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6년 12월호 [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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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6-11-29 ㅣ No.75

1. 2006년 대림절과 성탄절 유감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입니다. 대구 도심 동성로 거리의 상점마다 캐럴이 요란하고 한껏 성탄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인 풍정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오늘의 크리스천보다 바깥 시정인들이 오히려 더 잘 성탄을 맞이하는 것이나 아닌지 공연한 상념에 잠겨봅니다.

ꡒ은혜 충만한 대림절 왔네…. 첫째 초 켜진다ꡓ  교회력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대림 제1주일, 그리스도 신앙인인 우리는 새해 첫날을 맞이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시간을 대비하며 금년 성탄절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대림 4주간은 4천 년 동안 구세주 오실 것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린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절실한 마음으로 은총의 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ꡒ늘 준비하고 있으라ꡓ는 성경말씀처럼 우리의 타성과 일상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영적 숙면상태에서 헤어날 것을 촉구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등장을 보며 광야에서 드높이 외치는 회개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ꡒ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ꡓ(마태 3,2).

회개는 내적인 결단이고 생활방식의 일대 전환을 가리키며 나아가 하느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ꡒ그날ꡓ(이사 11,10)과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ꡒ하늘나라ꡓ(마태 3,2)는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고 그분과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대림절은 마냥 시간을 보내는 지루하고 힘없는 기다림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삶을 앞당겨 드러내며 산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란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고 이는 관계형성적 결단, 곧 사적이며 개별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성격을 강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전국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는 수년간 벌였던 ꡐ내 탓이오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을 ꡐ똑바로ꡑ 하자는 신뢰회복과 도덕성 운동을 거교회적으로 힘차게 펼쳐온 바 있으며 한국의 레지오 마리애 역시 도입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쇄신을 도모하며 정신회복운동을 힘차게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최초의 메시지는 회개요 이는 곧 억압받는 이의 해방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대림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해야 하는 더욱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각오와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매사를 마음대로 결정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과연 우리들 생애에 얼마나 많이 남아있을까요. ꡐ지금 이 자리에서ꡑ(Hic et Nunc)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 앞에 오늘의 신앙인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하며 또한 무엇을 어떻게 행하고자 하는지 ꡐ똑바로ꡑ 고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ꡒ성령과 불로 세례ꡓ(마태 3,11)받은 내가 스스로 달라지지 않는다면 만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2006년 성탄절을 맞는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새 성전, 새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묵은 존재는 사라지고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탄일을 경하하는 마음이라면, 구체적으로는 2천 년 전 광야에서 외치며 구세주 탄생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 오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모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매년 성탄 때가 되면 수없이 좋은 일과 많은 말들을 하지만 과연 몇 마디의 말과 행동이 그분께 꼭 맞고 기분좋게 해드리는 것인지 모두가 반성해야겠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긴 세월 동안 한갖 연중행사에 불과한 인사와 축하받기에 진력이나 나시지 않으셨는지, 행여 그분께서 더는 세상의 우리들과 어울리고자 않고 저 세상의 문을 꼭꼭 잠그고 숨어 계시고자 하신다면 큰일입니다. 그분이야 오시든 말든 못난 사람들끼리 밤새워 놀고 마시는 데만 정열을 쏟는다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성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대축일은 바로 우리 신앙인 자신의 날입니다.

성탄 축하합니다!

_최홍길․레오 신부


2. 자기를 살핌


요즘 각 본당에서는 판공성사로 한창 분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자신이 살아온 한 해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죄를 고백합니다. 사실 인생을 살면서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살고 있는 우리들은 바쁜 일정으로 정신없이 지낼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한 달, 또 한 해가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ꡐ바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고,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있게 지내면 능력이 없다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ꡑ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먼저 대답을 드린다면 결코 ꡐ그렇지 않다ꡑ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ꡐ일ꡑ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일 중독자 내지 일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하는지 목적을 물어본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요? 목적을 상실한 채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우리의 영성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동양화의 여백과도 같은 시간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멋진 화폭에 담겨있는 여백은 마음에 여유를 줍니다. 이런 여백의 미가 우리를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것이 요즘에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들입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은 바로 이런 시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 걱정에 시달리던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잘못했던 일들, 실수들을 기억해 내고 아픈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잔잔한 물 위에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듯이 하느님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부족했던 자신의 삶을 하느님 대전에 겸손되이 봉헌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자신을 태우며 주위를 밝히듯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주님의 빛이 여러분을 어루만지고 밝혀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반성 (준주성범 2권 5장)

1.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믿지 못한다. 이는 그런 은총도 없고 알아듣는 점이 흔히 부족한 까닭이다. 우리는 좀 알아듣는다 해도 경솔하기 때문에 그것조차 잃는 수가 있다. 우리는 자주 소경처럼 안으로 보지 못하면서 그런지도 모르고 지낸다. 우리는 자주 과실을 범하고 또 그보다 더한 것은 그런 과실을 핑계하려 함이다. 어떤 때는 욕심이 움직여서 하고도 이를 선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남의 작은 잘못을 탓하면서도 우리의 큰 과실은 넘겨버린다. 우리는 남이 우리를 괴롭히면 곧 충동적으로 그 경중을 재보지만 남이 우리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아니한다. 자기가 하는 일을 잘 판정할 줄 아는 사람은 남을 가혹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라.

2. 내적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다스리는 데 힘쓰고, 또 자신을 삼가 살피면 남의 장단을 말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네가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너 자신만 살피기 전에는 내적 신심생활을 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네 사정과 하느님만을 보살피게 되면 밖의 일에 그리 요동되지 않을 것이다. 너를 떠나서 너는 어디서 살려 하느냐. 네 자신의 일은 제쳐놓고 이것저것 다 참견해 보아라. 네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참다운 평화를 얻고 완전히 화합되려면 너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너 자신만 눈앞에 세워놓고 나아가야 한다.

3. 네가 덕에 잘 나아가려면 이 세상 모든 걱정을 물리쳐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이 세상 것을 무엇이나 중히 보면 크게 후회하리라. 하느님 이외에는, 또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 이외에는 큰 것도 없고, 높은 것도 없고, 유쾌한 것도 없고, 네 마음에 드는 것도 없음을 알라.

조물에서 찾는 즐거움은 그 어느 것이나 헛되다는 것을 생각하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느님과 관계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을 천히 본다.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영원하고 무량하신 하느님만이 영혼을 위안시키시고 마음에 참다운 즐거움을 주시느니라.

_윤병길․세례자 요한 신부


3. 성모님과 레지오


나는 레지오가 처음 시작된 그때의 많은 특징 가운데 오직 두 가지만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레지오 단원들 본연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이며 심층적인 본질임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 하나는 우리들 삶 안에서 성모님의 중요성입니다.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의 설명처럼 성모 마리아께 대한 순수한 헌신과 사랑을 떠나서는 레지오를 말할 수 없습니다. 프랭크 더프 형제도 말했듯이 성모님에 대한 헌신의 문제에 관련될 때 우리들이 성모님을 대단히 공경하고 다른 사람들도 성모님을 공경하도록 설득하면서도 자신은 아무런 변화 없이 종전처럼 그냥 잘 지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공경심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자극이 되지 않고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면 우리들이 아무리 성모님을 공경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과 헌신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성모님의 역할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그분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들이 성모님께 의탁하고 그분과 일치 협력하는 행위가 지금 힘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태중의 아기가 어머니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께 대한 우리들의 의탁과 결합의 관계는 태아와 어머니의 경우보다 더욱 친밀하고 깊습니다. 은총의 질서 안에서 볼 때, 만일 우리의 영혼이 마리아로부터 분리된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온갖 은총의 가능성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들과 함께 성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모님을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들 영혼은 우리 각자에 대한 성모님 모성의 진실성과 함축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순례 길에서 잠깐 생각하거나 위기를 맞아서, 또는 성모님을 찬미하는 기도 중에 기억하는 그런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습관적이어야 하며 적어도 우리 삶의 매 순간순간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시도록 마리아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모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것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자신을 예수님께 완전히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온전히 성모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남김없이 완전히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ꡒ저의 모후, 저의 어머니시여. 저는 오직 당신의 것이오며 제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나이다.ꡓ 이 말은 레지오 영성의 기초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삶, 봉사와 역할이 보여주는 가장 특징적인 면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정체성과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한마디로 가장 간명하고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ꡐ모성ꡑ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표현한 레지오 창설자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ꡒ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십니다. 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보고를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우리가 그분께 중재를 원할 때까지 우리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는 우리들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신 분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분이시고 또 우리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인류에게 전하는 유일한 도구로서 성모님께 필요한 존재들입니다.ꡓ

마리아께 드리는 진실한 헌신과 큰 사랑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활동이 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정신과 역할에 동참하는 우리들의 진실한 활동 몫이며 ꡐ마리아의 레지오ꡑ를 의미하는 핵심입니다.

이제 나는 두 가지 문제에 관해서 여러분들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양심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은총의 질서에서 생각할 때 마리아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당신의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로 자극이 되고 있습니까? 영혼들의 구원사업에서 당신은 어느 정도로 마리아와 진실로 협력하고 있습니까?

_맥그리거  신부 / 김차희 역


4. 내가 너희 어머니다(Soy Tu Madre)


ꡐ과달루페 성모님 발현 성지ꡑ 하면 나는 늘 가난한 인디언 부부가 무릎을 꿇고 아기를 안은 채 대성당을 향하여 기도하며 가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 성지 대성당 문 위에는 성모님께서 성 후안 디에고에게 하신 말씀의 일부가 적혀 있다.

ꡒ내가 여기 있지 않니? 내가 너희 어머니다ꡓ (No Estoy Aqui Que Soy Tu Madre).

그 어떠한 말씀도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큰 힘이 되는 말씀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 성지에는 중남미 곳곳에서 성지 순례객들이 방문한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다른 성모님의 발현 성지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순례객이 되어 방문하지만, 과달루페 성모 성지는 중남미에서 오는 가난한 사람들의 순례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의 검게 탄 얼굴과 아주 초라한 옷차림새, 그리고 무표정한 모습에서도 그들 깊은 내면 신앙의 힘을 보게 되는 까닭은, 성지를 방문하는 그들의 정성과 사랑이 보이기 때문이다.

매년 12월 12일 성모님의 발현 축일이 다가오면 수년, 수개월 동안 돈을 모아 가족들과 아니면 마을 전체가 몇 날 며칠, 한 달 이상을 걸어서 성모님 발현 성지를 방문한다.

이렇게 도착한 많은 순례자들은 성모님께 위로와 삶의 힘을 얻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오래 신앙생활에 소홀했던 이들은 고해성사를 보고, 성모님 성화 앞에서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을 입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나는 가끔 내가 어디서 삶의 힘을 얻고 기쁨과 평화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생각해 본다. 그 한 부분이 바로 성모님께서 성 후안 디에고에게 하신 말씀 ꡒ내가 여기 있지 않니? 내가 너희 어머니다.ꡓ 어렵고 힘들 때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일들 속에서도 ꡐ내가 여기 있지 않니?ꡑ라는 성모님의 숨결을 발견하면 용기를 얻어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된다.


늘 주어도 아무것도 준 것 없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사랑, 당신이 부족해서 당신 딸이 병이 들었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니,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힘들어할 때 전화를 통하여 꿈에서 어두운 딸의 모습을 보았다고 괜찮은가 물어보시며 염려하시는 어머니, 잘못된 길을 가면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기도하시는 어머니, ꡐ나보다도 너를 더 사랑하시는 성모님이 계시니 열심히 잘 살아라ꡑ 하시는 어머니….

이렇게 세상에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 눈가에 눈물이 어리는 우리들의 삶이다. 그런데 성모님은 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ꡒ나는 너희 어머니다.ꡓ 성모님이 바로 나의 어머니시다. 영혼이 지쳐 어둠 속에서 당신을 볼 수 없을 때에도 그분은 나의 어머니로 곁에 계시고, 힘들 때도 어려울 때도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그분은 곁에서 내가 너희 어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

과달루페 성모 성지를 순례하는 그들은 비록 가진 것 없어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해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큰 아파트도 없고, 넉넉한 은행통장, 값비싼 자동차, 유명 메이커의 고급 옷을 입지 않고, 또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풍요롭고 외로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확신이 있다. 성모님이 그들 곁에 늘 함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ꡐ내가 너희 어머니다ꡑ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부유함과 넉넉함, 그리고 든든한 힘으로 다가온다.

성모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ꡒ내가 여기 있지 않니?  내가 너희 어머니다.ꡓ

_이상금․율리아나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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