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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순결한 창녀> - 강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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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peace-maker] 쪽지 캡슐

2008-07-24 ㅣ No.6591

2008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조영만 세례자요한 신부님◀ 

 

<교회, 순결한 창녀>

언제부턴가 신앙이 대단히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세례 받고 몇 년, 그냥 아는 사람

아무도 없이 편히 다닐 수 있는 성당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얼마든지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

으니까... 신앙이라는 이유로 내가 짊어져야할 무게가 그다지 무거운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나 둘 공동체의 일이라는 것을 맡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저 마음

의 평화로움이 좋고 하느님 앞에서 누리게 되는 약간의 위로가 좋았을 뿐인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짊어지게 되는

교회라는 십자가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중압감을 감당하게 만듭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 위에 나는 고스란히 노출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좋아서 시작했던 일이 서서히

내 삶 깨트리고 내 평화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내가 좀 손해 보면 되니까, 사람 사

는 곳이 원래가 말이 많은 곳이라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앞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입에 올리는 데에는 도

가 튼 세상이지만, 교회의 일을 하면서도 아무리 잘해봐야 본전 찾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그렇게 말은 많고 탈은 많은지 어디 하나 조용한 성당이 없고 “저 사람 참 좋은 일 하는구나...” 하고 그냥 넘기는

법이 없습니다. 입을 대고 말을 댑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염장은 질러지고 그저 좋은 마음으로 하다못해 작은

단체의 장이라도 맡았던 사람은 거의 죽을 만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고 나서야 겨우 잠잠해집니다.

그마나 신앙적인 내공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겪게 되는 많은 고통은 도리어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행복’(1베

드 2,20)이라는 신념으로 무던히 참아 받는다손 치더라도 언제부턴가 하느님의 일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이 나의

성장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강박은 더 나를 참담하게 만듭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더 이상 앞으로도 뒤로도 옴짝달싹 할 수가 없어집니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고, 가족으로부

터도 응원 받지 못한 채 그저 하느님이 좋아서 시작했던 교회의 일이 결국은 내가 가지고 있던 신앙마저도 ‘파토’내

고 있다는 절박함은 이제 하느님은 좋지만 교회는 제발 떠나고 싶은 마음 하나 둘 굴뚝같이 생기게 만듭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본인, 자신들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이 좋아서 시작했던 일이 자신의 신앙

을 깨트린다는 적신호는 어쩌면 자신들이 구축해온 그 신앙 영역에 대한 확장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간과하는 것입

니다. 신앙은 따지고 보면 나 홀로 면벽 수도하는 고행의 길이 아닙니다. 애시당초 신앙이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에서 비롯되었듯, 신앙은 끊임없는 관계의 문제이고 그 관계를 통해 나를 성장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나 홀로 머

무는 마음의 평화, 그 수준을 한 단계 더 뛰어넘을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고통에서 주저앉으면 고통만 남을 뿐이

지만 그 고통을 이기면 그만큼의 성장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실 우리들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하나의 이상형으로만 기대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밖에서

오만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기만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특히 앞에서 무언가 일을 해야만 하는 봉사자들도 완전할 수 없습니

다. 다만 완성을 지향하며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더 나아갈 따름입니다.

오늘 이 미사도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이 미사를 위해 부족하지만 성가곡을 뽑았고, 누군가는 미사

안내판에 화답송을 쳐놓았습니다. 내가 이 성당에 들어오기 전 누군가는 이 제대를 차리기 위해 한 시간 반 전에서

부터 이 성당 문을 열었으며 누군가는 예수 성심상의 촛불을 나보다 먼저 밝혀 두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오늘도 이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지금도 우리들 속에 있습니다. 자신 역시 부족하지만 자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회를 위하여 지금도

누군가가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좀 더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존중할 필요도 있고, 조금 더 판단을 아낄 필요가

충분히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성당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성당이 <교회>를 더 사랑할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우리 자신이며, 교회는 우리 공동체,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 <그 자체>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

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1-12)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어진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다시금 우리 교회

를 봅시다. 볼 눈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다시금 교회 그 자체인 우리 형제자매들을 봅시다. 얼마나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존재들인지, 그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교회가 축복이요, 이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나

마 내가 신앙이라고 가졌었던 그것마저도 빼앗길 것입니다.

순결한 창녀인 교회, 누군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교회, 순결한 창녀>, 내가 바로 순결한 창녀인 그 교회는 지

금도 수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묵묵히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교회는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은 지금, 판단이 아니라, 사랑이 절실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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