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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 은총의 정의와 고유한 역할, 교회의 고유한 역할 912_faith [_믿음] 969_토미즘학습 1032_heart good_works CCC2010 히브리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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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5 ㅣ No.155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질문 1: 구약 성경 본문과는 달리 신약 성경 본문 중에서 "은총(恩寵, grace)" 이라는 용어가 대단히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은총(恩寵, grace)" 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그 고유한 역할은 무엇인지요?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대단히 잘 지적하셨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4일]

영어로 "mercy" 로 번역되는 용어의 우리말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자비(慈悲)"와 그 의미가 결코 동일하지 않은, 영어로 "grace"로 번역되는 용어의 우리말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은총(恩寵)"이라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할 것입니다. 아래의 게시자 주 2-3을 꼭 참고하십시오.

[이상, 내용 추가 끝]

 

1-1-1. 다음의 NAB(New American Bible) 본문에 대한 용어색인 정보에 의하면, 구약 성경 본문과는 달리, 신약 성경 본문 중에서 "은총(恩寵, grace)"(*) 이라는 용어가 대단히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vatican.va/archive/ENG0839/IK.HTM

 

각주들을 제외하고, NAB 성경 본문의 약 123개의 절들에서 "grace" 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2. "새 번역 성경"의 구약 본문 중에 "은총" 이라는 번역 용어가 약 13개의 절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히, 모세 오경 중에서는 오로지 신명기에서만 단 두 번 "은총" 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old2&prindex=0&Keyword=은총 

 

그리고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 중에 "은총" 이라는 번역 용어가 약 127개의 절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히, 이 "은총(恩寵, grace)" 이라는 용어가, 성 바오로(St. Paul)의 제자이며 루카 복음서의 인간 저자인 성 루카(St. Luke)에 의하여 저술된 사도행전의 6,8부터, 그리고, 성 바오로의 서간문들에서 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new2&prindex=0&Keyword=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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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1:

(1) 영어로 "grace"로 번역되는 단어는 우리나라 천주교회와 마찬가지로, 중국 천주교회에서도 또한, "은총(恩寵)"으로 번역되고 있음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chinese/ccc/ccc_zh-t-1987.pdf [중국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 직전 소제목: grace = 恩寵]
출처 2: http://www.chinacath.org/book/html/162/96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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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른 한편으로, 예를 들어, 다음은 굿뉴스 서버 제공의 천주교용어자료집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grace" "gift"를 동일한 단어인 "은총"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들이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결코 아니기에, 중대한 번역 오류입니다. 이는 "은총"은 "선물"이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5075

 

1-3. 질문 2: 그런데, "grace" "gift"를 동일한 단어인 "은총"으로 번역하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만약에 이들 두 용어들을 동일한 단어인 "은총"으로 번역하면,

 

(i) 영어로 "the gift of grace" 로 번역되는 표현을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여야 하는지요??? "은총 은총" 으로 번역할 것인지요, 아니면, "은총이라는 은총" 혹은 "은총 은총" 으로 번역할 것인지요???

 

그리고 지금 지적한 바에 동의하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애써 거부하는 분들께서는, 예를 들어,

 

(ii) 다음에 있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4항과 2725항을 읽고 이해하고자 할 때에 그 내용을 결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http://ccc.scborromeo.org.master.com/texis/master/search/?sufs=0&q=
%22gift+of+grace%22&s=SS

[예를 들어, 라틴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54항gratiae dono(don de la grâce)]

 

(iii) 더 나아가,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을 학습하고자 할 때에, 그 내용을 결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donum gratiae" "gift of grace" site: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

 

출처 1: https://www.google.co.kr/search?q=%22donum+gratiae%22+%22gift+of+grace%22+site
%3Ahttp%3A%2F%2Fwww.logicmuseum.com%2Fauthors%2Faquinas%2Fsumma%
2F&newwindow=1&hl=ko&gbv=2&oq=&gs_i=

출처 2: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Ia-109-114.htm [라틴어본 및 영어본 신학 대전, IIa, q.109,  a.10, ad 3]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게시자 주 1-3: (주의 사항 한 개) 현재까지 사용해 온 차용된 우리말 용어들 혹은 한자 번역 용어들 사이의 혼란을 최소한도로 줄이고자, 이 글에서는,

 

(i) 영어로 "grace"로 번역되는 단어는, 예외 없이"은총(恩寵)" 으로 번역하고, 그리고

 

(ii) 영어로 "gift"로 번역되는 단어는, 비록 국내의 가톨릭 교회 측에서 또한 "은혜(恩惠)" 로 번역한 경우들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과성은혜(preternatural gift)", 등]도 있으나, 그러나 이 글에서는, 예외 없이"선물" 로 번역하였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1월 14일]

(iii) 예를 들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제14항에서는 영어로 "gift" 로 번역된 표현이 "은혜(恩惠)" 로 번역되었으며, 제411항에서는 영어로 "benefited" 로 번역된 표현이 "은혜(恩惠)를 입은" 으로 번역되었으며, 그리고 제2003항에서는 영어로 "benefit" 로 번역된 표현이 "은혜(恩惠)" 로 번역되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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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은총(恩寵, grace)의 정의(definition)

 

2-1. 우선적으로, 제4항"은총(恩寵, grace)" 라는 용어의 설명들은 다음에 있는 글의 제4항에 주어져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0.htm <----- 필독 권고

 

2-2. 그런데, 바로 위의 제2-1항에 안내해드린 설명들이, "은총의 정의(definition)" 를 개념적으로 그리 잘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며, 그리하여 "은총의 고유한 역할"도 또한 개념적으로 그리 잘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제1독서지혜서 13,1-9인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지혜서 13,1-9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한 것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2_fri.htm <----- 필독 권고

 

이 해설 중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5항이 발췌 인용되고 있는데, 이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바로 이 항이 "은총의 고유한 역할"을 간략하면서도 대단히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5항과 그 전후 항들은 다음에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전후의 적절한 범위의 문맥 안에서라야 비로소 이 제35항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클릭한 후에 제2-1항을 읽도록 하십시오[게시일자: 2014-06-16]: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race(은총)의_역할_1554.htm <----- 꼭 필독 권고

 

2-3. [은총의 정의(definition) 및 고유한 역할]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5항에 이어서 "은총의 고유한 역할"을 개념적으로 잘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는 항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항의 두 번째 문장에서, 대단히 간결(簡潔)하게 "은총(恩寵, grace)" 의 정의(definition)가 주어져 있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4월 30일]

2-3-1. 우선적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아래의 제2-3-2항에 발췌된 바의 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동영상을 청취/시청할 수 있습니다. 꼭 먼저 청취하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grace_2047.htm <----- 꼭 우선적으로 필청취/필시청 하라 

 

 

게시자 주 2-3-1: 특히,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동영상 중의 설명에서 또한 말씀드리고 있는 향주삼덕들 중의 한 개인, 따라서 한 개의 초자연적 은총(a supernatural grace)인, "믿음"(faith)정의(definition)는, 아래의 제3-2-1항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믿음"(faith)자구적 어의(literal sense)를과 논리적으로 등가임(logically equivalent)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2023년 4월 30일자 내용 추가 끝]

 

2-3-2.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Z.HTM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
(발췌 시작)

1996 Our justification comes from the grace of God. Grace is favor, the free and undeserved help that God gives us to respond to his call to become children of God, adoptive sons, 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and of eternal life.46

 

출처 2: http://www.vatican.va/archive/FRA0013/__P6T.HTM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

(발췌 시작)

1996 Notre justification vient de la grâce de Dieu. La grâce est la faveur, le secours gratuit que Dieu nous donne pour répondre à son appel : devenir enfants de Dieu (cf. Jn 1, 12-18), fils adoptifs (cf. Rm 8, 14-17), participants de la divine nature (cf. 2 P 1, 3-4), de la vie éternelle (cf. Jn 17, 3).

 

1996 우리의 의화(justification)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옵니다. 은총(恩寵, grace)은 다음과 같이 되라는 당신의 부르심에 화답하도록 하고자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제공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우의적(友誼的) 도움(favor)(*), 즉 무상의 그리고 마땅히 받을 만 하지 않은 도움(the free and undeserved help)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요한 1,12-18 참조), 입양된 아들들(로마 8,14-17 참조), 신성적 본성(divine nature)의(2 베드로 1,3-4 참조) 그리고 영원한 삶/생명(eternal life)의(요한 17,3 참조) 참가자(partakers)들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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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favor""우의적(友誼的) 도움(friendly help)" 로 번역한 것은,
(i)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charity(애덕)" 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와의 의미/개념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 등을 충분하게 고려하면서, 그리고 또한
(ii) 출처 1의 라틴어 사전 및 출처 2의 어원 사전에 주어진 설명을 또한 고려하면서,
(iii) 출처 3 Merriam-Webster Dictionary에 주어진 설명을 따른 것이다:

 

출처 1: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text:1999.04.0059:
entry=gratia&highlight=gratia

출처 2: 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grace&allowed_in_frame=0

출처 3: http://www.merriam-webster.com/wdictionary/favor

 

(2)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charity(애덕)" 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6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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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3:

(1)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집"에 주어진 은총(恩寵, grace)에 대한 설명은, 바로 위의 제2-3항에서처럼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에 주어진 바를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로 제시하고 있으나, 그러나 은총의 정의(definition)로서 제시된 문장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의 두 번째 문장과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4-1항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0.htm

 

(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유다 백과사전"에 주어진 "신성적 은총(divine grace)"의 설명은 위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의 정의(definition)와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측과는 달리, 이 유다 백과사전의 설명에서는 하느님 의 은총(grace)과 하느님의 자비(mercy)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6842-grace-divine

(발췌 시작)
divine grace [주:  "유다 백과사전"에 주어진 설명임]

 

One of the attributes of God, signifying His loving-kindness and mercy, and particularly His compassion for the weak, the unfortunate, and the sinful. It is in contrast with the attribute of justice, inasmuch as grace is granted even to the undeserving. The most significant Scriptural passage is in Exodus (xxxiv. 6): "The Lord, The Lord God, merciful and gracious, long-suffering, and abundant in goodness and truth." The relation of this attribute of grace to God's justice is not always clearly defined in the Old Testament. (이하 생락)

 

신성적 은총(divine grace) [주:  "유다 백과사전"에 주어진 설명임]

 

당신의 자애로운 친절(loving-kindness)과 자비(mercy)를, 그리고 특히, 나약한 자들, 불운한 자들, 그리고 죄가 있는 자들에 대한 당신의 연민(compassion)을 나타내는, 하느님의 속성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 은총은, 그것을 마땅히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도 심지어 허락되는 한, 정의(justice)의 속성과 대조에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성경 본문의 단락은 다음과 같은 탈출기 (34,6)에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merciful) 너그러운(gracious)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long-suffering) 자애(goodness)와 진실(truth)이 충만하며 ..." 하느님의 정의(justice)에 대한 은총의 바로 이러한 속성의 관계는 구약 성경에서 항상 분명하게 정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하 생락)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그러므로, 위의 "유다 백과사전"에 주어진 "신성적 은총(divine grace)"의 설명에 의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에 주어진 "신성적 은총"의 정의(definition)가 전통적 가톨릭 그리스도교 고유의 정의(definition)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자비(mercy)""은총(grace)"이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2-4.

질문 3: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인지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예, 그렇습니다. 위의 제2-3항에 주어진 바로 이 은총(恩寵, grace)정의(definition)가,

 

"'은총(恩寵, grace)' 은

하느님의 자녀들(요한 1,12-18 참조),

입양된 아들들(로마 8,14-17 참조),

신성적 본성(divine nature)의(2 베드로 1,3-4 참조) 

그리고 영원한 삶/생명(eternal life)의(요한 17,3 참조)

참가자(partakers)들이 되라는 당신의 부르심에

화답하도록 하고자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제공하시는 무상의 도움

'하느님의 특별한 우의적(友誼的) 도움(favor)'이라는

한 선물(a gift)이다."

 

를 대단히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게시자 주 2-4: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즉, 하느님의 임의의 선물이 항상 하느님의 은총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술적 재능(artistic talent),(#) 지성적 재능(intellectual talent) 등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복(선물)이, 위의 제2-3항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정의된(is defined), "신성적 은총(divine grace)의 고유한 역할"과 무관할 때에, 그러한 선물은 결코 은총이 아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일시적으로 허락하시는 탈란트(재능, talents)들로 불리는 선물들을, 실기(失期)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위하여 기꺼이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한 탈란트(재능, talents)들은, 즉, 하느님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는 탈란트(재능, talents)들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에 주어진 은총의 정의(definition)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아무도 그러한 탈란트(재능, talents)들을 두고서 은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은총(恩寵, grace)은 하느님의 선물(gift)이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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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다음은, 2000년 대희년에 즈음하여, 예술가들에게 보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99년 서신 [제목: Letter of His Holiness Pope John Paul II to Artists(예술가들에게 보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성하의 서신]에서 발췌한 것이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letters/documents/
hf_jp-ii_let_23041999_artists_en.html

(발췌 시작)

It is in living and acting that man establishes his relationship with being, with the truth and with the good. The artist has a special relationship to beauty. In a very true sense it can be said that beauty is the vocation bestowed on him by the Creator in the gift of “artistic talent”. And, certainly, this too is a talent which ought to be made to bear fruit, in keeping with the sense of the Gospel parable of the talents (cf. Mt 25:14-30).

 

사람이 있음(being)과, 진리(the truth)와 그리고 선한 것(the good)들과 자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살아감(living)과 행동함(acting)에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아름다움(미, beauty) 쪽으로 어떤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름다움(미, beauty)이 "예술적 재능(artistic talent)" 이라는 선믈(gift)로 창조주에 의하여 그에게 수여된 소명(vocation)임은, 어떤 정말로 참된 의미로,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이것은, 탈란트들에 대한 복음서 비유의 의미와 일치하여(마태오 복음서 25,14-30), 마땅히 열매를 맺어야 하는 한 탈란트(재능, a talent)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예술적 재능(artistic talent)"이 하느님으로부터 한 선물(a gift)임을 지적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2004년 1월 25일자 강론 말씀은 다음에 있다: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speeches/2004/january/documents/
hf_jp-ii_spe_20040125_artists-poland_en.html

 

(3) 예를 들어, 각 본당에서 성가대 단원 등의 전례 음악 봉사자로서 의지적으로 기꺼이 헌신하고 계신,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음악적 재능(musical talent)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6항정의된(defined) "은총의 고유한 역할을 만족시킴으로써" 한 은총으로 변성(變成)하여,(##) 거룩한 미사성제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회중의 성화를 위하여, "무상 은총(gratuitous grace)"(###)을 다른 이들에게 제공하는 한 수단(a means)으로서 자신의 영혼(soul)을 천주께 봉헌하는 교우님들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 게시자 주: 변성(變成)함(becoming)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4.htm

 

(###) 게시자 주: 은총이 크게, 

(i) 본인의 성화를 도와주는 "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 과,

(ii) 다른 이들의 성화를 도와주는 "무상 은총(gratuitous grace)",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111, a.1 의 설명은 다음에 있다:

http://www.newadvent.org/summa/2111.htm#article1

 

(4) 바로 위의 제(3)항에서 말씀드린 바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03항의 두 번째 문장은 어떠한 조건을 만족하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gift)은총(grace)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더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Z.HTM

(발췌 시작)
2003 [...] But grace also includes the gifts that the Spirit grants us to associate us with his work, to enable us to collaborate in the salvation of others and in the growth of the Body of Christ, the Church. [...]

 

2003 [...] 그러나 은총은, 거룩한 영(the Spirit)께서 당신의 일에 우리를 관련시키기 위하여, 다른 이들의 구원에 그리하여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에 우리가 협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수여한(grants) 선물들을 또한 포함합니다.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질문 4: 그런데 신앙(faith, 믿음, 신덕)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들 중의] 한 은총(a grace)인지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들과 무관한, 피조물인 사람의 고유한 한 확신(a belief, 믿음) 인지요?

 

3. [질문 4에 대한 답변]

 

"[향주삼덕들 중의 하나인] 신앙은

한 은총이다 (Faith is a grace)."

 

3-1. 가톨릭 교회 교리서신앙의 특징(the Characteristic of Faith)에 대하여 가르칠 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53항(클릭하십시오)의 소제목으로서 "신앙은 한 은총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어본 CCC 제153항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X.HTM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2월 3일]

프랑스어본 CCC 제153항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FRA0013/__PY.HTM

 

(영어본으로부터 발췌 시작)

153 When St. Peter confessed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Jesus declared to him that this revelation did not come "from flesh and blood", but from "my Father who is in heaven".24 Faith is a gift of God, a supernatural virtue infused by him. "Before this faith can be exercised, man must have the grace of God to move and assist him; he must have the interior helps of the Holy Spirit, who moves the heart and converts it to God, who opens the eyes of the mind and 'makes it easy for all to accept and believe the truth.'"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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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Mt 16:17; cf. Gal 1:15; Mt 11:25.
25 DV 5; cf. DS 377; 3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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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성 베드로(St. Peter)가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즉, 성자)이심을 고백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바로 이 계시/드러냄(this revelation)은 "살과 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Father, 성부)로부터" 온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24 신앙(faith, 믿음)은,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되는(injused) 한 개의 초자연덕(a supernatural virtue)인, 하느님의 한 개의 선물(a gift)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faith)이 행사될 수 있기 전에(before), 사람(man)은 자신을 움직이고 그리고 조력하는(assist) 하느님의 은총(the grace of God)을 반드시 가져야 하며, 그리고 그는, 심장(the heart)을 움직이고 그리고 이 심장(heart)을 하느님 쪽으로 전향하게 하며(converts to), 마음의 눈(the eyes of the mind)들을 열어주시고 그리하여 '모두가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믿는 것을(believe) 쉽게 해 주시는, 성령의, 내부로부터의, 도움(interior helps of the Holy Spirit)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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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마태오 복음서 16,17; 갈라티아서 1,15`-16; 마태오 복음서 11,25 참조.
25. 계시 헌장, 5항; DS(Denzinger) 377; 3010 참조. (체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 Session III, Chap. 3. Faith) <--- 또한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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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1: 다음의 주소에 있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53항에서, (i) 영어로 "the heart(심장)"로 번역되는 표현과 (ii) 영어로 "the mind(마음)" 로 번역되는 표현, 이들 둘 다가 동일한 우리말 단어 "마음"으로 차용(借用) 번역되었는데, 바로 이러한 중복의 차용(借用) 번역 행위는, 독자들의 변별력의 상실을 초래하는, 분명한 번역 오류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아래의 우리말본에서, 영어로 "infused" 로 번역되는 표현을, "주입되는" 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불어 넣어 주시는"으로 번역한 것도 또한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출처: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90

(발췌 시작)

15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마태 16,17)
라고 밝히신다. 16)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 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하느님의 도움의 은총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령의 내적인 도움
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로 회개시키시며,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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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갈라 1,15`-16; 마태 11,25 참조.
17. 계시 헌장, 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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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5년 2월 3일자 내용 추가 끝]

 

3-2. 믿음(faith)이라는 용어의 교의적 자구적 어의(dogmatic literal sense)와 윤리적 어의(moral sense)[즉, 성경적 자구적 어의(biblical literal sense)의 차이점에 대하여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4월 20일]

3-2-1. [믿음(faith)이라는 성경 및 교리 용어의 교의적 자구적 어의(dogmatic literal sense)]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 제시된 믿음(faith)이라는 성경 및 교리 용어의 교의적 자구적 어의(dogmatic literal sense)/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s://www.vatican.va/archive/ENG0015/__PU.HTM 

(발췌 시작)

MAN'S RESPONSE TO GOD

 

142 By his Revelation, "the invisible God, from the fullness of his love, addresses men as his friends, and moves among them, in order to invite and receive them into his own company."1 The adequate response to this invitation is faith.

 

142 당신의 거룩한 계시(Revelation)에 의하여, "비가시적인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충만함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당신의 벗들로서 말을 거시고(addresses),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움직이시는데(moves), 이것은 당신의 고유한 동료(company) 안쪽으로 그들을 초대하고(invite) 그리고 받아들이기(receive) 위하여서 입니다"1) 바로 이러한 초대 쪽으로 [사람들의, 하느님의 의지에 부합하는(conform), 의지(will)의] 적절한 화답(adequate response)(*)이 믿음(faith)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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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V 2(하느님의 말씀 제2항); cf. Col 1:15(콜로새 1,15); 1 Tim 1:17(1티모테오 1,17); Ex 33:11(탈출 33,11); Jn 15:14-15(요한 복음서 15,14-15); Bar 3:38 (Vulg.)(바룩 3,38(대중 라틴말 성경)).

[게시자 주: 여기서 'DV'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신성적 계시(Divine Revelation)에 대한 교의 헌장인 'Dei Verum'(하느님의 말씀)의 약자이다.]

 

(*) 번역자 주: 

(1) (이 글의 결론 1) (Sun T. Soh) 

(가) (Credere Deum) 천지만물의 운행들 및 질서들을 또한 주관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느님과의 어떤 관계의 상태(a relationship)의 형성 초기에 있게 되는 바로 이 화답, 즉, '믿음'(faith)은, 피조물인 당사자의 지성(intellect)동의(assent) 이전에, 피조물인 당사자의 의지(will)동의(assent)가 먼저 개입하게 됨에 받드시 주목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6월 20일] 그러니까, 바로 이 '믿음(faith)이라고 불리는, 당사자의 의지(will)동의(assent)의 한 결과로서 당사자의 영혼에 수용(受容)된[즉, 받아들여진], 초자연적 은총'의 행위(the act of the accepted supernatural grace, called faith)에 의하여(참조: 마태오 복음서 16,15-17; 필리피 1,6; 1,29; 에페소 2,8),(*) '당사자의 의지의 동의의 대상(object)인 하느님'께서 존재하심이라는 진리에 대한 당사자의 지성(intellect)동의(assent)가 후건적으로(後件的, consequently) 곧바로 뒤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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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i) 이 부분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제목: 의지(will)란?; 게시일자: 2012-10-26] 중의, 제2차 오랑제 공의회(Concile d'Orange II, 529년)제2차 오랑제 공의회(Concile d'Orange II, 529년)에서 공포된, "믿고자 하는 의지"(will to believe)라고 불리는 교리(doctrine)에 근거하고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doctrine-will_to_believe_1283.htm <----- 꼭 필독 권고

 

(i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6세기 중반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마르틴 루터를 단죄할 때에 자유롭게 사용된, 제2차 오랑제 공의회(Concile d'Orange II, 529년)의 25개의 결과들의 요약을 학습할 수 있다:

https://www.newadvent.org/cathen/11266b.htm 

 

(iii)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제2차 오랑제 공의회(Concile d'Orange II, 529년)의 25개의 결과들이 의미하는 바들 몇 개를 읽을 수 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ouncil_of_Orange_(529) 

(발췌 시작)

Effects

 

The canons of the Second Council seem to have been lost in the tenth century, then recovered and consequently published in 1543. Nonetheless, the teachings of the Council, which followed closely those of Augustine, continued to be adhered to by later medieval scholars, not least of which Thomas Aquinas. The 'Capitula' of Felix IV, on which the Council's 'Capitula' were based, were freely used by the Council of Trent in its condemnation of Luther. Certain Classical Protestants affirm the theology of the Second Council of Orange. However, the concessions it makes of a weakened free will which cooperates with God's Grace is inconsistent with Luther (see Assertio, Article 36) or Calvin determinism and Calvin double-predestination. Arminian theologians[8][9] also consider the Council of Orange historically significant in that it strongly affirmed the necessity of prevenient grace and yet did not present divine grace as irresistible, deny the free will of the unregenerate to repent in faith, or endorse a strictly Augustinian view of predest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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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3년 6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의 한 결과로서, 인간들은 무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로지 피조물인 인간의 창조된 지성(intellect)만의 노력으로는 특히, 소위 말하는, 계시된 진리(the revealed truths)들을 제대로 알 수 없고, 따라서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한 이후로, 하느님과 피조물인 당사자 사람 사이의 통공/하나 됨(communion)의 최초 회복 및 지속적인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바가 바로, 바로 이러한 초대 쪽으로 [사람들의, 하느님의 의지에 부합하는(conform), 의지(will)의] 적절한 화답(adequate response), 즉,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믿음(faith)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특히, 바로 이러한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를 지닌 '믿음'(faith)은 피조물인 당사자가 반드시(should) 하느님 쪽으로 기울어지는 성향(disposition to God)을 항상 유지하여야 함, 즉, 습관적이어야(habitual) 함그 속성으로서 가짐을 또한 주목하라. 왜냐하면 하느님과 당사자 사이의 통공/하나 됨(communion)은 계속적으로 및 지속적으로(continuously and constantly) 유지되어야 하는 한 개의 관계의 상태(a relationship)이기 때문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6월 20일]

그리고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에 의하여 당사자의 영혼(soul)에 주입되는, '믿음(faith)이라고 불리는, 당사자의 의지(will)동의(assent)의 한 결과로서 당사자의 영혼에 수용(受容)된[즉, 받아들여진], 초자연적 은총'의 행위(the act of the accepted supernatural grace, called faith)에 의하여서(참조: 마태오 복음서 16,15-17; 필리피 1,6; 1,29; 에페소 2,8)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게시자 주: 그러나, 예를 들어 마르틴 루터처럼, 심지어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성악설을 신봉하거나 혹은 불신/회의(unbelief)[게시자 주: 위의 제I(아이)항 참조]에 사로잡힌 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탓에 의하여당사자의 의지(will)가 하느님의 의지에 부합하는(conform) 적절한 화답(adequate response)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임, 즉, 바로 이 초자연적 '믿음'(faith)이 자신의 영혼 안에 수용(受容)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임에 또한 주목하라 [요한 복음서 20,29ㄷ: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NAB: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have believed)].

 

(나) (Credere Deo) 그러면, 이번에는(in turn), 바로 이 '믿음(faith)이라고 불리는, 당사자의 의지(will)동의(assent)의 한 결과로서 당사자의 영혼에 수용(受容)된[즉, 받아들여진], 초자연적 은총'의 행위(the act of the accepted supernatural grace, called faith)에 의하여(참조: 마태오 복음서 16,15-17; 필리피 1,6; 1,29; 에페소 2,8), 당사자의 지성(intellect)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 바를 진리로서 인정하면서 자신의 기억(memory) 안쪽으로 받아들이는 동의(assent)를 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결과, 자신의[즉, 이성(reason)의] 추론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 바를 판단의 근거/기준/잣대로서, 즉, 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 바를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지성의 수용된 올바름(the rectitude of the intellect)으로서, 향후 사용하게 되는데, 의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지성의 바로 이러한 동의는, 즉,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당사자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 바를 진리로서 기꺼이 믿도록(believe) 하는, '믿음(faith)이라고 불리는, 당사자의 의지(will)동의(assent)의 한 결과로서 당사자의 영혼에 수용(受容)된[즉, 받아들여진], 초자연적 은총'의 행위(the act of the accepted supernatural grace, called faith)(참조: 마태오 복음서 16,15-17; 필리피 1,6; 1,29; 에페소 2,8)는, 당사자의 영혼에 주입되는 조력(助力) 은총(actual grace) 혹은 성화(聖化) 은총(sanctifying grace), 이들 둘 중의 하나 혹은 이들 둘 다인, 신성적 은총(divine grace)필요로 한다(requires). 

 

(다) (Credere in Deum) 그러면, 이번에는(in turn), 당사자의 의지(will)는 당사자의 기억 안쪽으로 수용된 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 바동의(assent)를 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결과, 당사자의 의지(will)는 하느님께서 이미 드러내신 바를 생각, 말, 행위로 불리는 움직임(movements)들에 있어서의 판단의 근거/기준/잣대로서, 즉,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의지의 수용된 올바름(the rectitude of the will)으로서향후 사용하게 되는데, 의지의 바로 이러한 동의는, 즉,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당사자로 하여금 하느님 쪽으로 기꺼이 믿도록(believe in) 하는, '믿음(faith)이라고 불리는, 당사자의 의지(will)동의(assent)의 한 결과로서 당사자의 영혼에 수용(受容)된[즉, 받아들여진], 초자연적 은총'의 행위(the act of the accepted supernatural grace, called faith)(참조: 마태오 복음서 16,15-17; 필리피 1,6; 1,29; 에페소 2,8), 당사자의 영혼에 주입되는 조력(助力) 은총(actual grace) 혹은 성화(聖化) 은총(sanctifying grace), 이들 둘 중의 하나 혹은 이들 둘 다인, 신성적 은총(divine grace)필요로 한다(requires). 

(이상, 이 글의 결론 1 끝)

 

게시자 주: 특히, 위의 (가), (나), 그리고 (다)에서 말씀드린 바가, 유아 세례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상, 2023년 6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믿음'(faith)은 또한 피조물인 인간들의 의지(will, rational appetite)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 정의(定義, definition)를 학습할 수 있는, 향주삼덕들에 포함되는 망덕(hope)과 애덕(charity)의 행위(acts)들인, "정의"(情意, affections)들을, 즉, 인간의 정조(情操, human sentiments)들에 있어서의 폭 넓은 다양함을,(#) 필요조건으로서, 요구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성경_및_교리_용어_affection은_애정으로_번역되지_말아야_한다_3156.htm <----- 꼭 필청/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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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필자의 졸글/졸고들 중에서 이들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들 혹은 용례(usage examples)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affections(情意들)_and_sentiments(情操들).htm <----- 필독 권고

 

(2) 그리고 다음의 파란 색칠을 한 굵은 글자들을 클릭하면, 윤리 신학 분야 안에서 더 많은 용례(usage exampled)들을 접할 수 있다:

 

"affections" "sentiments" site:maritain.nd.edu/j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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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 형용사 "adequate"(적절한)가 사용된 항들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 제2184항, 그리고 제2221항, 이렇게 단 세 번뿐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http://www.intratext.com/IXT/ENG0015/3/PY.HTM <----- 여기를 클릭하여 확인하라

혹은

https://www.vatican.va/archive/ENG0015/3/Q0.HTM <----- 여기를 클릭하여 확인하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들 세 개의 각 항들에 있어의 그 전후 문맥 안에서, 특히 바로 위의 제(1)항에서 함께 고찰하였듯이, 단순한 강조의 수식어가 결코 아닌 하느님과 피조물인 당사자 사이의 통공/하나 됨(communion, communio)을 위한 필수적인 바를 기술하는 한 개의 유관 개념 서술형 형용사로서, 따라서 교의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한 개의 유관 개념 서술형 형용사로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서 "adequate"(적절한)이라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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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2-1: (1) '믿음'/'신앙'/'신덕'(faith)이라는 성경 및 교리 용어의 교의적 자구적 어의(dogmatic literal sense)/정의(definition)가 바로 여기서 제시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그리고 통상적으로, 예를 들어, 위의 제3-1항 그리고 아래의 제3-2-2항에서처럼, 우리가 '믿음'/'신앙'/'신덕'(faith)이라는 번역 용어들 중의 어느 하나를 사용하더라도, 해당 번역 용어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정의된(defined), 바로 이 교의적 자구적 어의(dogmatic literal sense)를 또한 항상, 근본적으로 및 우선적으로, 의미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3)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14항의 첫 문장에서처럼:

 

출처: https://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6.HTM 

(발췌 시작)

1814 Faith is the theological virtue by which we believe in God and believe all that he has said and revealed to us, and that Holy Church proposes for our belief, because he is truth itself. By faith "man freely commits his entire self to God."78 For this reason the believer seeks to know and do God's will. "The righteous shall live by faith." Living faith "work(s) through charity."79

 

1814 믿음/신덕(faith)은 향주덕[즉, 하느님 쪽으로 향하게 하는 덕]인데 바로 이 덕에 의하여 우리는 하느님 쪽으로 믿으며(believe in)[번역자 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 주어진 "믿음"의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를 필히 참조하라] 그리하여 그분께서 우리들 쪽으로 이미 말씀하신 및 계시하신 바 모두 믿으며(believe), 그리고 우리들의 신념(belief)을 위하여 거룩한 교회가 제안한 바[번역자 주: 예를 들어, "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등의 신앙 고백(the confession of faith)들]을 믿는데,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의하여 "사람은 하느님 쪽으로 자신의 전체 자아를 위탁합니다."78)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믿는 자는 하느님의 의지(God's will)를 알고자 하고 그리고 행하고자 노력합니다. "의로운 자(the righteous)는 믿음으로써 살아갈 것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애덕을 통하여 실천한다"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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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DV 5.

79) Rom 1:17; Gal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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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에서 권고하고 있는 성경 본문의 네 가지 의미들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제2항 전부를 학습하라. 필독을 권고드린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 꼭 필독 권고

(발췌 시작)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들을 학습하도록 합시다.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영어 CCC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1: http://ch.catholic.or.kr/pundang/4/c115.htm (우리말 CCC 제115항)
출처2:
http://ch.catholic.or.kr/pundang/4/va_c115.htm (영어 CCC 제115항)
 
The senses of Scripture
성경의 의미
  
115 According to an ancient tradition, one can distinguish between two senses of Scripture: the literal and the spiritual, the latter being subdivided into the allegorical, moral and anagogical senses. the profound concordance of the four senses guarantees all its richness to the living reading of Scripture in the Church.
 
115 성경의 의미는 오랜 전통에 따라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후자는 우의적(寓意的)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로 다시 세분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읽기는 이 네 가지 의미들의 심오한 조화로써 더욱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진다.
 
116 The literal sense is the meaning conveyed by the words of Scripture and discovered by exegesis, following the rules of sound interpretation: "All other senses of Sacred Scripture are based on the literal."83
 
116 자구적 의미
자구적 의미는 성경의 말씀으로 나타내고, 올바른 해석 원칙에 따른 주석으로 밝혀 낸다. “성경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
90)
 
117 The spiritual sense. Thanks to the unity of God's plan, not only the text of Scripture but also the realities and events about which it speaks can be signs.
 
1. the allegorical sense. We can acquire a more profound understanding of events by recognizing their significance in Christ; thus the crossing of the Red Sea is a sign or type of Christ's victory and also of Christian Baptism.84
 
2. the moral sense. the events reported in Scripture ought to lead us to act justly. As St. Paul says, they were written "for our instruction".85
 
3. the anagogical sense (Greek: anagoge, "leading"). We can view realities and events in terms of their eternal significance, leading us toward our true homeland: thus the Church on earth is a sign of the heavenly Jerusalem.86
 
117 영성적 의미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성경 본문뿐 아니라, 그 본문이 말하는 실재와 사건들도 표징이 될 수 있다.
 
1. 우의적 의미. 사건들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으로써 더욱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홍해를 건넌 일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징이며, 그로 말미암아 세례의 표징이 된다. 91)
 
2. 도덕적 의미. 성경이 전하는 사건들은 우리를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이 사건들은‘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1코린 10,11 참조) 기록된 것이다. 92)
 
3. 신비적 의미(anagogia).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는(그리스 말 anagoge는‘위로’ 라는 뜻의 ana와, ‘인도하다’ 는 뜻의 agoge의 합성어이다.) 영원의 의미에서 실재와 사건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예컨대, 지상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징이다. 93)
 
118 A medieval couplet summarizes the significance of the four senses:
 
The Letter speaks of deeds; Allegory to faith;
The Moral how to act; Anagogy our destiny.87
 
118 중세의 한 이행시(二行詩)는 이러한 네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글자는 행한 것을 가르치고, 우의는 믿을 것을 가르치며,
도덕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신비는 향할 것을 가르친다. 94)
 
119 "It is the task of exegetes to work, according to these rules, towards a better understanding and explanation of the meaning of Sacred Scripture in order that their research may help the Church to form a firmer judgement. For, of course, all that has been said about the manner of interpreting Scripture is ultimately subject to the judgement of the Church which exercises the divinely conferred commission and ministry of watching over and interpreting the Word of God."88
 
But I would not believe in the Gospel,
had not the authority of the Catholic Church already moved me.89
 
119 성경 해석자들의 임무는 이러한 규범에 따라 성경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준비의 역할을 하는 연구로써 교회의 판단은 성숙하게 된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 95)
 
만일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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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St. Thomas Aquinas, S Th I, 1, 10, ad I.
84 Cf. I Cor 10:2.
85 I Cor 10:11; cf. ⇒ Heb 3:1 - ⇒ 4:11.
86 Cf. ⇒ Rev 21:1 - ⇒ 22:5.
87 Le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88 DV 12 # 3.
89 St. Augustine, Contra epistolam Manichaei 5, 6: PL 42, 176.
9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 , 1, q. 1, a. 10, ad 1: Ed. Leon. 4, 25.
91). 1코린 10,2 참조.
92). 히브 3,1`─`4,11 참조.
93). 묵시 21,1`─`22,5 참조.
94). 다키아의 아우구스티노, Rotulus  pugillaris,  I:  A.  Walz  편: Angelicum 6(1929), 256.
95). 계시 헌장, 12항.
96). 성 아우구스티노, 「마니교도 서간 반박」 , 5, 6: CSEL 25, 197(PL 42,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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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의 사항: 위에 나열한 3가지의 영성적 의미(영성적 어의)들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도덕적 의미” 대신에 “윤리적 어의”, “신비적 의미” 대신에 “종말론적/신비적 어의”.
 
특히 다음의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anagogical 단어의 설명 및 다음의 Henri de Lubac 추기경의 가르침을 담은 저서에 주어진 anagogical sense의 설명에 의하면, “anagogical sense”를 “종말론적/신비적 어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는 “anagogical sense"이 관점에 따라 주관적인 입장에서의 “신비적 의미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종말론적 의미 둘 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 of, exemplifying, or based on anagoge ; specifically : having a spiritual meaning or a sense referring to the heavenly life
(클릭하십시오, 필독 권유) 
 
참고 사항: 사실 Henri de Lubac 추기경은, 20세기 중반에, 가톨릭 계약 신학을 재 발굴한 신학자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4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적 헌장, "하느님 말씀(Dei Verbum)",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에 있어, 성경에 대한 섹션(CCC 제101-141항)을 통합한(consolidated) 가톨릭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항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 해당 구절의 인터넷 주소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신학대전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Reply to Objection 1. The multiplicity of these senses does not produce equivocation or any other kind of multiplicity, seeing that these senses are not multiplied because one word signifies several things, but because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can be themselves types of other things. Thus in Holy Writ no confusion results, for all the senses are founded on one — the literal — from which alone can any argument be drawn, and not from those intended in allegory, as Augustine says (Epis. 48). Nevertheless, nothing of Holy Scripture perishes on account of this, since nothing necessary to faith is contained under the spiritual sense which is not elsewhere put forward by the Scripture in its literal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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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 해석에 대한 관점을 다루고 있는 개괄 논문(survey paper)(저자: John F. Boyle)입니다. 이 논문은 성경의 의미를 위에서처럼 네 가지로 나눈 신학자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았던 시대인 13세기의 가톨릭 교회 안에는 이미, 그에 의하여 성경 본문의 의미가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가 되는, 여러 가지의 성경 해석법들이 알려져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발췌 끝)

[이상, 2023년 4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3-2-2. [믿음(faith)이라는 성경 및 교리 용어의 윤리적 어의(moral sense)]

[신앙(faith, 신덕)이라는 은총의 고유한 역할]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43항(클릭하십시오)은 더 구체적으로 "[대신덕들인 향주삼덕들 중의 하나인] 신앙(faith, 믿음) 이라는 은총""어떠한 역할을 하는 은총"인지를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영어본 CCC 제143항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U.HTM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4월 20일]

(발췌 시작)

143 By faith, man completely submits his intellect and his will to God.2 With his whole being man gives his assent to God the revealer. Sacred Scripture calls this human response to God, the author of revelation, "the obedience of faith".3

 

143 [바로 위의 제142항에 정의된] 믿음(faith)에 의하여, 사람은 자신의 지성(intellect)과 자신의 의지(will)를 하느님 쪽으로 완전하게(completely) 복종시킵니다(submits).2) 자신의 있음 전체와 함께 사람은 자신의 동의(assent)를 계시자이신 하느님께 제공합니다. 성스러운 성경 본문은, 계시의 저작권자(the author of revelation)이신, 하느님 쪽으로 바로 이러한 인간적 화답(human response)[즉, 하느님에 의하여 움직여진 당사자의 의지(will, intellectual appetite, rational appetite)의 재촉(prompt)에 의한 한 인격(a person)의 지성 및 의지의 한 개의 행위(an act)(위의 (가), (나), (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28항;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55항);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IIa, IIae, q2, a9)(*)]"믿음에 기인하는 순종/복종/순명"(the obedience of faith)이라고 부릅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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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f. DV 5.

3) Cf. Rom 1:5; 16:26

(*)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 IIa, IIae, q2 전문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9.htm <----- 또한 꼭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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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2-2: (1) 따라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3항에서 말해지고 있는 '믿음에 기인하는 순명/순종/복종'(the obedience of faith)에서 사용되고 있는 '믿음'(faith)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위의 제3-2-1항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 제시된 바로 그 교의적 자구적 어의(dogmatic literal sense)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2) (Sun T. Soh)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통상적인 예형론적 교리교육 방식에 따라, 히브리서 11,1에서 말해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용어의 성경적 자구적 의미/정의(biblical literal definition)는, 바로 이어지는 다수의 절들에 제시된 구약 성경의 본보기/예(examples)들에 의하여 만족되어야 하는(must be satisfied by the following many examples of the Old Testaments in Hebrews 11,2-40), 따라서 윤리적 어의(moral sense)를 그 주된 부분으로서 가지는 한 개의 형이상학적 속적 개념(a metaphysical generic concept)인, '믿음에 기인하는 순명/순종/복종'의 결과들로서 당사자의 영혼(soul) 안쪽에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되는(infused), 판단의 근거, 기준, 잣대, 즉, 원리(principle)로 사용되기 위한 진리(truth)로서 수용된, 그 출처가 하느님이신, 따라서 초자연적(supernatural) 현실유(actual being)인, 따라서 실체/본체(hypostatis, substantia, substance)인, 어떠한 지식(knowledge)의 총체를 말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그러므로, 지금까지 제3-2항에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Sun T. Soh) 그리스어 성경, 히브리서 11,1에서 사용된 hypostatis라는 성경 용어의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가, 결코, 예를 들어, 1950년대 혹은 그 이후에 출판된 RSV(Revised Standard Version), 공동번역성서, 혹은 새 번역 성경에서처럼. 피조물인 당사자에게 고유한 어떤 주관적인(subjective) 느낌(feeling)에 근거하는 핀딘임을 의미하는 보증(assurance)으로 해석할 수가 없고, 다만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 안에서, 아무리 늦더라도, 일찌기 5세기 초에 이르면 이미 수용된,(*) 피조물인 당사자에게 고유한 어떤 주관적인(subjective) 느낌(feeling)에 근거하는 판단이 개입됨을 전혀 의미할 수 없는, 즉, 객관적인(objective), 개념인 본체/실체(substantia, sutance) 혹은 바로 이 의미와 논리적으로 등가인(logically equivalent) 의미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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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히브리서 11,1에 대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가르침을 학습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46.htm <----- 꼭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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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향주삼덕들 중의 첫 번째인 믿음(faith, 신덕)은 마르틴 루터가 말하는 나의 주관적인 고유한 믿듬(belief, 신념)과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제목의 졸글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faith_vs_belief_2637.htm <----- 꼭 필독 권고

(발췌 시작)

‘믿음(faith, 신앙)’‘믿음(belief, 신념)’의 차이점에 대하여서는, 본 해설서, 즉,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II의 연중 제19주일 제2독서(히브리 11,1-2.8-19) 입문의 각주 및 연중 제12주일 제2독서(갈라티아 3,26-29)의 제26절에 대한 해설에서 발췌한 다음의 내용을 이해하도록 하라:

 

(발췌 시작)
바오로에게 있어 믿음(faith)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생각(belief)’보다 더한 것으로, 믿음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태도(attitude), 즉, 바로 그것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려지게 된 하느님의 계시를 자신이 받아들이며 그리고, 당신을 향하여 자신 고유의 인격적 삶(personal life)의 완전한 헌신과 함께, 이 계시에 응답하는 바로 그 태도를 말한다.
(이상, 발췌 끝).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2-3: (i) 바로 위에 발췌된 믿음(faith)의 정의(definition)와, (ii) 위의 제3-2-1항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에 제시된 믿음(faith)의 정의(definition)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이상, 2023년 4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3-3. 

3-3-1.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른 신앙(신덕, faith)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습니다. 정확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므로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48.htm <----- 필독 권고

 

3-3-2. 혹시 바로 위의 제3-3-1항에 안내된 글이 난해할 경우에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들 중에서, 제912번 글부터 위로 순서대로 읽도록 하십시오. 특히 제946번 글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faith.htm

 

4.

4-1. [교회의 고유한 역할]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당연하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Church)를 통하여 당신의 은총(grace), 진리(truth), 그리고 구원(salvation)을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는데(communicate), 이 가르침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71항(클릭하십시오)에 주어져 있습니다:

 

영어본 CCC 제771항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27.HTM

 

게시자 주 4-1: 그러므로,

(i)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69(클릭하십시오)], 사람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초자연덕(supernatural virtue), 신앙(faith, 신덕)이라는 한 은총(a grace)을 얻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주-i: 따라서, 세례를 위한 미사에서, 집전 사제가 환영식에서, 세례 성사를 거행하기 전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분들께 묻는 첫 번째 질문그 답변이 다음과 같음을 절대로 잊지 말도록 하라.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이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 무엇을 요구합니까?

  [What do you ask of God's Church?]  

신앙(faith, 신덕)입니다.

  [Faith.]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68항(클릭하십시오)]

 

(ii)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얻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이 신앙(faith, 신덕)이라는 한 은총(a grace)을 통하여, 사람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구원(salvation)이라는 은총(the grace of salvation)[톨릭 교회 교리서 제1250항(클릭하십시오)]을 얻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eternal salvation), 즉, 영원한 생명/삶(永生, eternal life)을 얻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5항(클릭하십시오)].

 

주-ii: 따라서, 세례를 위한 미사에서, 집전 사제가 환영식에서, 세례 성사를 거행하기 전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분들께 묻는 두 번째 질문그 답변이 다음과 같음을 절대로 잊지 말도록 하라.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이다:

 

신앙(faith, 신덕)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입수 가능하게 합니까?

  [What does faith offer you?]
영원한 생명/삶(永生)입니다.

   [Eternal life.]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68항(클릭하십시오)]

 

(iii) [교도권의 고유한 역할] 그러므로 우리는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을 통하여[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888항 - 제893항(클릭하십시오)], 구원(salvation)이라는 은총(the grace of salvation)[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250항(클릭하십시오)]을 얻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그리하여 영원한 구원(eternal salvation), 즉, 영원한 생명/삶(永生, eternal life)을 얻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5항(클릭하십시오)].

(이상, 게시자 주 끝)

 

4-2. 질문 5: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필요한 은총들을 우리는 어떻게 얻는지요?

 

질문 5에 대한 답변: 구원의 성사들이며 영원한 생명의 성사들인 가톨릭 교회의 일곱 성사들을 통하여서 입니다.

 

작성 중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27항

 

5.

5-1. 위의 제2-3항에서, "은총(恩寵, grace)" 이라는 선물(gift)이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제공하시는 특별한 용도의 도움(help), 즉, 성화와 영원한 생명/삶의 획득 쪽으로 부름을 받는 자들이 이에 화답하도록 하고자 우리들을 도와주시는 하느님에 의하여 제공되는, 무상의 도움(help)'하느님의 특별한 우의적(友誼的) 도움(favor)'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 5: 그런데, 우리들의 성화와 영원한 생명의 획득, 즉, 지복직관의 획득을 도와주고자 제공되는 신성적 도움(divine help)은 오로지 은총(恩寵, grace)뿐인지요?

 

질문 5에 대한 답변: 아닙니다.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49항은, 동일한 목적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제공되는 또다른 도움은 "법(law)" 이며, 그리고 이 들 둘이 "하느님의 도움"의 전부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49항의 본문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전체에 걸쳐, "법(law)"과 "은총(grace)" 둘 다를 언급하고 있는 단 한 개의 문장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S.HTM

(발췌 시작)

1949 Called to beatitude but wounded by sin, man stands in need of salvation from God. Divine help comes to him in Christ through the law that guides him and the grace that sustains him: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for God is at work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RSV).1

 

1949 참행복(beatitude)에 부름을 받은 그러나 죄에 의하여 상처를 입은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salvation)의 필요성에 있습니다. 신성적 도움(divine help)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인도하는 법(law) 그리고  다음과 같이 그를 떠받치는 은총(恩寵, grace)을 통하여, 그에게 옵니다:

 

     두려움 및 떨림과 함께 그대 고유의 구원을 성취하도록 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별한] 우의적(友誼的) 도움(자구적 의미: favor)(<--- 클릭하십시오)/

     선의(good will)(good purpose, NAB)를 위하여 의도하시고자(will) 그리고 일하시고자

     (work) 이들 둘 다로, 그대 안에서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필리피 2,12-13).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5-1: 필리피서 2,12-13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짝수 해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제1독서(필리피 2,12-18)에 포함되는데, 필리피서 2,12-13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대단히 좋은 해설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31_wed.htm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9월 29일]

5-2.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은총(恩寵, grace)의 역할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1.htm

[이상, 내용 추가 끝]

 

5-3. 이 글에 이어지는 글 [제목: 영원한 구원에 필수적인 하느님의 도움들 두 개]은 다음에 있습니다. 국내의 성직자 및 수도자들을 포함하여, 되도록 많는 분들의 필독을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2.htm  <----- 필독 권고 

 

그리고 이 글은 일단 여기서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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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baptlord.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5_mon.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5_mon.htm

 

http://www.ewtn.com/library/Theology/grace1.htm

http://www.ewtn.com/library/DOCTRINE/MNGGRACE.HTM [제3항의 첫 단락 필독 권고]

http://www.newadvent.org/cathen/06689x.htm [the definition of actual grace 항 참조]

 

CCC 308

 

CCC 1811

 

a grace of light(빛이라는 한 은총), a grace of strength(굳셈이라는 한 은총)

http://www.christianperfection.info/tta12.php

 

바로 위의 저술의 저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신학 박사 학위 논문 지도 교수임:

http://en.wikipedia.org/wiki/Reginald_Garrigou-Lagrange

 

질문: 원죄 이후로 "the gift of grace(은총인 선물)" 은 언제 처음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지기 사작하였는지요?

 

참고 자료: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encyclicals/documents/hf_jp-ii_enc_18051986_dominum-et-vivificantem_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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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현재까지 약1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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