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성당 게시판

부활 제 5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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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1999-04-29 ㅣ No.629

부활 제 5주일 강론

 

 

 

 

 교우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오늘은 5월의 첫날이고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5번째 주일이 되는 날입니다.

도데체 예수의 부활은 무엇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저는 오늘 이 부활이라는 문제를 한번 집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2가지 사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희랍적인 사상이고, 또하나는 히브리적인 사상입니다. 희랍적인 사상에 있어서 부활은 영혼의 부활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혼은 영혼을 가두던 육체를 떠나서 불사불멸의 세계로 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히브리적 사상에 있어서 부활은 다름 아닌 몸의 부활이였습니다. 지금 현재 나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부활은 바로 이 두가지 사상이 합쳐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과 몸이 함께 부활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를 보면 부활에 대한 이야길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집트에서 포로생활을 했었고, 그때 그들은 에집트왕의 무덤 바로 피라미드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피라미드는 바로 죽은자를 위한 무덤이고 이 무덤은 죽은 파라오의 영원한 삶을 기원하는 그들 종교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피라미드를 만드는데 젊은 청년 20만명이 20년을 일해야 했습니다. 죽은자를 위한 피라미드를 만드느라 청춘을 다 보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죽은 다음의 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은 괴로운 슬픈 추억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후의 부활을 이야기하길 꺼려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강대국인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을 당하는 아픔과 머나먼 이국 땅으로 유배를 당하는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절망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온다. 새로운 메시아가 온다. 새로운 출애굽의 시대가 온다. 다윗의 시대에 누렸던 그 찬란한 시대가 온다." 다시말해서 歷史內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했지 죽은 다음의 부활을 이야기 하진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성서의 외경으로 분류되는 마카베오서에 보면 조금 다른 시각으로 부활을 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심한 탄압을 받고 이제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죽음을 당하느냐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포기하느냐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신념을 선택해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억울한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앙이 생겼습니다. 바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 하느님을 위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 선한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은 바로 이런 점들이 접목이되어 생겨났다고 하겠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 진리를 외치다가 죽어간 많은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활신앙은 교회가 발전해 갈수록 차츰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약하고 힘없는 사람, 사회에서 소외받고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 이들에게 너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약하고, 힘들고, 병들고, 어렵게 살지만 천국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리라는 달콤한 환상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배계급의 지배논리로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부활신앙은 강대국의 압제에 대해 굴복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킨다는 항거에서 시작되었고, 예수 당시에 민중이 무참히 로마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예수를 비롯한 이스라엘 민중이 죽음의 세력에 대항해서 가지게 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했다는 뜻의 희랍어 '에게이로오'(Egeiro)와 '아나스타시스'(Anastasis)는 "일어난다" "봉기한다"는 뜻으로 민중의 역사적 사회적 갈망이 적극적인 저항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아신앙-- 하느님나라 신앙--부활신앙, 이것들은 한결같이 歷史的이고 革命的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지금 눌린 자들이 역사의 미래에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고 그 주인공이 될 약속의 새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는 당시의 지배자였던 빌라도나 그들 고발했던 대사제, 율법학자,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의 주된 활동지 였던 갈릴래아에서 자신이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민중들과 제자들은 이제 다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계속합니다. 그것은 결코 좌절과 패배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죽음의 세력을 이겨내고 부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주의 은혜와 선물임을 깨닫고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과 소유를 나누어 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쁨을 누리는 부활공동체를 살아갔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도 복받고 죽은 후 저 세상에서도 영생하고 복을 받는 것이다." "이 세상의 기득권을 저 세상에까지 연장하는 것이다."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욕심을 포장한 이기심이지 부활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 저 세상에 별도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나라가 있다면 우리가 염려할 바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예수께서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길을 그의 제자가 되어 따라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따라오라.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 주는 은총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류의 평등과 평화를 위해 이웃의 사랑을 위해 몸바치는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고 이미 그들은 그 나라를 맛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신앙은 거리의 신앙이고, 고난받는 현장의 신앙, 갈릴래아의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사건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꽃동네에서, 장애자를 돌보는 사랑의 손길에서, 노동자들의 작업현장에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판자촌에서, 민중의 현장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운동이며 사건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면, 우리는 그들 대신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ps.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과연 주님의 부활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상념을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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