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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6일 가지르의 복자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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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19 ㅣ No.2077



축일 6월26일
가지르의 복자 야고보,OFM Cap.
Beato Giacomo da Ghazir (Khalil Al-Haddad) Sacerdote cappuccino, Fondatore
Ghazir, Libano, 1° febbraio 1875 – Beirut, Libano, 26 giugno 1954
E’ stato beatificato il 22 giugno 2008.




십자가의 사도, 가지르의 복자 야고보

시복된 아시아의 첫 카푸친
지난 2008년 6월 22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의 가지르(Ghazir - غزير)의 야고보 형제의 시복식은 첫 레바논 출신 카푸친의 시복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첫 아시아 출신 카푸친의 시복식이기도 했다. 그 시점까지, 비유럽인인 카푸친 형제는 그 누구도 시복되지 않았다. 사실 대다수의 카푸친회 성인과 복자들은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마론 천주교 신자인 소년이 맨발 가난뱅이들의 단체에 합류하다
야고보 형제는 1875년 2월 1일, 베이루트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론교회, 즉 주로 레바논에 거주하며, 동방 의식을 채용하고 있는 한 동방가톨릭 교회 신자들이었던 부트로스 (즉, 베드로) 사례 엘-하따드(Boutros Saleh El-Haddad - بطرس صالح الحدّاد)와 샴스 요아킴 엘-하따드(ShamsYoakim El-Haddad - شمس يواكيم الحدّاد) 부부의 8명의 자녀 중의 셋째 아이였다. 1875년 2월 21일, 가지르의 마론파 교회 성당에서 그는 칼릴(Khalil - خليل)이란 세례명을 받았고, 5년 후인 1881년 2월 9일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1885년부터 1891년까지 칼릴은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에 다녔고, 이어서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베이루트에 위치한 두 군데의 중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16살 되던 해에 그는 이집트로 이민을 갔고, 성 세자 요한 드 라 살의 그리스도교수사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아랍어 선생으로 취직했다.  3년 후, 어느 한 프란치스칸 형제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사제직과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의 씨앗을 그의 마음에 심으시게 되었다. 귀향한 후,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할 허락을 아버지에게 청했지만, 그의 요청은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뭐야, 칼릴? 저 맨발 거지들, 이상한 풍습들을 따르는 저 가난뱅이들, 프랑스에서 온지 겨우 삼년밖에 안 된 저 망명자들 말이냐? 절대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그러나 칼릴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열심한 기도와 설득력 있는 말로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1893년 8월, 그는 카슈바우(Khashbau - خشباو)에 위치한 성 안토니오의 수련원에 청원자로 받아들여졌고, 8개월 후 같은 수련원에서 수련자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수도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수도명은 카지르의 야고보 형제였다. 모범적으로 수련기를 마친 후, 1895년 4월 14일 그는 유기 서원을 발원했고, 3년 후인 1898년 4월 24일에 종신서약을 했다. 신학 학부과정을 완료한 그는 1901년 11월 1일, 사제 성품성사를 받았다. 신학교 시절 내내, 그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미사를 바칠 수 있는 영광과 사제직을 열렬히 갈망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주님, 부디 제가 한 번만이라도 미사를 거행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소서. 그러고 나서 그 후에 당신께서 저를 데리고 가시기로 결정하시더라도, 저는 행복과 위로로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겠나이다.” 




활발한 사도직
수품 후에 그가 맡은 첫 임무들 중의 하나는 베이루트 지방에 위치한 다섯 곳의 형제회의 재무 관리였다. 이 일에는 잦은 여행이 수반되었고, 때때로 심하게 얻어맞고 강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둔 신뢰심 덕분으로 그는 이러한 역경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05년, 그는 레바논의 카푸친 형제들이 운영하는 여러 학교들의 이사장으로 임명되었고, 몇몇 중요한 쇄신을 그 교육체계에 도입했다. 그의 이상은 많은 학생들이 다니는 큰 규모의 학교들이 아니었다. 비교적 적은 수의 학생들이 다니는 작은 학급들과 학교들이었다. 1910년이 되자, 레바논에 7,500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230개의 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가지르의 야고보 형제의 특별한 은사는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국인 레바논에서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라크와 팔레스티나에서도 설교했다. 그는 밤에 성체 앞에서 강론을 준비하곤 했는데, 그의 저서는 8,000여 페이지가 넘는다. 또,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재속삼회 (현재의 재속프란치스코회)를 베이루트에서 설립했고, 루르드와 아시시 그리고 로마로 성지순례를 갔는데, 로마에서 그는 성 비오 10세 교황을 만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가정의 친구’라는 이름이 붙여진 월간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프랑스 출신 카푸친들이 레바논을 떠나야 했고, 그 선교지의 관리는 야고보 형제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그는 용기 있고 노련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삼회 회원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 피해자에게 빵을 배급하는 일과 썩어가도록 방치된 거리의 시신들을 매장하는 일을 조직했다. 무일푼에 몹시 탈진한 그는 레바논의 카푸친 선교지를 교황청에 이양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어쨌든, 터키 침략군으로부터 늘 상존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1915년 터키군의 그리스도인 집단 학살 동안 순교한 동료 카푸친 바압다트(Baabdath - بعبدات)의 레오나르도 형제와는 달리, 간신히 체포를 모면하며 무사히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레바논의 충실한 아들
대전 이후, 참된 애국자였던 가지르의 야고보 형제는 고국을 재건하는 일에 매진했다. 고국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레바논에 대해 말했다.  “우리 부친들과 조상들의 국토인 레바논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밟으실 수 있도록 하늘에서 떨어진 천국의 한 조각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티로와 시돈을 방문하셨던 그 날에 레바논을 축복하신 것이니 레바논은 진정한 신앙의 반석, 사랑의 순수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의 쇄신을 위해 세 갈래의 전략을 펼쳤다. 그것은 쇠퇴해가는 시민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의 신앙 양성을 통해 가정생활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재속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복음 간증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되어 있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레바논에 삼회를 확산시키고 보강시킬 목적은 이것입니다. 헌신적으로 복음을 살아가는 것으로써 신앙에 대한 평신도인 증인들을 찾는 것.” 신앙에 대한 열성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인해 그는 레바논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사랑받게 되었다. 1936년, 에밀 에떼 (Emile Eddeh - إميل أده) 레바논의 대통령은 장관급의 향백목 훈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1954년 그의 장례식 때에도 동일한 훈장인 황금 메달이 카밀 샤문 (Camille Chamoun - كميل  شمعون) 대통령에 의해 수여되었다. 하지만 야고보 형제 스스로는 “나의 훈장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라고 말하곤 했다. 




레바논의 십자가 사도
레바논에서 커다란 십자가 세우고자 하는 야고보 형제의 오랜 꿈은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국에 대한 헌신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는 그 십자가 성지가 그저 삼회 회원들이 만나는 장소인 것뿐만 아니라,  특히 전쟁 때에 사망한 전사자들과 구직 때문에 레바논을 떠난 이민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장소도 되기를 바랐다. 모인 돈의 도움으로 1923년, 그는 바다의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과 그리고 나중에, 병원과 고아원, 은퇴한 사제들을 위한 노양원이 포함된 이 계획을 끝마쳤다. 십자가에 대한 그의 사랑이 매우 유명했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십자가의 사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는 직접 매일 십자가의 길을 기도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기도를 장려하곤 했다. 그의 출판물 중에는 십자가의 길에 대한 묵상집이 있으며, 자신의 물질적 자선행위 프로젝트를 운영하기 위해 스스로 창설한 삼회 수녀단체도 ‘레바논의 십자가의 프란치스코 수녀회’라고 불렸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격언들 중에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나 스스로 십자가를 운명으로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1온스(28.35 그램)는 1톤의 기도서보다 낫습니다.” “오! 나의 마음에 너무나 소중한 주님의 십자가여!”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낡아빠진 십자가를 손에 든 채로 세상을 떠났다. 십자가에 대한 사랑 외에도 또한 야고보 형제는 성체와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을 품었다. 그는 묵주기도 15단을 매일 바치곤 했고, 성모님을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완전한 인도자로 여겼다. “마리아님을 상경하는 일은 아무리 신성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저 예수님께로 이끄는 문일 뿐입니다. 마리아님께서는 수단이신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목적지이십니다.” 야고보 형제가 지상에서 살면서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체 앞에서 조배를 하는 것이었다.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조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곤 했다. “제가 감실 안에 당신을 가두는 것보다 행렬을 지어 온 거리들을 누볐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 런지요!”




창설자 야고보 형제

1920년대 즈음, 그는 공공병원에서 투병하는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해달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는 빈약한 의료시설로 인해 그 사제가 처한 가련한 상태에 놀라고, 또 그곳에서 미사를 바칠 수 없는 사제의 상황에 놀라, 그 사제를 바다의 성모님의 시설로 이동시켰다. 얼마 안 되어 다른 병든 사제들도 그곳으로 오게 되었다. 또 그는 런-르-소니(Lons-le-saunie) 출신, 무염시태의 프란치스코 수녀들의 도움으로, 첫 번째 수녀와 공동창설자가 된 마리아 주게입 (Marie Zougheib ماري زغيب)이 포함된 몇몇 처녀들을 양성시켰고, 1930년에 이들을 ‘레바논의 십자가의 프란친스코 수녀회’로 조직했다. 야고보 형제는 이들이 다음과 같은 자선 행위를 절대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즉 병들거나 노쇠한 사제들에 대한 병원치료, 신체 장애인들과 맹인들 그리고 불구자들과 지적 장애인들 그리고 버려진 이들과 불치병 환자들에 대한 간호, 고아들의 교육 및 돌봄. 1919년에 그는 짤-엘-띠브 (Jal El-Dib - جل الديب)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학교(현재의 발 산 자크 - Val Saint Jacques)를 이미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었지만,  1993년 그 수녀들의 도움으로 그는 또 장애인 소녀들을 위한 병원을 데이르 엘-카마르  (Deir El-Qamar - دير القمر)에 설립했다. 그리고 1941년 브켄나야 (Bkennaya - بقنايا)에 ‘우물의 성모님 수녀원’을 설립했고, 그곳의 수녀원과 함께 수녀회의 총청과 청원소와 수련소와 영성 피정과 기도모임들에 참여하는 손님 숙소를 건립했다. 1946년에는 안텔리아스(Antelias - أنطلياس)에 만성질환자들과 노인들을 위한 ‘성모님의 병원’을, 1948년에는 도라 (Dora - الدورة‎)에 ‘성 요셉 병원’을 설립했다. 또 그는 1950년 브룸마나 (Brummana - برمانا‎)에 고아들과 가난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을 위해 ‘십자가의 수녀들’이 운영할 학교를, 1950년에는 주크-모스베 (Zouk-Mosbeh - زوق مصبح)에 ‘그리스도 왕 호스피스’를 설립했다. 그리고 1951년, 그는 정신병 치료만을 다루는 ‘십자가의 병원’을 설립했다.




레바논을 다시 뭉치게 하다
그러나 불가피한 노령성 질환은 이 활기찬 카푸친 형제의 기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이미 온 레바논에 걸쳐 ‘야고보 신부’ 또는 ‘아빠 야곱’이란 뜻인 ‘아부우나 야아쿠우쁘 (أبونا يعقوب)’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1954년 6월 26일 새벽, 그는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오.”라고 말했고 오후 3시에 선종했다. 라디오와 신문, 그의 친구들과 마을 성당의 종소리들은 그의 선종을 알렸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조문하고 기도하고 마지막 축복을 받기 위해 십자가의 카푸친 형제회에 몰려왔다. 그의 시신은 새롭게 완공된 해골산 경당에 안치되었는데, 그 경당은 곧 계속 늘어나는 순례자들로 방문 받는 곳이 되었다. 야고보 형제의 시복식을 경축하기 위해 베이루트의 순국자 광장에 수만 명의 레바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을 대표하는 마르덴스 추기경이 ‘칼릴 엘-하따드’라고도 하는 이 레바논의 충성어린 아들이요, 카푸친 수도회의 ‘아부우나 야아쿠우쁘’를 복자로 선포했다. 그러자 가지르의 야고보 형제의 조상화의 덮개가 벗겨지고, 전쟁으로 파괴된 근래 레바논 역사의 수많은 비극적 사건을 목격한, 그 피로 물든 광장에 환성이 울려 퍼졌다. 파벌의 전쟁과 국제 충돌에 찢어진 나라에서 그의 시복이 일치에 대한 희망이 가득찬 순간이었다.



“신뢰심이 없는 기도는 주머니에 있는 편지와 비슷합니다.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고통 없이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지 자신의 돈을 내지 않고서 물품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가지르의 복자 야고보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Beato Giacomo da Ghazir (Khalil Al-Haddad) Sacerdote cappuccino, Fondatore
26 giugno 
Ghazir, Libano, 1° febbraio 1875 – Beirut, Libano, 26 giugno 1954


Abuna Yaaqub El-Haddad, terzo di cinque fratelli, è nato in Libano il 1 febbraio 1875. Nel 1892, mentre era in Egitto dove lavorava come insegnante, sentì la vocazione sacerdotale. Decise quindi di entrare nel convento cappuccino di Khashbau l'anno seguente. Yaaqub prese i voti perpetui nel 1898 e divenne prete nel 1901.
Venne assegnato al monastero di Bab Idriss a Beirut. Da lì, lavorò con dedizione per costruire scuole elementary per I bambini delle campagne. Inolte, dette vita al terz'ordine per uomini e donne.
Sulle orme di San Francesco d'Assisi, il beato libanese è stato un instancabile apostolo della carità, plasmata nella sua sollecitudine per le necessità fisiche e morali del prossimo.
Subito dopo la prima guerra mondiale, padre Yaaqub acquistò la collina di Jall-Eddib dove voleva costruire una chiesa ed erigere una croce, e che divenne presto un luogo di raccolta di sacerdoti malati, e di altri poveri che chiedevano assistenza.
Per dare continuità al suo lavoro, in questo luogo, fondò nel 1930 la congregazione religiosa delle Suore Francescane della Croce del Libano, che da allora si dedicano alla cura dei disabili, degli handicappati mentali, delle persone anziane e incurabili abbandonate dai loro familiari e dagli ospedali, e all'educazione degli orfani.
Il postulatore della Causa di beatificazione, padre Florio Tessari, in una intervista alla Radio Vaticana ha parlato della sua instancabile opera di predicazione in Libano, Palestina, Iran e Siria.
“I suoi 24 volumi manoscritti di discorsi in arabo – ha aggiunto – testimoniano l’impegno della sua vita nell’evangelizzazione. Poi la sua attività sociale. Fondò scuole, ospedali, orfanotrofi”.
“É stato definito 'un altro san Vincenzo de’ Paoli', nonché 'il Don Bosco' e 'il San Giuseppe Cottolengo del Libano' per le sue opere di beneficenza che scaturivano dal suo cristocentrismo francescano”.
“La sua immensa carità, espressa in molteplici iniziative, nasceva dalla vitale incorporazione al Cristo sofferente in sé e nelle sue membra, la cui Croce tanto amata fu la teologia e la prassi della sua lunga vita sacerdotale”, ha sottolineato.
“Niente cielo senza croce – scriveva padre Yaaqub –. Chi vuole il cielo senza sofferenza, è come chi vuole comprare merci senza pagare”.
Morì il 26 giugno del 1954, stringendo a sé una croce.
E’ stato beatificato il 22 giugno 2008.

 

Fonte:    www.zenit.org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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