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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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0-22 ㅣ No.2115


초대 교회 안에서 골칫덩어리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안 믿는 유다인들이 아니라 믿는 유다인들이 문제였습니다. 이 유다계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댑니다. 누구나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했으면,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옛 조상이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며,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거듭거듭 설명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대단한 존경을 받는 구약의 성현 두 분(아브라함과 다윗)을 거론하며, 로마서 3장에 이어 4장에서도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 로마 3,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 로마 4,1-25
아브라함의 믿음
1 그렇다면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9 그렇다면 이 행복이 할례 받은 이들에게만 해당됩니까? 아니면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해당됩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10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은 다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입니까? 할례 받은 다음이 아니라 할례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11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할례라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2 또한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이들의 조상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걸어간 그 믿음의 발자취도 따라 걸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4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19 백 살가량이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도 죽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율법 이전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윗은 율법 이후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긍지를 높여준 인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음을 밝힌다면, 아무리 고집불통 유다인이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1장 1절(“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을 기억하십니까?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들을 위해서 쓴 복음서라고 합니다. 그러니 유다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수님과 연결지어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로마 4,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로마 4,11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할례라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로마 4,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그는 이천년 후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들을 미리 보았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6). 불가능한 일로 보이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믿음의 세계는 은총의 세계입니다.

아브람이 주님 말씀에 따라 하란을 떠날 당시의 나이가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 창세 12,1-4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스켐의 성소 곧 모레(가나안 사람의 이름, 그 이름을 딴 언덕. 판관기 9장 37절에 따르면 ‘점쟁이’를 뜻하기도 함.)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창세 12,7 참조). 어떤 장소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그 장소를 점유하였다는 상징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기 24장에 따르면, 스켐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모여서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께 신앙 고백과 다짐을 했던 뜻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여호 24,24). 이집트에서 돌아온 요셉의 시신을 안장한 곳도 스켐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돈 백 닢을 주고 산 밭에 안치된 것입니다(여호 24,32 참조).

아브람은 또한 베텔(‘하느님의 집’이라는 뜻)과 아이(암몬족 도시) 사이에서도 주님을 위하여 두 번째로 제단을 쌓았습니다(창세 12,8 참조). 주님의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전에 많은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우선,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큰 위기를 겪습니다.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피신한 아브람이 자신의 목숨을 건지려고 아내 사라이를 이집트 왕의 아내로 보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판단하면, 매우 부도덕한 행위였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죄를 묻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셔서, 결국 아브람은 재산을 늘려 이집트를 떠납니다. (창세기 20장에서도,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살리려고 아내를 또 누이라고 말하여,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창세 20,2)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아내를 돌려받았지만 이 또한 떳떳한 행동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는 말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창세 20,12 “그 여자는 정말 나의 누이입니다.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달라서 내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람에게 주님께서는 또다시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창세 13,14-17). 아브람도 주님을 잊지 않고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활력, 강하다는 뜻. 아모리인의 이름)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세 번째로 제단을 쌓았습니다(창세 13,18).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도, 모레의 제단을 쌓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므레의 제단까지 꾸준히 쌓아 확고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 이어 창세기 15장 5절에서도 거듭 복을 약속하셨고, 이때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75세)한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주님의 약속은 실현될 조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자기의 이집트인 여종에게서 아들을 얻으라고 권합니다. 아내의 권고를 들은 아브람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아브람은 사라이의 말을 들었다”(창세 16,2). 그리하여 아브람의 나이 여든여섯 살에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주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몰랐던 사라이와 아브람은 자기들 나름대로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아마도 절망적인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 같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은총, 완전한 선물을 베푸시기를 바라셨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리라는 굳은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창세 16,3 그리하여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자기의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를 데려다,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지 십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창세 16,16 하가르가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줄 때,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 살이었다.

비록 아브람이 창세기 15장에서 주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의로움을 인정받았으나, 그 믿음은 시련을 거치며 정화되고 성장해야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인간적 판단으로 태어난 이스마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더 기다립니다. 이스마엘의 동생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브람은 자신의 결정과 행위를 뉘우치고 다시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나고도 13년이 더 지났을 때, 곧 아브람이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하란을 떠난 지는 24년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라이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로 고쳐 주시며, 그들 사이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립니까?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희망, 믿음과 희망 속에서 기다림, 이것들이 우리 신앙의 척도입니다.)

창세 17,1-2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그러나 주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고는 하가르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나 돌보아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시며 당신의 약속을 확인하여 주십니다.

창세 17,17-21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 살 된 자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 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18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서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하고 아뢰자
19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 너는 그 이름을 이사악이라 하여라. 나는 그의 뒤에 오는 후손들을 위하여 그와 나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
20 이스마엘을 위한 너의 소원도 들어 주겠다. 나는 그에게 복을 내리고, 그가 자식을 많이 낳아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그는 열두 족장을 낳고, 나는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21 그러나 나의 이 계약은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너에게 낳아 줄 이사악과 세우겠다.”

이스마엘(‘하느님께서 들으신다’는 뜻.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실 뿐 아니라 이스마엘의 하느님이시기도 함.)에게도 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참 잘해 주십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나의 벗 아브라함”(이사 41,8)이라고까지 하십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에도 “하느님의 벗”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 야고 2,20-23
20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3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벗’으로 불리게 하였을까요? 오륜(五倫) 가운데 하나의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는 말처럼, 또 야고보서 2장 23절의 말씀처럼, 벗들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아브라함도 하느님도 자신의 외아들을 제물로 바친 분들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믿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이사악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주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곧,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자신과 이스마엘을 비롯하여 집안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할례는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과 맺으신 “계약의 표징”(창세 17,11)입니다.

할례는 선택된 백성에 속한다는 표지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야 할 만큼 불경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이 같은 할례의 지고한 가치를 끌어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백성의 상징인 할례가 오히려 주님 백성을 분열시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창세 17,2)는 것이 할례의 본뜻일 것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백 살이 되었을 때, 사라에게서 아들 이사악(‘하느님께서 웃으시기를!’, 곧 ‘하느님께서 호의적이시기를!’)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시험을 당합니다. 외아들을 바치라는 주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제단을 쌓은 곳은 모리야(‘주님께 보여짐’이라는 뜻) 땅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창세 22,2)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역대기 하권에 따르면, 모리야 산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2역대 3,1).

* 창세 22,16-18
16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로마서 4장 3절(“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과 창세기 15장 6절(“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은 야고보서 2장과 창세기 22장 16-18절과 합하여 해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컨대, 믿음과 의로움은 실천과 순종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믿음의 순종”(로마 1,5)으로 표현하였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창세기 23장에는 사라의 죽음 이야기가 나옵니다(창세 23,1 “사라는 백이십칠 년을 살았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위하여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에게 은 400세켈(1세켈=약 11.5g)을 주고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에 있는 에프론의 밭, 곧 밭과 그 안에 있는 동굴과 그 밭 사방 경계 안에 있는 모든 나무”(창세 23,17)를 매입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돈으로 500만 원도 안 되지만, 이 막펠라 땅이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이 소유한 유일한 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사라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도 안장되었습니다. 이처럼 시작은 미약하지만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창세기 25장 보면, 아브라함은 새 아내를 맞아들여, 여섯 명의 아들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칠십오 살까지 장수하고는 선조들 곁으로 갔습니다.

* 창세 25,1-2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그의 이름은 크투라였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지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를 낳아 주었다.
* 창세 25,7 아브라함이 산 햇수는 백칠십오 년이다.

로마 4,6-8에 다윗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여기에서 시편 32편이 인용되는데, 이 시편 저자(시편 32편은 다윗 시대 이후의 작품이지만 바오로 사도는 당대 유다인들처럼 시편을 다윗이 쓴 것으로 여김)는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잘못을 자백하였을 뿐인데, 잘못을 덮어 주시고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셨습니다.

* 로마 4,6-8
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로마 4,6-8에 따르면, 의로움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죄의 용서를 뜻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으려면 잘못을 자백해야 합니다. 잘못의 자백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계심을 믿는다는 증거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을 믿었기에, 죄를 자백한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를 낳습니다. 믿음의 증거가 없다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를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증거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마음속 내밀한 곳까지 들여다보시는 하느님에게는 훤히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시편 32편 (죄를 용서해 주신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 기도)
1 [다윗. 마스킬]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2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
3 제가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하였더니 나날이 신음 속에 저의 뼈들이 말라 들었습니다.
4 낮이고 밤이고 당신 손이 저를 짓누르신 까닭입니다.
저의 기운은 여름날 한더위에 다 빠져 버렸습니다. 셀라
5 제 잘못을 당신께 자백하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러자 제 허물과 잘못을 당신께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셀라
6 그러므로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모두 곤경의 때에 기도드립니다.
큰물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미치지 못하리이다.
7 당신은 저의 피신처.
곤경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환호로 저를 에워싸십니다. 셀라
8 나 너를 이끌어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르치고 너를 눈여겨보며 타이르리라.
9 지각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재갈과 고삐라야 그 극성을 꺾느니. 그러지 않으면 네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
10 악인에게는 고통이 많으나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자애가 에워싸리라.
11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잠시 생각해 보시지요.

저는 죄와 은총에 관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물으신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에 아브라함은 아내를 다른 사람의 아내로 넘기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입니다. 믿음이 약해져서인지 인간적 판단으로 아내의 몸종에게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또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으리라는 주님 말씀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한 모든 죄에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는지 더 열심히 주님께 기도하고 순종하였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창세 12,7; 12,8; 13,18; 22,9). 소돔을 위해서도 기도하였고,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주님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 한결같이 완전한 믿음을 지녀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환경에 살면서, 비록 가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꾸준히 믿음을 길렀고 마침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마저 번제물로 바치는 신앙의 증거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완전해지기 위해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은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모든 신앙인의 조상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 굳건한 신앙, 완전한 신앙을 청하려면, 또 얻으려면 그만한 시련을 겪을 각오도 해야 할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비 온 뒤의 진흙처럼 더욱 굳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거짓 믿음은 햇볕에 녹는 왁스와 같습니다.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비 온 뒤 더욱 견고해지는 진흙과 같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햇볕에 녹아버리는 왁스와 같은 믿음입니까?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1절)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6절).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7절).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떠났습니다(8절).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16절). 모세는 “앞으로 받을 상을 내다보고”(26절) “죄의 일시적인 향락을 누리기보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25절). 그는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굳건히 견디어 냈습니다”(27절).

* 히브 11장 (믿음장) -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사악, 야곱, ......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20 믿음으로써, 이사악은 장래의 일을 두고 야곱과 에사우에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21 믿음으로써,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아들들에게 하나하나 축복해 주고, “지팡이 끝에 의지하여 하느님께 경배하였습니다.”
22 믿음으로써, 요셉은 죽으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탈출을 언급하며 자기의 유골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지시하였습니다.
23 믿음으로써,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그의 부모는 그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아기가 잘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명령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24 믿음으로써,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파라오 딸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였습니다.
25 죄의 일시적인 향락을 누리기보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26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보물보다 더 큰 재산으로 여겼습니다. 앞으로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27 믿음으로써, 그는 임금의 분노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굳건히 견디어 냈습니다.
28 믿음으로써, 모세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피를 뿌려, 맏아들과 맏배의 파괴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29 믿음으로써, 그들은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넜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30 믿음으로써, 사람들이 이레 동안 예리코 성벽을 돌자 그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31 믿음으로써,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화로이 맞아들였기에, 순종하지 않은 자들과 함께 망하지 않았습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벗어났으며, 약하였지만 강해졌고 전쟁 때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으며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39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매년 9월에는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순교자의 신앙을 되돌아봅시다. 신앙의 증거, 그 절정은 순교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목숨까지 바치게 하였을까요?

신유박해 순교자 황일광(黃日光, 시몬, 1756-1802년)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교우들이 그를 애덕으로 감싸 주고 모든 교우들과 똑같이 대하니,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참조: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188쪽). 또 유군명이란 분은 이존창에게서 세례명 시메온으로 영세한 뒤에, 자기 종들을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참조: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중), 안응렬ㆍ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47-48쪽).

이 땅에 살았던 신앙 선조들은 신분의 차별 없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고 서로 교우(敎友)라고 불렀습니다. 남녀의 차별 없이 서로 동일한 인격체로 대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교우들의 형제자매 공동체는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가 없었다면, 순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서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 ‘보이지 않는 천국’을 보여 줍시다! 주님의 날을 미리 보고 기뻐한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만날 그날, 천국의 나날을 내다보고 바라보며 신앙의 여정을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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