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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옥균 주교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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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10-03-31 ㅣ No.25

고(故) 김옥균 주교가 걸어온 길
 
궂은 일 도맡으며 한국교회 발전 위해 헌신
 
 
 
- 2004년 김옥균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한민족돕기회 관계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한민족 걷기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16년, 총대리로만 17년을 재임했던 김옥균 주교는 2001년 12월 공식 퇴임했다. 사제들에겐 겸손함을 강조하고, 신자들에겐 항상 기도의 모범이 되고자 노력했던 김 주교는 늘 이웃들을 먼저 보듬은 따스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미사집전 흉내내다 주교 되다
 
네살배기 어린아이가 졸지도 않고 제대 쪽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이는 라틴어로 이어지는 미사전례를 한번도 지겨워하지도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으레 맨 앞자리에 앉아 똘망똘망한 눈빛을 빛냈다. 어깨엔 담요를 뒤집어쓰고 밥상을 제대 삼아 미사집전 흉내를 내곤 했던 아이였다.
 
김옥균(바오로) 주교는 1925년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688번지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예로부터 한터 혹은 사기점골이라고 불린 곳으로,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든 이들이 사기그릇을 굽고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김 주교는 아버지 김병희(비리버) 옹과 어머니 방 아가다 여사의 2남 3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공소회장을 아버지로 둔 덕분에 그의 집은 공소가 됐고, 성당과 매한가지 역할을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조과와 만과(아침·저녁 기도)를 바치던 기억은 무척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새벽미사 복사를 섰다. 김 주교는 스스로도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고픈 꿈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됐고, 그 바람은 매우 강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사제품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다. 심한 병치레로 신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1942년 신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태평양 전쟁이 터져 덕원 신학교로 옮겨가야 했고, 그후에도 용산 소신학교와 혜화동 성신대학을 오가며 어렵게 공부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학업을 접고 군에 입대해야 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길에 무사히 오른 김 주교는 1954년 프랑스 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해 신문학과를 수료 후 귀국한 김 주교는 교육자로서, 교구 행정사목가로서 풍부한 역량을 풀어냈다. 특히 교구청에서 사무처장 등을 거치며 활동하는 동안에는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등의 교구장을 보좌하며 교구 발전에 힘을 보태왔다. 보좌 주교 임명 후에는 풍부한 사목경험을 바탕으로 ‘인화(人和)’와 ‘속을 채워나가는 일’을 적극 실현한 사목자로 평가받아왔다.
 
 
교구 살림살이의 베테랑
 
“풍부한 사목경험과 아울러 훌륭하고 좋으신 분을 보좌주교로 주셨음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1985년 3월 김 주교가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되자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민들에게 전한 인사말의 첫머리다.
 
교구청의 여러 요직과 본당 주임을 맡았던 풍부한 사목 역량은 총대리로 활동할 때 더욱 유감없이 드러났다. 특히 김 주교는 교구 재정담당자로서 무거운 십자가를 졌지만 늘 기쁜 마음으로 가장 앞에서 걸었던 성직자였다.
 
“서울대교구는 현재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팽창하는 추세입니다. 교구가 비대해 지는 만큼 할 일 또한 산적해 가는데 제대로 손이 미치진 못하는 형편입니다.”
 
김 주교는 총대리로 활동할 당시 교구 신부들에게 ‘짜다 짜’, ‘자린고비 주교님’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 재정을 탄탄하게 하는데 힘썼다. ‘베테랑 교구 살림꾼’으로의 한결같은 삶이었다.
 
 
의사소통 위한 메신저
 
김 주교는 눈앞에 직면한 큰 과제를 맞아들이는 태도에서는 ‘순리대로 살자, 감사하며 살자’며 특유의 소박함과 단호한 면모를 드러냈다. 그의 이 마음은 때로는 고달픈 사목자로서의 활동에서 항상 기쁨과 감사함을 길어온 마중물과 같았고 선후배 사제들을 엮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김 주교는 교구 살림살이를 돌보는 것 이상으로 사제들을 양성하고 일치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김 주교는 서울대교구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굵직굵직한 행사와 행정 실무의 중심에 항상 서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행사 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각종 행사의 실무를 성공적으로 해내 교회 안팎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행사는 한국교회가 새로운 선교의 시대로 나아가는데 큰 디딤돌이 된 행사였다. 이후 1989년 제44차 서울세계성체대회를 위해서도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한국교회의 역량을 세계에 드러내는 데에도, 199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에서도 집행위원장을 맡아 땀흘렸다.
 
아울러 김 주교는 가톨릭출판사 설립에 이어 평화신문과 라디오?케이블 TV 개국의 중추 역할을 하며 매스미디어를 통한 문화복음화에도 힘을 실었다.
 
교구 사목행정 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본당과 각 기관의 행정업무 표준화를 완료한 것은 물론, 사목행정의 전산화와 가톨릭포털사이트인 ‘가톨릭인터넷 굿뉴스’를 개통하는 데에도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구와 교회 발전을 향한 그의 일편단심은 원로사목자로 활동하면서도 식지 않았다. 특히 그는 일선 사목 현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천주교한민족돕기회’ 총재로 통일과 북한주민돕기를 위한 활동에 발벗고 나섰다. 이러한 활동은 1993년부터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과 통일고문위원으로 이어졌다. 그는 떠났고, 우리는 이제 그의 말을 기억한다.
 
“희망은 믿음과 구체적인 실천이 뒷받침될 때 가능합니다. 신앙인이라면 통일에 대한 진정한 믿음과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나눔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김옥균 주교 약력
 
1925년 12월 9일 경기도 용인 출생
1949년 성신대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졸업
1954년 12월 프랑스 릴 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12월 18일 사제수품(프랑스 릴 교구 주교좌성당)
1957년 7월 프랑스 릴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졸업(신학 전공)
1959년 6월 프랑스 릴 가톨릭대학교 졸업(신문학 전공)
1959년~1962년 서울대교구장 비서 겸 가톨릭출판사 사장
1962년 서울대교구 상서국장
1965년~1982년 종로·흑석동·당산동·노량진동·청파동·수유동본당 주임
1982년~1985년 서울대교구 사무처장·관리국장·총대리 겸임
1985년 3월 23일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임명
1985년 4월 25일 주교수품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
1989년~2001년 재단법인 평화방송·평화신문 이사장
1999년~2001년 축성생활 담당 교구장 대리 겸임
2001년 12월 12일 원로사목자
2010년 3월 1일 선종
 
 
- 2002년 천주교 한민족돕기회 총재 김옥균 주교(오른쪽 세 번째) 일행이 백두산 천지에서 통일기원미사를 봉헌한 후 기념촬영.
 
 
 
- 김옥균 주교가 2004년 사제수품 금경축 및 팔순 기념 감사미사 후 김수환 추기경과 전 교황 대사 에밀 폴 체릭 대주교와 축하 행사를 갖고 있다.
 
 
 
- 김옥균 주교가 1998년 서울대교구 총대리 시절 가톨릭신문사가 개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전’을 관람하고 있다.
 
 
 
- 2001년 12월 28일 명동 주교좌 성당에서 열린 김옥균 주교를 위한 감사 미사 모습.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7일, 주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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