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베드로와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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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1동성당 [suyu1] 쪽지 캡슐

2005-04-19 ㅣ No.429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신앙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그저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일어난 신기한 ‘기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성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극적으로 변화된다고 전합니다. 제자들은 이 만남을 통해서 과거의 묵은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시자 베드로는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결코 스승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거듭 맹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맹세는 너무도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하고 나서,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르 14,30)는 스승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는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습니다(마르 14,72).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스승 예수를 배반한 것 때문에 많이 자책하고 몹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서야 비로소 무거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요한 복음 21장이 전하고 있지요. 이 대목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당부하십니다. 3번이나 이렇게 물음과 대답, 당부의 말씀이 반복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물음과 대답, 당부의 과정을 거쳐서 베드로가 세 번 스승을 배반한 것을 기워 갚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배반을 따져 묻지 않으십니다. ‘못난 녀석, 그렇게 큰 소리 탕탕 치더니 별수 없이 나를 배반하더구나’하고 야단조차 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베드로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단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는 내 양을 잘 돌보라는 당부만 하십니다. 이 당부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모른다고 했던 것을 새삼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는 자책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목숨을 바쳐 아끼던 양떼들을 잘 돌보아라’.

이런 크나큰 용서를 통해서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에 매여 노예가 되지 않고 해방되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스승을 배반했던 나약한 베드로는 이제 완전히 변했습니다.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전파하다가 결국은 그분의 양떼를 위해서 순교까지 하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은 스승을 배반한 부당한 사람이기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겠다고 했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용서를 통해서 베드로가 새로운 삶을 살도록 변화시켜 주셨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 부활은 베드로의 부활도 이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과 죄 때문에 괴로워 할 때, 주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내가 용서해 줄 테니 과거의 잘못 때문에 자포자기하거나 자학하지 말고 이웃 사랑에 힘을 쏟아라’하고 당부하십니다. 이런 말씀과 당부에 힘입어 우리는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과거의 잘못에 매여서 살기를 원치 않으셨던 예수님은 우리 역시 과거의 탓에 발목이 잡혀서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과거가 아닌 현재, 자신의 죄에 대한 끊임없는 자책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의 삶을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거듭 거듭 용서를 베푸시면서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부르십니다. 용서를 통해서 과거의 허물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난 사람,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안에서 이미 부활이 시작됐다고 하겠습니다. 부활은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에 완성될 것입니다. / 글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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