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집회서 3,17의 우리말 번역에 대하여 [번역 오류] 신빈자, 양선(meekness) vs 겸화(mansuetudo), mitis 2648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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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8 ㅣ No.2648

게시자 주: (1)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648.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이번 글에 서술된 바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또한 사용하여 분석하고, 이 분석의 결과에 따라 도출된 바들/결론들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1. 들어가면서: 집회서 입문

 

1-1. 우선적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집회서 3,17이 포함되는,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I, 다해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집회 3,17-18.20.28-29) 입문으로서 제시된 집회서 전반에 대한 입문이 포함된 다해 연중 제22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을 청취/시청할 수 있습니다: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2839/146/다해연중제22주일.mp4 <----- 여기를 클릭하여 청취(聽取) 혹은 시청(視聽)하십시오

 

1-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1-1항에 안내된 묵상 동영상의 교안(敎案)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647.htm <----- 필독 권고

 

1-3. 특히, 바로 위의 제1-2항에 안내된 주소에 접속하면, 예를 들어, 영어본 성경들에서 집회서 3,19 분문이 아예 없거나 혹은 제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다름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또한 그 까닭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가톨릭 교회의 말씀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I, 다해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집회 3,17-18.20.28-29), 집회서 3,19의 각주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1-4. 16세기 중반경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교 교회의 한 개의 교의(a dogma)인 연옥 교리의 성경 근거 등(*1) 성경 본문들에서 아예 없애버리려고, 그 당시까지 가톨릭 교회 및 동방 정교회 등에서 구약 성경의 정경들로서 항상 인정해온 7개의 경전들을, 즉, 소위 말하는 제2경전들을, "경건하지 않다"는 마르틴 루터 본인의 고유한 비성경적 주장과 함께, 구약 성경의 정경들의 목록에서 제거해 버렸는데, 성전(즉, 사도전승, Apostolic Tradition) 및 성경 둘 다에 전혀 근거하지 않은 마르틴 루터의 바로 이 개인적 주장은, 아무리 늦더라도 1897년에 이르면 개신교회 측 구약 성경에 반영되어, 요즈음까지 개신교회 측 제공의 구약 성경들에서 집회서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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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졸글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617.htm <----- 필독 권고

 

참고로,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졸글은 2006년 당시에 소속 본당의 홈페이지에 제공되었고 상당한 기간에 걸쳐 소속 본당 홈페이지에 실려 있었던 글이기도 합니다.

 

(*2) 게시자 주: 16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구약 성경의 정경에 포함되어 있던, 구약 성경의 제2경전에 대하여 매우 잘못된 설명을 하고 있는 개신교회 측의 Easton's Bible Dictionary의 출판 년도가 1897년인데, 적어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비로소 구약 성경의 제2경전이 개신교회 측의 성경에서 제외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1947-1956년의 기간 동안 쿰란/꿈란(Qumran)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Dead Sea Scrolls)들의 발견으로, 특히 쿰란의 제4번째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 때문에, 16세기 초기까지의 그리스도교 구약 성경의 정경 목록으로부터 제2경전의 배제의 근거로 제시하였던, 예를 들어 위의 Easton's Bible Dictionary에 실린, 개신교회 측의 기존의 주장들이 고고학적으로 전혀 뒷받침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예를 들어, 일부 개신교회 측 성경 출판사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 구약 성경에 제2경전을 포함한 ‘가톨릭용 성경’을 또한 출판하여 시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보되는 개신교회 측의 Easton's Bible Dictionary 의 pdf 파일[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래의 자료를 입수한 시점은 2007년 6월25일 이전이었다] 주소에 접속한 후애, 바로 이 사전의 표제어 "Bible"에 대한 설명을 읽도록 하라:

 

출처: http://club.catholic.or.kr/community/asp/club/attboard/read.asp?type=attboard&schcode=pundang4biblestudy&seq=2&id=16 

(발췌 시작)

It is divided into the Old Testament, containing thirty-nine books, and the New Testament, containing twenty-seven books.

 

[가톨릭 교회와는 크게 다르게, 개신교회 측의] 성경은 [총 66권, 즉], 39권의 책들을 포함하는 구약 성경과,(*) 27권의 책들을 포함하는 신약 성경으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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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매우 오래 전부터 가톨릭 교회의 구약 성경은, 소위 말하는, "제2경전들"(Deuterocanonical Books)이라고 불리는 7권의 경전들을 포함하여총 46권의 책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것은 16세기 중반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재차 확인되었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담은 졸글을 읽을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3.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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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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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런데, 본글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집회서의 경우에,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들여다볼 수 있는 개신교회 측 영어본 성경들에서, 바로 위의 제1-4항에서 말씀드린 역사적 배경/이유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집회서의 본문 및 해석들을 찾아보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일단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1950년대와 그 이후에, 영어 문화권, 프랑스어 문화권 등의 천주교 측 및 개신교회 측 성서학자들이 함께 모여, 소위 말하는 "공동번역성서"를 마련하여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어지는 제2항에서는 이들 "공동번역성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집회서 3,17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게시자 주 1-5: 그러나, 아래의 제2항의 마지막 항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듯이, 1950년대와 그 이후에 처음으로 등장한 "공동번역성서"들 등은, 예상 밖의 또다른 문제점을 야기하였다는 생각이며, 본글의 제3항에서는 이에 대하여 가능한 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고자 한다.

 

1-6. 이번 항에서는, 우선적으로, 현존하는 집회서 사본들와 관련하여, 지난 2천년의 세월 동안에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주석 성경"이 제공하는 집회서 입문 전문을 읽을 수 있으며, 아래에 발췌된 바는 본글에서 말씀드리는 바와 관련하여 꼭 알고 계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출처: https://bible.cbck.or.kr/Knbnotes/Intro/2307 

(발췌 시작)

집회서 원문은 히브리 말로 작성되었고, 4세기에 예로니모 성인은 그 수사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사본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는 유다교 라삐들의 문헌에서나 그 단편적인 본문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엽 카이로에 있는 유다교 회당의 부속건물인 게니자에서 그리스 말 본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본문이 단편들로 발견되었다. 이 단편들 가운데 1910년 쉐히터(S. Schechter)가 출간한 수사본 A와 B가 가장 중요하며, 같은 장소에서 발견된 작은 단편들도 뒤이어 확인 작업을 거쳤다.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는 기타 히브리 말 단편들이 쿰란과 (기원후 73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된) 마싸다 요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단편들을 통해 우리는 카이로 수사본들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히브리 말 수사본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19-20(쿰란)
3,6─16,26
18,31─19,2
20,5-7.13
25,8.13.17-24ㄱ
26,1-3.13-17
27,5-6.16
30,11─34,1
35,11─38,27ㄴ
39,15ㄷ─51,30

 

지금까지 발견된 히브리 말 수사본들은 두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나는 매우 오래된 수사본으로서(H-I) 기원전 130년경 벤 시라의 손자가 이집트에서 그리스 말로 번역할(G-I) 때 대본으로 삼았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후 50-150년 사이에) 바리사이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개정된 수사본으로서(H-II) 기원후 130-215년 사이에 그리스 말 번역본을 수정할(G-II) 때 사용된 것인데, 이러한 수정 작업은 일련의 그리스 말 수사본들로 입증된다. 시리아 말 역본 역시 히브리 말 수사본이 개정되던 시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그리스 말 본문 G-I는 대문자 수사본 A(알렉산드리아 수사본), B(바티칸 수사본), C(에프렘 수사본), S(시나이 수사본)들과 같은 계열의 흘림체 수사본들에 포함되어 있다. 다른 그리스 말 본문 G-II는 히브리 말 본문을 새롭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이미 번역된 G-I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히브리 말 본문의 개정판을(H-II) 참고로 삼아 필요한 부분을 G-I에 삽입한 것이다(치글러의 견해). 한두 낱말을 바꾸거나 첨가하는 것 말고도 G-IIG-I에 없는 약 300개의 행을 덧붙였다. G-I은 전반적으로 히브리 말 본문에 충실하지만, 벤 시라의 손자가 히브리 말 표현과 어법을 잘못 이해한 경우가 적지 않고 본문의 전승 과정에서도 필경사들의 수많은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후에 히브리 말 본문의 수정본 H-II를 참조하여 펴낸 G-II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동시에 히브리 말 수정본들을 대본으로 하고 G-II를 참고로 삼아 번역한 시리아 말 역본과, 자매 역본들 가운데 G-II의 중요한 증인으로 알려진 대중 라틴 말 성경의 전신인 고대 라틴 말 역본아람 말 역본의 증언도 중요하다.

 

그리스 말 역본은 히브리 말 본문의 가장 중요한 증인이다. 유다교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이 후대에 전한 수사본은 바로 이 그리스 말 역본이었다. (비교가 가능한) 그리스 말 역본과 히브리 말 본문을 대조해 보면 이스라엘의 종교 개념들이 신학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변천하는 신학적, 역사적, 지정학적, 사회적 맥락에 적응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그리스 말 역본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시도들의 동기는 가능한 대로 본문의 각주에서 밝힐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공동체의 요구에 맞추어 현실화시킴으로써 성경을 미라로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미드라쉬적 경향에 힘입은 것이다.


우리말 번역 대본은 랄프스(A. Rahlfs)가 편집한 슈투트가르트판이(1935년) 아니라 철저한 본문 비평을 바탕으로 새롭게 편집한 치글러(J. Ziegler)의 괴팅겐판이다(1965년). 이 치글러의 그리스 말 본문에는 G-II의 첨부 내용들이 덧붙어 있고 이를 G-I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글자로 옮겨 놓았는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를 기울어진 글씨체로 표기하였다. 치글러의 괴팅겐판은 각 장의 절을 구분하는 데서 대부분은 랄프스의 슈투트가르트판과 일치하지만 30-36장에서는 매우 다르다. 이 부분에서 랄프스는 대다수 그리스 말 수사본들의 장과 절 구분을 무시한 반면 치글러는 그것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말 수사본들은 33,13ㄴ─36,16ㄱ을 30장 24절과 25절 사이에 놓고, 30,25─33,13ㄱ을 36장 16ㄱ절과 16ㄴ절 사이에 놓았다.

(이상, 발췌 끝)

 

1-6-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교황 교도권에 매우 충실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수석 편집자에 의하여 마련된 집회서 입문 전문을 읽을 수 있으며[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래의 자료를 입수한 시점은 2012년 8월 6일 이전이었다], 아래에 발췌된 바는 본글에서 말씀드리는 바와 관련하여 꼭 알고 계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intro_Sirach_AF.htm 

(발췌 시작)

Sirach was originally written in Hebrew, as the Greek translator says in the prologue. Jerome was acquainted with the Hebrew text, which was used up to the Middle Ages. In the eleventh century the Hebrew disappeared and could not be used again until about two-thirds of it was discovered in an old synagogue in Cairo in 1896. The archaeological evidence given by that manuscript, together with the portions of the same which survive in rabbinical literature, proves that the Hebrew text dates from before 132 B.C. The New Vulgate conserves the Old Latin text, which was made from a Greek codex containing some interpolations, to which certain glosses and retouches were added. 

 

집회서는 애초에, 이 책의 그리스어본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히브리어로 쓰였습니다. 예로니모는, 중세까지 사용되었던, 히브리어 본문과 친숙하였습니다. 11세기에 히브리어 집회서가 사라졌으며 그리하여 1896년에 카이로에 있는 한 개의 오래된 회당에서 히브리어 집회서의 약2/3가 발견될 때까지 히브리어 집회서는 사용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사본에 의하여 제공된 고고학적 증거는, 라삐 문헌 안에 잔존하는 동일한 책의 일부분들과 함께, 이 책의 히브리어 본문이 기원전 132년 이전으로 연대가 매겨짐을 증명합니다.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제공 중인] 새 대중 라틴말 성경(the New Vulgate)은, 바로 거기에 특정한 주석들 및 수정들이 추가된, 일부 삽입(some interpolation)들을 포함하는 그리스어 코댁스 한 부로부터 마련된, 고대 라틴어 본문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1-6-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수석 편집자에 의하여 마련된 성경의 경전들에 대한 입문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부록>>으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각 경전들의 입문으로서 대단히 좋은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성경 본문 학습 시에, 우선적으로 필독하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33.htm

 

 

2. 유관 자료/사료 분석 I

 

2-1.

2-1-1. 다음은, 2005년에 그 초판이 출판된,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성경인,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 전문이며,

 

출처: https://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3603&gomonth=2022-08-28&missatype=DA

(발췌 시작)

17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이상, 발췌 끝)

 

본글에서는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온유(溫柔)하게"로 번역된 표현이, 전후 문맥 안에서, 번역 오류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2-1-2. 그러니까 무슨 말씀인고 하면, 다음에 발췌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온유하다"라는 표제어 형용사의 의미에는 "겸손하다"(humble)라는 의미가 없는 데에 있습니다:

 

출처: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237997&searchKeywordTo=3 

(발췌 시작)

온유하다(溫柔하다)


「형용사」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

(이상, 발췌 끝)

 

2-1-3. 따라서, 다음에 발췌된 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의 영어본 성경으로서 1611년에 초간된 King James Version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Douay-Rheims Bible", 집회서 3,19 [주: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 해당함]에서 "meekness"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의 우리말 번역 용어로서, 예를 들어, "겸손하다"(humble)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는 , "온유"(溫柔)를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처: http://www.latinvulgate.com/verse.aspx?t=0&b=26&c=3 

(발췌 시작)

3,19 fili in mansuetudine opera tua perfice et super hominum gloriam diligeris

 

3,19 My son, do thy works in meekness, and thou shalt be beloved above the glory of men.

(이상, 발췌 끝)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462682&searchKeywordTo=3

 

2-2. 다음은, 필자가 오래 전부터, 즉, 미국 유학 중에 구입하여, 지금까지 소장 중인, 1979년에 교회의 출판 검열을 획득한, 공동번역성서인, Good News Bible, Catholic Study Edition [Good News Translation], 집회서 3,17과 각주입니다. 특히, 집회서 3,17-29에는 소제목 "humility"(겸손)이 분명하게 붙어 있습니다:

 

(발췌 시작)

humility (겸손)

 

3,17 Son be humble in everything you do, and people will appreciate it more than gifts.f)

 

3,17 아들아 네가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 겸손하여라(be humble), 그리하여 사람들이 선물들보다 더 네 겸손을 장차 더 고맙게 여길 것이다(will appreci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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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Hebrew people ... gifts; Greek those whom the Lords approves will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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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2: 바로 위에 발췌된 각주는, 집회서 3,17의 후반부가 히브리어 사본과 그리스어본 사본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말하고 있을뿐이며, 따라서 집회서 3,17의 전반부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사본과 그 번역본인 그리스어본 사본이 동일함을 또한 말하고 있다는 생각임.

(이상, 게시자 주 2-2 끝)


따라서, 이번 항에서 정밀하게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1979년에 교회의 출판 검열을 획득한, 공동번역성서인, Good News Bible, Catholic StudyEdition, 집회서 3,17과 각주에 의하여, "새 번역 성경"의 집회서 3,17의 후반부히브리어 집회서 3,17의 후반부와 대동소이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2-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주석 성경"이 제공하는 주석들의 번역대본인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서(TOB), 집회서 3,17의 각주 등을 발췌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집회서3_14-24_주석들_in_2010_TOB_제1839쪽.jpg

(이상, 발췌 끝)

 

바로 위에 발췌된, 히브리어 집회서 3,17의 전문의 프랑스어본을 제시하고 있는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서(TOB), 집회서 3,17의 각주를 정밀하게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다음은, 바로 위에 발췌된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서(TOB), 집회서 3,17에 대한 각주에 제시된 프랑스어본 집회서 3,17 전문의 영어 번역문인데, 그리스어본 집회서 3,17결코 아니고, 히브리어 집회서 3,17의 영어본입니다: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서(TOB), 집회서 3,17에 각주로서 제시된 히브리어 집회서 3,17의 프랑스어본의 영어 번역문

3,17 Hebr: My son, in your prosperity walk with humility and you will be more loved than the one who gives gifts.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96년에 이집트 카이로 소재 회당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집회서 3,17그 영어 번역문을 볼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bensira.org/navigator.php 

(발췌 시작)

Sirach_in_Hebrews_Cairo_1896 > Sirach3_16-28.jpg

 

Sirach_in_Hebrews_Cairo_1896 > Sirach3_16-20_in_English_translation.jpg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3: [주; 이 게시자 주는 아래의 제3항을 작성한 후에 추가한 것임]
(1)
 그런데, 위의 제1-6-2항에 발췌된 바에 의하여, (i)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420년)가 들여다본 히브리어 집회서 3,17 본문이, (ii) 바로 위에 발췌된 1896년에 이집트 카이로 소재 회당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집회서 3,17 본문과, 정확하게 동일한지의 여부는, 오래 전에 사라진 성 예로니모가 들여다본 히브리어 집회서의 사본을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하였기에, 적어도 지금까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다.

 

(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성 예로니모가 집회서 3,19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i)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라틴어본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특히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meek"의 의미를 지닌, 라틴어 단어 "mitis"의 명사형을 사용하는 대신에, (ii) 특히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meek"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라틴어 명사 "mansuetudine"을 사용한 것은, 마태오 복음서 11,29집회서 3,17(19)의 본문들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는 과정에서, 변별력의 상실을 야기하지 않기 위하여서였을 것임을 또한 생각할 때에, 상당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3) 무슨 말씀인고 하면,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420년)께서 일찌기 집회서 3,19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라틴어 형용사 "mitis"의 명사형 "mitigatio"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매우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4) 그러나 이와는 달리,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에, "mitis"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 용어로서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영어 형용사 "meek"의 명사형 "meekness"를 집회서 3,19에서 사용한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5) 설상가상으로. 왜냐하면 1947년에 마련된 영어본 "신학 대전"에서, 필요시, 바로 위의 제(4)항에 안내된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에서 발췌 인용하기 때문에, 아래의 제3-2-1항에 안내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라틴어 정본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 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췌 인용된 대중 라틴말(Vulgate) 성경, 집회서 3,19에서 사용되고 있는 라틴어 성경 용어 mansuetudine"의 번역 용어로서 "Douay-Rheims Bible", 집회서 3,19에서 사용되고 있는 "meekness"라는 잘못 선정된 영어 단어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본 "신학 대전"의 본문에서도 또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57.html#SSQ157OUTP1 

 

(6) 다른 한편으로, 본글의 제2-5항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역 언어인 "영어" 자체의 변별력이 "라틴어"의 변별력에 비하여 매우 부실하여, 예를 들어, "mitis", "modestos", "mansuetudine" 이들 세 개의 라틴어 단어들이 모두 한 개의 영어 단어 "meek"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바로 위의 제(5)항에서 지적한, 영어본 "신학 대전" 본문 안쪽으로 증폭되어 퍼져 나간 번역 오류의 문제정말로(indeed) 대단히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상, 게시자 주 2-3 끝)

 

따라서, 이번 항(즉, 제2-3항)에서 정밀하게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잠정 결론] [번역 오류] "주석 성경"이 제공하는 주석들의 번역대본인 프랑스어본 공동번역성서(TOB), 집회서 3,17의 각주 에 제시된 히브리어 집회서 3,17 전문의 프랑스어 번역문에 의하여,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의 전반부에서 "온유(溫柔)하게"아니라, "겸손하게"/"겸손과 함께"/"겸손으로써"로 번역될 수도 있음(may)을, 이 글의 한 개의 잠정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2-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2-4-1. 다음은,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漢典"에서 발췌한 바인데, "溫順"(온순)이라는 한자 단어가 "meek"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www.zdic.net/hans/溫順 

(발췌 시작)

溫順

 

[meek;docile;tame] 温和顺从;和顺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4-1: "溫順"(온순)이라는 한자 단어가 "meek"; "docile"; "tame" 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밝힌 자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아는 한, 1850년대에 중국 상해 지역에서 개신교회 측의 "상제판" 중국어 성경 대표 역본의 번역 작업에 참여한, 그리고 또한 "4서3경"을 영어로 번역한, 개신교회 측 선교사 James Legge이라고 알고 있다.

 

2-4-2.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중국어본 구약 성경, 집회서 3,19 전문인데, "meekness"(대응하는 라틴어: mansuetudine, 원형: mansuetudo)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로서, "溫順"(온순) 대신에, "謙和"(겸화)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 https://www.vatican.va/chinese/bibbia.htm 

출처 2: https://www.vatican.va/chinese/bibbia/antico-testamento/Siracide_zh-t.pdf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3:19
我兒,執行你的工作時,應當謙和;這樣,你會比施惠的人更受人愛戴。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4-2: "謙和"(겸화)는, 예를 들어, 한 권의 아동학습서로서 우리나라 고려 후기의 문신 추적이 엮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명심보감, 12. 성심편 하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 개의 단어이기에, 특히 우리나라 조선에서, 그리 생소한 단어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http://db.cyberseodang.or.kr/front/sabuList/BookMain.do?mId=m01&bnCode=jti_5a0501&titleId=C13 

 

2-4-3. 그리고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한 개의 표제어로 수록된 겸화(謙和)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19678&searchKeywordTo=3 

(발췌 시작)

겸화(謙和)

 

「명사」

마음씨나 태도가 겸손하고 온화함.

(이상, 발췌 끝)

 

2-5. [주: 본 항은 아래의 제3항 및 제4항까지 작성 완료한 후에, 상당한 양의 내용 보강이 이루어졌음] 

또한, 특히,위의 제2-1-3항에서 말씀드린,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의 영어본 성경으로서 1611년에 초간된 King James Version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Douay-Rheims Bible"에는,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i) 왜냐하면, "humility""meekness", 이들 두 개의 단어들이 성경 용어들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2-5-1. Douay-Rheims Bible 본문 중의 "humility" 단어 색인:

http://www.intratext.com/IXT/ENG0011/2/D1.HTM 12

 

2-5-2. Douay-Rheims Bible 본문 중의 "meekness" 단어 색인:

출처: http://www.intratext.com/IXT/ENG0011/2/P7.HTM 12

(발췌 및 내용 추가 시작; 주: [ ] 안에 나열된 바는 대충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에서 대응하는 라틴어 단어이고, "새 번역 성경"의 대응하는 표현임)

1 Psa  45(44):5  |      reign. Because of truth and meekness and justice: and thy right [mansuetudinem; 자비(번역 오류)] <===== 겸화(謙和)
 2 Psa 132(131):1  |      remember David, and all his meekness. ~ [adflictionis; 노고] ???
 3 Wis   2:19 |   tortures, that we may know his meekness and try his patience. ~ [reverentiam; 온유] ???
 4 Eccl   1:35|                 35 Is faith, and meekness: and he will fill up his [mansuetudo; 온유(1,27)(번역 오류)] <===== 겸화(謙和)
 5 Eccl   3:19/17|          My son, do thy works in meekness, and thou shalt be beloved [mansuetudine; 온유하게(번역 오류)] <===== 겸화(謙和)하게 

 6 Eccl  10:31|         My son, keep thy soul in meekness, and give it honour according [mansuetudine; ???] <===== 겸화(謙和)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6,28 [???; 온유]
 7 Eccl  45:4 | sanctified him in his faith, and meekness, and chose him out of all [lenitate; 온유함]
 8 Dan   3:42 |         with us according to thy meeknes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mansuetudinem; 호의(번역 오류)] <===== 겸화(謙和)


 9 1Co   4:21 |    charity, and in the spirit of meekness ? ~ [mansuetudinis; 온유한 마음(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정신으로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10,1 [mansuetudinem; mildness; 온유(번역 오류)] <===== 겸화(謙和)

"새 번역 성경", 갈라티아 5,23 [mansuetudo; mildness(*); 온유(번역 오류)] <===== 겸화(謙和)
10 Gal   6:1  |      such a one in the spirit of meekness, considering thyself, lest [lenitatis; 온유힌 마음]

"새 번역 성경", 에페소 4,2 [mansuetudine; mildness; 온유(번역 오류)] <===== 겸화(謙和)

"새 번역 성경", 콜로새 3,12 [modestiam; modesty; 온유]

"새 번역 성경", 1티모테오 6,11 [mansuetudinem; mildness; 온유(번역 오류)] <===== 겸화(謙和)

"새 번역 성경", 2티모테오 2,25 [modestia; modesty; 온유]

"새 번역 성경", 티토 3,2 [mansuetudinem; mildness; 온유(번역 오류)] <===== 겸화(謙和)
11 Jam   1:21 |   abundance of naughtiness, with meekness receive the ingrafted word, [mansuetudine; 공손(번역 오류)] <===== 겸화(謙和)하게
12 Jam   3:13 |    conversation, his work in the meekness of wisdom. ~ [mansuetudine; 온유한 마음으로(번역 오류)] <===== 겸화(謙和)함으로

"새 번역 성경", 1베드로 3,16 [modestia; modesty; 온유]

(이상, 발췌 및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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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문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의 부록에 나열된 성령의 열매들 12개[주: 출처: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갈라티아서 5,22-23]에서, 갈라티아서 5,23의 첫 번째인 "mansuetudo"가, "mildness" 대신에, "gentleness"로 번역되어 제8번째로 나령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5cccc.htm <----- 여기를 클릭하여 필히 확인하라 

 

(ii)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Ma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mildness"에 대한 설명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m/m201.htm 

(발췌 시작)

MILDNESS

 

Gentleness in disposition and behavior. As a fruit of the Holy Spirit, it is a perfection of love which tempers justice by avoiding any unnecessary action that might provoke anger or resentment.

 

겸화(謙和)(mildness, mansuetudo)

 

성향(disposition) 및 처신(behavior)에 있어 겸화(謙和)(gentleness)를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 한 개로서(갈라티아 5,23), 이 덕(virtue)은, 분노(anger) 혹은 분개(resentment)를 유발시킬(provoke) 수도 있는 어떠한 불필요한 행동도 회피함으로써, 정의(justice)를 누그러뜨리는 애덕의 어떤 완미(a perfection of love)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iii) (이 글의 결론 15) 따라서, 바로 위의 제(i)항에서 확인한 바 및 제(ii)항에 의하여, 영어 형용사들 "mild""gentle"이, 성향(disposition) 및 처신(behavior)에 있어,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이 글을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iv) 따라서, 바로 위의 제(iii)항(이 글의 결론 15)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6) 성향(disposition) 및 처신(behavior)에 있어 겸화(謙和)한 자(the gentle/the mild)들(집회서 3,17; 갈라티아 5,23; 신학 대전 IIa IIae, q157) 중에서만 오로지 양선(良善)한 자(the meek)들[즉, 어질고 윤리적으로 착한 자들](마태오 복음서 5,5)이 있을 수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7)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다수의 영어본 성경들 중의 약 1/3에서, 갈라티아서 5,23의 첫 단어가, "gentleness" 대신에, "meekness"로 번역된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https://biblehub.com/galatians/5-23.htm <----- 필히 확인하라

 

(이 글의 결론 18)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서 "온유하게"로 번역된 표현 및 갈라티아서 5,23의 첫 단어가, "온유"로 번역된 표현은 매우 심각한 번역 오류이며, 대신에, 각각 "겸화하게"(謙和)겸화"(謙和)로 번역되는 것이 매우 적절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9) "새 번역 성경", 마태오 복음서 5,5; 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표현은 매우 심각한 번역 오류이며, 대신에, "양선"(良善)으로 번역되는 것이 매우 적절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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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3년 2월 1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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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Douay-Rheims Bible 본문 중의 "humble" 단어 색인:

http://www.intratext.com/IXT/ENG0011/1/U.HTM 53

 

2-5-4. Douay-Rheims Bible 본문 중의 "meek" 단어 색인:

출처: http://www.intratext.com/IXT/ENG0011/1/R3.HTM 24

(발췌 및 내용 추가 시작; 주: [ ] 안에 나열된 바는 대충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에서 대응하는 라틴어 단어이고, "새 번역 성경"의 대응하는 표현임)

 1 Num  12:3  |         Moses was a man exceeding meek above all men that dwelt [mitissimus; 겸손하였다(번역 오류)] <===== 양선(良善)하였다
 2 Judi   9:16|      prayer of the humble and the meek hath always pleased thee. ~ [mansuetorum; 없음] <===== 겸화(謙和)

"새 번역 성경", 2마카베오 15,12 [modestum; modest; 온유하며]
 3 Job  24:4  |       have oppressed together the meek of the earth. ~ [mansuetos; 가련한 이들(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들
 4 Psa  25(24):9  |       judgment: he will teach the meek his ways. ~ [modestos; 가련한 이들] ??? 
 5 Psa  34(33):3  |          soul be praised: let the meek hear and rejoice. ~ [mites; 가난한 이들(번역 오류)] <===== 양선(良善)한 사람들
 6 Psa  37(36):11 |                        11 But the meek shall inherit the land, [mites; 가난한 이들(번역 오류)] <===== 양선(良善)한 사람들[마태오 5,5 참조]
 7 Psa  76(75):10 |         judgment, to save all the meek of the earth. ~ [mites; 가난한 이들(번역 오류)] <===== 양선(良善)한 사람들
 8 Psa 147(146):6  |           The Lord lifteth up the meek, and bringeth the wicked [mansuetos; 가난한 이들(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들
 9 Psa 150(149):4  |     people: and he will exalt the meek unto salvation. ~ [mansuetos; ???] <===== 겸화(謙和)한 이들
10 Pro   3:34 |          the scorners, and to the meek he will give grace. ~ [mansuetis; 가련한 이들(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들
11 Pro  16:19 |     better to be humbled with the meek, than to divide spoils with [mitibus, 가난한 이들(번역 오류)] <===== 양선(良善)한 사람들
12 Eccl   5:13|                             13 Be meek to hear the word, that thou [mansuetus; ???] <===== 겸화(謙和)한 이
13 Eccl  10:16/15|      princes, and hath set up the meek in their stead. ~ [mites; 비천한 이들(번역 오류)(10,15)] <===== 양선(良善)한 사람들
14 Isa  11:4  |       reprove with equity for the meek of the earth: land he shall [mansuetis; 가련한 이들(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들
15 Isa  29:19 |                        19 And the meek shall increase their joy [mites; 가장 가난한 이들(번역 오류)] <===== 양선(良善)한 사람들
16 Isa  32:7  |     framed devices to destroy the meek, with lying words, when [mites, 가난한 이(번역 오류)] <===== 양선(良善)한 사람들
17 Isa  61:1    |          sent me to preach to the meek, to heal the contrite of [mansuetis; 가난한 이들(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들
18 Jer  11:19 |                 19 And I was as a meek lamb, that is carried to [mansuetus; 순한(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
19 Sop   2:3  |           3 Seek the Lord, all ye meek of the earth, you that have [mansueti; 겸손한 이들(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
20 Sop   2:3  |           seek the just, seek the meek: if by any means you may [mansuetum; 겸손함(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

21 Matt   5:4/5 |                 4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possess [mites; 온유한 사람들(번역 오류)] <===== 양선(良善)한 사람들[시편 37,11 참조]
22 Matt  11:29|         learn of me, because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mitis; 온유하고(번역 오류)] <===== 양선(良善)하고
23 Matt  21:5 |          thy king cometh to thee, meek, and sitting upon an ass, [mansuetus, 겸손하시어(번역 오류)] <===== 겸화(謙和)한 이
24 1Pe   3:4  | incorruptibility of a quiet and a meek spirit, which is rich in [modesti; 온유하고]

(이상, 발췌 및 내용 추가 끝)

 

그리고 (ii) 왜냐하면 영어로 "humility"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가 우리말본 성경들에서 "겸손"으로 이미 번역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만약에 영어로 "meekness"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를 또한 "겸손"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humility"(겸손)"meekness" 각각이 나타내는 상이한 개념들이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겸손"이 나타내는 개념 한 개로 잘못 번역되는,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원 개념 훼손"이라는 번역 오류가 야기되는 예상 밖의 문제가 발생하여, 그 결과, 우리말로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 본문을 읽고서, 설사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학습하고 묵상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생각입니다.

 

2-5-5. 따라서, 지금까지 이번 항(즉, 제2항)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 바에 의하여,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3)[잠정 결론]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의 전반부에서, 왜냐하면, "온유(溫柔)한 자들" 중에 "겸손하지 않은 자들"그리고/혹은 "양선(良善)하지 않은 자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온유(溫柔)하게" 혹은 심지어 "겸손하게"가 아니라, "겸화()하게"혹은 "온순(溫順)하게"로 번역되어야 함을, 이 글의 한 개의 잠정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2-5: 이어지는 제3항에서는,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3)을 크게 뒷받침하는 바, 즉, 서구 윤리학의, 바이블에 해당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의 역할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도록 하겠다.

 

 

3. 유관 자료/사료 분석 II

 

3-1.

3-1-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어본 집회서 3,17 전문 및 영어본을 읽을 수 있으며,

https://en.katabiblon.com/us/index.php?text=LXX&book=Sir&ch=3&interlin=on 

 

그리고, 바로 위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마우스로 해당 단어를 클릭하면, 그리스어본 집회서 3,17의 전반부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 πραΰτητι 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gentleness(친절), humility(겸손), courtesy(예의 바름) 혹은 considerateness(사려깊음)라고 합니다:

 

(발췌 시작)

πραΰτητι

 

lexicon][inflect][close]
Noun (Fem. 3rd Decl.)
πραΰτη[τ]ς v.l. πρᾳΰτη[τ]ς and πραότη[τ]ς v.l. πρᾳότη[τ]ς, -ητος, ἡ
πραυτητ·ι
(fem) dat sg
gentleness
gentleness, humility, courtesy or considerateness

(이상, 발췌 끝)

 

따라서, 그리스어 단어 "πραΰτητι"가, 집회서 3,17의 전후 문맥 안에서, "겸손" 을 포함하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한 개의 단어로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특히, "온유(溫柔)한 자들" 중에 "겸손하지 않은 자들" 그리고/혹은 "양선(良善)하지 않은 자들"이 있을 수도 있음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게시자 주 3-1-1: 비록 그리스어본 집회서 3,17의 전반부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 πραΰτητι 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로서, Douay-Rheims Bible, 집회서 3,19[주: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 해당함]에서 "meekness"가 선정되어 사용되었기는 하나, 그러나, 바로 아래의 제3-1-2항과는 크게 다르게, 정작에, 바로 이 그리스어 단어 πραΰτητι 의 의미에 "meekness"없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3-1-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어로 "meek"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와 영어로 "humble"로 번역되는 성경 용어가 바로 인접하여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어본 마태오 복음서 11,29 전문 및 그 영어본 전문을 읽을 수 있으며,

https://en.katabiblon.com/us/index.php?text=GNT&book=Mt&ch=11&interlin=on 

 

그리고, 바로 위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마우스로 해당 단어를 클릭하면, 그리스어본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 πρᾷός 혹은 πραΰς 의 의미가, 다음과 같이, meek(온순한), tame(유순한)이라고 합니다:

 

(발췌 시작)

πραΰς v.l. πρᾳΰς πραεῖα πραΰ, gen. sg. πραέος and πραέως, and πρᾶος v.l. πρᾷος -ον
πρᾳ·ος

mas nom sg or fem nom sg
meek/tame
[submissive(온순한), easily controlled, non- resisting]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3-1-2: 바로 위에 발췌된, 그리스어 단어 πρᾷός 혹은 πραΰς 의 의미가, 그리스어 단어 πραΰτητι의 의미와는 크게 다르게, "겸손하다"(humble)로부터 상당히 멀어져 있음, 즉, "겸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전제(前提)하지 않음을, 반드시 주목하라.

 

따라서,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4) 성경 본문을 지역 언어로 번역할 때에, 예를 들어, "새 번역 성경" 마태오 복음서 11,29집회서 3,17에서처럼,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피조물이 아닌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 당신 자신의 본성/속성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moral good)을 나타내는 번역 용어로서 사용된 단어 "온유"(*), 집회서 3,17에서처럼, 피조물인 인간의 윤리척 처신에 있어서의 어떠한 면을 나타내는 번역 용어로서, 또한 함부로 사용하면 아니 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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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아래의 제5항에서, 바로 이 번역 용어 "온유(溫柔)"의 출처와 기원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할 것이다. 이 용어는, 1969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천주교회 안에서 사용되지 않은, 매우 부적절한, 개신교회 측의 고유한 용어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께서 애초에 사용한 용어 "양선(良善)"으로 반드시 교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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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또 다른 한편으로, 

 

3-2-1. 윤리 신학의, 더 나아가, 서구 윤리학의, 바이블에 해당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  본문에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집회서 3,19 [주: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 대응함]가 발췌 인용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출처 1: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57.html#SSQ157OUTP1 

출처 2: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b/Q157#q157pr 

 

영어본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 본문에서 특히, "humility"(겸손)에 대응하는 단어 대신에, 한 개의 윤리덕(a moral virtue)을 나타내는 용어인 "meekness"(대응하는 라틴어: mansuetudine, 원형: mansuetudo) [주: 대응하는 성경 용어는, 위의 제2-0-2항에 발췌된,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집회서 3,19[주: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 대응함]에서 사용된 "mansuetudine"임]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바로 이 단어가 바로 위의 제2-3항에 발췌된 성경 용어인, 그리스어 단어 "πραΰτητι"에 대응하는 단어임에 크게 주목하십시오.

 

3-2-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61  본문에서, "humility"(겸손)(대응하는 라틴어: humilita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다른 윤리덕(another moral virtue) 한 개를 또한 별도로 기술하고 있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1: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61.html#SSQ161OUTP1 

출처 2: http://www.logicmuseum.com/wiki/Authors/Thomas_Aquinas/Summa_Theologiae/Part_IIb/Q161#q161a1arg1 

 

3-3. 따라서, 위의 제2-4항과 이번 항(즉, 제3항)에서 정밀하게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5)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의 전반부에서, 전후 문맥을 또한 고려하여, "온유(溫柔)하게" 혹은 심지어 "겸손하게"가 아니라, "겸화()하게"로 번역되어야 함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6) 만약에, 예를 들어, 위의 제2-2항제2-3항에서 다룬, "공동번역성서"를 마련하는 데에 참여한 1960년대 이후의 성서 신학자들이, 위의 제3-2항에 안내된, 윤리 신학의, 더 나아가, 서구 윤리학의, 바이블에 해당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 및 q.161을 사전에 학습한 분들이었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성경 용어 "meekness"로 번역되었던 성경 용어를 "humility"결코 교체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4. 지금까지 본글의 중간 마무리

 

4-1.[주의 사항] 다음은 "OnLine Etymology Dictionary"에 표제어로 수록된 "meekness"의 어원 정보 등입니다:

 

출처: https://www.etymonline.com/word/meekness#etymonline_v_44398 

(발췌 시작)

meekness (n.)

 

late 12c., meknesse, "the virtue of humility;" early 13c., "softness of temper, gentleness;" mid-13c., "forbearance under injuries or provocation;" see meek (adj.) + -ness.

 

meek (adj.)

 

late 12c., mēk, "gentle or mild of temper; forbearing under injury or annoyance; humble, unassuming;" of a woman, "modest," from a Scandinavian source such as Old Norse mjukr "soft, pliant, gentle," from Proto-Germanic *meukaz (source also of Gothic muka-modei "humility," Dutch muik "soft"), a word of uncertain origin, perhaps from PIE *meug- "slippery, slimy." In the Bible, it translates Latin mansuetus from Vulgate (for which see mansuetude). Sense of "submissive, obedient, docile" is from c. 1300.

(이상, 발췌 끝)

 

[문제점 1] 그런데, 위의 설명 중에서, "meekness"라는 단어가, 구체적인 출처/근거의 제시 없이, 12세기 말기에 "겸덕"(the virtue of humility)의 의미를 지녔다는 설명은, 우선적으로, 위의 제3-2항에서 말씀드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 및 q.161의 가르침들에 결코 부합하지 않음에 주목하십시오. 

 

따라서, "OnLine Etymology Dictionary"에 표제어로 수록된 "meekness"의 어원 정보에 근거하여, "meekness"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덕(virtue)이 "humility"라는 단어가 나타내는 덕(virtue)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착각, 심각한 판단 오류 등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굵게 쓴 파란 글자들을 클릭하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가르침들 중에서, "humility""meekness", 이들 두 단어들이 바로 인접하여 나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meekness" "humility" "john Paul II" site:vatican.va <----- 여기를 클릭하여 필히 확인하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바로 위의 예(example)을 제시하는 이유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세기의 탁월한 토미스트(Thomists)들 중의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문제점 2] 그리고 또한, "In the Bible, it translates Latin mansuetus from Vulgate (for which see mansuetude)." 라는 설명도 출처를 밝히지 않아서 매우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mansuetude" 대신에, 라틴어 단어 "mitis"가 사용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 11,29가 그 출처가 아닌 것은 매우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www.latinvulgate.com/verse.aspx?t=1&b=1&c=11 

(발췌 시작)

tollite iugum meum super vos et discite a me quia mitis sum et humilis corde et invenietis requiem animabus vestris

(이상, 발췌 끝)

 

그리고 위의 제3-2-1항에 제시된 바에 의하여, 이 라틴어 단어 "mansuetude"대중 라틴말 성경, 집회서 3,19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천주교 신자가 아닌 자에 의하여 마련된 것이 바로 "OnLine Etymology Dictionary"임을 또한 고려할 때에, 대중 라틴말 성경, 집회서 3,19가 그 출처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음에 대하여,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처: https://www.etymonline.com/columns/post/bio?utm_source=etymonline_footer&utm_medium=link_exchange 

(발췌 시작)

I was raised among and in part educated by Quakers, but have no faith personally. ... I could say I've lived my whole life in the compass of ground that has the Philadelphia Quakers on one end and the Lancaster Amish on the other.

(이상, 발췌 끝)

 

4-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위의 제2-3항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2-3: [주; 이 게시자 주는 아래의 제3항을 작성한 후에 추가한 것임]
(1)
 그런데, 위의 제1-6-2항에 발췌된 바에 의하여, (i)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420년)가 들여다본 히브리어 집회서 3,17 본문이, (ii) 바로 위에 발췌된 1896년에 이집트 카이로 소재 회당에서 발견된 히브리어 집회서 3,17 본문과, 정확하게 동일한지의 여부는, 오래 전에 사라진 성 예로니모가 들여다본 히브리어 집회서의 사본을 지금까지 찾아내지 못하였기에, 적어도 지금까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다.

 

(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성 예로니모가 집회서 3,19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i)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라틴어본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특히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meek"의 의미를 지닌, 라틴어 단어 "mitis"의 명사형을 사용하는 대신에, (ii) 특히 대응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meek"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라틴어 명사 "mansuetudine"을 사용한 것은, 마태오 복음서 11,29집회서 3,17(19)의 본문들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는 과정에서, 변별력의 상실을 야기하지 않기 위하여서였을 것임을 또한 생각할 때에, 상당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이다.

 

(3) 무슨 말씀인고 하면,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420년)께서 일찌기 집회서 3,19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라틴어 형용사 "mitis"의 명사형 "mitigatio"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매우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4) 그러나 이와는 달리,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에, "mitis"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 용어로서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영어 형용사 "meek"의 명사형 "meekness"를 집회서 3,19에서 사용한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5) 설상가상으로. 왜냐하면 1947년에 마련된 영어본 "신학 대전"에서, 필요시, 바로 위의 제(4)항에 안내된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에서 발췌 인용하기 때문에, 아래의 제3-2-1항에 안내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라틴어 정본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IIa, IIae, q.157 이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췌 인용된 대중 라틴말(Vulgate) 성경, 집회서 3,19에서 사용되고 있는 라틴어 성경 용어 mansuetudine"의 번역 용어로서 "Douay-Rheims Bible", 집회서 3,19에서 사용되고 있는 "meekness"라는 잘못 선정된 영어 단어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본 "신학 대전"의 본문에서도 또한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157.html#SSQ157OUTP1 

 

(6) 다른 한편으로, 본글의 제2-5항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역 언어인 "영어" 자체의 변별력이 "라틴어"의 변별력에 비하여 매우 부실하여, 예를 들어, "mitis", "modestos", "mansuetudine" 이들 세 개의 라틴어 단어들이 모두 한 개의 영어 단어 "meek"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바로 위의 제(5)항에서 지적한, 영어본 "신학 대전" 본문 안쪽으로 증폭되어 퍼져 나간 번역 오류의 문제정말로(indeed) 대단히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상, 게시자 주 2-3 끝)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위의 제2항제3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7)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의 경우, "mitis"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 용어로서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영어 형용사 "meek"의 명사형 "meekness"를 집회서 3,19에서 라틴어 "mansuetudo"에 대응하는 영어 번역 용어로서 사용한 것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5. 유관 사료 분석 III

 

5-0. 들어가면서

 

본글의 작성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서 사용되고 있는 "온유(溫柔)하게" 라는 번역 표현이, 그 전후 문맥 안에서, 매우 부적절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으며, 바로 이 부적절성에 대하여서는 위의 제1항, 제2항, 그리고 제3항에서, 상당히 충분하게,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항에서는, 우선적으로, 차용 번역 용어인 "온유(溫柔)하게" 가 언제쯤에 누구에 의하여 성경 용어로서 처음으로 도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고, 두 번째로, 바로 이 부적절한 용어를 어떠한 용어로 교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하여서도 또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새 번역 성경"에서 "온유(溫柔)"라는 번역 용어가, (i) 마태오 복음서 11,29, 그리고 (ii) 집회서 3,17에서, 위의 제3-1항에 기술된 (이 글의 결론 4)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후 문맥 안에서 변별력 제고 없이 도입되어, 무작정 사용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iii) 위의 제2-5항에서 이미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였듯이, 성경 본문이 우리말로 번역 되는 과정에 남용이 되었음을 또한 구체적으로 예증하였다(demonstrate)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 부적절한 용어 "온유(溫柔)"를 어떠한 용어로 교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하여서는 크게, (i) "새 번역 성경",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바로 이 용어를 어떤 용어로 교체하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 그리고 (ii)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서 사용된 바로 이 용어를 어떤 용어로 교체하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 이렇게 둘로 구분되는데, 바로 이러한 구분은, 위의 제2항제3항에서 매우 정밀하게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였듯이, 일찌기 성 예로니모께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소위 말하는,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를 마련할 때에, 성 예로니모에 의하여 동일하게 적용되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ii)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서 사용된 바로 이 용어를 어떤 용어로 교체하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이미 위의 제3-3항에서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i)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성경 용어로서 처음으로 도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 및 최초 도입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규명의 문제[주: 바로 아래의 제5-1항을 보라], 그리고 (iii) 바로 이 용어를 어떤 용어로 교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제, 그리고 (iv)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에서, 이들 두 개의 교체 용어들의 최초 출처들의 규명 등의 문제가 이제 남아 있습니다. 

 

5-1. 우선적으로,

 

5-1-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아래의 제5-2-1항에 안내된, 중국 본토에 1807년에 최초로 임국한 개신교회 측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이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할 때에 대단히 많이 의존하였던,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장 바쎄 신부님(1662-1707년)에 의하여 1704년경에 중국어로 번역된 신약 성경(주: 히브리서 제1장까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2-1707_장_바쎄/로마_보존본/신약_upto_히브리서1장.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2-1707_장_바쎄/마태오_11.htm <----- 여기를 클릭하면,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온유(溫柔)" 대신에, "양선(善)"이 사용되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마태오11_29_in_장_바쎄_로마_보존본_신약성경_제23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1-1: 그런데, 위의 제2-5-4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에 의하여, 즉,

 

(발췌 시작) 

21 Matt   5:4/5 |                 4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shall possess [mites; 온유한 사람들] <===== 양선(良善)한 사람들
22 Matt  11:29|         learn of me, because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mitis; 온유하고] <===== 양선(良善)하고

(이상, 발췌 끝)

 

대중 라틴말(Clementine Vulgate),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사용된 라틴어 단어 "mitis"의 변형인 "mites"이 마태오 복음서 5,5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사실은, 장 바쎄 신부님의 중국어본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서 5,5에서 "良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었을 것임을 가리킴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게시자 주 5-1-2-1 끝)

 

5-1-2. 그리고 다음에 발췌된 바는, 바로 위의 게시자 주 5-1-1에서 지적한 바가 사실임을 실증적으로 확인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2-1707_장_바쎄/마태오_5.htm 

(발췌 시작)

마태오5_1-12_in_장_바쎄_로마_보존본_신약성경_제11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1-2: (1) 그런데, 대단히 예상밖으로, 그리고 매우 실망스럽게, 마태오 복음서 제5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소위 말하는, "진복팔단"에서 사용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도입된 번역 용어들 중에서, 특히 마태오 복음서 5,3에 도입된 번역 용어인  "貧"(신빈)이, 전혀 예상 밖으로, 바로 위에 발췌된 바의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의 첫 시작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장 바쎄 신부에 의하여, "貧"(심빈)으로 교체되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즉, ""을, 다산 정약용 선생님처럼 심장 혹은 염통이 아니라"마음"으로 잘못 번역해 온 것이 국내의 그동안의 현실인데, 마태오 복음서 5,3에서, 애초에, 즉,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올바르게 직역 번역된 "貧者"(신빈자, 즉, 영(spirit)이 가난한 자)장 바쎄 신부에 의하여 1704년경에 "貧者"(심빈자)로 대단히 잘못 선정된 번역 표현으로 교체되었고, [내용 추가 일자: 2023년 1월 28일]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미국 개신교회 측의 장로회 소속의 선교자들에 의하여 1863년에 초간된 裨治文、克陛存譯 중국어본 성경에서, "虛心者"(허심자)로 번역되었음을 필자가 이미 확인하였으며, 그러나 바로 이 중국어본 성경을 그 번역대본으로 삼아 1953년경에 우리말로 중역(重譯, double translation)이 되어 우리나라 개신교회 측의 우리말 성경이 마련될 때에, "虛心者"(허심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https://www.zdic.net/hans/%E8%99%9B%E5%BF%83 , 아마도 한자 단어인 "虛心"(허심)이라는 단어의 자구적 의미 open-minded, modest; timid, cowardly가 진복팔단의 전후 문맥 안에서 도무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되며 [이상, 2023년 1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그리고 그 이후 1970년대 문익환 목사(장로파)김현주 목사(감리파)가 참여한 우리말본 "공동번역성서"로의 번역 과정에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기존의 번역 표현이 "마음이 가난한 자"로 교체되었는데, 그러나 바로 이 교체된 번역문은 명백한 번역 오류라 아니 지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구적으로나(literally) 혹은 번역 용어로서로나, (i) 성경 용어로서 "영/신"(spirit)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 한 개(a metaphysical concept)를 나타태는 낱글자 ""과, (ii) 성경 용어로서 사람의 "심장"(heart)이라는 형이하학적 개념 한 개(a physical concept)를 나타내는 낱글자 ""은 결코 동의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장 바쎄 신부가, 1704년경에매우 독선(獨善)적으로/임의(任意)적으로/작위(作爲)적으로 행한 바로 이 잘못된 교체가 어불성설인 것은, 약 100년 뒤에 중국 본토에 처음으로 임국한 개신교회 측 선교사들에 의하여[즉, 독일 개신교회 루터파 출신의 귀츨라프와, 1850년대에 이르면, 소위 말하는, 중국어본 성경 "대표역본" 번역에 참여한 서양인 선교사들 중에서 "신()파"로 불리는, 미국 개신교회 장로파 출신의 브리지만 등에 의하여], 어떠한 종류의 잘못된 교체들을 계속하여 야기하였는지를 들여다보면 또한 알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아래에 이어지는 글들에 발췌된, 이들 개신교회 측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이 된 해당 부분들과 정밀하게 비교/검토를 하도록 하라.

 

(2) 다른 한편으로, 우선적으로, 바로 이 잘못된 교체 자체에 상당한 연고가 있는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아직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글/졸고에서 이 문제가 왜 발생하였는지에 대하여 매우 깊이있게 다룰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563.htm <----- 바쁘지 않는 분들의 필독 권고  

 

그런데, 필자가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글을 여태까지도 마무리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서 중국에 파견되었던 장 바쎄 신부가 당시에, 한문 문화권의 천주교회의 그 당시의 전후 역사 안에서, 어떠한 수준의 중대한 과오를 범하였는지에 대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구체적 및 실증적으로 확인한 후에, 아무리 커다란 비극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비극이 또다시 발생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로, 너무도 크게 실망하였기 때문이었다.

 

(3) 그 다음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이 교체가, 최초로 1807년, 그리고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측 선교사들에게, 1850년경에, 어떠한 빌미/기회를 제공하였는지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글/졸고를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성신_vs_성령_2548.htm <-----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5-1-2 끝) 

 

5-2. 이번 항에서는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처음으로 도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 및 최초 도입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1807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측 선교사들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들의 중국어본 마태오 복음서 11,29 및 마태오 복음서 5,5를 각각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1: https://bible.fhl.net/new/ob.php?book=all&chineses=40&chap=11&sec=29 

출처 2: https://bible.fhl.net/new/ob.php?book=all&chineses=40&chap=5&sec=5 

 

5-2-1.

5-2-1-1. 1823年神天聖書,馬禮遜譯 <-----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s://bible.fhl.net/new/ob.php?book=36&chineses=40&chap=11&sec=29 [(2024-01-12) 새 주소]

 

 로버트 모리슨의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謙"(겸)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합니다.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왼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의 시작부분에 있는 마태오 복음서 11,29를 보십시오:

(발췌 시작)

겸자손자_마태오11_29_in_1823_로버트_모리슨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5-2-1-2. 1823年神天聖書,馬禮遜譯 <-----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s://bible.fhl.net/new/ob.php?book=38&chineses=40&chap=5&sec=5 [(2024-01-12) 새 주소]

 

로버트 모리슨의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5,5에서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謙遜"(겸손)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합니다.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의 시작부분에 있는 마태오 복음서 5,5를 보십시오:

(발췌 시작)

겸손자_마태오5_5_in_1833_로버트_모리슨_신약성경_제8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빌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2-1: (1) 로버트 모리슨이 위의 제5-1항에 안내된 장 바쎄 신부님의 신약 성경을 대단히 많이 들여다본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인에, 그러나 정작에, 마태오 복음서 11,29마태오 복음서 5,5를 중국어로 번역할 때에,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良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를 그대로 베끼지 않았는지 참으로 납득할 수 없다.

 

(2) 대신에,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에서 및 1611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King James Version", 이들 둘 다에서, 라틴어 "mitis"의 번역 용어로서 사용된 "meek"가, (i)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는 "謙"(겸)으로 번역이 되고, (ii) 마태오 복음서 5,5에서는 "謙遜"(겸손)으로, 동일하지 아니 한 표현들로 번역이 된 것은 명백한 번역 미숙/번역 오류가 분명하다는 생각이며, 바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작업이, 이어지는 제5-2-2항제5-2-3항실증적으로(positively) 제시하였듯이,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개신교회 측의 서양인 후배 선교사들에 의하여, 진행되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5-2-2. 

5-2-2-1. 1839年救世主耶穌新遺詔書,郭實臘譯 <-----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s://bible.fhl.net/new/ob.php?book=70&chineses=40&chap=11&sec=29 [(2024-01-12) 새 주소]


귀츨라프의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의 마지막에 있는 마태오 복음서 11,29를 보십시오. "溫柔"(온유)대신에, "溫良"(온량)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합니다.

 

5-2-2-2. 1839年救世主耶穌新遺詔書,郭實臘譯 <-----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s://bible.fhl.net/new/ob.php?book=70&chineses=40&chap=5&sec=5 [(2024-01-12) 새 주소]

 

귀츨라프의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5,5에서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의 마지막에 있는 마태오 복음서 5,5를 보십시오. "溫柔"(온유)대신에, "溫良"(온량)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합니다.

 

게시자 주 5-2-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에서 및 1611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King James Version", 이들 둘 다에서, 라틴어 "mitis"의 번역 용어로서 사용된 "meek"가, 漢典 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溫良"(온량)이라는 단어의 설명에 제시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zdic.net/hans/溫良 

 

5-2-3.

5-2-3-1. 1853年聖經新遺詔全書,高德譯 <-----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s://bible.fhl.net/new/ob.php?book=94&chineses=40&chap=11&sec=29 [(2024-01012) 새 주소]

 

고다드의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왼쪽에서 다섯 번째 열(column)의 마지막에 있는 마태오 복음서 11,29를 보라. "溫柔"(온유)라는 표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마태오11_29_in_1853_고다드(高德)_역_신약성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다섯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5-2-3-2. 1853年聖經新遺詔全書,高德譯 <-----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s://bible.fhl.net/new/ob.php?book=94&chineses=40&chap=5&sec=5 [(2024-01-12) 새 주소]

 

고다드의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5,5에서 "온유(溫柔)"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오른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에 있는 마태오 복음서 5,5를 보십시오. "溫柔"(온유)라는 표현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온량_in_마태오5,5_in_1853_고다드(高德)_역_신약성경_제11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2-3: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589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Douay-Rheims Bible"에서 및 1611년에 초간된 영어본 성경인 "King James Version", 이들 둘 다에서, 라틴어 "mitis"의 번역 용어로서 사용된 "meek"가, 漢典 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溫柔"(온유)라는 단어의 설명에 제시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zdic.net/hans/溫柔 

 

(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856년 9월 23일자로 예수 성심 축일가톨릭 교회의 보편교회 전례력에, 처음으로/최초로, 포함되었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학습랄 수 있는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067.htm <----- 꼭 필독 권고  

 

특히, 바로 이 시점 이전에 출판된 중국어본 "천주성교일과"/"수진일과" 본문에는, 마태오 복음서 11,29가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발췌 인용되는, "성심송", 더 나아가, "예수 성심 도문"이 등 예수 성심 관련 기도문(들)이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음에 또한 주목하라.

 

그러나 이와는 달리, 1862년에 초간되었다고 알려진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에는, 예수 성심을 분명하게 표현한, (i) "성심송"[권2, 제13a쪽(page 203), 그리고 제14a쪽(page 205)에서 "량션"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었음(아래의 제5-4-2-11항 참조)](ii) "예수 성심 도문"[권2, 제85a쪽(page 347) 예수부활후주일, 그러나 제89a쪽(page 355)에서 "량션"이라는 자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음]이 수록되어 있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3) 또한, 최양업 신부님(1821-1861년)께서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 번역 작업을 완료한 시점1859년 10월 12일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최양업 신부님께서, 당시의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대목구장 혹은 부대목구장의 명에 따라, (i) 일찌기 우리나라 조선에 전달된,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다수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저술된, 내용 보강된, 기존의 중국어본 "천주성교일과"/"수진일과"(ii) 1773년 3월에 처음으로 중국 남서부 내륙 지방인 사천성(四川省) 소재 전교지에 부임한,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모예 신부에 의하여, 바로 이 천주성교일과"/"수진일과"다듬은 따라서 저작권이 모예 신부 혹은 파리 외방선교회에 없는 것이 분명한1780년에 마련된 중국어본 "천주경과", 이들 두 기도서들을 그 번역 대본으로 삼아,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 번역 작업을 시작한 시점, 예수 성심 축일이 가톨릭 교회의 보편 교회 전례력, 즉, 첨례표에 처음으로/최초로 추가된, 1856년 9월 23일 직후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신자들을 위하여, 예수 성심 축일을 가톨릭 교회의 보편 교회 전례력, 즉, 첨례표에 추가하여야 하는 시급한 사목적 이유는, 그 당시까지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 없었던, 바로 이러한 공식적인 우리말 기도서의 출판을, 특히 중국 소재 파리 외방선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게시자 주 5-2-3 끝)

 

5-2-4.

5-2-4-1. 1863年新約,裨治文、克陛存譯  <----- 여기를 클릭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https://bible.fhl.net/new/ob.php?book=123&version=&page=15 [(2024-01-12) 새 주소]

 

마태오 복음서 11,29에서  바로 위에 있는 고다드의 신약 성경 본문의 전반부를 그대로 베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오른쪽에서 열 번째 열(column)의 마지막에 있는 마태오 복음서 11,29를 보라. "溫柔"(온유)라는 표현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5-2-4: 특히, 바로 이 성경이 우리니리 개신교회 측 우리말본 성경의 번역 대본임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라.

 

그 결과, "온유(溫柔)" 라는 대단히 잘못 선정된 차용 번역 성경 용어는 1950년대에 출판된 우리나라 개신교회 용 성경 본문에, 중역 번역하는 과정에, 그대로 수입되었고, 그 결과

 

1970년대에 국내에서 "공동번역성서" 본문에 수입되었으며, 그리하여 드디어

 

2005년에 초간된 천주교 "새 번역 성경" 본문에도 수입되었는데, 

 

그러나 바로 이러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래의 제5-4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듯이,

 

일찌기 17세기초에 그 공인 초판이 출판된 마태오 리치 신부님"천주실의"을 시작으로 하여,

"칠극"(1614, 판토하 신부님), 

"교요해략"(1615년,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 

"천주강생언행기략"(1635년,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

"천주강생성경직해"(1636-1642년,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

"성경광익"(1740년,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주: 이들 모두는, 임금 정조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 안에 이미 전래되었음] 등에서 이미 사용된, 그리하여

 

1862년에 초간된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 권4, 진복팔단에,

 

1910년에 초간된 "사사성경", 마태오 복음서 제5장, 진복팔단에서도 사용된, 그리하여

 

1969년판 "복음성서", 마태오 복음서 제5장, 진복팔단에서도 사용된

 

"良善"(양선)이라는 참으로 적절한, 훌륭한, 좋은, 차용 번역 용어는,

 

갑자기 1970년대부터 국내의 가톨릭 교회 문헌들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질문 1: 1779년 겨울 천진암 장촉담경 바로 그 시점에 이미 가시적으로 존재한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의 전승/전통에 대한 기억지킴이는 도대체 누구의, 어느 세대의, 몫일까???

(이상, 게시자 주 5-2-4 끝)

  

5-2-5. 따라서, 위의 제5-1항 및 5-2항에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8) "온유(溫柔)" 라는 차용 번역 성경 용어는, 위의 제5-1항 및 제5-2항에서의 실증적인 고찰에 의하여,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미국 개신교회 측 선교사 고다드(高德, Goddard, 1813-1854년)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되어 1853년에 초간된 중국어본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5-3.

5-3-1. 우선적으로, 위의 제2-4-2항, "謙和"(겸화)라는 단어가 한 권의 아동학습서로서 우리나라 고려 후기의 문신 추적이 엮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명심보감, 12. 성심편 하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는  게시자 주 2-4-3, 그리고 제2-4-3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5-3-2.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저술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에서, 위의 제2-4-2항에서 말씀드린, "새 번역 성경", 집회서 3,17에서  사용된 번역 용어 "온유"의 대체 용어로서 적합한 "謙和"(겸화)라는 차용 번역 용어의 출처는, 예를 들어,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1582-164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40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인의"를 들 수 있습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82-1649_쥬리오_아레니/1640_천주강생인의.htm 
(출처 1로부터 발췌 시작)

천주강생인의_상권_제7장_강생사적_진부고경예언_17-26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주: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4월 23일) 마태오 복음서에서 취하여지고 있는 (이상, 2020년 4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천주강생" 에 대하여 예언된 구약 성경 본문들의 내용들의 조합 22개가, 다음의 (i) - (xxii)에 나열하였듯이, 각 조합의 구성 성분들로서 사용된 구약 성경 본문들의 출처들의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제시되고 있음. 혹시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이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본문의 번역 대본은, 1979년에 개정 초간된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이 아니라,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그 이전 시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 성경인,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 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

 

(xv) 천교신정: 본문: 고경 [미카 4,7; 이사야 52,7, 마태오 복음서 18,22], 각주: 기략 3권1[마태오 복음서 5,1-12(가해 연중 제4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매년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 복음 말씀); 5,13-16(가해 연중 제5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5,17-19(매년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5,20-26(매년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5,27-32(매년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5,33-37(매년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5,17-37(가해 연중 제6 주일 복음 말씀; 5,38-42(매년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5,43-48(매년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5,38-48(가해 연중 제7주일 복음 말씀); 6,1-6.16-18(매년 재의 수요일; 매년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6,19-23(매년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6,24-34(가해 연중 제8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7,1-29; 7,1-5(매년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7,6.12-14(매년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7,7-12(매년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7,15-20(매년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7,21.24-27(매년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7,21-29(가해 연중 제9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17.20-26(다해 연중 제6주일 복음 말씀); 6,20-26(매년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6,27-38(다해 연중 제7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6,36-38(매년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6,39-42(매년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6,39-45(다해 연중 제8주일 복음 말씀); 6,43-49(매년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4권13(마르코 복음서 9,33-40); 6권27 

천주강생인의_상권_제7장_강생사적_진부고경예언_제15_천교신정_제15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xvi) 대주자감비빈: [잡가리아 = 즈카르야, 서완 = 시온] 본문: 즈카르야 [9,9-10], 각주: 기략 6권8 [요한 복음서 12,1-11(매년 주님 수난 성지 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2016년 12월 7일) 주: "용약"이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그런데, "용약"이라는 번역 용어는, 다음에 있는, "천주강생언행기략" 초간본보다 늦게(즉, 1년 뒤에) 초간된 쥬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의 한문본 "성경직해"에서도 또한 사용되고 있음: 성경직해, 권10_13_성모왕견성부의살백이첨례_199-206

천주강생인의_상권_제7장_강생사적_진부고경예언_제15_천교신정_제16_대주자감비빈_제15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294712#p37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第七節 降生事跡,盡符古經預言

 

[...]

 

古經預言降生之主。為世世主。其家國。非如人世家國。惟權柄勢利是尚。乃為謙和之邦。為諸聖人之會。為上天之國。為神妙之政。蓋吾主聖教。傳於世世。而天上永享真福。是以吾主耶穌。每以謙下立教。謂弟子曰。汝輩若不變為赤子。則不能入天國。又令其相恕相赦。不較人犯。即至七十七次。亦不為限也。至論哀矜。論貞德。論絕財。論祈禱。種種聖訓。見天國之法令。神治之密功。與世國之法迥絕矣。見紀略三卷一。又四卷十三。又六卷二十七。此其十有五也

 

古聖匝加利亞在天主降生前。五百二十一年。論吾主降生。雖為天下真主。實甘謙和卑貧。不以財帛為業。乃曰。吾子西完。如德亞。京都內山名。乃以此稱都城雲。子者。愛之意也。宜大歡喜。吾子協露撒棱都城本名。宜大踊躍蓋爾大主至善。降臨救爾。其允坐驢母及駒。諭萬民以太平。然其威權。從此海以至彼海。統無疆之地。至吾主耶穌受難前。入都城。實符此古經。時宗徒亦憶至此。乃知是舉非偶爾。見紀略六卷八。此其十有六也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3-1: 바로 위에 안내된, "천주강생인의"는, 이벽 성조가 그 저자인 "성교요지"의 자구 출처 및 내용 출처 한분몬 천주교 문헌들에 포함된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여, 졸글/졸고[제목: 주교연기, 천주강생인의, 천주강생언행기략 은 이벽 성조의 성교요지 5,1-10의 내용 출처 및 자구 출처이다; 게시일자: 2018-03-28]를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13.htm <-----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 권고

 

(ii)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여, 졸글/졸고[제목: 교회사 연구에 있어 판단의 기준/근거인 rectitude는 넓고 깊이 있는 성경 및 교리 지식이다; 게시일자: 2017-010-03]를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13.htm <-----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5-3-1 끝)

 

5-4.

5-4-1. 우선적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良善"(양선)이라는 한자 단어가, 조선의 율곡 이이께서 편집하여 엮은, "소학집주"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db.cyberseodang.or.kr/front/sabuList/BookMain.do?mId=m01&bnCode=jti_3a0501&titleId=C234 

 

따라서, "善"(양선)이라는 한자 단어를 구성하는 낱글자들의 자구적 의미를 결합한 "정말로 착함"/"어질고 착함"의 의미는, 동네 서당에서 조금 공부를 한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5-4-2. 다음에 발췌된 바들은, "良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된, (i)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저술되어 출판된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과 (ii) 1862년과 그 이후에 우리나라 조선의 천주교회에서 출판한 우리말본 천주교회 문헌들의 유관 본문들 입니다:    

 

5-4-2-1. 다음에 발췌된, 1583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마태오 리치 신부님(1571-161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03년에 공인된 초판이 출판된, "천주실의"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52-1610_마태오_리치/1603_천주실의_하권_중각.htm  

(발췌 시작)

량선_in_1603_천주실의_허권_중각_1868년판_토산만본_제36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영어본 제435항 참조].

(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938302#p450

(발췌 시작)

第七篇 論人性本善,而述天主門士正學。

제7편 인성이 본래 선함을 논(論)하고, 천주의 문사(門士)들의 정학(正學)을 술()하니라.

 

[...]

 

中士曰:性本必有德,無德何為善?所謂君子,亦複其初也。

 

중국 선비 가로대: 성(性, nature)은 본디(本, originally) 덕(德, virtue)을 반드시 가지고 있는데, 덕이 없는 자(無德, virtueless)가 무슨 까닭으로(何為) 윤리적 선(善)(moral good)을 행할 수 있겠는지요? 군자(君子)라고 일컬어지는 자는 또한 그 시초(其初, his origin)를 회복하는(複, restore) 자를 말합니다.

 

西士曰:設謂善者惟複其初,則人皆生而聖人也,而何謂「有生而知之,有學而知之」之別乎?如謂德非自我新知,而但返其所已有;已失之大犯罪,今複之不足以為大功。

 

서양 선비 가로대: 만약에(設, if) 윤리적으로 선한 자(善者)가 오로지(惟) 그 시초를 회복한 자만을 일컫는다고 한다면, 곧(則) 사람(人)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성인(聖人)들인 것인데, 그러나(而) 무슨 까닭으로 「태어남(生)으로부터 알게 됨이 있고, 배움(學, learning)으로부터 알게 됨이 있다」(*1)는 구별(別, division)이 있는지요? 만약에(如) 덕(德)이 나 자신으로부터(自我) 새롭게 아는 것이 아니고(非), 그 이미 가지고 있었던 바 쪽으로 다만 되돌아감(返)만을 일컫는(謂) 것이라면, 그것을 이미 잃었던 것은 죄를 크게 범한 것이며,(*2) 지금(今) 그것을 회복함(複)은 커다란 공으로 삼음에 있어 충분하지 않습니다(不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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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전후 문맥 안에서 한 개의, 진리인 명제(true proposition/statement)인, 결정적인, 반례(counter-example)로서 제시된 이 발췌문의 출처가 "論語", 季氏에 기술된,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바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https://ctext.org/all-texts?searchu=%E7%94%9F%E8%80%8C%E7%9F%A5 

(발췌 시작)

孔子曰:「生而知者,上也學而知者,次也困而學之,又其次也;困而不學,民斯為下矣。」

(이상, 발췌 끝)

 

그러니까, 왜냐하면  바로 이 문장이 한 개의 결정적인 반례(a decisive counter-example)로서 제시되었기 때문에, 공자님의 바로 이 가르침이 진리임에 마태오 리치 신부님이, 확실하고 그리고 명확하게, 동의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바로 이 부분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 기술된, 아담(Adam)과 하와(Eve)가 범한 원죄(original sin)를 말함이 자명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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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固須認二善之品矣:性之善,為『良善』;德之善,為『習善』。

 

그러므로(則, donc) 다음과 깉은 두 개의 윤리적 선(二善)들로 구성된 품계/등급(品, rank)를 확실하게 인정하여야(認) 합니다: "양선"(良善, meekness)이라고 일컬어지는(為), 성(性, nature)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性之善), "습선"(習善)이라고 일컬어지는(為), 덕(德)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德之善).

 

良善者,天主原化性命之德,而我無功焉;我所謂功,止在自習積德之善也。

 

무릇 "양선"(良善, meekness)이라고 불리는 바는 천주께서 성명(性命, 생명, life)을 기원/원천에 있어 변화하심(原化, change in origin)에(*3) 기인하는 덕(德, virtue)이어서,(*4) 따라서 내가 [공로로서] 성취한(功, merits) 것이 아니며, [다른 한편으로] 내가 [공로로서] 성취하였다고(功, merits) 일컫는 바는, 스스로 익혀서/배워서(習) 쌓은(積) 덕(德, virtues)들[즉, 후천적으로 습득된 윤리덕(moral virtues)들]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善, moral good)[즉, "습선"(習善)]에만 오로지(止, only)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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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변화"(change)라는 차용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4.htm [주: 제2-3항]


(*4) 번역자 주: (1) 바로 이 덕이 거명되고 있는 한문본 성경 본문이, 우선적으로, 아래의 제5-4-2-7항에 발췌된 "천주강생성경직해", 마태오 복음서 11,29[주: 사람으로 육화()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경우]임을 반드시 확인하라.

 

(2) 바로 이 덕이 거명되고 있는 한문본 성경 본문이, 그 다음으로,  아래의 제5-4-2-6항에 발췌된 "천주강생언행기략", 마태오 복음서 5,5[주: 진복팔단 중의 피조물들인 특정된 사람들의 경우]임에 또한 반드시 확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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孩提之童愛親,鳥獸亦愛之;常人不論仁與不仁,乍見孺子將入於井,即皆怵惕;此皆『良善』耳,

 

[예를 들어] 어린아이인 아이(孩提之童)는 친부모(親)를 사랑하고 새들과 짐승들도 또한 그 부모들을 사랑하며, 보통 사람(常人)들이, 인(仁) 혹은(與, or) 불인(不仁)을 논하지 않더라도, 사내아이(孺子)가 우물에 거의/조만간(將, nearly/soon) 빠지게 될 것을 갑자기(乍, suddenly) 보는 즉시, 모두가 놀라게/염려하게 되는데(怵惕, be alarmed, be apprehensive), 이들 모두가 "양선"(良善, meekness)인 것입니다.

 

鳥獸與不仁者何德之有乎?見義而即行之,乃為德耳。彼或有所未能、或有所未暇視義,無以成德也。


새들과 집승들 혹은 불인(不仁)인 자들이 어찌하여(何) 덕에 기인함(德之)에 있을 수 있는지요? 의(義)를 보는 즉시 행함만이 실제적으로/정말로(乃, really/indeed) 덕(德)을 행함(為)일뿐입니다. 저들이 혹시 의(義)를 행할 수 없는(未能) 바에 있거나, 혹시 의(義)를 바라볼(視) 여유(暇)가 없는 바에 있으면, 덕(德)을 어떻게 성취하는지(成) 모르는 것(無以, do not know how to)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5-4-2-1: (1) 바로 위에서 "性之善"[성()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moral good)]으로 정의된(defined) "良善"(양선, meekness)의 성경 근거가, 마태오 복음서 11,29 - "mitis"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왜냐하면, 바로 이 절에서, '완미한 사람(perfect man)이 되신 하느님이신 당신 자신의 속성/본성(nature)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moral good)'을, 특히 인간들의 윤리적 처신의 완미한 모범(pefect example)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良善"(양선, meekness)에서 사용된 낱글자 "良"(량)의 자구적 어의/의미(literal sense)가 낱글자 "仁"(인)의 의미인 "어질다"임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2) 그리고 바로 이 동일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제5장 첫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에서의 삶에 있어서의 윤리적 처신의 대 헌장(magna charta)인 "산중성훈"을 시작하심과 함께 곧바로 진복팔단을 말씀하시면서, 마태오 복음서 5,5에서, 동일한 단어 "mitis"의 복수형인, "mites"를 사용하셨을 것임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3) 따라서, (i) 위의 (*1) 번역자 주(ii) 위의 (*4) 번역자 주: 제(1)항제(2)항을 경유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 그리고 또한 (iii) 바로 위의 제(1)항제(2)항에서 지적한 바에 의하여, 마태오 리치 신부님께서 자신의 저서인 "천주실의"에서, 위에 제시된 필자의 주석에서 이미 발췌된 공자님의 가르침과 전혀 모순됨 없이, 마태오 리치 신부님에 의하여 "양선"(良善, meekness)이라고 불리는 윤리적 선들을 실천하는 자들인 성인(聖人)들이, 마태오 리치 신부님에 의하여 "습선"(習善)이라고 불리는 윤리적 선들을 실천하는 자들인 군자(君子)들보다, 더 상급임을 말하고 있음이 실증적으로(positively) 입증/고증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게시자 주 끝)

 

5-4-2-2.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판토하 신부님(1571-161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05-1615년 사이에 초간된 것으로 알려진, "천주실의속편"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370298#p396 

(발췌 시작)

「三者,當信天主選擇世間良善童貞女,名瑪利亞。是為聖母,不由交感,童身而受天主第三位斯彼利多三多之降孕。聖母瑪利亞孕九月而生耶穌。既生之時,並無半點污穢,仍前全體之室女。譬即太陽射光於琉璃瓶中,光雖在內,而琉璃瓶依舊不穿漏也。」

(이상, 발췌 끝)

 

5-4-2-3.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판토하 신부님(1571-161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14년에 초간된 "칠극", 해탐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칠극/contents.htm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천학초함/칠극/칠극卷之三.pdf - 해탐

(출처 2로부터 발췌 시작)

량선심_in_칠극_in_1629_천학초함_제865쪽_c10.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貨財之美有一端。能顯明人所懷善惡。

 

經勸我曰。勿勞躁圖衣食。大父知爾輩皆須得此。爾盍視空中鳥。不蠶繅。不耕穫。而天主之食之。爾輩不貴於鳥乎。焉忘爾哉。且爾靈神暨爾身命。俱大於衣食。天主已賜爾大者。獨靳爾小者哉。惟爾先求天國。及天國之義。而衣食諸物。天主多益爾矣。


撒羅滿(*1)西國大王也。欽奉天主。最純最敏。天主遣天神謂曰。隨爾所禱。我悉從爾。王曰。予小子年幼識薄。國民眾多。恐不足膺此重任也。望主賜我良善心。(*2) 明朗識。可辨別善惡當否。以撫此大眾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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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다윗 임금의 아들인 솔로몬 임금을 말한다.

 

(*2) 판토하 신부님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적응주의 선교 방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던, 마태오 리치 신부님 생전의 [비서 역할을 한] 최측근 신부님이셨음을 또한 상기할 때에, 여기서 말하는 "良善"(양선한 심장)에서 "良善"(양선)의 의미를, 판토하 신부님께서 그 내용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 매우 분명한 신약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마태오 복음서 11,29일에서 언급된 성경 용어 "mitis"[주: 이 성경 용어의 차용 번역 용어 "良善"의 최초 출처는 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천주실의"이다(아래의 제5-5항 참조)]의 의미가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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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5-4-2-4.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1566-164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15년에 초간된 "천주교요해략"/"교요해략"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66-1640_알퐁소_바뇨니/1615_교요해략.htm

(발췌 시작)

교요해략_권지하_9_진복8단_72-78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량선_in_교요해략_권지하_9_진복8단_제7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5-4-2-5. [내용 보강 일자: 2023년 2월 1일]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1566-164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0년경에 초간된 "수신서학"에서, 마태오 리치 신부님"천주실의"(1603년)에서 기 도입되어 사용된 차용 번역 용어인 "善"(양선)이,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집회서 3,19갈라티아서 5,23에서 사용된, 칠죄종들 중의 한 개인 "분노"(anger)를 제어하는 한 개의 덕(virtue)을 나타내는 라틴어 용어 mansuetudine(원형: mansuetudo)[참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IIa IIae, q157]한 개의 이름/호칭(a name)으로서 또한 사용되고 있는데,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용은, (i) 위의 제5-4-2-4항에 발췌된, "善"(양선)이라는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진복팔단들 중의 두 번째 단의 의미를, 그리고 (ii) 바로 이 "수신서학"의 초판 출판 시기보다 더 늦게 출판된, 아래의 제5-4-2-6항제5-4-2-7항에 발췌된 바에 포함된 "천주강생언행기략""천주강생성경직해" 중의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마태오 복음서 5,4 11,29에서 사용된 라틴어 성경 용어 "mitis"의 번역 용어인 "善"(양선)의 의미를, 한문 문화권의 사람들이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장애 혹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부적절한 사용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2023년 2월 1일자 내용 보강 끝]: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66-1640_알퐁소_바뇨니/1630_수신서학.htm

(발췌 시작)
수신서학_권8_1_염덕(temperance)위하_25-26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卷八記述廉德,其枝有四,即節食、節飲、節色、節狎。廉之屬德又有四,即砥持、良善、哀矜、斂戢。(졸번역) 권8은 염덕(the virtue of temperance)를 기술하며, 그 가지에는 넷이 있는 즉, 절식(節食), 절음(節飲), 절색(節色), 절압(節狎)임. 염(廉, temperance)에 속하는 덕들에는 또한 넷이 있는 즉, 지지(砥持), 양선(良善), 애긍(哀矜), 염집(斂戢)임. (이상, 졸번역 끝)] 
[염덕, 종신(spirit), 종신(body), 격물궁리, 학, 종신(spirit)지신(spirit)락, 5사, 종신(body)지신(body)락, 신(body)락, 탐(즉, 식탐), 색, 도덕, 학문, 염위영신[즉, 영혼(soul)], 학지요] 
수신서학_권8_2_염덕(temperance)지지_26-30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절덕, 절식,절음, 절색, 절압, 주, 정덕, 동신, 혼인, 부부, 교목(交目), 교언(交言), 교형(交形), 5사, 정덕, 1부1부] 
수신서학_권8_3_염덕(temperance)생존_30-31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영심, 천신, 천민, 인신, 심지영사, 심지영활, 형지력강, 명지성탁, 업지적숭, 군자, 소인, 식(즉, 식탐), 색, 2욕(慾), 유, 노, 성정, 5사] 
수신서학_권8_4_염덕(temperance)망실_31-33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염덕, 실, 망, 절식지덕, 부채, 내사, 외사, 락, 취, 광, 절색, 독음, 실음, 외음, 강음, 남음, 이음] 
수신서학_권8_5_염(temperance)지속덕_33-40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속덕, 지지(砥持), 양선, 애긍, 감집(歛戢), 심지, 기욕(嗜慾), 분노, 염덕, 양심, 욕, 정, 양선, 천주지도, 겸퇴지덕, 절제, 감의(歛儀), 검약[儉約], 겸덕, 절제자, 사각, 영심, 절심무지덕, 영재(靈才, intellect's faculties/powers), 번급(繁急), 태정(怠情), 절덕, 타(惰), 염덕, 환우, 천주성전, 의례지미, 위기, 위가, 위국]  

량선_in_수신서학_권8_5_염(temperance)지속덕_제9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5-4-2-6.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1582-164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5년에 초간된, 신약 성경의 4복음서들을 하나로 묶은 화합 복음서/조화 복음서의 한 종류인, "천주강생언행기략"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82-1649_쥬리오_아레니/1635_천주강생언행기략.htm 

(발췌 시작)

권3_1_산중성훈_50-57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마태오복음서 제5장-제7장] [마태오 복음서 5,1-12(가해 연중 제4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매년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13-16(가해 연중 제5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17-19(매년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20-26(매년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27-32(매년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33-37(매년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17-37(가해 연중 제6 주일 복음 말씀; 5,38-42(매년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43-48(매년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5,38-48(가해 연중 제7주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6,1-6.16-18(매년 재의 수요일; 매년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6,7-15(매년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6,19-23(매년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6,24-34(가해 연중 제8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7,1-29; 7,1-5(매년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7,6.12-14(매년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7,7-12(매년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7,15-20(매년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서 7,21.24-27(매년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마태오 복음서 7,21-29(가해 연중 제9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17.20-26(다해 연중 제6주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20-26(매년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27-38(다해 연중 제7주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36-38(매년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39-42(매년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39-45(다해 연중 제8주일 복음 말씀); 루카 복음서 6,43-49(매년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주: 여기서 "진복팔단" 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가 사용됨] [주: 마태오 복음서 5,3과 5,10에서 "천상국(天上國)" 으로 차용(借用) 번역된 표현은, "천당(heaven)" 에 등가인 차용(借用) 번역 표현이 아니고, "천국(天國)[즉, 하늘 나라(kingdom of heaven), 즉, 하느님 나라(kingdom of God, 신국, 神國)]" 에 등가인 차용(借用) 번역 표현이다. 이 지적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은, 위에 있는, 권2_13_훈책3도_43-43 (루카 복음서 9,57-62) 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주에 있으니 이 주를 꼭 읽도록 하라. (2020년 11월 10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이 "천상국""천주야소성적"에서 올바르게 "천국"으로 교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22.htm] [(2017년 1월 6일) 주: "진복팔단", "천주지자" 등의 번역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음. "평화" 대신에 "화목"이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2017년 3월 21일) 주: 마태오 복음서 6,9-13에 있는 한문본 "주님의 기도"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1566-1640년)의 저서로서 1615년에 초간된 "교요해략"에 수록된 "천주경"을 거의 그대로 발췌한 것임: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66-1640_알퐁소_바뇨니/교요해략_권지상_1_천주경_8-13.htm ] [(2017년 4월 14일) 주: 비과(肥果)(라틴어 ficus; 이탈리아어 fico) 이탈리아어 fico) = 무화과, fig (마태오 복음서 7,16)] [(2018년 5월 22) 주: 제2쪽에서 "교법(教法)"[주: 요즈음 용어로 (모세) 율법(the Law)을 말함]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상주"(heavenly Lord, 높은 하늘에 계신 주님, 즉, 성부 하느님)[주: 소 괄호 ( ) 안에 추가한 날짜: 2018년 8월 8일]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량선_in_1635_천주강생언행기략_권3_1_산중성훈_제1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256377#p5 

(발췌 시작)

第一節 山中聖訓

 

耶穌與宗徒同在山中,四方聞而至者無算,爭願親就耶穌。於是耶穌大展好生之德,凡病者被魔者,一就無不立愈,從者彌眾。耶穌仰首,顧弟子而先論以真福八端曰:「神貧者乃真福,為其已得天上國也;良善者乃真福,為其將得安土也;涕泣者乃真福,為其將受慰也;嗜義如飢渴者乃真福,為其將得飽飫也;哀矜者乃真福,為其將蒙哀矜已也;心淨者乃真福,為其將得見天主也;和睦者乃真福,為其將謂天主之子也;為義而被窘難者乃真福,為其已得天上國也。」 

(이상, 발췌 끝)

 

5-4-2-7.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36-1642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성경직해"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74-1659_엠마누엘_주니오르_디아스/1636_천주강생성경직해.htm

(발췌 시작)

권12_37_성마제아종도첨례_305-311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2월24일, 마태오 복음서 11,25-30(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 말씀)] [마제아 = 마티아] [마두 = 마태오] 

여성_량선_in_마태오11_29_in_성경직해_권12_37_성마제아종도첨례_제38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열(column)을 보라.

 

권13_6_제성첨례/제성인지첨례_318-338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11월초1일, 마태오 복음서 5,1-12ㄴ(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 복음 말씀)] [주: 여기서 (i) 영어로 "kingdom of heaven (regnum cælorum)" 으로 직역 번역되는 표현이, "천국(天國)"으로 직역 번역되는 대신에, "천상국(天上國)"으로 잘못 번역되었고(번역 오류), 그리고 (ii) 영어로 "heaven (cælis)" 으로 직역 번역되는 표현이, "천(天)"으로 직역 번역되거나 혹은 "천당" 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번역이 되는 대신에, "천국 (즉, kingdom of heaven)" 으로 잘못 번역되었는데(번역 오류), 그러나 여기서의 이러한 번역들은, 예를 들어,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 Douay-Rheims Version, 1611년판 "KJV(King James Version)", "RSV(Revised Standard Version)", "NAB(New American bible)", "공동번역성서" 그리고 "새 번역 성경" 등을 포함하는 지역 언어본 성경들의 마태오 복음서 5,1-12ㄴ 에서의 번역문들과 일치하지 않는, 명백한 번역 오류들임. 다른 한편으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이들 번역오류들은 "성경직해"의 저자인 엠마누엘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에 의하여 바로 여기(즉, "성경직해")에서 처음 발생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며, 그러나 이들 번역 오류들은,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의 선교사였던 장 바쎄 신부님(1662-1707년)에 의한 중국어본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5,1-12ㄴ에서 바로잡아짐. 그러나,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였던 안토니오 드 푸아로 신부님(1735-1813년)에 의한 중국어본 "고신성경", 신약, 마태오 복음서 5,1-12ㄴ을 읽을 때에는,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천상국(天上國)"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표현이 "천국(天國)" 과 등가인 차용(借用) 번역 표현임을 꼭 상기하도록 하라. 다른 한편으로,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성경광익"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중국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소속의 모이리악 드 메야 신부님(1669-1748년)에 의하여 출판된 한문본 "성경광익"이 연중 주일과 축일의 복음성서 해설이며 성서의 본문은 한문본 "성경직해"에서 취하였다고 안내되어 있는데, 그러나 이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확인할 수 있듯이, 한문본 "성경광익"에 제시된 이 제성첨례일의 성경 본문은, 한문본 "성경직해" 권13_1_성인첨례(즉, 모든 성인 대축일)에 제시된 복음 말씀인 마태오 복음서 5,1-12ㄴ의 중국어 번역문이 아니고, 한문본 "성경직해"의 본문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은, 모든 성인 대축일의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 7,2-4.9-14의 중국어 번역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문본 "성경광익" 어디에서도, "산상설교"로 불리는 그리스도교 윤리 생활의 핵심 내용들이 제시되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 제5장-제7장의 가르침의 시작 부분인, "진복팔단"에 대한 "묵상"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주된 이유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엠마누엘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1574-1659년)에 의하여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직해", 제성첨례일의 복음 말씀인 마태오 복음서 5,1-12ㄴ의 중국어 번역문이, 위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지적한 바와 같은, 명백한 번역 오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 명백한 번역 오류의 문제는, 여기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화면 제공의 우리말본 "성경직해"(1938년 출판) 자료에서, 원문 보기 > vol : 권 2, 본문 제486쪽에서부터 시작하는, 우리말본 "성경직해", "제성첨례성경", 성사마두제오편(즉, 마태오 복음서 5,1-12ㄴ)에서, 영어로 "kingdom of heaven" 으로 직역 번역되는 용어가 중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문본 "성경직해"에서 "천상국(天上國)"으로 번역되었던 명백한 번역 오류가, "천국(天國)"으로 올바르게 바로잡아졌고(마태오 복음서 5,3과 5,10애서) 그리고 영어로 "heaven"으로 직역 번역되는 용어가 중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문본 "성경직해"에서 "천국(天國)"으로 번역되었던 명백한 번역 오류가, "하늘[즉, 천(天)]"로 올바르게 바로잡아졌음(마태오 복음서 5,12에서)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번역 오류의 지적과 관련하여, 이제 남은 과제들 중의 몇 개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i) 이 우리말본 "성경직해"의 본문에서, 과거의 어느 시점에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이렇게 올바르게 바로잡아졌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일. (ii)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중국 가톨릭의 용어 사전인 "天主敎英漢袖珍辭典"에 실린 "heaven" 에 대한 설명에 "천국" 또한 번역 용어로서 실려 있는 번역 오류를 바로잡는 일, 이 때에,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중국 그리스도교(천주교와 개신교 포함) 용어사전 "基督宗敎外語漢語神學詞典"에 실린 "heaven"[즉, 하늘]에 대한 설명에서는 "천국" 이 등가의 차용(借用) 번역 용어로 제시되지 않음을 또한 참고하라. (iii) 다음의 주소들에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그동안의 글들 중에서, 바로 위의 제(ii)항의 용어 사전 등에 의존하여, "천당(즉, 하늘, heaven)"과 "천국"을 동일시하였던 오류(error)를 올바르게 바로잡는 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H_concept_errors.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H_translation_errors.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KH_JohnPaul_II.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John_Paul_II4Kingdom_of_heaven.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Kingdom_of_heaven.htm] [(2017년 1월 4일) 주: 마태오 복음서 5,9; 5,10 각각의 잠들의 각주(제23쪽 및 제33쪽)에서 "천주의자(義子)" = "하느님의 입양 자식"이라는 번역 용어가 각 한 번씩 사용되고 있음. 그러나 이 각주들은 세례/영세와 관련지어 말하지 않음.] [(2017년 1월 6일) 주: 제6쪽 본문과 제21쪽 잠에서 "화목", "천주지자"라는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음. 제21쪽과 제25쪽 각주들에서  "천주의자(義子)" = "하느님의 입양 자식"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제25쪽 각주에서 "복지"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말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량선_in_마태오5_5_in_성경직해_권13_6_제성첨례_제6a쪽.jpg

 

게시자 주: 왼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의 마지막 글자부터 보라.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4-2-7: [내용 보강 일차: 2023년 2월 1일] 바로 위에서 첫 번째로 발췌된 바에서, 마태오 복음서 11,29가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낱글자 "性"(성)"善"(양선)앞에, 번역자인 주니오르 디아스 신부님에 의하여, 추가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여기서 사용된 "善"(양선)이라는 번역 용어의 의미가, 위의 제5-4-2-5항에 발췌된 "수신서학"에서 처럼 한 개의 덕(virtue)의 의미가 아니라, 위의 제5-4-2-1항에 발췌된, 마태오 리치 신부님"천주실의"에 제시된 "善"(양선)의 의미인 "性之善"[성()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moral good)]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상, 2023년 2월 1일자 내용 보강 끝].

 

5-4-2-8.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1582-1640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40년에 초간된 "천주강생인의", 상권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82-1649_쥬리오_아레니/1640_천주강생인의.htm 

(발췌 시작)

천주강생인의_상권_제7장_강생사적_진부고경예언_17-26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주: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4월 23일) 마태오 복음서에서 취하여지고 있는 (이상, 2020년 4월 23일자 내용 추가 끝) "천주강생" 에 대하여 예언된 구약 성경 본문들의 내용들의 조합 22개가, 다음의 (i) - (xxii)에 나열하였듯이, 각 조합의 구성 성분들로서 사용된 구약 성경 본문들의 출처들의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제시되고 있음. 혹시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이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본문의 번역 대본은, 1979년에 개정 초간된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이 아니라,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그 이전 시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 성경인,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 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

 

(x) 겸비화손: 본문: 이사야 42 [42,1-4.6-7(매년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매년 성 월요일)], 각주: 기략 성적제편[2권12[마르코 1,21-28(주님 세례 축일 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나해 연중 제4주일 복음 말씀) & 1,29-39(주님 세례 축일 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나해 연중 제5주일 복음 말씀)]; 3권2[마태오 복음서 8,1-4(매년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 8,5-13(매년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3권3[루카 복음서 7,11-17(매년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믐 말씀)]; 4권1[마태오 복음서 14,22-36(가해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대체 복음 말씀; 매년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가해 연중 제19주일 복음 말씀)]; 4권4[마태오 복음서 15,21-28(매년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4권5[마태오 복음서 15,29-31(매년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 6권10[마태오 복음서 21,10-13]; 6권11[마태오 복음서 21,14-16] 

량선_in_1640_천주강생인의_상권_제7장_강생사적_진부고경예언_제13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294712#p32 

(발췌 시작)

第七節 降生事跡,盡符古經預言

 

[...]

 

依撒意亞四十二篇。論契利斯督 即天主降生別號譯言諸王之王。諸司教之宗主也。降世。言其謙順良善。毫無害於人物。即搖葦亦不折也。而吾主耶穌慈善好生。兼良施惠。事事明顯。見紀略聖跡諸篇。此其十也。 

(이상, 발췌 끝)

 

5-4-2-9.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드 샤비냑 신부님(1670-1717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18년에 초간된 "진도자증", 권2, 인류 상 및 권4, 경교요문에서, "善"(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70-1717_랑그로이_드_샤바낙/1718_진도자증.htm

(발췌 시작)

권2_2_인류_상_46-53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량선_in_1718_진도자증_권2_2_인류_상_제11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쩨 열(column) 및 여섯 번째 열을 보라.

(이상, 발췌 끝)

 

출처 1-2: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760002#p72 

(발췌 시작)

真道自証卷二:事道

 

[...]

 

至論失傳而未得《聖經》者,其傳之失,雖人自誤,而至仁之主,亦不忍棄於無可如何。外恩在人,人能失之;內恩在主,非人可棄。聖傳行於世,異端能亂之。良善稟於心,世俗不能泯也。夫然,則凡承天主之內佑,及依良善而行者,絕異端,認真主,信之,望之,畏之,愛之,而不自誤,則雖或有人不盡識再生之法,而再生之主,亦必有救其人之道也。即主欲默啟其心,以複其原道,亦無不承荷焉。是以自開闢以來,凡人若不背其良善者,未有不得其救者也。苟不得之,非天主之不拯,乃因人之惡,而自棄天主之慈焉耳。 

(이상, 발췌 끝)

 

출처 2-1: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70-1717_랑그로이_드_샤바낙/1718_진도자증.htm

(발췌 시작)
권4_1_1_경교(經教)요문_45-47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2020년 9월 6일) 여기서 "景教"(경교)가 아니라 "經教"(경교)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經教"(경교)란, 불교 용어가 아니고, "그리스도교 성경의 가르침"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 용어의 의미는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1582-1649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640년쯤에 초간된 "천주강생인의", 상권에서 사용된 동일한 의미의 번역 용어들, 경교(經敎)(scriptual teaching)/서교(書教)/고교(古教)의 의미, 즉, "구약 성경 중의 옛 가르침들인 모세 율법의 가르침"과 결코 동일하지 않음에 또한 주목하라.]
권4_1_1_1_향천주3덕
권4_1_1_2_천주10계 [(2017년 7월 12일) 주: 여기에 나열된 "천주십계"는, 미카엘 루지에리 신부님(1543-1607년)"천주성교실록"에 수록된 "조전천주십계"와 동일하지 않으며 그리고 특히 바로 여기에 정하상 성인이 작문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재상서"에 수록된, "천주십계"가 "만물 위에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으로 "총귀"된다는 기술이 주어져 있음. 그리고 동일한 기술이 또한 예수회 소속의 제이오 몬테이로 신부님(1602-1648년)의 저서로서 1655년에 초간된 "천학략의", 제27쪽 오른쪽 면에 주어져 있음]
권4_1_1_3_4추덕
권4_1_1_4_8진복
권4_1_1-5_7죄종
권4_1_1-6_극죄7덕
권4_1_1-7_애긍지행
권4_1_1_8_성사7적
권4_1_1_9_만민4종
권4_1_2_진복팔단해략_부_47-49
권4_1_2_1_논진복
권4_1_2_2_팔복분류
권4_1_2_3_결어

량선_in_1718_진도자증_권4_1_1_경교요문_제10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출처 2-2: https://ctext.org/wiki.pl?if=en&chapter=354608#p54 

(발췌 시작)

真福八端:神貧者,不貪 乃真福,為其已得天上國也。良善者,不傲 乃真福,為其將得安土也。泣涕者,不介世樂 乃真福,為其將受慰也。嗜義如飢渴者,乃真福,為其將得飽飫也。哀矜者,乃真福,為其將蒙哀矜己也。心淨者,乃真福,為其將得見天主也。和睦者,乃真福,為其將謂天主之子也。為義而被窘難者,乃真福,為其已得天上國也

(이상, 발췌 끝)

 

5-4-2-10. 다음에 발췌된,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드 메야/마이야 신부님(1669-1748년)에 의하여 저술되어 1740년에 초간된 "성경광익", 하권, 성신강림후 제24주일, 복음 말씀 후 묵사인 의행지덕에서, "耶穌之良善"(야소지량선)(즉, "예수님의 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특히, 良善(양선)謙德(겸덕)(the virtue of humility)와 동일한 덕이 결코 아님은, 전후 문맥 안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669-1748_모이리악_드_메야/1740_성경광익.htm 

(발췌 시작)

야소지_량선_in_1740_성경광익_하권_제65a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5-4-2-11. 다음에 발췌된, 1862년에 초간된 것으로 알려진,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 권2에 수록된, 셩심숑(즉, 성심송) 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온유" 대신에, "량션"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62_텬쥬성교공과/1881년이전_텬쥬셩교공과_권2.pdf  

(빌췌 시작)

량선_in_예수_셩심숑_in_1862_텬쥬셩교공과_권2_제14a쪽(page205).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첫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5-4-2-12. 다음에 발췌된, 1862년에 초간된 것으로 알려진,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 권4에 수록된, 진복팔단에서, "온유" 대신에, "량션"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862_텬쥬성교공과/1881년이전_텬쥬셩교공과_권4.pdf  

(발췌 시작)

량션_in_진복팔단_in_1862_천주성교공과_4_제32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5-4-2-13. 다음에 발췌된 바는, 1910년에 초간된 "사사성경", 마태오 복음서 제5장, 진복팔단과 그 전후 문장들인데, 마태오 복음서 11,29 및 마태오 복음서 5,4에서, "온유" 대신에, "량션"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910년 초판, 사사성경, 마태오 복음서 11,29 및 5,4

(발췌 시작)

마태오복음서11_21-29_in_1910_사사성경_제43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왼쪽에서 두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마태오5_1-13_in_1910_사사성경_제13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열(column)을 보라.

(이상, 발췌 끝)

 

5-4-2-14. 다음은, 1948년 초간된,1969년판 "복음성서"에서 발췌한 바인데, "온유" 대신에, "양선"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1970년대초에 "공동번역성서"가 사용되기 전 시기에 국내의 가톨릭 교회에서 바로 이 성서를 사용하였습니다:

 

(발췌 시작)

마태오 복음서 11,29: 너희는 내 멍에를 메며, 또 내 마음이 양선하고 겸손함을 내게 배우라. 이에 너희 영혼에 평안함을 얻으리라.

 

마태오 복음서 5,4: 양선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이상, 발췌 끝)

 

5-5. 지금까지 본글에서 고창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또한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9)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중에서, 마태오 복음서 11,29 - "mitis"에 근거하여, 바로 이 라틴어 성경 용어 "mitis"의 차용 번역 용어로서 "良善"(양선)이라는 용어가 최초로/처음으로 사용된 한문본 천주교 문헌은, 16세기 말에 저술된, 마태오 리치 신부님"천주실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0) 마태오 복음서 11,29 - "mitis"에 근거하여, 바로 이 라틴어 성경 용어 "mitis"의 차용 번역 용어로서 도입된 "良善"(양선)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위의 제5-4-1-1항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에 의하여, "性之善"[성()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moral good)]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1) (i) 위의 (*1) 번역자 주(ii) 위의 (*4) 번역자 주: 제(1)항제(2)항을 경유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 그리고 또한 (iii) 바로 위의 제(1)항제(2)항에서 지적한 바에 의하여, 마태오 리치 신부님께서 자신의 저서인 "천주실의"에서, 마태오 리치 신부님에 의하여 "양선"(良善, meekness)이라고 불리는 윤리적 선들을 실천하는 자들인 성인(聖人)들이, 마태오 리치 신부님에 의하여 "습선"(習善)이라고 불리는 윤리적 선들을 실천하는 자들인 군자(君子)들보다, 더 상급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따라서, (이 글의 결론 11)의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을 또한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2)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11)에 의하여, 예를 들어, 우리말본 "천주실의"(초판 12쇄 발행 2016년 11월 20일), 하권, 제7편(우리말 번역자: 최소자 교수), 제346쪽에 있는 각주 13에 제시된 다음과 같은 주장이 한 개의 오류의 주장(an erroneous claim)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발췌 시작)

마테오 리치에 의하면, 生而知之는 최하급이 되고 그보다 더 높은 단계가 學而知之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실천을 통하여 배우지 않고서는 지식이 더 높은 단계로 갈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 발췌 끝) 

(이상, 이 글의 결론 12 끝)

 

게시자 주 5-5: (1) 바로 위에 발췌된 바가, 최소자 교수의 주장인지, 아니면 송영배 교수의 주장인지에 대하여, 필자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2)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12)에 발췌된 한 개의 오류의 주장은, 또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마테오 리치와 다산 정약용 철학의 거리 : 다산의 지적 배경을 통해서 본 《천주실의》의 쟁점들" 제목의 백민정 교수의 논문[교회사 연구 제39집, 201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심지어 더 나아가, 강조의 수식 기법의 현란한 적용에 의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대단히 잘못된 방향으로 크게 심화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인고 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견해는, 바로 아래에 발췌된 바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크게 다르게'공자님의 견해'를 수용하여 그대로 따르고 있는 '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견해'를 또한 그대로 수용하여 따르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http://pds.catholic.or.kr/pdsm/bbs_view.asp?num=212&id=162895&menu=4817

(발췌 시작)

리치의 주지주의적 · 이성중심적 관점은 良善과 習善을 구별하는 대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리치가 인간이 타고나는 양선에 비해 습선의 가치를 강조한 것은 德을 실천해서 이루려는 윤리적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는 실천을 통한 덕의 완성을 주장한 다산의 德論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덕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리치가 양선, 즉 사람마다 노력하지 않아도 갖고 태어나는 측은지심 같은 선천적 경향의 도덕욕구를 상대적으로 폄하하고 있다는 점이다.69) 뒤에서 보겠지만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孝弟의 정감은 다산이 자신의 이상적 王政論을 구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내걸었던 윤리적 가치인데, 리치는 오히려 이런 종류의 효제라는 선천적 도덕 감정은 짐승들도 가진 것으로서 인간 공로의 대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분명하게 비판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인간의 판단과 노력이 가미되지 않은 전형적인 측은지심의 사례, 즉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느끼는 측은한 마음도 리치는 어질든 어질지 않든 누구나 느끼는 평범한 감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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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性之善爲良善, 德之善爲習善. 夫良善者, 天主原化性命之德, 而我無功焉. 我所謂功, 止在自習積德之善也. 孩提之童愛親, 鳥獸亦愛之. 常人不論仁與不仁. 乍見孺子將入於井, 卽皆??. 此皆良善耳.···見義而卽行之, 乃爲德耳. 彼或有所未能, 或有所未暇視義, 無以成德也. 故謂人心者始生, 如素簡無所書也(《천주실의》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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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이 글의 결론 12) 만약에 국내의 유관 분야 연구자들이 출처/근거 문헌들로서 본글에 제시된 유관 문헌들을 입수하여 본인의 연구의 1차 사료들에 포함시키고 이미 학습하였더라면(가정법 과거 완료), 본글에서 찾아내어 실증적으로(positively) 지적하고 있는, 여러 분야들에 걸친, 다수의 오류들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13)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중국어본 CCC 2091, 2094, 2119에서, 영어본 CCC의 해당 절들에서 "goodness"로 번역된 라틴어 "bonitati", "bonitatem", "bonitate" 이들 세 개 모두가, 마태오 복음서 11,27에서 사용된 라틴어 "mitis"의 전통적 번역 용어인, "性之善"[성()에 기인하는 윤리적 선(moral good)][주: 위의 제5-4-2-1항에 발췌된, 마태오 리치 신부님의 "천주실의"에 제시된 "良善"(양선)의 의미 참조]을 나타내는 차용 번역 용어인, "善"(양선)으로 번역된 것은 심각한 번역 오류들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https://www.vatican.va/archive/catechism_lt/p3s2c1a1_lt.htm#ARTICULUS 1  PRIMUM PRAECEPTUM

https://www.vatican.va/chinese/ccc_zh.htm 

https://www.vatican.va/chinese/ccc/36_2083-2141_ccc_zh.pdf 

(이상, 이 글의 결론 13 끝)

 

(이 글의 결론 14) 위의 게시자 주 5-2-3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한 바에 의하여, 우리나라 조선의 최양업 신부님께서  우리말본 "천주성교공과" 번역 작업을 시작한 시점, 예수 성심 축일이 가톨릭 교회의 보편 교회 전례력, 즉, 첨례표에 처음으로/최초로 추가된, 1856년 9월 23일 직후이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작성 중입니다.

 

 참고: "天主原化性命之德"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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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자 주: 2020년 가해 부활 제3주일부터, 매주 시리즈의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본 "주일 전례성경 묵상 동영상 교안"은 통상적으로 이틀 동안의 묵상 후에 작성되고 있으며, 그리고 묵상 동영상 녹화 후에 추가적인 묵상의 결과로서 내용 보강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아래의 안내 첫 공지일자: 2021년 3월 10일]

이곳은 2004년에 굿뉴스 서버에 개설된 "가톨릭 문서 선교회"가 운영/관리하는 Big DataBase Archive 구축 공간 및 2000년 대희년부터 당시 교육부 지원 공동연구/교육용 SGI Origin 3400 수퍼컴퓨터 사용자들을 위하여 연구/개발해 온 고유한 AI 알고리즘/빅 데이터 분석 기법 기반 최신 연구 결과물들의 제공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또한 이곳은, 문화장벽(culture barriers)들/언어장벽(language barriers)들 등에 기인하는 형이상학 개념(metaphysical concepts)들의 전달 장애/훼손/오류 등의 조기 회복/복원 및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이들 개념들 사이에 현존하는 진리인 유의미한 관계의 상태들의 전달/발견 등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추구해 온, 연구/교육, 선교/전교/복음화 및 토착화, 공간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신빈자_in_진복팔단_마태오5_3_2648.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량선_vs_습선_in_천주실의_2648.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량선_in_진복팔단_마태오5_5_2648.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량선_in_마태오11_29_264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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