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7월호_영화[혈의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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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06-23 ㅣ No.11


비겁(卑怯)이 빚은 참극(慘劇)

 

조금 생뚱맞지만 이번 호엔 제 친구 ‘삼석이’ 얘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1975년 초여름쯤이었어요. 서울 미아리에 살던 저는 “신천지(?)로 가자”는 부모님의 결단에 따라 당시 개발이 한창이던 강남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래도 딴에는 옛날 학교에서 간부도 해보고 나름대로 ‘잘 나가던 몸’이었는데, 희고 말쑥한 아파트 건물에 압도돼서인지 스스로가 ‘쥐뿔도 없는 놈’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만나는 아이마다 어찌 그리 똑똑하고 잘나 보이는지…. 주눅이 단단히 든 제게 학교는 세상에서 제일 가기 싫은 곳이었습니다.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엉뚱한 생각을 해댔지만, 남침준비를 이미 끝냈다는 북한의 김일성은 무심하게도 대포 한 방 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게 다가와 손을 잡아준 이가 바로 ‘삼석이’였습니다. 삼석이는 강남에서 제가 사귄 첫 친구가 되었고, 녀석 덕분에 저는 조금씩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석이는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아이였습니다. 학업에 대한 이해가 많이 느렸고, 마음이 너무 여려서 요샛말로 하면 ‘왕따’되기 십상이었죠. 어찌됐건 삼석이의 도움으로 ‘강남의 학생’이 된 저는 두렵기만 했던 ‘똑똑한 아이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조금씩 삼석이를 잊어갔습니다. 아이들이 은연중에 무시하는 삼석이를 저도 멀리했고, 그가 따돌림을 당할 때도 모른 척했습니다. 심지어 삼석이가 물건을 훔친 걸로 오해받을 때조차 저는 ‘그의 무죄함’에 관해 단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습니다.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요. 돌아보면 제 인생을 통해 거듭된 비겁은 삼석이를 외면하면서부터 시작된 듯합니다. 80년대 초반 대학시절엔 제 몸 다칠까봐 가장 어려운 순간에 운동권 친구에게 등을 돌렸고, 직장생활 중에도 ‘바른말하는 이’를 따르기보다는 제게 올 불이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이후 저는 거푸 만나는 수많은 ‘삼석이들’을 그렇게 비겁하게 외면했고, 정의로울 수 있었던 숱한 시간들마다 ‘의도적인 벙어리’로 행세했습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작품 ‘혈의 누(血의 淚)’는 바로 ‘저 같은 사람들의 비겁’에 관한 영화입니다.
서구의 신문물이 밀려들던 19세기 조선. 제지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외딴섬 동화도에서 조정에 바쳐야 할 ‘종이 수송선’이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 해결을 위해 수사관원 이원규(차승원 扮) 일행이 섬에 도착하고, 이때부터 엽기적인 연쇄살인극이 이어집니다. 하루에 한 명씩 특정한,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섬주민들은 이 잔혹한 살인극이 몇 년 전 ‘천주교인’으로 몰려 멸문당한 강객주(천호진 扮)의 원혼이 복수를 시작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죽어가는 이들은 ‘강객주’를 천주교인으로 고발했던 사람들이었고, 살해되는 방법 또한 객주와 그의 식구들이 죽어간 방식 그대로였기 때문입니다.
외딴섬의 살인행각이 진짜로 죽어간 원혼(寃魂)의 소행이라면 강객주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들 말고 다른 이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섬사람들은 하나같이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떨고 검은 바다에 둘러싸인 외딴섬의 고립은 공포를 증폭합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건 그만한 과거가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수사관 원규는 ‘과거’ 강객주의 죽음을 파헤치면서 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강객주는 이른바 ‘개화한 인물’이었습니다. 만석꾼 재산가였지만, 반상과 귀천의 차별 없이 사람들을 끌어안았고 당시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낮은 이자로 주민들에게 돈을 꾸어줘 굶주림을 면하게 한 박애주의자였습니다. 섬사람 모두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어른이었지요.
그러나 동화도의 토착권력인 유생들에게 있어 강객주는 계급적·경제적 체계를 뒤흔드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작당해서 ‘발고자들’을 조작했고 마침내 강객주를 ‘천주쟁이’로 몰아 멸문지화를 입혔던 거지요. 하긴 당시에 계급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대하던 이들 중 대다수가 ‘천주교인’이었을 테니, 사건 조작이 어렵진 않았을 겁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그에게 은혜를 입은 섬사람들 모두가 침묵했다는 겁니다. 강객주는 마지막까지 주민들에게 “한마디만 해주시오. 내 가족들을 살려주시오” 하며 절규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위해 나서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할 때 치러야 할 불이익이 두려웠고, 그들을 기아로부터 구해준 ‘저리(低利)의 빚’마저 이 기회에 없애버리려는 탐욕 때문이었지요. 섬사람들은 끝내 ‘비겁한 침묵’을 택했고 강객주와 가족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죽어갔습니다.
어찌 보면 객주를 살해한 진짜 주범은 몇몇 유생들과 발고자들이 아닌 섬의 수많은 ‘비겁자’들이었던 거지요. 섬주민 전체가 공포에 떠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독특한 판타지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격찬을 받았던 김대승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사의 잔혹함 뒤에 도사린 다수(多數)의 비겁과 침묵’을 선 굵은 필치로 고발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부조리한 폭력들이 실상은 ‘비겁한 다수 군중의 엄호’ 아래 저질러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반전을 묘미로 삼는 미스터리 영화이니만큼 더 이상의 줄거리를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만, 그 결말이 어떻든 간에 저는 이 영화에서 또 한 명의 제 친구 ‘삼석이’를 봤고 그를 외면한 ‘비겁한 제 자신’이 화면 안에서 군중의 모습으로 서성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2천년 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진짜 범인들도 어쩌면 빌라도나 바리사이인들이 아니라 ‘그가 구세주임을 알고도 침묵했던 수많은 비겁자들’이었을 겁니다.
‘눈물처럼 뿌려지는 피’를 뜻하는 ‘영화의 제목 혈의 누(血의 淚)’처럼, 오늘날 우리들 각자의 비겁이 더 이상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 핏빛 상처로 남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_변승우/명서베드로. 평화방송 TV국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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