cappuccini. Questi religiosi subirono ilmartirio singolarmente in date diverse e furono poi accorpatisuccessivamente in un’unica causa di beatificazione.

Il nuovo Martyrologium Romanum li commemora infatti separatamentenell’anniversario del martirio. Si presentano dunque in appositesingole schede le vicende terrene di questi cinque figli di SanFrancesco, che la Provvidenza ha voluto accomunare nellaglorificazione terrena e celeste:

92954- Anicet Wojciech Koplinski, Sacerdote, 16 ottobre
92955- Henryk Jozef Krzysztofik, Sacerdote, 4 agosto
92956- Fidelis Jerome Chojnacki, Religioso, 9 luglio
92957- Florian Jozef Stepniak, Sacerdote, 12 agosto
92958- Symforian Feliks Ducki, Religioso, 11 aprile


Autore: Fabio Ardu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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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09-25

 


Beati Aniceto Adalberto (Anicet Wojciech) Koplinski e Giuseppe (Jozef) Jankowski Sacerdoti e martiri
16 ottob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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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schwitz, Polonia, 16 ottobre 1941

Padre Aniceto (al secolo Wojciech Koplinski), sacerdote cappuccino nato a Debrzyno (Polonia) il 30 luglio 1875, e Padre Jozef Jankowski, sacerdote pallottino (Società per l’Apostolato Cattolico) nato a Czyczkowy (Polonia) il 17 novembre 1910, mentre la loro patria polacca era in mano agli invasori tedeschi, furono deportati nel campo di concentramento di Auschwitz ove morirono entrrambi il 16 ottobre 1941, il primo nella camera a gas ed il secondo invece trucidato dagli aguzzini del campo.

Etimologia: Adalberto = di illustre nobiltà, dal tedesco

Martirologio Romano: Vicino a Cracovia in Polonia, nel campo di sterminio di Auschwitz, beati Aniceto Koplinski,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Giuseppe Jankowski, della Società dell’Apostolato Cattolico, sacerdoti e martiri, che, durante l’occupazione militare della patria da parte dei seguaci di un’empia dottrina ostile agli uomini e alla fede, testimoniarono fino alla morte la fede in Cristo, l’uno ucciso in una camera a gas, l’altro dalle guardie del campo.
 


Anicet Wojciech Koplinski cappuccino
Debrzyno, Polonia, 30 luglio 1875 - Auschwitz, Polonia, 16 ottobre 1941

É a partire dalla fine che spesso una vita riceve la sua luce. Questa constatazione è doppiamente vera per un uomo che il 13 giugno 1999 venne proclamato beato a Varsavia da Giovanni Paolo II in occasione del suo ottavo viaggio in Polonia. Quest'uomo sarebbe rimasto sconosciuto, se non fosse giunto agli onori degli altari. Ma ora la sua vicenda getta un'ennesima luce nel tanto buio capitolo della storia tedesca di questo secolo. E anche nella vicenda umana, la sua fine manifesta chi è stato e per che cosa è vissuto.
Stiamo parlando di Aniceto Koplin, un cappuccino finora sfuggito alle cronache del mondo. Nato il 30 giugno 1875 in Preußisch-Friedland (oggi Debrzno) nella provincia di Prussia occidentale (Westpreußen) in Germania, una città confinante con la Polonia in cui forte era anche la presenza polacca.
Forti in particolare erano i rapporti tra i pochi cattolici tedeschi della zona e il gruppo dei polacchi soprattutto a causa della comune fede cattolica, che dava loro l'occasione di partecipare alle stesse liturgie e di condividere anche gli stessi lavori. Il piccolo Adalberto, il nome che gli venne imposto nel battesimo, era il più piccolo di 12 fratelli, di una famiglia tutt'altro che benestante che si manteneva con lo stipendio del padre operaio. Adalberto, o semplicemente Alberto, come tutti lo chiamavano, conobbe anche i cappuccini noti in quel tempo per il loro apostolato sociale e ne ebbe anche un'esperienza diretta nella sua giovinezza. Il 23 novembre 1893 egli entrò nel lontano convento dei cappuccini di Sigolsheim nell'Alsazia (nella Prussia tutti i conventi cappuccini erano stati soppressi) appartenente alla provincia Renano-Wesfalica, e ricevette il nome di Aniceto (l'invincibile).
Il giorno dell'Assunta del 1900 venne consacrato sacerdote per svolgere poi il suo ministero innanzitutto a Dieburg, poi lungamente nella regione della Ruhr (Werne, Sterkrade, Krefeld) come assistente per la gente polacca. A casa aveva infatti un po' studiato polacco e l'aveva poi migliorato personalmente durante gli anni di studio, sfruttando anche una volta il periodo di ferie presso la sua sorella che viveva in Polonia per trascorrere un periodo in un ambiente polacco. Nel suo apostolato nella zona della Ruhr la sua conoscenza della lingua polacca gli era molto utile, come anche la sua origine da una famiglia di operai. Egli riusciva a capire la gente operaia, e viceversa essi capivano lui. La vicinanza affettiva alla Polonia, non diminuiva però il suo amore per la Germania: era un uomo di frontiera, ma anche un patriota. All'inizio dello scoppio della prima guerra mondiale compose delle poesie a favore della guerra, composizioni che oggi ci imbarazzano. Ma anche questa sua capacità poetica più tardi pose a servizio dei poveri che divennero sempre di più l'unico obbiettivo della sua attività pastorale.
La svolta fondamentale nella vita di p. Aniceto avvenne nel 1918 a Krefeld quando gli venne rivolta la richiesta di rendersi disponibile per la riorganizzazione della vita ecclesiale e dell'Ordine a Varsavia. Con entusiasmo accettò questa sfida. Dopo lunghi anni di dominio zarista, la Polonia aveva ritrovato la sua libertà. Però la situazione economica era disastrosa e molti erano i poveri e le famiglie che vivevano nella miseria. Né molti erano i grandi ricchi, come vediamo oggi nelle situazioni contraddittorie di paesi quali il Brasile, il Messico, l'India. P. Aniceto si fece mediatore tra questi due gruppi. Senza chiedere nulla per sé, sempre con il suo povero saio e con i sandali, lo si vedeva sempre a piedi per le strade di Varsavia a chiedere la carità per i suoi poveri. E ciò che poteva ricevere riponeva nelle profonde tasche del suo mantello: pane, salsicce, frutta, verdura, dolci per i bambini. Spesso si caricava sulle sue spalle pesanti pacchi o trascinava grandi valige piene di beni di prima necessità. Il 25 gennaio 1928 scrive al suo provinciale padre Ignazio Ruppert: "Un particolare impegno, che rappresenta spesso un lavoro gravoso, costituiscono per me i numerosi poveri e la molta gente qui senza lavoro, per i quali quasi giornalmente esco per la questua". Era stimato per questo come "san Francesco di Varsavia".
Non si è lontani dal vero se si interpreta la sua attività di questuante per i poveri come un'espressione di attività sportiva.
Fin dalla sua giovinezza egli si era esercitato giornalmente nel sollevamento dei pesi. In occasione della preghiera di mezzanotte, tradizione che per ogni frate iniziava dal noviziato, egli, prima della preghiera o dopo essere tornato in camera, si esercitava nella sua specialità. La sua costanza lo portò ad una grande potenza muscolare così da poter fare cose straordinarie, con la gioia dei suoi confratelli o a vantaggio dei poveri o anche a servizio dell'attività pastorale. Così alzava tavoli e banchi o mostrava le sue capacità nelle feste paesane per poi passare con il "cappello" (zucchetto) chiedendo la ricompensa per i suoi poveri. Si racconta che un poliziotto violento con la sua moglie e i suoi bambini, nonostante le sue ripetute confessioni, non riusciva a migliorare il suo carattere aggressivo. Un giorno padre Aniceto lo portò in sagrestia, lo prese per la cintura e lo sollevò sopra la sua testa urlandogli: "Vedi cosa posso farti? E che farà Dio con te se continui ad essere così violento?". La lezione fu efficace, il poliziotto si liberò dalla sua violenza.
Quando padre Aniceto non era in giro per i suoi poveri, sedeva spesso nel confessionale della chiesa dei cappuccini di Varsavia. Ogni mattina iniziava a confessare un'ora prima della messa e vi restava per tutta l'ora seguente, e di nuovo alla sera, quando ritornava in convento dalla sua questua. Svolgeva questa attività più volentieri che predicare, richiesta quest'ultima che gli veniva rivolta soltanto di rado dal superiore, a causa della sua conoscenza limitata del polacco.
Ai molti sacerdoti che venivano al suo confessionale impartiva delle brevi ma molto efficaci ammonizioni in latino; egli venne scelto come confessore dai vescovi Gall e Gawlina, e anche dal cardinale Kakowski e dal nunzio apostolico Achille Ratti, il futuro Pio XI. Come penitenza normalmente imponeva di fare un'elemosina per i poveri, penitenza data anche al cardinale Kakowski al quale impose di donare durante il tempo invernale un carro di carbone per una famiglia povera.
Padre Aniceto si prese cura dell'anima e del corpo degli altri. Chiedeva ai ricchi pane per i poveri, ma invitava questi a pregare per sé e per i ricchi: davanti a Dio ognuno porta la responsabilità dell'altro. Di grande significato era vedere davanti al suo confessionale officiali dell'esercito accanto ai contadini, donne eleganti vicino a povere vedove. Il cappuccino aveva lo stesso amore per tutti. La notizia che qualcuno era morente lo faceva correre al suo capezzale per consolarlo e portargli i sacramenti della confessione e della comunione. E se qualcuno moriva abbandonato da tutti, egli si prendeva cura anche della sepoltura. Spesso prendeva parte ai riti funebri e alla processione verso il cimitero, pregando lungo la via il suo breviario o il rosario, e a volte succedeva che tanta era la sua immersione in Dio da non accorgersi dell'entrata del cimitero così da andare oltre mentre il corteo funebre svoltava verso il camposanto.
Aniceto Koplin era di nazionalità tedesca. Non lo nascondeva, nemmeno quando la politica di Hitler aveva iniziato a rivelarsi inaccettabile. Quando si trovava a discutere con i suoi confratelli egli spesso batteva i pugni contro il tavolo parlando degli avvenimenti politici della Germania. Aveva intravisto e capito lo spirito anticristiano del nazionalsocialismo e la sua visione demoniaca del mondo. Per Aniceto non si poteva entrare a patti con questa corrente politica. Avendo sperimentato fin dalla sua giovinezza l'onestà e la fede della gente polacca, non poteva non schierarsi dalla loro parte, fino ad assumere, animato da una radicale solidarietà, il nome di Koplinski. Durante la prima settimana dell'occupazione tedesca in Polonia, egli rimase in convento. Ma subito lo si vide impegnato nell'aiuto ai suoi poveri e anche a coloro che dovevano fuggire a causa della violenza nazista. Dall'ambasciata tedesca, utilizzando la sua conoscenza del tedesco, ottenne i necessari permessi per ottenere viveri, vestiti, scarpe e medicine. Il padre Koplinski si impegnò anche per i cristiani non cattolici e per gli ebrei, cosa testimoniata dall'arcivescovo Niemira.
Per la Gestapo i cappuccini e in particolare p. Koplinski erano fumo negli occhi. Il giorno dell'Ascensione del 1941 ebbe luogo il primo interrogatorio. Il cappuccino prussiano, senza paura e con molta franchezza, come era sua abitudine, espresse un giudizio molto pesante: "Dopo quello che Hitler ha fatto in Polonia, io mi vergogno di essere un tedesco". È possibile ritenere che il padre cappuccino avrebbe salvato la sua vita, se si fosse appellato alla sua cittadinanza tedesca. Ma non sembra, per quanto sappiamo, che abbia tentato questa via di uscita, che poi avrebbe contraddetto la schiettezza e lo spirito di sacrificio che contraddistingueva la sua persona. Sta di fatto che il 28 giugno 1941, il giorno dopo l'attacco aereo a Varsavia, venne arrestato insieme ad altri 20 confratelli e rinchiuso nella prigione di Pawiak. Motivo dell'arresto era di aver letto fogli propagandistici antinazionalsocialisti e di aver espresso idee contrarie al nuovo regime.
Arrestati vennero rasati dei capelli e della barba e spogliati anche dei loro abiti religiosi, tuttavia fu concesso loro di conservare il breviario. Il padre guardiano e p. Aniceto furono torturati per spingerli ad autoaccusarsi, senza però riuscire a strappar loro l'ammissione di aver istigato la gente alla ribellione contro il regime. Egli rimase fedele alla sua vocazione di religioso e di sacerdote, anche dinanzi alle minacce e alle rappresaglie; ne fa fede quanto dichiarò apertamente durante gli interrogatori: "Sono sacerdote e dovunque vi siano uomini, io là opero: siano essi ebrei, polacchi, e ancor più se sofferenti e poveri".
Il 3 settembre furono caricati tutti in un carro bestiame per essere trasportati ad Auschwitz, dove ricevettero la tanto tristemente famosa casacca a strisce e un numero di prigionia. Era stata strappata loro la dignità di persone per essere ridotti ad un numero tra le migliaia di altri prigionieri. Avendo 66 anni P. Aniceto venne destinato nel blocco degli invalidi, che a sua volta era vicino a quello dei destinati allo sterminio. Non sappiamo bene quali soprusi e maltrattamenti egli dovette sopportare durante le cinque settimane che seguirono, ma lo possiamo un po' ricostruire dai racconti che riportarono i sopravvissuti. Possediamo però la testimonianza diretta del suo provinciale e compagno di prigionia p. Arcangelo, il quale racconta che "p. Aniceto, appena giunto all'entrata del campo di concentramento, venne bastonato perché non riusciva a tenere il passo degli altri; oltre ciò fu azzannato anche da un cane delle SS. Durante l'appello il frate cappuccino venne messo insieme agli anziani e a coloro che non potevano lavorare e collocato nel blocco vicino a quello dei destinati alla morte. Durante tutto questo periodo di sofferenze p. Aniceto ha pregato e taciuto, mantenendo costantemente la pace e il silenzio".
Questa testimonianza è sufficiente per farci intuire che il padre cappuccino, dopo aver spesso celebrato la via crucis e aiutato altri a portare la loro croce dietro Gesù, viveva quel momento tragico della sua esistenza unito a Gesù e come sentiero doloroso verso il Golgota. Colui che fino a poco tempo prima aveva urlato per difendere i poveri e condannare il peccato, ora taceva e pregava. Prima di essere portato alla camera a gas, diceva ancora ad un amico: "Dobbiamo bere fino in fondo questo calice".
Il 16 ottobre gli aguzzini dopo aver allestito un breve processo, buttarono il p. Aniceto insieme ad altri prigionieri in una fossa e gettarono sopra di loro calce viva; una morte atroce, poiché la calce sprigiona una violenta attività corrosiva sui corpi vivi fino a consumarli come fosse fuoco.
Dopo essere vissuto povero ed essersi impegnato per i poveri, Aniceto Koplin ha incontrato sorella morte nella più totale povertà.
Esternamente era stato spogliato di tutto anche della sua carne, ma internamente rimase ricco di un tesoro che nessuno mai gli avrebbe potuto strappare: la fede, la dignità, l'attenzione amorosa agli altri. È morto nella speranza della resurrezione e nella fede che anche la sua sofferenza e atroce morte costituiva un aiuto per riconciliare gli animi divisi della Germania e della Polonia, dei giudei e dei cristiani, dei cattolici e dei protestanti, dei poveri e dei ric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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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ta 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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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09-25

 



Beato Enrico Giuseppe (Henryk Jozef) Krzysztofik Sacerdote e martire
4 ago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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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chorzew, Polonia, 22 marzo 1908 – Dachau, Germania, 4 agosto 1942

Henryk nacque nel 1908 a Zachorzev in Polonia. Nell 1927 vestì l’abito cappuccino e prese il nome religioso di Enrico. Dopo gli studi, tornò in Polonia, a Lublino, dove fu nominato rettore del seminario. Nel 1939 scoppiò la guerra. Il 25 gennaio 1940 la Gestapo tedesca arrestò 23 cappuccini del convento di Lublino tra cui fra’ Enrico Krzysztofik. Durante la prigionia Enrico fu premuroso con tutti. Fece in modo che all’alba fosse celebrata la Messa. Il 18 giugno 1940 fu tradotto, insieme ai confratelli, al campo di concentramento di Sachsenhausen, poi a Dachau. Pur essendo di debole salute nella vita del campo non si risparmiò mai: aiutava i più deboli, soprattutto gli anziani. Nel luglio del 1941 fu consegnato all’ospedale del campo. Di là scrisse un messaggio segreto ai suoi allievi: «Cari fratelli! Sono paurosamente dimagrito perché disidratato. Peso 35 chili. Sono disteso sul letto come sulla croce insieme a Cristo. E mi è grato essere e soffrire con Lui. Prego per voi e offro a Dio queste mie sofferenze per voi». Morì il 4 agosto 1942. (Avvenire)

Martirologio Romano: Nel campo di prigionia di Dachau vicino a Monaco di Baviera in Germania, beato Enrico Krzysztofik, sacerdote e martire, che, deportato in tempo di guerra dalla Polonia in un carcere straniero per essersi professato cristiano, portò a compimento il martirio sotto tortura.


Cosa sono due pagnotte di pane, divise in 25 porzioni, tante quanti sono i propri compagni? Cosa normale (per non dire insignificante) in tempi normali; eroismo puro se, invece, questo avviene in un campo di concentramento, dove le due pagnotte non servirebbero neppure come antipasto ad uno solo di questi uomini, resi scheletriti dalla fame. Certamente, un simile eroismo non lo si può improvvisare, ma è proprio di chi ad esso si allena nella normalità degli atti quotidiani, per diventar capace poi, al momento giusto, di offrire anche una testimonianza così significativa. Ed è per questo che, di Padre Enrico Krzysztofik, i testimoni ricordano con edificazione questo gesto di carità eroica, non come episodio isolato, ma come culmine di un itinerario di amorosa donazione. Nasce il 22 marzo di 100 anni fa in un villaggio polacco e al battesimo gli viene imposto il nome Giuseppe, che cambia in Enrico entrando tra i Cappuccini. Studia filosofia in Olanda e teologia a Roma, fino all’ordinazione sacerdotale del 1933, ma a Roma si ferma ancora altri due anni per conseguire la licenza in teologia. Torna in Polonia in veste di insegnante, ma diventa anche rettore del seminario nel convento di Lublino. Qui lo ricordano predicatore appassionato e convinto, impegnato a trasfondere nei suoi ascoltatori un po’ dell’entusiasmo spirituale che gli brucia dentro. Anche quando scoppia la seconda guerra mondiale, anche quando la Polonia è invasa dai tedeschi e professare apertamente la propria fede equivale a mettere a repentaglio la vita. I primi a doversene andare sono i confratelli olandesi, espulsi dal regime totalitario di Hitler e, tra questi, c’è anche Gesualdo Wilem, che è il padre guardiano del convento di Lublino; così il nostro Padre Enrico si trova, dalla sera alla mattina, a doverne prendere il posto. Posizione delicatissima, la sua, nella duplice veste di rettore del seminario e guardiano del convento, mentre la persecuzione si fa feroce, gli arresti si susseguono a raffica e sugli edifici religiosi si sfoga tutta la ferocia nazista. I seminaristi di padre Enrico sono tesi, preoccupati e agitati, costretti a ritardare l’inizio delle lezioni dal preoccupante clima politico che si respira ovunque. Soltanto la sua pazienza e la sua costante serenità riescono a rasserenare gli animi quel tanto che basta per cominciare a studiare ed arrivare con una certa tranquillità al 25 gennaio 1940, giorno in cui la Gestapo fa irruzione nel convento di Lublino e arresta i 23 cappuccini che vi trova. Nel carcere, strapieno in conseguenza degli arresti di massa, non c’è posto per loro e devono così essere confinati nel castello della città, guardati a vista da carcerieri senza scrupoli. Enrico è il primo, se non l’unico, tra i confratelli, ad analizzare lucidamente la situazione e a prevedere le violenze psicologiche e le vessazioni cui devono andare incontro. Per questo invita i suoi frati ad offrire a Dio tutte le sofferenze che li attendono, “fintantoché abbiamo la mente lucida”. Dio solo sa come, in quel clima di oppressione, riesca comunque a garantire alla sua comunità la messa quotidiana, celebrata clandestinamente all’alba. Il 18 giugno 1940 tutti i frati vengono tradotti nel campo di concentramento di Sachsenhausen, nei pressi di Berlino. Qui Enrico, nelle condizioni disumane in cui vive, incanta tutti per la premurosa delicatezza che dimostra nei confronti, soprattutto, di chi più fatica a sopportare quell’inferno di violenza e di morte. Qui i testimoni registrano, tra gli altri, l’episodio delle due pagnotte fraternamente divise. Di qui, ricoverato ormai nell’ospedale da campo per la sua estrema debolezza e denutrizione, scrive ai confratelli di essere “paurosamente dimagrito, perché disidratato, peso 35 chili, fanno male tutte le ossa”. Si sente “disteso sul letto come sulla croce insieme a Cristo” e qui, offrendo le sue sofferenze per tutti i cappuccini, muore il 4 agosto 1942 e il suo corpo viene bruciato nel forno crematorio del campo 12. E’ stato beatificato da papa Woityla il 13 giugno 1999.


Autore: Gianpiero Petti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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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8-12-29






Beato Fedele Gerolamo (Fidelis Jerome) Chojnacki Religioso e martire
9 lug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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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òd, Polonia, 1° novembre 1906 – Dachau, Germania, 9 luglio 1942

Il beato Fidelis (al secolo Gerolamo Chojnacki), profes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nacque a Lód, Polonia, il 1° novembre 1906 e morì a Dachau, Germania, il 9 luglio 1942. Beatificato da Giovanni Paolo II a Varsavia (Polonia) il 13 giugno 1999 con altri 107 martiri polacchi.

Martirologio Romano: A Dachau vicino a Monaco di Baviera in Germania, beato Fedele Chijnacki,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martire, che, durante l’occupazione della Polonia da parte di un empio regime, fu deportato per la sua fede in Cristo in questo campo di prigionia e raggiunse sotto tortura la gloria eterna.


Nacque a Lódz la festa di Ognissanti del 1906, ultimo di sei fratelli. Al battesimo, impartitogli tre giorni dopo, i genitori Waclaw e Leokadia Sprusinska gli imposero il nome di Hieronim (Gerolamo).
In famiglia ricevette un'educazione religiosa esemplare, frequentando la sua parrocchia di S. Croce. Terminata la scuola superiore, si iscrisse all'accademia militare. Finiti gli studi, non riuscí a trovare un lavoro. Grazie all'aiuto di parenti, per un anno lavorò a Szczuczyn Nowogrodzki presso l'Istituto della Previdenza Sociale (ZUS) e successivamente lavorò alla Posta Centrale di Varsavia. Era un impiegato molto apprezzato per la sua affidabilità. Nel frattempo, insieme allo zio, p. Stanislao Sprusinski, collaborava alla gestione dell'Azione Cattolica.
Si occupò della campagna contro l'alcool, essendo egli stesso astemio. Operando all'interno dell'Azione Cattolica, avvertí il bisogno di un approfondimento della vita interiore. Entrò dunque nel Terz'Ordine di S. Francesco presso la chiesa dei cappuccini a Varsavia. Le sue nobili doti di carattere gli guadagnavano la fiducia della gente, riuscendo anche a riconciliare persone in discordia. In quel tempo fece amicizia con il Beato Aniceto Koplin, famoso questuante di Varsavia. I rapporti costanti con i cappuccini suscitarono in lui la vocazione religiosa.
Il 27 agosto 1933, a Nowe Miasto, ricevette l'abito cappuccino e il nome religioso di Fedele. Nonostante i suoi 27 anni e l'esperienza di vita, denotava grande disponibilità e semplicita, mantenendo piacevoli rapporti con tutti. Nel periodo del noviziato si preoccupò di conoscere i principi della vita interiore e si dedicò con impegno al proprio perfezionamento spirituale.
Emise i voti temporanei il 28 agosto 1934 e partí per Zakroczym per studiare filosofia. Qui, con il consenso dei superiori, fondò un Circolo di Collaborazione Intellettuale per i seminaristi. Continuò ad occuparsi del problema dell'astinenza dall'alcool e fondò un Circolo degli Astemi. Inoltre cooperò con il Terz'Ordine francescano.
All'inizio del 1937 superò con un'ottima valutazione l'esame finale di filosofia. Il 28 agosto 1937 emise i voti perpetui. In seguito studiò teologia presso il convento di Lublino. Alla scoppio della seconda guerra mondiale frequentava il terzo anno di teologia. In una lettera del 18 dicembre 1939 manifestò allo zio, p. Stanislao Sprusinski, un certo sconforto e abbattimento per il fatto di non poter vivere e studiare normalmente.
Un mese dopo le festività natalizie del 1939, il 25 gennaio 1940, venne arrestato e internato nel carcere del Castello di Lublino. Sopportò con serenità e addirittura con un certo buon umore le dure condizioni carcerarie, la mancanza di moto, di spazio e di aria. Dopo 5 mesi, il 18 giugno 1940, fu trasferito insieme a tutto il gruppo nel campo dí concentramento dí Sachsenhausen, nei pressi di Berlino. Si trattava di un lager modello, di vero stampo prussiano, specie nella disciplina e nell'ordine, finalizzato all'annientamento dell'individuo. Qui Fedele perse il suo ottimismo. Il trattamento disumano dei prigionieri lo scioccava, inducendolo al pessimismo.
Il 14 dicembre 1940, con un convoglio di preti e religiosi, venne trasferito al campo di concentramento di Dachau, vicino a Monaco di Baviera, dove il suo stato d'animo peggiorò ulteriormente. Gli fu impresso sul braccio il numero di matricola 22.473. Le notizie delle continue vittorie del fronte militare tedesco non facevano intravedere ai prigionieri alcuna speranza di uscire dal campo. La fame, il lavoro e le persecuzioni pesavano sempre di piú. "La capacità di cavarsela, l'energia vitale l'avevano abbandonato". Il lavoro molto superiore alle sue forze, la fame, la penuria di indumenti, procurarono a fr. Fedele una grave malattia polmonare.
Una mattina d'inverno del 1942, mentre trasportava insieme a un compagno un pesantissimo pentolone di caffè dalle cucine, scivolò, rovesciò il caffè bollente, provocandosi gravi bruciature. La dura punizione a cui lo sottopose il capoblocco debilitò ancor piú la sua psiche. Fra Gaetano Ambrozkiewicz, compagno dí sventura nel lager, narra cosí l'addio di fr. Fedele: "Non dimenticherò mai quella domenica pomeriggio dell'estate 1942 quando fr. Fedele lasciò la nostra baracca 28 per trasferirsi nel blocco degli invalidi. Era stranamente cosí quieto e assorto, negli occhi aveva persino dei riflessi di serenità, ma erano ormai riflessi non di questo mondo. Ci baciò tutti, congedandosi con parole di s. Francesco e dicendo "Sia lodato Gesú Cristo, arrivederci in cielo".
Poco tempo dopo, il 9 luglio del 1942, si spense nell'ospedale del campo. Il corpo venne arso nel forno cremato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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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ta 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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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09-25






 

Beato Floriano Giuseppe (Florian Jozef) Stepniak Sacerdote e martire
12 ago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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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dzary, 3 gennaio 1912 - Linz (Austria), 12 agosto 1942

Il beato Floriano nasce da genitori contadini a Zdzary (Polonia), il 3 gennaio 1912. Entra nell'Ordine dei cappuccini, dove si distingue per zelo, generosità e devozione. È ordinato sacerdote il 24 giugno 1938. Allo scoppio della guerra non abbandona il convento ma continua coraggiosamente a confessare i fedeli. Nella sua vita mette in pratica la frase apposta sull'immagine dell'ordinazione sacerdotale: «Siamo pronti a darvi non solo il Vangelo, ma la nostra stessa vita». Parole che esprimevano l'essenza della sua esistenza di religioso. Il 25 gennaio 1940, insieme a tutti i frati del convento, è arrestato dalla Gestapo e deportato al campo di concentramento di Sachsenhausen e successivamente a Dachau. Muore il 12 agosto del 1942, martire delle persecuzioni naziste. (Avvenire)

Martirologio Romano: A Dachau vicino a Monaco di Baviera in Germania, beati Floriano Stępniak,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Giuseppe Straszewski, sacerdoti e martiri, che, al tempo dell’invasione della Polonia durante la guerra, morirono nel campo di prigionia in una camera a gas.


Il beato Floriano nacque a Zdzary, nei pressi di Nowe Miasto, il 3 gennaio 1912. I suoi genitori erano contadini e si chiamavano Paolo e Anna Misztal. Ricevette il battesimo il 4 gennaio 1912, con il nome di Giuseppe. La madre morí quando egli era ancora piccolo. Il padre si risposò. Terminata la scuola primaria a Zdzary, avvertí un forte desiderio di studiare e di diventare cappuccino. Grazie ai cappuccini di Nowe Miasto ultimò la scuola secondaria superiore e, successivamente, nel 1927, gli studi nel Collegio di S. Fedele dei cappuccini di Lomza. Di capacità mediocri, suppliva alle carenze con la diligenza e la laboriosità. Un suo compagno di studi, fr. Gaetano Ambrozkiewicz, lo descrive cosí: "Un'anima santa. Solidale, franco, allegro, eppure già allora un po' diverso da noi, ragazzi giocherelloni e con la testa fra le nuvole". Aderí al Terz'Ordine di S. Francesco quand'era allievo del ginnasio. In seguito si rivolse all'Ordine dei cappuccini di Nowe Miasto, presso i quali iniziò il noviziato il 14 agosto del 1931 e, insieme all'abito religioso, ricevette il nome di Floriano. Nel noviziato si distinse per il suo zelo, la generosità e la devozione.
Fece la professione temporanea il 15 agosto 1932. Dopo aver terminato il corso di filosofia, il 15 agosto 1935 emise la professione perpetua. Continuò gli studi teologici a Lublino.
Terminati questi, fu ordinato sacerdote il 24 giugno 1938. Dopo di che venne inviato alla Facoltà di Teologia dell'Università Cattolica di Lublino per studiare Sacra Scrittura. Allo scoppio della guerra, il 1° settembre 1939, si trovava a Lublino In quei giorni e mesi cruciali non abbandonò il convento al pari di altri, ma continuò coraggiosamente a confessare i fedeli. Per via delle persecuzioni, molti ecclesiastici si nascondevano e non c'era chi potesse seppellire i morti. Floriano se ne incaricò con grande coraggio e generosità. Non fece altro, in realtà, che mettere in pratica quella frase programmatica della vita religiosa che aveva apposto di suo pugno sulla immaginetta dell'ordinazione sacerdotale: "Siamo pronti a darvi non solo il Vangelo, ma la nostra stessa vita". Una frase che esprimeva l'essenza della sua vita.
Non ebbe modo di operare a lungo a Lublino. Il 25 gennaio 1940, insieme a tutti i frati del convento, fu tratto in arresto dalla Gestapo e imprigionato nel Castello cittadino. L'arresto fu per lui uno schock, ma non crollò e non perse l'ottimismo e l'allegria che, in lui, erano innati. Il 18 giugno 1940, insieme ad altri confratelli, fu tradotto al campo di concentramento di Sachsenhausen. vicino a Berlino. Anche qui non perse il suo bonumore, benché la vita dei lager fosse cosí terribile. Il 14 dicembre 1940 fu trasferito al campo di concentramento di Dachau, dove gli fu dato il numero di matricola 22.738. I suoi confratelli prigionieri lo chiamavano "padre spirituale" del blocco dei condannati e "sole del campo".
Il freddo lo afflisse fino a minare il suo organismo. Era un uomo di struttura forte e robusta, quindi necessitava di molto nutrimento. Alla debilitazione per fame si aggiunse la malattia. Nell'estate del 1942 si ammalò e fu ricoverato nell'ospedale del campo, la cosiddetta "corsia". In quel periodo tutti gli inabili al lavoro e gli infermi venivano destinati, come invalidi, al trasferimento dove c'erano "condizioni migliori". Lí venne destinato anche Floriano. Dopo alcune settimane, nonostante le razioni da fame e la degenza in ospedale, si rimise a sufficienza e fu dimesso. Ma non fu riportato nel suo blocco. In quanto convalescente fu trasferito nel blocco per gli invalidi (numero 29, dispari). Cosí ricorda il comportamento di fr. Floriano il suo compagno di sventura nel lager, fr. Gaetano Ambrozkiewicz:
"Alcuni amici sacerdoti, riusciti a scampare al blocco invalidi, narrarono che fr. Floriano Stepniak aveva portato la luce a quell'infelice baracca. Gli uomini chiusi là dentro erano destinati a morire.
Morivano di stenti a decine e numerosissimi venivano condotti via a gruppi non si sa dove. Soltanto in seguito si seppe che venivano eliminati nelle camere a gas nei dintorni di Monaco. Chi non ha provato il lager non ha idea di cosa significasse per quella gente, solo pelle e ossa del blocco degli invalidi, immersa in un'atmosfera di morte, una mite parola di conforto; che cosa potesse rappresentare per loro il sorriso di un cappuccino ridotto allo stremo come loro".
Quando venne la volta della lettera "S" (il cognome era Stepniak), Floriano fu condotto al reparto degli invalidi, nonostante si sentisse ormai bene e fosse in grado di tornare ai lavoro. Fu ucciso con il gas il 12 agosto del 1942. Il corpo fu con ogni probabilità cremato nei forni. Le autorità del campo recapitarono ai genitori, a Zdzary, l'abito, avvertendoli malignamente che il figlio Giuseppe era morto di ang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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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ta 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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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09-25








 

Beato Sinforiano Felice (Symforian Feliks) Ducki Religioso e martire
11 apr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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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savia, Polonia, 10 maggio 1888 – Auschwitz, Polonia, 11 aprile 1942

Il beato Symforian (al secolo Feliks Ducki), religioso profes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nacque a Varsavia, Polonia, il 10 maggio 1888 e morì ad Auschwitz-Oswincim, Germania (oggi Polonia), l'11 aprile 1942. Fu beatificato da Giovanni Paolo II il 13 giugno 1999.

Martirologio Romano: Nel campo di sterminio di Auschwitz vicino a Cracovia in Polonia, beato Simproniano Ducki, religioso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martire, che, arrestato durante la guerra per la sua fedeltà a Cristo, concluse sotto tortura il suo martirio.


Nacque il 10 maggio 1888 a Varsavia da Giuliano Ducki e Marianna Lenardt. Al battesimo, celebrato il 27 maggio seguente, ricevette il nome di Felice (Feliks). Frequentò le scuole elementari nella nativa Varsavia.
Quando nel 1918 i cappuccini fecero ritorno al proprio convento, abbandonato in seguito alla soppressione zarista del 1864, Felice, "definendosi aspirante di vecchia data all'Ordine", si uní a loro, prima come aspirante, rendendosi utile alla riorganizzazione del convento; e poi come postulante, nel giugno del 1918. Dopo un biennio di prova, il 19 maggio 1920, iniziò a Nowe Miasto, con il nome di Sinforiano, il noviziato, che concluse il 20 maggio 1921 con la professione temporanea. Terminato l'anno dí noviziato, si dedicò al servizio fraterno nei conventi di Varsavia, di Lomza ed ancora di Varsavia (dal 27 maggio 1924), fino alla professione solenne, il 22 maggio 1925.
A Varsavia svolse prima la mansione di fratello questuante, impegnandosi nella raccolta di offerte per la costruzione del seminario minore di San Fedele e poi fu nominato, per diversi anni, fratello compagno del ministro provinciale. Di carattere semplice e amichevole, facilmente conquistava la simpatia del popolo e nuovi amici all'Ordine. Nonostante la sua vita molto attiva tra la gente, non perse mai lo spirito di preghiera e di devozione, distinguendosi per una preghiera devota e fervorosa. Era stimato dagli abitanti della capitale.
Allo scoppio della seconda guerra mondiale si adoperò per non far mancare il necessario né ai suoi frati né ai bisognosi fino al 27 giugno del 1941, giorno in cui la Gestapo arrestò tutti i 22 cappuccini del convento della capitale. In un primo tempo Sinforiano fu internato nella prigione di Pawiak, e poi, il 3 settembre ad Auschwitz. Di costituzione robusta, soffrí piú degli altri la fame e le persecuzioni, sopportando tutto in silenzio. Le misere razioni fornite dai tedeschi, infatti, non coprivano nemmeno un quarto del fabbisogno dell'organismo di un uomo normale. Dopo sette mesi fu condannato a una morte lenta.
Una sera, mentre i tedeschi avevano iniziato a trucidare in modo bestiale i prigionieri, fracassando loro la testa a manganellate, Sinforiano li affrontò facendo su di loro il segno della croce. Il testimone oculare e compagno di prigionia, Czeslaw Ostankowicz, dichiara che ci fu un attimo di sbigottimento, seguito dall'ordine di bastonarlo. Fra Sinforiano fu colpito da una manganellata in testa e stramazzò al suolo, ai piedi dei tedeschi, fra loro e i prigionieri. Poco dopo ebbe la forza di risollevarsi e rifece il segno della croce. Fu allora che lo assassinarono. Era l'11 aprile 1942. La morte dí Sinforiano mise fine alla tremenda esecuzione che i tedeschi stavano perpetrando e una quindicina di prigionieri si salvò grazie al suo intervento. Questi caricarono con grande venerazione la salma di fr. Sinforiano insieme alle altre sul carro che le avrebbe portate al forno crematorio. Con il suo martirio Sinforiano ha dimostrato grande eroismo, ha professato la fede nella SS. Trinità, e ha salvato la vita a molti compagni di sventura.

Fonte:  
 Santa 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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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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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ssed Anicet Koplinski
 
Memorial
16 October

Profile
Friar. Priest. Friend of Blessed Fidelis Chojnacki. One of the 108 Polish Martyrs of World War II.

Born
1875

Died
martyred on 16 October 1941 at the Auschwitz, Poland concentration camp

Venerated
26 March 1999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
13 June 1999 by Pope John Paul II at Warsaw, Poland

Canonized
pending

 


Blessed Fidelis Jerome Chojnacki
Also known as
 Jerome Spurinska
 prisoner 22473


Memorial
 9 July
 12 June as one of the 108 Martyrs of World War Two


Profile
Youngest of six children born to Waclaw and Leokadia Spurinska. Raised in a pious family. Studied in public schools and a military academy. Worked for a year at Szczuczyn Mowogrodzki in the Institute of Social Insurance. Worked at the Central Post Office in Warsaw. Member and administrator of Catholic Action. Worked against alcohol abuse and helped recovering alcoholics in his region. Joined the Secular Franciscan Order at the Capuchin church in Warsaw. Friend of Blessed Anicet Koplinski. Joined the Capuchins on 27 August 1933, taking the name Fidelis. Developed a great devotion to the Blessed Virgin Mary. Studied philosphy at Zakroczym. Founded a Club for Intellectual Collaboration for the seminarians. Continued his work with alcoholics, working a group of Franciscans. Studied theology in Lublin, begining in 1937; his studies were interrupted by the German invasion of Poland in September 1939. Arrested for his faith on 25 January 1940 and held in the "Fortress of Lublin". On 18 June 1940 he was moved to the prison camp at Sachsenhausen. To this point Fidelis has kept his optimism, hope and simplicity, but this camp broke him; the abuse of himself and the other prisoners sent him into depression. On 14 December 1940 he, with other priests and religious, was transferred to the Dachau concentration camp; tattooed with his prisoner number, and subjected to more abuse. Abused, starved and over-worked, he developed a serious heart condition, and finally died of excessive abuse. His last words to fellow prisoners as he was being taken away were, "Praised be Jesus Christ; we'll see each other in heaven."


Born
1 November 1906 at Lodz, Poland as Jerome Spurinska

Died
 martyred on 9 July 1942 at the Dachau concentration camp due to assorted abuse
 body burned in the camp's crematorium ovens

Venerated
26 March 1999 by Pope John Paul II

Beatified
13 June 1999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pending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Kirken i Norge - norwegian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Blessed Symforian Ducki
Also known as
Felix Ducki

Memorial
11 April
12 June as one of the 108 Martyrs of World War II


Profile
Franciscan Capuchin friar. Arrested for his faith in the Nazi persecutions in 1941, and sent to the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Martyr.


Born
10 May 1888 in Warsaw, Poland as Felix Ducki


Died
11 April 1942 at Auschwitz concentration camp (in modern Poland)


Venerable
26 March 1999 by Pope John Paul II (decree of martyrdom)


Beatified
13 June 1999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if you have information relevant to the canonization of Blessed Symforian, contact
   Rev. Tomasz Kaczmarek
   Postulacja Generalna Procesu Meczenników Kosciola w Polsce
   ul. Karnkowskiego 3
   87-800 Wloclawek, POLAND


Additional Information
Hagiography Circle
Kirken i Norge


MLA Citation
“Blessed Symforian Ducki”. Saints.SQPN.com. 11 April 2012. Web. {today’s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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