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성당 게시판

로마서 2장&3장

인쇄

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10-15 ㅣ No.2114

로마서 2장 1-11절은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자”(시편 75,8)이시며 “모든 사람의 심판자”(히브 12,23)이심을 거듭거듭 가르치고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 12,14).

- “때가 오면 내가 그대로 하겠다. 나는 돌이키지 않고 동정하지도 않으며 뉘우치지도 않겠다. 네가 걸어온 길과 행실에 따라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24,14).

-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


그런데, 자신이 하느님인 양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더구나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는”(로마 2,1)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 로마 2,5-7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로마서 2장 6절은 시편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십니다”(시편 62,13). 이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야 온갖 시련을 견디며 하느님께 충실하고 착하게 산 나 같은 사람이 상을 받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아, 큰일이다. 나는 아직 자신이 없는데. 내 악행을 아직 다 보속하지 못했는데.’ 하고 걱정하십니까?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원하지만, 아버지의 나라가 왔을 때 우리는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또 아버지의 나라에서 “큰사람”(마태 5,19)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VIP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은행에 가도 VIP 고객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해 준다고 합니다. VIP 대접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접받기에 앞서서 대접받을 만한 행실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접받는 것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VIP 대접받는 것을 더 바라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큰사람으로 대접받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 마태 18,4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 마르 9,35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루카 9,48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자신을 낮추신 분,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 가장 작은 분,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신 분입니다. 그래서 가장 크신 분입니다. 루카 7,11-17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그 과부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과부는 성모님을, 죽은 외아들은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죽은 아드님을 팔에 안고 애통해 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미리 보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고통 덕분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느님이 과연 진노할 수 있느냐, 죄인을 심판하여 영원한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느냐, 잠시 가두었다가 풀어 주는 것이 아니냐고 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진노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진노란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품성에서 나오는 죄에 대한 반응입니다. 죄에 대한 반응이 진노입니다. 거룩함은 죄를 전혀 용납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진노도 없습니다.


- 하바쿡서 1,13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


다른 한 편, 하느님의 진노는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의 진노를 가장 많이 받은 백성은 이스라엘입니다. 바빌론도 불레셋도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죄를 지으니 때려 고치게 하십니다. (칼 브라이트라는 신학자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고 하였고, 에밀 브루너는 하느님께 등을 돌린 사람에 대한 진노가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악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그리 기뻐할 일도 아닙니다. 일시적으로는 감추어져 있겠지만, 결국은 드러날 것이고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대로 살아도, 부당한 짓을 해도, 벌 받지 않고 무탈하니 만사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느님 진노의 표징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악이 폭로되어서 창피를 당하고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도 크나큰 은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오히려 감사합시다. 그것은 내버려 두시는 하느님의 진노가 아니라 자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진노는 계속 쌓입니다. 그리고는 그 진노는 심판 때에 쏟아져 드러날 것입니다. 댐에 물이 가득 차서 터질 때까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불행합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가득 차서 터질 때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더욱 불행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로마 2,6). 천사의 행실을 한 사람은 천당으로, 악마의 행실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지금 무엇 하나 아쉬운 것이 없다면 하느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내 남편이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내 남편에게 한 방 먹여서 정신 차리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남편 사업 잘 되고 아이 공부 잘 하고 건강하다고 해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고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세속적 행복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성공을 향하여 달려가기보다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우리에게 큰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참조: 마태 4,16).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3,18).


-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9).


우리가 영원한 죽음을 피하고 그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구원의 은총이 땅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생명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피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깨닫게 되어 바오로 사도는 행복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만으로 충분했고, 그래서 다른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바오로 사도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우리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다른 신자들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였고,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 1코린 2,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자나 깨나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은 십자가에서 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십자가에서 선포됩니다. 복음을 다시 들음으로써,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감격을 다시 체험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나게 됩니다. 세상의 것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예수보다 더 좋은 것 없네.’,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 세상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견딜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은 모두 예수님께서 짊어지셨고, 그 덕분에 우리에게는 가벼운 짐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 마태 11,28-30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느님의 심판은 공정합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로마 2,9). 마찬가지로,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로마 2,10).


유다인과 그리스인’이 대비되어 쓰였는데(로마 1,16; 3,9도 참조), 여기에서 ‘유다인’이라는 표현은 마카베오 시대부터, 곧 기원전 2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카베오는 반유다주의 정책을 실시하던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기원전 168-165년 재위) 치하에서 독립 전쟁을 일으킨 가문(3대)의 이름이며, 고대 이스라엘의 마지막 독립 왕조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로마 2,12-16은 율법을 모르는 민족들도 그 마음에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쓰여 있다는 점을 밝혀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하며(로마 2,11 참조), 유다인과 비유다인의 간격을 되도록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유다인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받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2,13). 또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민족들은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됩니다”(로마 2,14). 이처럼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과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한다면 비유다인에게도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로마 2,10)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천명합니다.


반면에,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유다인들을 바오로 사도는 질책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로마 2,23) 바오로 사도는 율법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몸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속으로 유다인인 사람이 참유다인이고,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할례입니다”(로마 2,29). 심지어, 유다인이 그리스인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이 둘 다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단언합니다. “우리가 유다인으로서 나은 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로마 3,9).


혹시라도 남을 심판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알아차린다면 곧바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는 멈추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말을 더 늘어놓습니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하느님 뜻에 따른 비판이었다가도 나중에는 자기 생각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을 끊을 수 없다면, 짧게 줄이는 습관을 들이도록 노력합시다.


남을 심판하는 문제를 이야기하였지만,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내가 어떤 심판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어떤 판결을 받을 것인지, 상을 받을 것인지, 벌을 받을 것인지, 벌을 받는다면 어떤 벌을 받을 것인지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매우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 로마 3,10-18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3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로는 사람을 속이고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을 품는다.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15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3장 13절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은 우리 풍습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동굴 안에다 가족의 시신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장사를 치릅니다. 시신을 안치할 때마다 동굴 입구의 돌을 움직여 열고 닫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무덤이 열린다는 표현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무덤을 목구멍에 비유할 만합니다. 그런데 무덤이 열렸으니 냄새가 지독할 것입니다. 그 지독한 냄새가 우리 목구멍에서 나온다는 것이니, 참으로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살아갑시다.


로마서 3장 10-18절의 말씀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가끔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격려와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너무 심한 말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지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지만,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살다가 멸망하는 것은 더더욱 바라지 않으십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죄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습니다. 조그마한 간격도 하느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소한 죄라도 짓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때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거듭거듭 합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자신이 특별히 죄 짓는 것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정말 큰일입니다. 죄가 없으니 용서받을 일이 없습니다. 죄가 없으니 예수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억지로라도 자신의 죄를 찾아내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무릎만 꿇지 말고, 입으로만 죄를 인정하지 말고,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죄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에 하느님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도 어지간하면 가벼운 벌을 주고 용서해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도 외아드님의 십자가 죽음은 되도록 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속으로 ‘얘들아, 잘못했다고 해. 용서해 달라고 해.’라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분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 탓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인간 사이의 관계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도 역시 깨어집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배우자도, 형제자매도, 이웃도, 자연도 잃게 됩니다.


용서받고 싶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비록 내 이웃이, 내 동료가 가끔 싫은 소리를 하고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여 분란을 일으키고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은 말, 착한 행동을 할 때가 있으니,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관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로마 3,23-25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죄를 몹시 싫어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람과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시는데, 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깊은 심연을 만들고 높은 담을 쌓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은 더 더욱 타락의 길을 걷습니다. 남녀 사이에 반목이 생기고, 형제 사이에 살인까지 일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창세 6,5), 사람들을 땅 위에서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창세 6,13).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속죄의 길은 하느님에게서 열렸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소 속죄의 제물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성소 안에 있는 계약의 궤에는 속죄판이 있다고 합니다. 그 속죄판에는 일 년에 한 번씩 황소의 피를 뿌린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씻는 예식입니다(레위 16장 참조). 우리는 더 이상 해마다 황소의 피를 뿌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직접 “계약의 피”(마르 14,24)를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사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됩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깨달은 복음이며, 우리에게 그토록 전하고 싶어 했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믿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불가능이 없는데(마르 9,23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아이의 아버지처럼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하고 간청합시다. 하느님을 향해서 두 팔을 벌립시다. 하느님을 느껴 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믿음만 완전하다면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강한 믿음이 있는가 하면, 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하면, 걱정도 많고 겁도 많고 의심도 많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6,30)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6). 우리는 어떤가요? 풍랑에 죽을까 봐 아우성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하고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물에 빠진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구원을 보장하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실천이 있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말뿐인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은 ‘실천이 있는 믿음’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마태오 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열 처녀의 비유’(25,1-13)입니다.


* 마태 25,1-13

1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주제는 ‘준비’입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준비해야 할 것이 이 비유에서는 바로 ‘기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곧 기름 부음 받은 사람으로서는 성령의 ‘기름’에 푹 젖어 있어야 하겠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기름에 푹 젖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가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것입니다. ‘기름’은 또 ‘선행’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선행’도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을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웃도,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도, 아무리 친한 친구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혹시 하느님 나라 입구까지는 동행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들어갈 때 참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 가르쳐 주듯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며, 그 준비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행’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두 번째 이야기는 ‘탈렌트의 비유’(25,14-30)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마태 25,14)로 시작되는 이 비유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각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받은 세 사람의 종이 나중에 주인에게 셈을 하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각자 주인에게서 받은 능력을 잘 활용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최후의 심판’(25,31-46)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예언적 말씀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나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결국 ‘탈렌트의 비유’에서 각자 받은 능력으로 맺어야 할 열매는 ‘선행’입니다.


우리의 선행 속에 담긴 가라지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씨를 뿌려도 가라지가 생기는 법입니다(마태 13,27-28: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원수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사탄은 교활합니다. 사탄의 유혹에 하와와 아담이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하느님을 볼 수 있었던 아담과 하와조차도 사탄의 강력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탄의 간교한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강력한 유혹을 경험하셨기에, 우리에게 그것을 경고하시고 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는, 하느님의 아드님과 함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과 더불어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이기에, 하느님께서 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도록, 내 입이 그리스도의 입이 되도록, 내 기도 소리가 그리스도의 기도 소리가 되도록 해 봅시다.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겸손하게 도움을 간청합시다.


주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선을 향한 영을 받았지만, 동시에 죽을 육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은, 마음조차 우둔하고 어둡습니다(로마 1,21 참조). 그런데 이 나약한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물을 담는 질그릇’(2코린 4,7 참조)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2코린 4,6-7

6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느 해 ‘올해의 아버지 상’을 받은 사람은 고아 18명을 입양하여 키운 ‘코도조도보수’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양아들이 자라서 14세, 15세가 되면 자신의 성적 노리개로 삼는 사람임이 밝혀져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 코도조도보수라는 사람이 처음부터 나쁜 의도로 아이들을 입양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악마가 그의 마음에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나 봅니다. 좋은 마음에 정욕과 탐욕이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아이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지옥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싶어 합니다.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분이기에,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한 번 볼 수만 있다면, 참으로 잘 믿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소박한 소망이지만, 어쩌면 청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뵙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 탈출 3,6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 신명 18,16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하며 기뻐하지만, 하느님께서 늘 나를 지켜보시고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방식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속 1,600km 정도라고 합니다. 공전 속도도 시속 10만 km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방식은 너무도 신비롭고 오묘해서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구의 엄청난 회전 속도를 느낀다면 결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느끼면서 살아 있는 것도,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자비요 선물일 것입니다.


믿음은 느낌을 초월합니다. 느끼지 못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먹구름 아래에서 어둠과 추위에 떨고 있지만, 먹구름 위에 찬란히 빛나는 태양이 곧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 몸을 녹여 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현재의 어둠과 추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굳은 믿음은 구원을 주고, 평안을 주며, 건강도 줍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우리 모두 이 로마서 공부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2티모 3,15)를 받게 되기를 빕니다.



2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