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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 발령 났을땐 삼성 영향력 실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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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범 [riufsc] 쪽지 캡슐

2008-12-29 ㅣ No.9032

"안식년 발령 났을땐 삼성 영향력 실감”
[2008 사건과 사람]
④ ‘삼성비리 폭로’ 도운 전종훈 천주교사제단 대표신부
 
 
한겨레 김성환 기자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대표신부에게 2008년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일가의 비리 사건에 이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 시국미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올해 내내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성탄 전야인 24일 저녁 서울 성동구 옥수동 성당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몹시 수척했다. 석 달 전 안식년 발령을 받은 뒤 전국 곳곳을 돌며 사제들을 만나고 있다고 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자료 엄청나 외면할수 없어
삼성일가 법정에 세웠지만 면죄부만 줘 씁쓸
‘6월 미사’ 촛불 도덕성·순수성 지키기 위한것

 

그는 이건희 일가의 비리 의혹을 폭로하며 사제단에 도움을 청해 온 김용철 변호사와의 첫 만남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죠. 삼성에서 누릴 만큼 누린 사람이라는 선입견도 있었고요. 하지만 법 위에 군림한 삼성 일가의 비리가 워낙 엄청나고 구체적이어서 사제로서 그의 양심 고백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제들까지 나서서 “법 위에 군림하는 삼성 일가의 오만”을 법정에 세웠지만, 결국엔 삼성 일가에 면죄부만 준 꼴이 될 것 같아 “안타깝고 절망스럽다”고 했다.

그에게 ‘삼성 사태’의 핵심은 불과 2~3%의 지분으로 황제처럼 초법적 전횡을 하고 자식한테 경영권까지 대물림하려는 부도덕성을 끊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은 삼성 사태를 끊임없이 ‘삼성의 위기’로 몰아갔고, 검찰 수사 역시 곁가지에 머물다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전 신부는 “검찰과 특검에서 김 변호사가 제기한 문제는 단 한 건도 제대로 수사를 마무리한 게 없다”며 “이미 결론을 세워 두고 적당히 끼워 맞췄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 신부는 삼성 사태에 대한 면죄부식 수사와 판결이 우리 사회에 결국 ‘돈이 역시 최고’라는 인식을 굳어지게 할 것이란 점을 가장 우려했다. 그는 “정당하지 못한 권력과 부는 반드시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까지도 부패시킨다는 상식이 통하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며 “우리 사회 전체에 너무도 불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전 신부에게 ‘촛불’은 이런 좌절감을 극복하는 희망의 불씨였다. 그를 비롯해 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물리적 대치가 최고조로 치닫던 지난 6월 서울광장에서 시국미사를 열었다. 이어 불교 법회와 기도회가 잇따랐고, 촛불 민심은 비폭력 평화 노선을 이어갔다. 그는 “사제단이 나선 것은 촛불의 세를 확산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촛불의 도덕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당시 촛불 민의에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건 사제들의 몫이 아니라는 판단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전 신부는 지난 9월 천주교 서울대교구로부터 ‘유례없는’ 안식년 발령을 받아 서울 수락산 본당을 떠났다. 그동안 인사 문제에 말을 아끼던 그는 이렇게 속내를 토로했다. “‘우리 사회에선 삼성이 교회 인사권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 신부는 “번잡한 마음을 다스리려” 지난 9월부터 두 달 남짓 ‘오체투지’ 순례를 했다. “모든 게 1980년대로 거꾸로 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번잡함’이 모두 다스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내년 3월 또 오체투지 순례에 나설 계획이라고 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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