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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3일 아비아노의 복자 마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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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12 ㅣ No.2076



축일 8월13일
아비아노의 복자 마르코, O.F.M.Cap.
Beato Marco d’Aviano Cappuccino
Aviano, Pordenone, 17 novembre 1631 - Vienna, 13 agosto 1699

Blessed Mark of Aviano
Also known as : Carlo Domenico Cristofori, Marco D’Aviano, Marco of Aviano
Born : 17 November 1631 at Aviano, Italy as Carlo Domenico Cristofori
Died : 13 August 1699 of cancer in Vienna, Austria
Venerated : 6 July 1991 by Pope John Paul II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 27 April 2003 by Pope John Paul II



하필이면 나쁜 때?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카푸친회의 가경자인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를 시복할 것을 발표하자, 수많은 서양 매체의 논평자들은 그 같은 조치는 시기도 좋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도발적인 행동으로 여겼다. 어떤 논평자들의 보기로, 9.11과 그 사건에 뒤따른 이슬람 과격분자들을 주로 겨냥한 미국 주도의 대 테러전 발발 2년 만인, 1683년 9월 12일, 빈(Vienna) 포위작전의 해제를 위해 그리스도교군을 조직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시복하는 것은, 가톨릭교회가 전투적 이슬람의 광신주의 확산과 많은 유럽 국가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대항하는 서양 세력에 편승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청은 서구의 전략적 관문인 빈을 포위한 터키군을 패배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교 통치자들을 일치시킨 마르코 형제의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역할이 이슬람을 종교로서 공격하는 일이나 혹은 일종의 '선제적 십자군원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교회 관리들은 오히려 마르코 형제가 당시에 우연히 오토만 황제였던, 그 침략자로부터 자주국방하는 일에 있어 빈의 시민들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전 국민들을 도와 준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들은 마르코 형제의 시복에 있어서, 현대인들을 위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반이슬람주의의 메시지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유럽인들이 자기들의 공통적 유대그리스도교 종교유산을 인식하라는 호소였음을 덧붙였다. 그러나 사실, 이것 역시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가 시복을 받게 된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시복을 받게 된 주된 이유라면, 다른 성인들과 복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가 진정한 성덕의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의 성덕을 확인해주는, 사후의 입증된 그 기적들이 그의 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십대의 무단결석생이 카푸친회에 입회하다
마르코 형제는 크레타 섬에서 터키군과 전쟁 중인 베네치아의 군대에 입대하려고 학교를 도망쳐 나오는 도중, 카푸친 수도회의 형제회들 중 한 곳에서 묵을 곳을 찾았고, 1년이 지난 후,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 형제회의 수호자는 16살짜리 그 모험가에게 숙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어버이에게로 돌아가라는 현명한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의 부모, 마르코 크리스토포리(Cristofori)와 로사 잔노니(Zanoni)는 또 다른 10명의 자녀를 둔 부유한 중산층의 부부였다. 1631년 11월 17일, 아비아노에서 훗날 마르코 형제가 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그에게 '카롤로 도미니코'라는 세례명을 붙여주었다.그들은 기본 교육을 집에서 시킨 다음, 어린 카롤로 도미니코를 고르치아(Gorzia)의 예수회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카롤로 도미니코 크리스토포리가 전쟁터로 가려고 달아난 학교가 바로 이 기숙학교였다. 그는 달아나다가 굶주리고 지쳐서 결국 숙식을 얻기 위해 카포디스트리아(Capodistria)에 위치한 카푸친 형제회의 문에 두드리게 된 것이었다. 비록 그가 수호자 형제의 조언대로 귀가를 했지만, 1년 후에 그는 카푸친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1648년 9월,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수련자로 받아들여졌고, 1년 후 1649년 11월 21일, 종신 서약을 하면서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서약한 다음에 그는 진학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노동과 기도로서 1년간의 성찰 기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필수적인 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동안은, 설교하기 위해 사제 서품을 받고자 하는 그의 꿈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해성사나 설교할 특별권한 없이 단순히 ‘미사 사제’로서만 서품을 받는 것에 만족해야만 할 것처럼 보였으나, 1653년, 총봉사자가 관구를 방문하여 마르코 형제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마르코 형제가 설교와 고해성사에 필요한 특별권한을 얻을 수 있게 할 특별한 학업과정을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1655년,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는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었고, 즉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열정으로 설교 직무에 투신하게 되었다.

카푸친들의 설교방식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의 유럽 설교자들의 강론은 그리스도와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것보다도 여러 신화와 우화와 문학적 암시, 그리고 박식한 작가들 저서에서의 잦은 인용과 고전적 웅변술의 수사학 장치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 설교자들의 목적은 듣는 이들에게 감명과 흥미를 주려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자주 연극조의 언동을 쓰곤 했다. 이런 설교와 대조적으로 당시의 카푸친 회헌은 진정한 설교를 위한 규범을 제정했는데, 그 규범에 의하면 설교의 내용은 ‘벌거벗으신 십자가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야 하며, 연설 방식은 '소박하고 단순하며 겸손하지만 사랑으로 가득하고 열정하며 신심어린 말로' 된 꾸밈이 없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카푸친 설교는 성경에 기반을 두는 설교였으며, 복음의 진리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모시키려는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그 설교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접해진 하느님 말씀이 깊이 묵상되고 기도의 대상이 되는, 그런 기도생활로부터 우러러났기 때문이었다. 비록 마르코 형제 또한 처음에는 동시대인들의 설교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유혹을 받긴 했지만, 점차적으로 진정한 카푸친 식의 설교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기도함으로써 하느님 말씀 듣기
!
마르코 형제의 설교가 대성공이었던 주된 원인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강론들에 흠뻑 스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하느님 말씀이 웅변술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는 독서와 묵상 안에서 성경에 따른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와 관상 안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그 말씀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초기 카푸친 회헌의 말을 바꾸어 보자면, 그는 예수님께서 '그로 하여금 사랑의 충만함으로 말하게 해주실 수 있을 만큼' '복되신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에 새겨'두었다. 실제적으로도 마르코 형제는 설교하지 않는 자신의 나머지 시간 중 대부분을 기도에 바치곤 했다. 설교하느라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후, 보통 그는 그다지 잠을 자지 않고 밤 10시까지 가대석에 머무르곤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두 시간쯤 자신의 독방에서 쉰 다음, 조과(독서기도나 심야기도)를 하기 위해 한밤중에 제일 먼저 일어나서 가대석으로 나오는 형제들 중에 하나였다. 그 뒤에 그는 잠자는 동료 형제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자신의 샌들을 손에 들고, 조용히 가대석에 돌아가서 아침까지 주님께 기도하곤 했다. 그렇게 새로운 하루일이 시작되어도 그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고, 증인들에 의하면 분심을 일으킬 수 있는 활동 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하느님께 드높여 있는 채로 마음을 계속 유지했다’고 한다. 그의 설교 여행 후에, 그는 ‘자신의 독방에서 하느님께 완전히 몰두하여 새롭게 하느님 사랑에 불타게 되도록’ 그곳으로 되돌아가기를 좋아했다.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그는 준비를 철저히 했으며, 미사성제에 대한 그의 신심이 그토록 깊었기에 그 신심은 전염성이 있는 것이었다. 증인들은 '그가 제단 앞에 서면 그 자신의 열정으로 모든 이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미사 거행은 종종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고, 축성 시에 그는 황홀경으로 인해 자주 넋을 잃곤 했다. 그는 또한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을 품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모님께 당신의 힘찬 도움을 크나큰 신뢰심으로 청하도록 권하곤 했다.



설교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나눔!
마르코 형제는 자신의 심오한 기도생활 덕택에 '세라핌들처럼 불타서', 스스로에게 불붙음으로써 타인도 불타게 할 수 있었다. 그의 설교에 대한 동시대인이 쓴 다음의 보고는 그 사실을 뚜렷하게 시사한다. "그분의 강론은 훌륭했다. 그리고 그분의 연설은 질서가 잘 잡혀있어서 매우 마음에 들었고, 또 설득력이 있어서 아무리 길게 말하더라도 그 누구도 듣는데 피곤하지 않았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에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분은 빨리 말씀하셨고, 신적인 화술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그분은 은유나 그와 비슷한 장치들을 사용하는 현대적 유행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분의 강론들은 일관되고 균형이 잘 잡힌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샘솟을 정도로 풍부한 감정으로 설교했다. 그가 손에 쥔 십자고상을 추켜세우면서 회중에게 이 현세의 사물에서 이탈하여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라고 권고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그의 모든 말과 몸짓에 주의를 기울이려 무리지어 모여들곤 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자비를 구하는 외침으로 반응하곤 했다. 그가 지역의 나랏말을 모르면서 독일과 다른 유럽 지방에서 설교할 때에도, 엄청난 수의 회중들이 주의 깊게 들었으며, 그의 말의 실제적 뜻보다는 설교자의 눈의 띄는 신실함으로 감명을 받았다.

치유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실행함!
1676년 9월 8일, 수많은 기적 중의 첫 번째 기적이 발생하자 마르코 형제의 '인기율'은 치솟게 되었다. 그 날, 그는 13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운 수녀에게 강복했는데 그 수녀가 즉시 낫게 되었다. 그 기적에 대한 소식이 바깥으로 퍼지자, 축복과 치유의 기적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마르코 형제가 머무는 곳 어디든지 몰려왔다. 그가 외딴 시골 형제회로 이동될 지라도, 군중들로 인해 많은 불편을 느낀 동료 형제들이 대단히 유감스럽도록 사람들은 역시 그를 따라 그곳으로 뒤따라갔다. 마르코 형제의 축복의 결과로 기적들은 도처에서 크게 증가했지만, 그는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통회의 기도에 대한 '짤막한 연설'을 함으로써, 기적을 일으키는 이 은사를 복음전파의 순간으로 바꿀 방법을 창안했다. 이 연설들은 점차 그 나름의 모양을 취하게 되어 결국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가 되었다. 열의에 불타게 된 그는 청중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신뢰, 또 그들의 통회와 회심을 표현하도록 권했으며, 듣는 이들은 자주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을 쳤고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십사고 간청함으로써 그 말씀에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 '짤막한 연설'들은 늘 진심어린 통회의 기도를 공동적으로 외움으로써 끝맺음을 맺었다. 머지않아 '통회기도의 사도'로 불리게 된 마르코 형제는 이 신심을 격려하기 위해 통회의 기도를 선전하는 팸플릿들과 상본들을 몸소 작성하고 인쇄하여 신자들에게 나누곤 했다. 그는 통회의 기도를 함께 외운 다음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주곤 했는데, 이것의 결과로 수많은 병자들과 장애인들이 즉시 회복되곤 하였다. 그 한 예로써, 1681년, 150개의 목발과 80개의 지팡이, 그리고 수많은 기형교정 기구들이 마르코 형제의 치유 능력의 증거로 뮌헨의 카푸친 성당에 남겨져있다. 영적 치유 또한 결여되지 않았는데, 이 일은 무엇보다도 설교 후에 거행되곤 한 화해의 성사(고해성사) 동안에 일어났다. 종종 고해사제가 충분하지 않을 땐 성사거행이 몇 시간 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마르코 형제의 설교와 그 밖의 노력들은 불화중인 가족들의 공공연한 화해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는 자주 부당하게 대우를 받은 사람들이나 박해나 제도적 폭력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빌곤 했다. 예를 들어 1684년에 그는 파도바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를 중재했고, 1688년 베오그라드의 포위작전 동안, 그는 포로가 된 회교도 적군 병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해서 그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내기도 했다.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의 성격
그렇다면, 영웅적인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평범한 카푸친 형제로서 어떤 사람이었을까? 증인들에 의하면, 그는 어떤 형태로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넘치는 동정심을 품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식량이 부족할 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빵을 늘 제공하곤 했고, 병든 사람의 병상으로 가서 그들을 기꺼이 격려하고 위로했다고 한다. 그는 상당히 수줍은 성격의 남자였고 타인을 대할 때 항상 겸손하고 얌전했다. 하지만, 그는 위기 시 특히 유럽 왕궁에서 자신의 외교적 사명을 이행하는 것에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함께 살았던 카푸친 형제들은 그가 친절하고 다정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우호적이고 정중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했다. 한 카푸친 수호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우호적인 얼굴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감을 느꼈다." 그의 예리한 천부적 지능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전에 공부를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어떤 형제들은 그의 수줍음과 저자세를 타고난 우둔함으로 오해하기도 했었다. 그들에게 마르코 형제는 그저 평범하고 독실한 수도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그에게 베풀어진 다음일지라도, 몇몇 형제들은 왜 하느님께서 마르코 형제를 선택함으로써 그토록 부족한 판단력을 드러내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르코 형제는 공중의 찬사를 유쾌한 것으로 여기기는커녕 당황스러운 것으로 여겨, 한번은 그가 수도복 조각을 잘라가려는 유물 사냥꾼들을 피하면서, 차라리 산채로 피부가 잘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동료에게 말한 적도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가 성덕으로 유명해졌음에도 불구라고, 허영심은 결코 그의 개인적 결함 중에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비록 허영심과 교만에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고통과 병에는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다. 유럽을 횡단하는 길고 힘든 도보여행 후에 그는 때때로 발에 병이 너무 심해서 상당히 긴 휴가와 요양의 기간이 필요한 적도 있었다. 탈진과 극심한 여름 더위에 대한 대처 무능력은 특히 말년에 그를 매우 괴롭혔다. 실제로 1699년 8월, 이 증상들은 결국 그의 목숨을 빼앗은 열병을 가져왔다. 이 열병은 위장병과 기타 합병증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그가 선종하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자신이 몸소 마르코 형제의 장례절차를 맡아, 오토만 터키군으로 들끓는 서유럽과 신성로마제국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그에게 국장(國葬)을 치러주었다.



커피의 메이커인 것보다는 연맹의 구축자
1693년의 빈 전투 시,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의 역할은 전설적인 것이다. 어떤 도시 괴담에 의하면, '카푸친'이라는 뜻이 있는 '카푸치노' 커피의 이름도 마르코 형제가 전장에서 터키군이 남기고 달아난 쓴맛의 진한 커피에 따뜻한 우유와 꿀을 탔다는 사실에 기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카푸친 수도복과 비슷한 그것의 색깔에서 카푸치노 커피 이름을 따온 것 같다.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가 요즘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커피의 실제 발명자가 아니다 할지라도, 빈에서 터키군을 물리치는 데에 기여한 그의 결정적인 역할은 반박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고문이자 외교관인 이 열성적인 카푸친 설교가에 의해 유지되어 온 유력한 정치적 연줄과 사적 인맥 중에는, 티롤의 총독이자 로렌의 공작인 카롤로 5세와 그의 부인 엘레아노라, 노이베르크(Neuberg)의 공작 발테르-필립보와 그의 아들 요한-굴리엘모, 바이에른의 선거후(選擧侯, 신성 로마 제국에서 1356년에 황금 문서에 의하여 독일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 막시밀리아노-엠마누엘과 그의 삼촌 막시밀리아노-필립보, 보드본트(Vaudemont)의 군부인(郡夫人-Princesse)인 로렌의 안나-엘리사젯 공주, 프랑스의 태자비(太子妃-Dauphine) 비이에른의 마리아-안나-크리스티나 공주, 에사파냐의 국왕 카롤로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노이베르크의 마리안나 왕비, 그리고 특히 폴란드의 국왕인 요한 3세 소볘스키(Jan III Sobieski)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도 2세와 여러 명의 궁중  신하들이 있었다. 그러한 저명인사들과의 복잡한 그의 관계들은 그리스도교 통치자들의 대동단결을 구축하라는 교황의 명령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신성 연맹이라고 칭했던 그 대동단결은 빈의 포위작전을 해제하고 터키의 이슬람 오토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었다. 마르코 형제는 이러한 이질적인 세력가들을 하나로 모아 연맹국 간의 시샘과 내분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타고난 외교적 영향력과 설득력을 성공적으로 발휘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설득하여 폴란드의 국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인 요한 3세 소비에스키에게 동맹의 총사령권을 양도하게 했다.



그 이유는 폴란드의 국왕이 스스로 총사령권이 없었더라면 신성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693년 9월 12일, 소비에스키 아래의 그리스도교 연맹군은 2달 동안 빈을 포위한 터키군을 기습하여 최종적으로 그들을 완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코 형제는 그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신 전투장면이 내려다보이는 칼렌베르크(Kalenberg) 언덕 위에 있는 작은 경당에 머물러 계속 기도했다. 그의 역할은 이질적인 군대들이 서로 함께 하여 능률적으로 전쟁 장비를 구축하게끔 하고, 진로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지휘관들 사이를 중재하며, 군인들에게 승리를 확약해줌으로써 군대 사기를 북돋아주고, 또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권해주는 것이었다. 1683년부터 1689년까지, 그는 황제국군 내의 좋은 관계를 계속 도모하고, 영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병사들을 도와줌으로써 빈의 포위작전의 해제에 뒤따른 군사 행동에 참여했다. 그의 원조는 1686년의 부다(Buda)의 해방과 1688년의 베오그라드의 해방에 도움이 되었다. 그 전쟁은 1699년의 카를로비치(Karlovici)의 평화조약으로 끝났다. 빈의 시민들과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도 2세는 빈을 방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에 마르코 형제에게 대단히 감사했다. 6개월 후에, 그 거룩한 카푸친이 선종했을 때에, 그 고마움은 황제의 행실로 드러났다. 그는 그 장례를 몸소 치렀고, 카푸친 성당 내의 오스트리아의 황릉들과 마르코 형제의 묘를 나란히 안치할 것을 고집한 그 사실로 증명되었다.



전투 시에는 용감했고 승리 시에는 관대했다
비록 마르코 형제가 터키군이 그리스도교 유럽에 들끓고 결과적으로는 서구가 ‘이슬람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전할 필요 있다고 확신하긴 했지만, 승리 후에 그는 자비와 너그러움을 보여줄 줄 알았다. 그는 그리스도교 군대가 베오그라드를 함락한 후, 직접 자신에게 호소한 수백 명의 회교도 병사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그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 자비심과 관용은 아비아노의 마르코 형제의 성격과 그의 카푸친 봉사의 특징들이었다. 또 관용과 너그러움의 정신은 고유의 주된 사도직이었던 그 설교와 치유 사도직의 특징이었다. 그는 치유를 찾아다니고 하느님 말씀에 목말라하며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늘 만날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비에 관한 그의 신심은 사람들이 너그러운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게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그의 독특한 통회의 기도의 신심행위로 가장 잘 증명되어 있다. 마땅히, 아비아노의 복자 마르코는 '통회 기도의 사도'로 불리어져 있다.



"오 하느님, 당신께 봉헌된 이들의 놀라움이여, 당신께서 저의 수많은 악행을 정의의 저울에 다셨다면, 저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어두움과 깊으디 깊은 심연뿐 그 외에 그 어느 것도 없었음을 저는 잠시도 부인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다른 목적을 품으시고, 당신의 의노를 마지막 자리에 놓으시게 될 만큼 당신의 자비는 모든 것을 능가하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당신의 원수로 일컬음을 영광으로 삼곤 하였나이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그저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저를 당신의 자녀 중 하나로 헤아려주시며, 당신께서 친히 저를 위해 준비하신 유산, 그 하늘나라를 저에게 약속해주셨나이다. 이것은 참으로 과도한 신적 관용이며, 이로 인해 제 영혼은 하느님이신 당신께 대한 사의와 감사 외에는 그 어느 것으로도 표현될 수 없을 만큼 기쁨으로 흘러넘치고 있나이다." - 아비아노의 복자 마르코



 
 
 



Beato Marco d’Aviano Cappuccino
13 agosto 
Aviano, Pordenone, 17 novembre 1631 - Vienna, 13 agosto 1699

Martirologio Romano: A Vienna in Austria, beato Marco d’Aviano (Carlo Domenico) Cristofori, sacerdote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che, sapiente predicatore della parola di Dio, in ogni luogo si adoperò mirabilmente per i poveri e i malati, sollecitando soprattutto i potenti del mondo ad anteporre la fede e la pace ad ogni altra impresa o interesse.

Grande predicatore del secolo XVII, taumaturgo, artefice della salvezza dell’Europa cristiana dai turchi. Carlo Domenico Cristofori, questo il suo nome da laico, nacque ad Aviano (Pordenone) il 17 novembre 1631 da degni e distinti genitori.
Ricevette una prima istruzione da un precettore del paese e poi giovinetto fu affidato dai genitori al Collegio dei Gesuiti di Gorizia. Di carattere timido ma sognatore, un giorno ancora ragazzo, si lasciò prendere dall’entusiasmo e dopo una uscita dei collegiali, non rientrò, fuggendo per andare a convertire i Turchi.
Dopo due giorni di cammino, bussò stanchissimo alla porta del convento dei Cappuccini di Capodistria, in piena crisi giovanile, che si risolse con la chiamata di Dio per il chiostro francescano. Il 21 novembre 1648 vestì l’abito dei cappuccini nel noviziato di Conegliano, cambiando il nome in Marco; non sembrava portato troppo per i pesanti studi, ma poi con la comprensione del padre Fortunato da Cadore, che divenne poi Ministro Generale, riuscì con soddisfazione a giungere alla meta.
Venne ordinato sacerdote il 18 settembre 1655 dedicandosi quasi subito alla predicazione; nel 1670 venne nominato superiore del convento cappuccino di Belluno e dopo un paio d’anni di quello di Oderzo. La responsabilità della carica, però ostacolava il suo desiderio di solitudine e preghiera, quindi i superiori accogliendo la sua richiesta, lo trasferirono a Padova; ed è in questa città dopo una non programmata predicazione, che si rivelò ai fedeli della dotta Padova per quel grande predicatore che era.
Un prodigio avvenuto il 18 settembre 1676, quando guarì una suora paralizzata da 13 anni, gli cambiò la vita, fino allora tutto sommato tranquilla. Questa ed altre guarigioni, insieme alla crescente fama di predicatore, accrebbe la sua popolarità al punto che vescovi di varie Nazioni europee, iniziarono a richiederlo per le predicazioni; padre Marco d’Aviano divenne un instancabile viaggiatore per il Veneto ed in tutta Europa, accompagnato sempre dalla crescente fama di taumaturgo; ovunque andasse riusciva a radunare folle oceaniche, nelle chiese e nelle piazze di città come Anversa, Augusta, Colonia, Magonza, Salisburgo, Worms, per ascoltare le sue prediche tendenti alla conversione ed alla penitenza fatte in italiano con qualche parola di tedesco.
Usava a favore dei malati e bisognosi, una particolare formula di benedizione che rimase famosa, procurandogli qualche grattacapo da parte delle Autorità ecclesiastiche; i fedeli che lo avvicinavano gli strappavano gli abiti di dosso, con scene di fanatismo, per avere un suo ricordo come reliquia, tanto era il suo ‘odore di santità’.
Le richieste dei governanti per averlo, arrivavano ai suoi superiori ed anche al papa; nel 1680 era nel Tirolo, la Baviera e Austria, l’imperatore Leopoldo I d’Asburgo lo volle come suo consigliere a Vienna.
Ritornato a Venezia nel 1681 partì poi per le Fiandre attraversando la Francia, anche se per motivi pretestuosi re Luigi XIV non permise, a padre Marco d’Aviano di passare per Parigi; ritornò in Italia attraverso la Germania e la Svizzera.
Intanto i Turchi in quel periodo d’invasione, erano giunti fino a Vienna, papa Innocenzo XI di fronte al pericolo della caduta della città, in mano dei musulmani, forti di un esercito di 150.000 turchi e giannizzeri, comandati da Mustafà “il Nero”, generalissimo di Maometto IV, inviò padre Marco d’Aviano a riappacificare i rissosi comandanti degli eserciti cristiani, riportando l’unità e una forte alleanza, capitanata dal coraggioso Giovanni Sobieski e incitando i soldati a chiedere l’aiuto divino, così il 12 settembre 1683 Vienna fu liberata dall’assedio ed i Turchi sconfitti.
Se la città fosse caduta si sarebbe aperta la strada agli islamici, per arrivare fino a Roma, che era il fine di Mustafà IV. Marco d’Aviano per questo divenne il “Salvatore dell’Europa”; con il suo prestigio e volontà, continuò a spingere, suggerire, riunire ed organizzare i cristiani, provocando la sconfitta definitiva dell’Islam in Europa, con le battaglie di Budapest (1684-1686), Neuhäusel (1685), Mohacz (1687), Belgrado (1688) e con la pace di Karlowitz (1689).
Non fu solo un uomo di battaglie e alfiere della cristianità contro gli ottomani, ma anche uomo di carità e proprio a lui si rivolsero ottocento turchi che nel 1688 a Belgrado, erano rimasti asserragliati in un castello, oramai temevano per la loro vita, in pochi giorni erano stati uccisi 12.000 di loro e frate Marco si prodigò per la loro salvezza.
Terminate le guerre Marco d’Aviano riprese instancabile la sua opera pastorale, scotendo le coscienze, combattendo il peccato, diventando operatore di pace e di unione. Nel 1699, ripartì ormai a 68 anni, di nuovo per Vienna, diceva “non ne posso più, ma il papa comanda”, era afflitto da un tumore che lo consumava.
Il 25 luglio fu costretto a letto e assistito dall’imperatore Leopoldo I, morì il 13 agosto 1699; dopo solenni funerali venne sepolto nella cripta dei Cappuccini di Vienna, accanto alle tombe degli imperatori asburgici; il suo sepolcro divenne subito visitatissimo dai fedeli.
La sua figura poco ricordata in Italia, invece si studia a scuola in Austria e nell’Europa dell’Est. Papa Pio X firmò il decreto d’introduzione della causa di beatificazione e il 27 aprile 2003 è stato beatificato in Piazza s. Pietro a Roma, da papa Giovanni Paolo II.

Autore: Antonio Borr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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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3-04-11

 

 

 


 

Blessed Mark of Aviano
Also known as
Carlo Domenico Cristofori
Marco D’Aviano
Marco of Aviano


Memorial
13 August


Profile
Son of Marco Pasquale Cristofori and Rosa Zanoni. Educated at home and at the Jesuit school in Gorizia, Italy. He was especially fascinated with stories of the saints. At age 16 he left home to walk to Crete, where Venice was at war with the Ottoman Turks; he planned to preaching Christianity to Muslims and take his chance on martyrdom. After a few days of hiking, he stopped at the Capuchin house in Capodistria (modern Kopar, Slovenia), seeking food and shelter. The brothers took him in, fed him, prayed with him, and advised him to return home, which he did.

His time at the monastery affected Carlo deeply, and in 1648 he became a Capuchin novice at Conegliano, Italy. He made his formal vows in 1649, taking the name Mark. Ordained on 18 September 1655 at Chioggia, Italy. He lived several years in the cloister, but in 1664 he was called to missionary duty, preaching throughout Italy. Elected superior of the Belluno, Italy house in 1672. Elected superior of the Oderzo, Italy house in 1674.

On 8 September 1676, while preaching at a monastery in Padua, Italy, Mark prayed over Sister Vincenza Francesconi, who had been bed-ridden for 13 years; she was miraculously healed. Word spread, and while he continued preaching, Mark was soon beseiged by people seeking miracles; many were healed, and many were brought to the faith.

His fame led his to become counselor on religious and political matters to Leopold I, emperor of Austria for nearly two decades. Papal legate and Apostolic Nuncio to Austria for Pope Blessed Innocent XI. He secured the release of Vienna from the Ottoman Turks on 12 September 1683. Travelled with the army from 1683 to 1689 as advisor and chaplain to soldiers of all ranks. He helped negotiate the liberation of Buda on 2 September 1686, and of Belgrade on 6 September 1688. He worked as a peacemaker throughout Europe, bringing unity to warring Catholic powers, educating them on the threat posed by the Ottoman’s – and never letting them forget that all wise counsel was given by God.

Legend has it that when the Ottomans fled before the European army, they left behind a lot of their strong, bitter coffee. The Christian soldiers, to make this liberated coffee more palatable, mixed it with honey and milk; they named the drink after Mark’s Order, the Capuchins, and thus cappuccino was created.

 

Born
17 November 1631 at Aviano, Italy as Carlo Domenico Cristofori


Died
13 August 1699 of cancer in Vienna, Austria


Venerated
6 July 1991 by Pope John Paul II (decree of heroic virtues)


Beatified
27 April 2003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if you have information relevant to the canonization of Blessed Mark, contact
   Fra Florio Tessari, OFMCAP
   Vicepostulazione B. Marco d’Aviano
   P.zza Pescheria, 3
   33170 Pordenone, ITALY


Additional Information
Hagiography Circle
L’Osservatore Romano
Padre Marco d’Aviano


Readings
God knows that the scope of all of my works is only to do His will. My only interest is God’s glory and the good of souls. I am always an obedient son of Holy Mother Church and am ready to shed my blood and give my life for Her. - Blessed Mark of Aviano

Blessed Mark of Aviano shone with holiness as his soul burned with a longing for prayer, silence and adoration of God’s mystery. This contemplative who journeyed along the highways of Europe was the centre of a wide-reaching spiritual renewal, thanks to his courageous preaching that was accompanied by numerous miracles. An unarmed prophet of divine mercy, he was impelled by circumstances to be actively committed to defending the freedom and unity of Christian Europe. Blessed Mark of Aviano reminds the European continent, opening up in these years to new prospects of cooperation, that its unity will be sounder if it is based on its common Christian roots. - Pope John Paul II in his homily at the beatification of Blessed Mark of Aviano

MLA Citation
“Blessed Mark of Aviano”. Saints.SQPN.com. 9 March 2012. Web. {today’s 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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