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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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VeNiVeDiVeCi] 쪽지 캡슐

1999-05-15 ㅣ No.530

 

 

산 하나가 나의 눈앞에 펼쳐져 있어.  웅장하여 경외감마저 부르는.

 

그리고 나의 바로 앞에는 높이가 2미터도 채 안 되는 담벼락이 하나 있지.

 

그런데 담에 가까이 갔더니 그 담의 키가 갑자기 커지기 시작하는거야.

 

그럴수록 그토록 거대했던 산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갔어.

 

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벼락에 다가섰지.

 

담의 차가운 표면에 나의 코끝이 닿아버렸어.

 

그리고 그 담이 끝내 산을 완전히 가려버렸어.

 

더 이상 산이 보이지 않아...

 

 

이런 기적이 또 있을까!

 

그렇게 작디 작은 담 하나가 그 커다란 산을 완전히 가려버리다니.

 

그러나.   산이 실제로 없어진 것은 아니었어.

 

그렇다고 산이 작아진 것도 아니었어.

 

산은 그냥 거기..  그대로 있었어..

 

 

 

하느님이 계시다. 강하고 전능하신.

 

그리고 나의 바로 앞에는 그 분께는 문제거리조차 안되는 문제 하나가 있다.

 

그런데 그 문제에 가까이 갔더니 고뇌가 더욱 커지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그보다 훨씬 더 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간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문제에 빠져든다.

 

절망이라는 절벽의 나락 끝에 나의 발이 닿았다.

 

그리고 끝내는 그 문제가 하느님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더 이상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기적이 또 있을까!

 

그렇게 작은 인간의 문제 하나가 전능자이신 하느님을 완전히 가려버리다니.

 

그러나.   하느님이 실제로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무능해지신 것도 아니었다.

 

하느님은 그냥..   그대로 계셨다..

 

 

사람이라는 연약한 존재는

믿음으로 산을 옮기리라던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멋대로 적용해버리고는

기적을 이루었다고, 자기가 산을 옯겼다고 자부하네.

 

 

믿는 이에게 기적이라는 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라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그럴 거라고 믿지 못하는 것,  그것이 '기적' 아닌가?

 

작은 문제 하나가 하느님을 완전히 가려 버린 것처럼.

 

 

우리의 치열하고도 슬픈 하루를 북돋아주는 것은

 

거창하고 화려한 한통의 편지도,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도,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지나친 관심도 아니다.

 

멀리서라도 지켜봐주는 눈, 지고의 별들을 친구 삼아 그 빛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꿈이다.

 

 

 

힘든 몸과 마음으로 천천히 담에서 물러섰다.  그랬더니,

 

이럴수가!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산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위를 드리운 파란 하늘도.

 

아카시아 향기 풀냄새 가득한 봄거리.

 

 

함께 누리는 매일매일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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