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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8일 브장송의 복자 요한 루도비코(요한 르와르)와 로슈포르의 사제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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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11 ㅣ No.2074



축일 8월18일
브장송의 복자 요한 루도비코(요한 르와르)와 로슈포르의 사제, O.F.M. Cap.
Beati Martiri dei Pontoni di Rochefort 64 martiri della Rivoluzione Francese
Senza data (Celebrazioni singole)  La Rochelle, Rochefort, † 1794-1795



브장송의 복자 요한 루도비코(요한 르와르)
Beato Giovanni Battista Saverio Loir (Gianluigi da Besançon) Sacerdote e martire
19 maggio  (5월19일)  1720 - 1794

세이즈의 복자 프로타시오
Beato Giovanni Bourdon (Protasio da Sees) Sacerdote e martire
23 agosto  8월23일 1747 - 1794

낭시의 복자 세바스티아노
Beato Francesco Francois (Sebastiano da Nancy) Sacerdote e martire
10 agosto  8월10일 1749 - 1794

 

공화국 책(즉, 기록부)에서 지워지고 소리 없이 죽게 된 이들
"이 사람들은 공화국의 책에서 지워졌으니, 나는 그들을 소리 없이 죽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두 동료(Deux Associés)호'의 함장인 랄리(Laly) 대령의 섬뜩한 말이다. 그 감옥 선박은 프랑스 혁명 정권의 적들로 인식된 자들을 억류하여 추방하기 위해 사용된 배였다. 이 사례에 있어, 적으로 인식된 그 자들은 성직자 기본법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지 않은 성직자들이었다. 성직자 기본법이란, 프랑스 내의 가톨릭교회를 억압하고, 또 그 교회의 성직자들이 프랑스 혁명의 목표와 목적을 받아들일 것을 확정하기 위해 혁명정부가 1790년에 제정한 법적인 수단이었다.



1794년에 이르러, 그 선서를 거절한 사제의 수가 아주 많이 늘어나자, 그들을 기요틴(guillotine)의 단두대로 처형하는 일이 부당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그 대신, 그 사제들은 프랑스령 기아나와 마다가스카르로 강제추방 선고를 받게 되었고, 로슈포르(Rochefort)의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항해가 부적합한 3척의 감옥 선박에 구금되었다. 프랑스 해군함정의 출항을 막기 위해 영국의 해군함정들이 1년 이상 프랑스 앞바다를 순찰하고 있었기에, 그 감옥 선박들은 참된 죽음의 수용소가 되어버렸다. 모두 합쳐 1,000명에서 2,000명의 성직자들이 그 3척의 감옥 선박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위생설비의 부족과 유해한 생활여건, 오염된 음식과 그들 자신이 이미 상습적인 죄수였던 함장과 선원들의 학대, 게다가 장티푸스의 발병까지 덮쳐 억류된 사제들 중 585명 정도가 사망하게 되었다.



특히 노인들과 병약자들에게 수용소 상태는 십중팔구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선박 짐칸에 가득 차 있었고, 이들은 사슬로 10명씩 묶여진 채로 불결한 주석 식기에서 나무 숟가락으로 오염된 음식을 먹어야 했다. 또 그들은 강제로 갑판으로 나와서 비좁은 장소에서 선 채로 먹어야 했다. 밤이 되어, 취침시간을 알리는 기적소리가 울리고 나면, 그들은 심한 악취로 가득 찬 갑판 아래에서 잠을 자야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원들은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 타르를 태우곤 했다. 물론, 타는 타르 가스는 더 많은 호흡곤란을 일으킬 뿐이었고, 그로 인해 기절한 사람들은 숨을 돌리기 위해 축축하고 몹시 추운 갑판으로 끌려 나가곤 했다. 이렇게 상반되는 온도 차이는 오히려 그들을 더욱 더 아프게 했다. 기본 위생의 부족 외에도 옥수들은 선원들의 험담을 견뎌야 했고, 자신들의 성무일도서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글이나 신심의 성물들조차도 가지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죽으면 그들의 시신은 일-마담(Île Madame)과 일-데이(Île-d'Aix)라는 프랑스의 대서양 해안도에 위치한 표시도 없는 무덤들에 아무 의례도 없이 묻히곤 했다. 로슈프로에서 이런 식으로 사망한 이들 중에 3명의 카푸친 순교자도 있었다.  이들은 바로 브장송(Besançon)의 복자 요한 루도비코와 세이즈(Seez)의 복자 프로타시오와 낭시(Nancy)의 복자 세바스티아노이다.


 

브장송의 복자 요한 루도비코
Beato Giovanni Battista Saverio Loir (Gianluigi da Besançon) Sacerdote e martire
19 maggio  (5월19일) 1720 - 1794


리용의 조폐국장의 아들 - 세자 요한 르와르
브장송의 복자 요한 루도비코는 1720년 3월 11일,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브장송에서 태어나 ‘세자 요한 르와르(Loir)’라는 세례명 받았다. 그의 부모는 파리 출신 부르고뉴(Bourgone) 조폐공사의 국장인 시몬 르와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베스 줄리오(Julliot)였다. 1730년, 세자 요한의 아버지가 리옹(Lyons) 조폐공사의 국장이 되자, 그의 가족들은 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겸손하고 열정적이며 우호적인 카푸친, 브장송의 요한 루도비코 형제
비록 세자 요한 르와르가 리옹에서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했을 20살 때까지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리옹 수련원에서 카푸친 수도복을 입게 되었고, '브장송의 요한 루도비코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일 년 후, 즉 1741년 5월 9일에 그는 종신 서약을 했고, 몇 년이 더 지나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카푸친으로서 그의 여생은 규모가 큰 리옹시의 성 프란치스코 형제회나 혹은 그 도시의 성 프란치스코 형제회보다는 규모가 작은 성 안드레아의 형제회에서 보내게 되었다. 1761년부터 1764년까지 그는 성 안드레아 형제회의 수호자였으며, 그 후에 성 프란치스코 형제회의 수호자로 임명받았다. 그는 1767년까지 그 직무를 유임했다.

1791년 프랑스 혁명당국이 카푸친들을 박해하기 시작할 때까지, 이와 같은 사실들 외에는 요한 루도비코 형제의 수도생활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를 직접 알고 있었던 한 아빠스는 그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묘사를 남겼다. "(사람이 교직-교회의 관리를 맡은 직책-을 맡기에) 적절하게 할 모든 덕행을 타고난 그는 자신이 명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서,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수도회에 입회했다고 주장하며, 어느 교직도 맡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겸손하게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했고, 고해성사의 봉사직무를 매우 성과적으로 수행하곤 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형제들이 그 어떠한 설교사목을 조직하더라도, 그는 그것에 늘 열의를 보이곤 했다. 그는 단순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선호했지만, 지위가 높은 경건한 요인(要人,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품위 있고 우아한 모습의 귀족적인 도시풍모와 상냥함에 매력을 느끼곤 했다. 그가 일으켰던 회개의 횟수나 그가 하느님께 되돌아오도록 했던 모든 사회 계층에 속한 영혼들의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모든 이의 기쁨'이 되었던 이 덕망이 높은 카푸친 어르신의 마지막 시련
1791년, 혁명 당국은 요한 루도비코 형제가 당시 살고 있던 성 프란치스코의 규모가 큰 형제회의 모든 물품 목록을 만들었다. 그때에 그는 만 74세였고, 장래에 대한 견해를 물었을 때, 그는 카푸친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1791년 10월, 그는 리옹에서 부르번네이(Bourbonnais)로 피신해야 했고, 도미니코회 소도승녀들이었던 두 명의 조카딸과 함께, 여동생 니콜라 에리사벳과 그녀의 아들 길베르토 드그라싼(de Grassin)이 살고 있던 성(城)을 피난처로 삼았다.

1793년 2월 3일, 의혹스러운 소문들과 밀고자의 악의적 제보의 탓으로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의 혁명 당국에 의해 심문을 받고 물랭(Moulins)으로 호송되었는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성직자 기본법에 대한 맹세를 거부한 60명이나 되는 사제들과 함께 옛 글라라회 수도원에 갇히게 되었다. '한때 카푸친이었던 자'로 묘사된 요한 루도비코 형제는 맹세하지 않는 사람들 중의 하나로 명단에 올려졌다. 그의 고령은 원래 법적인 형벌을 받지 않을 충분한 이유였지만, 조항은 고령의 사제들 또한 로슈포르로 호송되어 그곳에서 기결수로서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로 추방될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1794년 4월 2일, 요한 루도비코 형제는 26명의 의건사제들과 본당주임사제들과 트라피스트회원들과 카푸친들과 기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과 그리스도교 학교 수도회의 수사들과 함께 세 번째 호송 집단에 속하여 물랭을 떠났다. 거의 한 달 동안 그들은 마차를 타고 헌병대(Gendarmerie)와 국가방위군의 호송을 받았다. 호송 도중, 사람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고 애썼다. 로슈포르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모든 소유물을 빼앗겼고,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샤랑트마리팀(Charente-Maritime)의 연안에 정박된 두 척의 감옥 선박에 떠밀려 채워졌다.

브장송의 요한 루도비코가 수감된 선박은 '두 동료(Deux Associés)호'라고 불렸다. '두 동료 호'에 만연된 극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종교적 서적이나 다른 신심성물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중 한 명은 간신히 성무일도서를 은닉할 수 있었고, 또 한 명은 복음서를 몰래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성직자는 성유를 간신히 숨겨 왔고, 어떤 사제들은 성체성사를 선체에 숨어서 지키기조차 했다. 그리하여 수감된 사제들은 비밀리에 서로를 위로해줄 수 있었고, 마음의 침묵 안에서 기도할 수 있었으며, 형언하기가 어려운 공포 한 가운데에서도 성사들을 거행할 수 있었다. 깊은 신앙심에 제 스스로 힘을 얻은 요한 루보비코 형제는 생기 있고 활기찬 성격으로 동료 재소자들을 그토록 많이 격려했기에, 한명의 생존자는 그 카푸친이 "비록 고령으로 인해 공경 받을 만했지만," 선상에 있던 "모든 이의 기쁨이 되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자신의 극심한 고통은 경시하면서도, 다른 이의 시련을 덜어주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사실 그는 그의 나이의 절반이나 된 젊은 사람의 에너지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죽음 직전까지 그가 중병에 걸린 것을 알아챌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카푸친 순교자의 기도 중의 선종
그가 죽은 날 아침에도, 그는 평상시대로 일어나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다. 1794년 5월 19일 아침, 동료 수감자들은 기도하는 자세로 자신의 그물침대 버팀목 옆에 똑바로 무릎을 꿇고 있는 베장송의 요한 루도비코 형제의 신신을 발견했다. 이 거룩한 카푸친 순교자의 시신은 애초부터 카푸친 수도회의 생활 특성이 되어왔던 기도와 신심 정신에 대한 평생의 충실성을 말없이 증명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선종함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이기보다 기도가 된 사람이었던 성 프란치스코처럼 되어 있었다.
 

 

세이즈의 복자 프로타시오
Beato Giovanni Bourdon (Protasio da Sees) Sacerdote e martire
23 agosto  8월23일 1747 - 1794

수레공의 아들, 요한 부르동
세이즈의 복자 프로타시오는 1747년 4월 23일에 서북 프랑스에 위치한 세이즈(Seez 또는 민법대로 Sees)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유한 수레공, 시몬 부르동(Bourdon)과 그의 아내 마리아 루도비카 르 푸(le Fou)였다. 그들은 아들의 세례 때에 '요한'이란 이름을 붙였다. 요한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만 20살 때에 그는 노르망디(Normandie), 바이유(Bayeux)에서 카푸친 더욱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에 입회했다.

노르망디 카푸친 관구봉사자의 비서, 세이즈의 프로타시오 형제
1768년 11월 27일 종신 서원 시, 요한 부르동은 ‘세이즈의 프로티시오 형제’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775년 그는 사제품을 받았고, 잠깐 동안 옹플뢰르 형제회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은총의 성모 성지의 담당사제가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1783년, 캉(Caen) 형제회로 이동되었고, 1789년에 노르망디의 카푸친 관구봉사자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이때 즈음, 그는 또한 루앙(Rouen) 근교에 위치한 소트빌(Sotteville)의 카푸친 형제회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추적당하고 수감되고 잔인하게 순교한, 충실한 카푸친 사제
1791년, 지방 자치제 공무원들은 건물을 징수하기 위해 그 형제회로 왔다. 그들은 형제회에 속한 형제들에게 성직자 기본법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라고 요구했지만, 프로타시오 형제를 비롯하여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던 모든 형제들은 그 맹세를 하기를 거부했다. 프로타시오 형제는 두 차례에 걸쳐 수도생활을 계속할 마음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1791년 8월 21일, 당국은 형제회 수유물의 최종적인 물품목록을 만들었고, 일 년 후에 형제들은 아예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루앙 근처에 계속 머무르고 싶어 한 프로타시오 형제는 그 지방의 어떤 신사 집에서 숙박을 구했고, 소액의 연금과 미사예물, 그리고 구걸을 통해 얻은 수입금으로 그 변변찮은 방세를 낼 수 있었다. 루앙의 신자들에게 해 준 그의 봉사는 도시의 혁명 당국의 주목을 피하지 못했다. 1793년 8월 10일, 그는 체포되어 혁명 재판소의 신문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프랑스 혁명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진 문서소지죄와 허락 없이 미사를 거행했던 죄, 그리고 성직자 기본법에 충실할 맹세를 거부했던 죄로 프랑스령 기아나로의 추방을 선고받았다. 1794년 3월, 사슬에 묶인 그는 걸어서 로슈포르로 끌려갔다. 1794년 4월 12일, 그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두 동료 호’라는 감옥 선박에 억류되었다. 1794년 8월 23일, 그는 그 선박 내에서 선종했는데, 가장 빈도 높은 사망의 원인인 발진티푸스에 의해서였다.  

끝까지 자선하는 헌신된 카푸친
프로타시오 형제 생애의 마지막 무렵을 목격한 한 증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성격을 묘사했다. “그는 크나큰 공훈을 쌓은 수도자였고, 타고난 물질적, 윤리적 능력들만큼, 그가 추방당한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서 해왔던 그 노력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신앙의 견고함, 현명, 평정, 규칙성과 그 외의 그리스도인답고 수도자다운 덕행들은 칭찬받을 만했습니다.”
 

  

낭시의 복자 세바스티아노
Beato Francesco Francois (Sebastiano da Nancy) Sacerdote e martire
10 agosto  8월10일 1749 - 1794


예수님처럼 목수의 아들이었던 프란치스코 프랑수아
훗날, 낭시의 복자 세바스티아노가 될 이 형제는 상당히 특이한 세속명이 있었다. 그의 이름과 성은 둘 다 프랑스어에서 프란치스코라는 뜻인 프랑수아(François)로 표기되었다. 그는 1749년 1월 17일에 프랑스 동부의 옛 로렌 주의 수도였던 낭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노련한 목수인 도미니코 프랑수아(François)와 그의 아내 마르기리타 베르네송(Verneson)이었다. 출생 당일에 그들의 갓난아기는 성 니콜라오의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프란치스코(François)라는 이름을 받았다. 아이의 대부모 양측은 상류층에 속해 있었던 요인(要人)이었고, 프란치스코 자신의 부모는 부유한 중산층 가문이었다. 아이의 성과 이름이 프란치스코라는 뜻으로 둘 다 똑같았다는 우연의 일치를 볼 때, 그 아이가 아주 어릴 때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1593년부터 카푸친 형제들이 프란치스코 프랑수아의 본래 고향에서 주로 산 덕분이었다. 실제로 1730년부터 카푸친들의 성당은 성 니콜라오의 본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뒤에서 기도하곤 한 형제들은 또한 그 지역의 성 프란치스코 재속 3회, 즉 현재의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단위 형제회를 활성화시키곤 했다.

낭시의 세바스티아노 형제의 열정적인 사제 직무
1768년 1월 24일에 젊은 프란치스코 프랑수아 스스로 카푸친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의 수련장이었던 ‘상-디에(Saint-Dié)의 미카엘 형제’는 그에게 수련자의 수도복을 입혀주며 ‘낭시의 세바스티아노 형제’라는 수도명을 주었다. 1년 후의 그의 종신서약은 성 니콜라오의 본당 기록부에 첫 번째로 기록된 종신서약이다. 서약한 후, 그는 퐁-아-무송(퐁 아 무송(Pont-à-Mousson)으로 카푸친회의 철학신학 대학생 숙소로 파견되었고, 그곳의 예수회 신학교에서 사제직을 위한 학문을 닦고 연마했다. 그러나 그가 사제서품을 받은 정확한 날짜는 알 수가 없다. 1777년 6월 5일에 그는 설교를 하고 고해성사를 줄 수 있는 특별권한을 받았고, 자르게민(Sarreguemines)의 카푸친 형제회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주민들의 매일 사용되는 언어인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동안 배치된 것은 아닌 것 같다. 1778년에 그가 고해사제로서 자르부르(Sarrebourg)의 형제회에 묵고 있었다는 증거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규칙 준수로 유명한 그 형제회에 모범적인 카푸친으로 살았고, 당시 그 지역에서 교구성직자의 수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또한 그 지방의 상-키랑(Saint-Quirin) 본당에서 세례성사를 주고 혼인성사를 주례하는 것과 같은 사목에 몰두했다. 1784년 8월 26일, 그는 코메르시(Commercy)의 형제회로 이동되었고 그곳에서도 비슷한 사목활동을 했다. 1787년이나 1789년까지 그는 코메르시 형제회에 거주했다가 잠시 동안 디우즈(Dieuze) 형제회에 머물렀고, 다시 에피날(Epinal)에 위치한 카푸친 형제회로 이동되었다. 1789년 7월, 프랑스의 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자진하여 투옥과 확실한 사형에 자기 자신을 넘겨준 카푸친
혁명 발발 9개월 후인 1790년 4월 30일, 지방자치체의 위원들은 수도원 내의 모든 물품의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에피날 형제회로 왔다. 그리고 1년 후, 형제회의 모든 가구들과 그 밖의 물품들이 매각되었다. 성직자 기본법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지 않았던 세바스티아노 형제는 빈약한 생활 보조금을 받고는 그 집의 나머지 형제들과 함께 쫓겨났고, 좀 더 규모가 큰 샤텔-수르-모젤의 형제회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집은 시의회가 로렌의 모든 카푸친 형제들에게 그들의 공동 숙소로 제공한 형제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직자 기본법에 충실할 것을 맹세한 사제가 지도한 행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 집에서도 쫓겨났다. 노숙자가 되어버린 그들은 지역 주민들의 집에서 묵을 곳을 얻어야 했다. 형제들이 과거에 그들에게 베풀어 준 후원 때문에, 그 지역 주민들은 형제들을 기꺼이 맞이했다.

1793년 11월 9일, 세바스티아노 형제는 낭시에 있는 한 집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예전에 삼회 수녀들에 소속된 집이었지만, 당시에는 성직자 기본법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지 않은 반항적인 사제들의 감옥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세바스티아노 형제가 이 곤경에 빠져 있게 된 것은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탓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스스로가 지방의 감시위원회 앞으로 나가서, 국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법으로 제정된 맹세를 하지 않은 사제로서 자수했기 때문이었다. 1794년 1월 26일, 낭시의 지방행정관은 모든 억류자들의 지위와 체포된 원인, 그들의 나이, 그리고 발생 가능한 질환 등을 확인하러 그 집으로 왔다. 세바스티아노 형제는 건강한 '불량' 사제로 기록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같은 해 4월 1일자로 결국 프랑스령 해외식민지로 추방되기 위해 로슈포르로 보내진 '41명의 건강한 반역의 사제들과 수도자들' 안에 포함되었다.

1794년 4월 28일, 한 달에 걸친 고통스러운 여행 끝에 억류자들은 항구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그들은 모든 소유물들을 몽땅 털렸고 로슈포르에 정박한 ‘두 동료 호’ 감옥 선박에 승선되었다. 당시 이미 373명 이상의 사제 가 그 배에 타고 있었고, 이들은 매일매일 일-데이와 일-돌레론(Île-d'Oleron) 사이의 대서양 연안에서 이리저리 운송되고 있었다. 세바스티아노 형제가 선상에서 겪어야 했던 감옥 사정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수감자들은 면도나 이발을 할 기회는 물론이고, 목욕을 할 기회차도 없어서 그들 몸은 이미 더럽고 부스스했다. 누더기가 된 그들의 옷은 낡아서 올이 다 나갔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학대로 인해 많은 수감자들이 병이 들어 죽음에 직면하고 있었다. 사실상 병자들은 의사나 아무런 약품도, 그 어떠한 종류의 의료 시설도 아예 없는 스쿠너범선으로 이동되었으므로, 죽음만이 그들의 고통을 감소할 수 있는 유일한 치유법이었다. 매일 오전 10시와 정오 사이, 사망한 수감자 시신들은 옷이 다 벗겨진 채로 근처의 섬이나 강둑으로 옮겨졌고, 비교적으로 건강한 수감자들이 판 무덤에 신속히 묻히곤 했다. 그들의 격식 없는 매장에 공공연한 위령기도나 장례 추모곡이 동반되는 것은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한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사제들와 수도자들로 넘쳐나는 그 선박은 마치 제사의 온전한 완성을 위해 바다의 물결 한가운데에 세워진 번제물 제단 같았다"고 한다.

복음전파의 진정한 순간을 마련한 카푸친 순교자의 거룩한 죽음또 다른 생존자는 '두 동료 호'에 승선한 낭시의 세바스티아노 형제의 거룩한 죽음에 대해서 다음의 보고를 남겼다. "주님께서는 이 갤리선에 죽으러 와 있던 당신의 종들 중의 한 명인 세바스티아노 형제의 성덕을 드러내 주셨다. 그분은 낭시 집의 카푸친이었다. 그분의 탁월한 경건함과 덕성과 감명이 깊은 신심 때문에, 이 거룩한 수도자는 우리들 사이에서 각별한 존경심으로 모셔졌다. 특히 마지막 병을 앓으실 때에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곤 했다. 어느 날 아침, 마치 그분께서는 두 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벌리시고, 두 눈은 하늘을 향해 드높여진 채로 입을 여시고서 무릎을 꿇으신 자세로 목격되었다. 이 일은 별 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왜냐하면 병든 이들을 위해 그분께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에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시간은 지나도 그분께서 항구하게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에 우리는 놀라워했다. 그 자세는 매우 불편한 것이었다. 더욱이 바다가 상당히 거칠었고, 또 배가 많이 흔들리고 있었으므로 더욱 더 유지하기가 힘든 자세였다. 그분께서는 황홀경에 사로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그분을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해 그분께 다가갔다. 그분의 얼굴과 손을 만져보니, 우리는 그분께서 그와 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몇 시간 전에 이미 하느님께 자신의 영혼을 넘겨드린 것을 깨달게 되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배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분의 시신이 그렇게 기도하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전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선원들이 불려왔다. 그 남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신앙이 드러났고, 그들 중의 몇몇은 그들의 팔을 걷어붙이고, 뜨거운 돌로 팔에 새긴 십자가 형상의 문신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었고, 자신들이 저버렸던 신앙으로 다시 되돌아오기로 다짐했다."

1794년 8월 9일, 낭시의 세바스티아노 형제는 죽음자매를 받아 안았다. 그의 거룩한 생활방식처럼, 그가 죽음을 맞이한 그 거룩한 방식도 복음전파의 한 순간이 되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사도직 활동을 합친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마지막 지상 안식처를 표시하는 것은 조약돌로 만든 십자가뿐
1995년 10월 1일, 교회에 대한 충실성과 참된 신앙에 대한 고수 때문에 로슈프르에서 순교한 61명의 사제들과 함께 이 3명의 카푸친 순교자들은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브장송의 복자 요한 루도비코와 세이의 복자 프로타시오와 낭시의 복자 세바스티아노의 시신들은 대서양 내로 흐르는 샤랑트 강의 하구 표식 없는 모래 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일-마담에 있는 조약돌 십자가는 그들의 순교의 고통과 영광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은 요한 부르동이요, 수도자로서는 프로타시오 형제입니다. 나는 오른(Orne) 도에 위치한 상피에르(Saint-Pierre) 본당, 세이즈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만 48살입니다. 나는 가톨리 사제요 관구비서이며, 강의자요 스트빌-레-루앙(Sotteville-lez-Rouen)의 카푸친들 집의 수호자입니다. 내가 아무 맹세도 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곳에서 미사를 하는 나를 막을 그 어떤 법도 없으며, 나는 귀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 세이즈의 복자 프로타시오

 










 

Beato Giovanni Battista Saverio Loir (Gianluigi da Besançon) Sacerdote e martire
19 maggio  (5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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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 1794

Martirologio Romano: Nel braccio di mare antistante Rochefort in Francia, beato Giovanni Battista Saverio (Giovanni Ludovico) Loir, sacerdote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martire, che, durante la rivoluzione francese, imprigionato quasi ottuagenario in una galera per il suo sacerdozio, fu trovato morto inginocchiato.

Tra gli oltre 800 preti e religiosi ammassati sui famigerati "pontons de Rochefort" ormeggiati presso l'isola d'Aix nel 1794 c'erano anche diversi frati cappuccini. Avrebbero dovuto essere deportati alla Guyane, ma i velieri inglesi che incrociavano le coste francesi impedirono questo viaggio. Così su questi prototipi "campi di morte" galleggianti molti lasciarono miseramente la vita per amore della fede. Questo sacrificio è stato riconosciuto come grazia di martirio il primo ottobre 1995 da Giovanni Paolo II per Giambattista Souzy, vicario generale de La Rochelle e i suoi 64 compagni, tra i quali i cappuccini Gianluigi di Besançon, Protasio di Sées e Sebastiano di Nancy, dei quali ora vogliamo brevemente narrare la storia.
Giambattista (era questo il suo nome di battesimo) era nato l'11 marzo 1720 a Besançon (Doubs) da Gianluigi Loir ed Elisabetta Juliot, sesto di una nidiata di otto figli e venne battezzato nello stesso giorno. Il padre, parigino, era direttore e tesoriere della Zecca di Borgogna a Besançon e nel 1730 fu eletto direttore della stessa a Lione, dove venne ad abitare con tutta la famiglia e dove il figlio Giambattista fece i suoi studi, anche se non si conosce quasi nulla della sua fanciullezza. Si sa però che a vent'anni, nel mese di maggio 1740, si fece cappuccino nel grande convento della città e prese con l'abito il nome di fra Gianluigi. Professò il 9 maggio 1741. A Lione i cappuccini abitavano in due conventi, uno intitolato a San Francesco e detto "grand couvent", fondato nel 1575, nel quartiere Saint-Paul, l'altro costruito nel 1622, dedicato a S. Andrea e detto del "Petit Forez". In queste due case il futuro martire trascorse la maggior parte della sua vita religiosa. Almeno due volte esercitò l'ufficio di superiore, una volta nel convento di S. Andrea dal 1761 al 1764, e una seconda volta nel grande convento di S. Francesco fino al 1767. Oltre questa notizia, gli archivi tacciono.
Un abate che allora lo conobbe rilasciò questa significativa testimonianza: "Dotato di tutte quelle virtù che lo potevano rendere raccomandabile, egli non volle mai accettare nessuna carica, dicendo di essere entrato nell'Ordine non per comandare, ma per obbedire, non per dominare, ma per essere sottomesso. Dedicandosi con umiltà alla salvezza delle anime, esercitò il ministero della confessione con frutto e sembrava in questo infaticabile. Non c'era missione organizzata dai suoi frati, nella quale egli non prestasse il suo zelo. Il popolo semplice e i poveri erano i suoi prediletti; ma anche le persone di riguardo e importanti che si davano alla pietà si sentivano attratte dalla nobile urbanità e affabilità della sua figura maestosa e aggraziata. Sarebbe difficile numerare le conversioni da lui operate e le anime riportate a Dio in tutte le classi sociali".
Aveva 74 anni quando i rivoluzionari francesi obbligarono i preti e i religiosi, nel 1791, a prestare giuramento scismatico della costituzione civile del clero. Padre Jean-Louis si trovava nel convento di S. Francesco quando l'Assemblea Costituente aveva ordinato l'inventario delle persone e dei beni di ogni casa religiosa. Egli aveva dichiarato di voler restare nell'Ordine. Ma verso ottobre lasciò Lione e si ritirò nel Bourbonnais a Précord, nel castello dove abitava la sua sorella Nicole-Elisabeth col figlio Gilbert de Grassin e dove anche due nipoti suore domenicane avevano trovato rifugio. Una soffiata di qualche malevolo e sospettose dicerie causarono una perquisizione ordinata dal Direttorio il 3 febbraio 1793, e anche se il risultato fu nullo, il 30 maggio tutti gli abitanti del castello vennero trasportati a Moulins, dove 66 preti "insermentés", refrattari, erano stati reclusi parte nelle prigioni e parte nell'antico monastero Sainte-Claire.
Nell'elenco degli ecclesiastici che non avevano prestato giuramento figurava anche padre Loir, classificato "ci-devant capucin".
La sua età l'avrebbe risparmiato da ulteriori sofferenze se non fosse stato per il terribile accordo ateistico della fine del 1793, che permetteva tacitamente l'eliminazione di questi anziani ecclesiastici, che, infatti, furono trasportati, molti di loro ammalati, in tre spedizioni diverse, fino a Rochefort P. Jean-Louis lasciò Moulins il 2 aprile 1794, nella terza spedizione, con 26 deportati, canonici, curati, trappisti, cappuccini, altri francescani e fratelli delle Scuole Cristiane. Lungo il tragitto, su carri scortati da gendarmi e da guardie nazionali, vennero compatiti e aiutati dalla gente. Giunsero a Rochefort verso la fine di aprile. Perquisiti di ogni cosa, vennero ammassati su due vascelli ormeggiati in quella costa di mare.
Il vascello sul quale p. Jean-Louis venne trasferito si chiamava "Deuz-Associés". Il capitano e la sua ciurma erano gente da galera. Sul naviglio erano letteralmente ammucchiati più di 400 deportati in stato pietoso, vita di lager ante litteram. Una gavetta lurida serviva per il pasto di dieci persone che dovevano accontentarsi di carne avariata, di merluzzo, di fave grosse, attingendo il cibo in piedi, senza piatti né bicchieri né forchette, stretti stretti fra loro, servendosi di un cucchiaio di bosso. Era il supplizio della fame, al quale si aggiungevano altri terribili tormenti di carattere igienico-sanitario, senza rimedi, e gli insulti di quei marinai aguzzini. Ma il tormento più tremendo erano le ore notturne. Un fischietto annunciava l'ora del riposo. Quella massa umana, con molti vegliardi e ammalati, veniva costretta ad ammucchiarsi sotto coperta, nella stiva, come acciughe in un barile, e la notte era un inferno, con un'ultima raffinata crudeltà, anticipatrice delle camere a gas: quei galeotti spandevano acri vapori facendo scoppiare con palle infocate un barilotto di catrame: un metodo usato per purificare l'aria, ma che provocava nei prigionieri un tremendo sudore e tosse fino alla morte per soffocamento per i più deboli. E in quello stato venivano bruscamente mandati all'aria aperta sul ponte del vascello e tutti dovevano strisciare come vermi e il tremendo contrasto faceva loro stridere i denti per i brividi di freddo.
Tuttavia la pena più grande era di non poter tenere né breviario né altri libri di pietà e neppure di poter pregare insieme. Ciò nonostante c'era chi aveva potuto nascondere un breviario, o un vangelo o gli oli santi e qualcuno anche le ostie consacrate. E in quella cloaca infetta quei martiri si scambiavano i sacramenti che li fortificavano ad affrontare la morte con gioia.
Queste erano le sofferenze di p. Jean-Louis. Ma il suo carattere vivace e allegro infondeva coraggio ai compagni di sventura. Uno dei sopravvissuti testimoniò che il cappuccino, "pur essendo un venerabile vegliardo, era diventato la gioia di tutti. Egli infatti cantava ancora come un giovane di trent'anni cercando così di alleviare le nostre sofferenze, nascondendo le sue che lo stavano terribilmente consumando. Egli morì serenamente come aveva sempre vissuto. Infatti il mattino del 19 maggio 1794, i deportati, al risveglio sotto coperta, trovarono questo eccellente religioso morto in ginocchio al suo posto, e nessuno avrebbe pensato che soffrisse qualche malattia. Dopo essersi levato, si era inginocchiato a pregare e così era spirato. Vedendolo in questa umile posizione, accanto al palo della sua amaca, sembrava davvero che pregasse, ed era morto nell'atteggiamento di supplica come la S. Scrittura ci rappresenta i patriarchi dell'Antica Legge nell'atto di spirare".
Egli fu il primo dei 22 cappuccini che morirono a Rochefort.

Fonte:  
 Santa 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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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10-29

 

 

 

Beato Giovanni Bourdon (Protasio da Sees) Sacerdote e martire
23 agosto  8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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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 - 1794

Religioso cappuccino incarcerato con molti altri sacerdoti in una galera, durante la Rivoluzione Francese. Morì consumato dalle malattie, mentre si prendeva cura dei suoi compagni di carcere.

Martirologio Romano: All’ancora nel mare antistante Rochefort sulla costa francese, beato Giovanni (Protasio) Bourdon, sacerdote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ini e martire, che, messo in una galera durante la rivoluzione francese insieme a molti altri sacerdoti, morì consunto da malattia mentre portava conforto ai compagni di reclusione.

Sullo stesso famigerato naviglio "Deux-Associés" dove morí il beato Jean-Louis di Besançon c'era anche padre Protasio Bourdon. Anche di lui non sono numerose le notizie. Nato il 3 aprile 1747, venne battezzato il giorno dopo nella parrocchia di Saint-Pierre di Séez (Orne). I suoi genitori e parenti erano benestanti, il padre, Simone Bourdon era un carraio e la madre si chiamava Maria Luigia Le Fou. La formazione cristiana ricevuta (nulla in particolare si conosce della sua fanciullezza e adolescenza) fece maturare in lui la vocazione alla vita religiosa che lo spinse a entrare, ormai ventenne, fra i cappuccini di Bayeux dove professò il 27 novembre 1768 prendendo il nome di Frate Protasio. Nel 1775 fu consacrato sacerdote e tra le scarse notizie d'archivio si trova che abitò per un po' di tempo nella casa d'Honfleur, vicino al santuario di Notre-Dame des Grâces, di cui ebbe la direzione. Lo si trova anche nel convento di Caen il 29 novembre 1783, e nel 1789 è segretario del ministro provinciale di Normandia.
L'ultima sua destinazione, come segretario provinciale e guardiano, fu il convento di Sotteville, vicino a Rouen. Qui con la sua comunità lo trovarono gli agenti municipali quando vennero a perquisire la casa e a richiedere il giuramento della costituzione civile del clero. Egli rifiutò assieme agli altri suoi confratelli, ribadendo in due circostanze diverse la sua volontà di perseverare nella vita religiosa, e particolarmente il 26 agosto 1791, mentre era in atto l'ultima verifica dell'inventario del convento, dal quale i religiosi l'anno dopo vennero definitivamente espulsi e messi sulla strada. P. Protasio volle ugualmente rimanere a Rouen e, rifiutando di prendere la via dell'esilio, trovò ospitalità presso un signore, che compensava con un po' della sua pensione e delle elemosine ricevute per le messe celebrate.
Questa sua tenacia gli meritò di essere arrestato il 10 aprile 1793 e di subire un interrogatorio da parte di due fanatici "citoyens", che, nella sua futilità e leggerezza, mostra, come solitamente avviene, l'inconsistenza di simili processi di cui è piena, purtroppo, la storia. Il testo di questo interrogatorio è stato fortunatamente conservato. P. Protasio risponde con molta libertà, ma è chiaro nel dichiarare di aver rifiutato il giuramento, di voler seguire fedelmente la sua vita religiosa, ed è reticente dove si tratta di non svelare il coinvolgimento di altre persone.
Nella perquisizione avvenuta nella casa dove si era rifugiato erano stati trovati dei manoscritti e alcuni libri stampati che divennero capi d'accusa perché difendevano i refrattari. Egli, da buon normanno, non offre ulteriori spiegazioni che sarebbero state compromettenti anche per altri e neppure svela il nome delle persone presso cui andava celebrando l'Eucarestia in segreto. È un atteggiamento unicamente religioso: per questo egli ha affrontato rischi e pericoli. È qui il suo eroismo. A lui interessa la fede integra, semplice, lucida. Non c'è nessun atteggiamento politico. L'effetto però è immediato: egli è subito rinchiuso nell'antico seminario di Rouen Saint-Vivien, utilizzato dai rivoluzionari come casa di detenzione provvisoria, in attesa della sentenza definitiva, che arriva il 10 gennaio 1794: il "cittadino" Jean Bourdon, ossia p. Protasio è condannato ad essere deportato alla Guyane per aver celebrato la messa illegalmente e aver tenuto documenti sospetti.
Il 9 marzo viene trasportato verso Rochefort. Vi arriva il 12 aprile e, perquisito, viene privato di tutto quello che poteva ancora avere: un orologio d'oro con una scatoletta per coprirlo (probabilmente si trattò di una custodia eucaristica) e 1303 lire. Imbarcato sul vascello famigerato "Deux-Associés", segue la sorte degli altri prigionieri. Il quadro desolante di sofferenze volgari, di agonie e di morte che forma il tessuto quotidiano di quella prigionia è lo stesso già descritto per il beato Jean-Louis Loir. Dopo quattro mesi p. Protasio, nella notte dal 23 al 24 agosto 1794, moriva di male contagioso. Un sopravvissuto rilasciava più tardi questa testimonianza: "Era un religioso di grande merito ed encomiabile sia per le sue iniziative a favore dei confratelli deportati, sia per le sue capacità fisiche e morali di cui era dotato, sia soprattutto per la sua fermezza nella fede, la sua prudenza, equilibrio, regolarità e altre virtù cristiane e religi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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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ta 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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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10-29

 

 
Beato Francesco Francois (Sebastiano da Nancy) Sacerdote e martire
10 agosto  8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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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 - 1794

Durante la Rivoluzione Francese, morì incarcerato in una sordida nave perchè era sacerdote.

Martirologio Romano: Nel braccio di mare antistante Rochefort sulla costa francese, beati Claudio Giuseppe Jouffret de Bonnefont, della Compagnia dei sacerdoti di San Sulpizio, Francesco François,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e Lazzaro Tiersot, dell’Ordine Certosino, sacerdoti e martiri, che, relegati durante la rivoluzione francese in una sordida galera, subirono il martirio per il loro sacerdozio.

Tra le 547 vittime dei "pontons de Rochefort" e i 64 sacerdoti beatificati come martiri della rivoluzione francese figura anche padre Sebasatiano da Nancy. La trama della sua biografia è un po' più documentata. Francesco François era nato il 17 gennaio 1749 a Nancy da Domenico e Margherita Verneson, e venne battezzato il giorno dopo nella chiesa di S. Nicola. Suo padre era un bravo falegname e gente distinta e nobile furono il suo padrino e madrina. Il che significava uno stato sociale di benestanti borghesi. Non fu difficile al piccolo Francesco imparare a conoscere i frati cappuccini che fin dal 1593 si erano insediati a Nancy nella periferia della città per poi passare nel 1613 in un convento più accogliente, rifatto con la generosità del duca Leopoldo di Lorena e del re Stanislao nel 1746. Infatti la parrocchia S. Nicola, fondata nel 1731, utilizzava la chiesa dei cappuccini per il culto fino al 1770. I frati si raccoglievano nel retro coro e animavano il Terz'Ordine francescano.
Il loro convento era importante sede del capitolo provinciale e del lanificio della provincia per la confezione delle tuniche e mantelli per tutti i cappuccini di Lorena, distribuiti in ben 28 conventi sul territorio della regione. La loro vitalità apostolica e il loro dinamismo caritativo a favore dei poveri, degli appestati e dei sofferenti li aveva resi assai popolari e molti richiesti. Ma quando nel 1768 il giovane Francesco François, diciannovenne, entrò nel convento di Sanit-Mihiel, fin dal 1602 destinato alla formazione dei novizi, già si notava una certa crisi di vocazioni. La Commissione dei Regolari, istituita dal re di Francia nel 1766 per correggere abusi e riformare i monasteri e i conventi, intervenendo con un editto del re nel 1768 a fissare a 21 anni l'età di ammissione ai voti solenni, aveva contribuito ad accelerare questa crisi.
Il maestro dei novizi p. Michele di Saint-Dié il 24 gennaio 1768 lo rivestì dell'abito cappuccino col nome nuovo di Frate Sebastiano e un anno dopo ricevette la sua solenne professione. L'atto della sua professione, segnato nel registro ufficiale, è il primo del 1769, come l'atto di battesimo aveva inaugurato nel registro della parrocchia S. Nicola l'anno 1749. Dopo il noviziato Sebastiano passò nello studentato cappuccino di Pont-à-Mousson, un convento fondato nel 1607 e rinnovato nel 1764. Al tempo del Beato vi abitavano nove padri, sei chierici e un fratello laico. La città era indicata come luogo di studi avendo un efficiente collegio di gesuiti. Egli stava completando i suoi studi ed era già stato ordinato sacerdote, anche se non si conosce la data precisa della sua ordinazione.
Nel 1777, il 5 giugno, venne approvato come confessore nel convento di Sarreguemines, dove bisognava conoscere anche la lingua tedesca che era usata in quella zona di confine. Nel 1778 i documenti lo segnalano presente nel convento di Sarrebourg, diocesi di Metz, come confessore, in una comunità di religiosi molto esemplare nella povertà e osservanza della regola. I documenti sono molto eloquenti negli anni 1782-1784. Si tratta di registri della parrocchia di Saint-Quirin. Il beato vi svolgeva frequente ministero pastorale, battesimi, matrimoni, ecc. supplendo alla mancanza di clero locale. Il 26 agosto 1784 il capitolo provinciale triennale lo destinò al convento di Commercy dove rimase fino al 1787, e probabilmente fino al 1789, eccetto una pausa nel convento di Dieuze, svolgendo sempre apostolato attivo e in auxilium cleri.
Padre Sebastiano a partire dal 1789 si trovava nel convento d'Epinal, sulla riva sinistra del braccio occidentale della Moselle, quando scoppiò la rivoluzione francese con tutte le sue conseguenze antireligiose. e antiecclesiastiche. I commissari municipali il 30 aprile 1790 entrarono nel convento per fare l'inventario. Un anno dopo i mobili ed effetti del convento venivano venduti, mentre p. Sebastiano, che aveva rifiutato di giurare la Costituzione, con una pensione di 770 lire, dopo l'espulsione dei frati dal convento, si era incamminato verso il convento di Châtel-sur-Moselle, indicato dal Consiglio municipale come casa comune dei cappuccini. Da qui verranno in seguito espulsi per non aver voluto partecipare a una processione guidata da un parroco che aveva giurato la Costituzione civile del clero. Messi sul lastrico, i frati furono accolti e aiutati dalla popolazione. Il 9 novembre 1793 egli fu inviato nella casa delle terziarie a Nancy, che serviva come prigione per i preti refrattari. Era la risposta del Comitato di sorveglianza, al quale il padre si era presentato spontaneamente chiedendo di conformarsi alla legge che prevedeva la prigione ai refrattari.
Il 26 gennaio 1794 l'amministratore del distretto di Nancy venne a verificare la situazione di tutti i detenuti, la causa del loro arresto, l'età e l'eventuale infermità. Di p. Sebastiano annotò che era refrattario e senza nessuna infermità, pronto, quindi a entrare nella lista dei preti ribelli da spedire a Rochefort. Partirono infatti il primo aprile successivo 48 preti e religiosi e dopo un penoso tragitto durato quattro settimane, spogliati di ogni cosa che ancora potevano avere, giunsero a Rochefort il 28 aprile. Pochi giorni dopo erano imbarcati sul naviglio negriero dei Deux-Associés, già carico di ben 373 preti e religiosi prigionieri, vengono trasportati fra le isole d'Aix e d'Oleron dove il veliero viene attraccato. A p. Sebastiano si presenta una visione desolante: quelle centinaia di prigionieri pallidi in viso, barbe lunghe e incolte, abiti sudici, annunciano una prigionia da moribondi. Infatti una vecchia goletta serviva a raccogliere i malati e infettati terminali come in un ospedale, ma senza medicine e medici, in attesa che la morte facesse il suo corso. E allora con un canotto si prelevavano e trasportavano i dieci-dodici cadaveri quotidiani per essere sepolti nella sabbia di quella costa marina.
"Era il nostro naviglio ingolfato di preti e religiosi - lasciò scritto un sopravvissuto - come un altare per l'olocausto innalzato dalla Provvidenza tra le onde del mare per la consumazione perfetta del sacrificio". I corpi delle vittime, completamente spogliati come nei campi di concentramento itleriani, venivano trasferiti sulle rive sabbiose e alcuni dei prigionieri ancora in discreta salute li dovevano seppellire nella sabbia senza poter recitare apertamente nessuna preghiera o innalzare al cielo qualche canto della Chiesa.
"Dio permetteva questa quotidiana scena di strazio - scrisse ancora uno dei superstiti - per aumentare il prezzo delle nostre sofferenze, donandoci una più perfetta rassomiglianza con il suo divin Figlio nella sua passione. Nulla ci consolava nelle nostre afflizioni, nulla ci fortificava nelle nostre prove se non il pensiero di Gesù che regna nei cieli ed è attento dall'alto del suo trono ai nostri combattimenti, egli che prima di noi e per noi era stato legato, flagellato, schiaffeggiato, sputacchiato, coronato di spine, rivestito da pazzo, abbeverato di fiele e di aceto, inchiodato su una croce, insultato e maledetto dai suoi nemici. Questa considerazione spirituale del nostro Redentore faceva come stillare una dolcezza ineffabile nei nostri cuori. Ci sentivamo felici di essere stati scelti fra tanti per fare questa via dolorosa e seguire il nostro Maestro divino. Soffrivamo non solo con pace, ma con gusto, e morivamo con gioia. Pensavamo che Gesù Cristo aveva voluto, nei diversi secoli, che ciascun dogma della fede fosse conservato e anzi consolidato nella sua Chiesa per mezzo del sangue di un numero di martiri più o meno grande, secondo l'importanza della verità combattuta; e noi pensavamo che era un grande onore per noi essere perseguitati e sacrificati per corroborare l'insegnamento dell'autorità spirituale e indipendente dalle autorità del mondo, divinamente attribuita alla Sede Apostolica e in generale a tutto l'episcopato".
Questa preziosa testimonianza ha lasciato anche uno splendido ritratto di p. Sebastiano, colto come un fiore speciale di virtù in quel mazzo di fiori profumati dei martiri. Ecco le sue parole: "Il Signore aveva manifestato la santità di un altro dei suoi servi, il padre Sebastiano, cappuccino della casa di Nancy, venuto per morire su questa stessa galeotta. Questo santo religioso era fra noi in singolare venerazione per la sua eminente pietà e virtù e toccante devozione. Pregava incessantemente, soprattutto nell'ultima malattia. Un mattino lo si vide in ginocchio, le braccia aperte in forma di croce, gli occhi elevati al cielo, la bocca aperta. Non vi si fece molto caso, perché si era abituati a vederlo pregare così, durante la sua malattia. Passò mezz'ora ed eravamo stupiti di vederlo perseverare in quella posizione così scomoda e difficile da tenersi in quel modo perché allora il mare era piuttosto mosso e l'imbarcazione beccheggiava e oscillava molto.
Probabilmente era in estasi. Allora ci avvicinammo per osservarlo dappresso. Toccando la sua figura e le sue mani ci rendemmo conto che egli già da molte ore aveva reso in quella positura la sua anima a Dio. Non riuscimmo mai a spiegarci come il suo corpo avesse conservato così a lungo quella posizione orante, nonostante il continuo rullio della piccola imbarcazione. Si chiamarono subito i marinai. Essi a quello spettacolo non riuscirono a trattenere un grido d'ammirazione e le lacrime. Si risvegliò in quel momento la fede nei loro cuori e alcuni di loro, denudando le braccia, mostravano a tutti l'effigie della croce tatuata con pietra rovente, e decisero di ritornare alla religione che avevano abbandonato". Era il 10 agosto 1794.

Fonte:  
 Santa S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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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6-10-29

 

 

 

 

 
Beati Martiri dei Pontoni di Rochefort 64 martiri della Rivoluzione Francese
Senza data (Celebrazioni singole) 
La Rochelle, Rochefort, † 1794-1795

La Rivoluzione Francese ebbe dei grandi meriti nella formazione politica, morale e sociale dell’epoca moderna, ma come tutte le rivoluzioni, che in qualche modo presuppongono un capovolgimento vilento delle classi al potere con i rivoltosi, lasciò dietro di sé un lago di sangue, morti ingiuste, delitti e violenze.
E la Chiesa Cattolica che in ogni rivoluzione avvenuta nel mondo, sin dalle sue origini, ha dovuto pagare un tributo di sangue, anche in questa ebbe innumerevoli martiri, morti per il solo fatto di essere religiosi.
L’Assemblea Costituente nel 1789, dopo aver confiscato tutti i beni ecclesiastici e soppresso gli Istituti religiosi, decretò la Costituzione Civile del, Clero, per cui vescovi e parroci, dovevano essere eletti con il voto popolare e imponendo al clero il giuramento di adesione alla Costituzione stessa; ci fu chi aderì (clero giurato) e chi non lo volle fare (clero “refrattario”).
L’Assemblea Legislativa andata al potere, infierì contro il clero ‘refrattario’ giungendo nel 1792 a massacrarne 300, fra vescovi e sacerdoti.
Seguì al potere la Convenzione Nazionale, che emise contro il clero ‘refrattario’ dei decreti di deportazione, per cui bisognava presentarsi spontaneamente pena la morte, furono così colpiti 2412 sacerdoti e religiosi, deportati in tre zone della Francia, 829 a La Rochelle (Rochefort), 76 a Nantes-Brest e 1494 a Bandeau-Blayc.
I deprtati di Rochefort, dei quali parliamo in questa scheda, appartenenti a 35 diocesi, affrontarono per la fede i crudeli trattamenti ordinati dalla Convenzione, che voleva disfarsi clandestinamente della loro opposizione. Ma la fermezza nella fede dimostrata dai deportati, li rese intrepidi testimoni di Cristo, confermandoli fedeli figli della Chiesa.
Nella primavera 1794, gli 829 sacerdoti e religiosi furono imbarcati su due vecchie navi (pontoni), che rimasero ancorate nella foce del fiume Charente, di fronte all’isola di Aix.
Ammucchiati di notte in uno strettissimo interp0onte, vissero un vero inferno di sofferenze, che furono appesantite dalla cattiveria dell’equipaggio che, ogni mattina, “affumicava” i poveri prigionieri con il fumo di catrame.
I miseri detenuti, costretti a vivere numerosi in così poco spazio, subirono sofferenze e stenti indicibili, senza alcuna assistenza sanitaria e molti di loro erano anziani ed ammalati.
Dopo cinque mesi di quella invivibile detenzione, si contarono ben 547 morti, fra i quali il canonico Jean-Baptiste Souzy, che nel marzo 1794 aveva ricevuto dal vescovo di La Rochelle la sua delega per l’assistenza ai suoi compagni deportati, prima per il disagevole viaggio poi per la prigionia, come molti altri confratelli, fu sepolto nella sabbia dell’isola Madame.
Con la testimonianza dei 282 sopravvissuti, liberati nel febbraio 1795, si poterono raccogliere notizie più o meno complete sul martirio di tutti questi sacerdoti diocesani e religiosi; nel 1932 fu istruito a La Rochelle il processo ordinario per la beatificazione di 64 martiri, dei quali si era potuto reperire una documentazione sufficiente sulla loro morte.
Il 2 luglio 1994 fu riconosciuto il loro martirio, ciò ha permesso la loro beatificazione a Roma il 1° ottobre 1995, da parte di papa Giovanni Paolo II. Ma nella cerimonia di beatificazione furono commemorati tutti i 547 deportati morti a Rochefort, gli eroici “Martiri dei Pontoni” del 1794.
Sulla spiaggia dell’Isola Madame, nell’estuario del fiume Charente, i pellegrini hanno deposto una croce di ciottoli, sul luogo ove furono sepolti molti martiri, indicando simbolicamente la loro tomba.

Si riportano di seguito i 64 nomi, con la qualifica e le date di nascita e morte; nati e vissuti in città e diocesi diverse, morirono tutti nella zona di Rochefort, accomunati nella fedeltà a Cristo, vittime della Rivoluzione Francese; a parte la celebrazione singola per ognuno nel giorno della morte, tutti insieme vengono ricordati il 18 agosto.

91351 - Jean-Baptiste Souzy – sacerdote, vicario episcopale della deportazione (24/3/1732 - 27/8/1794)
- Antoine Bannassat – parroco (20/5/1729 - 18/8/1794)
- Jean-Baptiste di Bruxelles – canonico (12/9/1734 - 18/7/1794)
- Florent Dumontet de Cardaillac – vicario generale di Castres (8/2/1749 - 5/9/1794)
- Jean-Baptiste Duverneuil – carmelitano (1737 - 1/7/1794)
- Pierre Gabilhaud – parroco (luglio 1747 - 13/8/1794)
- Louis-Wulphy Huppy – sacerdote (1/4/1767 - 29/8/1794)
- Pierre Jarrige de La Morelie de Puyredon – canonico (19/4/1737 - 12/8/1794)
- Barthélémy Jarrige de La Morelie de Blars – religioso cluniacense (18/3/1753 - 13/7/1794)
- Jean-François Jarrige de La Morelie de Breuil – canonico (11/1/1752) - 31/7/1794)
- Joseph Juge de Saint-Martin – sulpiziano, direttore di seminario (14/6/1739 - 7/7/1794)
- Marcel-Gaucher Labiche de Reignefort – compagnia missionaria (3/11/1751 - 26/7/1794)
- Pierre-Yrieix Labrouche de Labordaire – canonico (24/5/1756 - 1/7/1794)
- Claude-Barnabé Laurent de Mascloux – canonico (11/6/1735 - 7/9/1794)
- Jacques Lombardie - parroco (1/12/1737 - 22/7/1794)
- Joseph Marchandon – parroco (21/8/1745 - 22/9/1794
- François d’Oudinot de La Boissiere – canonico (3/9/1746 - 7/9/1794)
- Raymond Petiniaud de Jourgnac – vicario episcopale (3/1/1747 - 26/6/1794)
- Jacques Retauret – carmelitano (15/9/1746 - 26/8/1794)
93144 - Paul-Jean Charles – cistercense (29/9/1743 - 25/8/1794)
93142 - Augustin-Joseph Desgardin – cistercense (21/12/1750 - 6/7/1794)
91889 - Pierre-Sulpice-Christophe Faverge – lasalliano (25/7/1745 - 12/9/1794)
93223 - Joseph Imbert – gesuita (1719 - 9/6/1794)
- Claude-Joseph Jouffret de Bonnefont – sulpiziano, direttore di seminario (23/12/1752 - 10/8/1794)
- Claude Laplace – vice direttore tribunale vescovile (15/11/1725 - 14/9/1794)
- Noël-Hilaire Le Conte – canonico cattedrale di Bourges (3/10/1765 - 17/8/1794)
- Pierre-Joseph Legroing de La Romagére – canonico (28/6/1752 - 26/7/1794)
93139 - Jean-Baptiste-Xavier Loir – frate cappuccino († 19/5/1794)
92948 - Jean Mopinot – lasalliano (12/12/1724 - 21/5/1794)
- Philippe Papon – parroco (5/10/1744 - 17/6/1794)
- Nicolas Savouret – consigliere delle clarisse (27/2/1733 - 16/7/1794)
- Jean-Baptiste Vernoy de Mont-Journal – canonico (17/11/1736 - 1/6/1794)
- Louis-Armand-Joseph Adam – sacerdote (19/12/1741 - 13/7/1794)
- Charles-Antoine-Nicolas Angel – religioso dell’Immacolata Concezione (11/10/1763 - 29/7/1794)
- Claude Beguignot – certosino (19/9/1736 - 16/7/1794)
93140 - Jean Bourdon – frate cappuccino (3/4/1747 - 23/8/1794)
- Louis-François Lebrun – benedettino (4/4/1744 - 20/8/1794)
- Michel-Bernard Marchand – sacerdote (28/9/1749 - 15/7/1794)
- Pierre-Michel Noel – sacerdote (23/2/1754 - 5/8/1794)
- Gervais-Protais Brunel – cistercense trappista (18/6/1744 - 20/8/1794)
93141 - François François – frate cappuccino (17/1/1749 - 10/8/1794)
- Jacques Gagnot – carmelitano (9/2/1753 - 10/9/1794)
93168 - Jean-Baptiste Guillaume – lasalliano (1/2/1755 - 27/8/1794)
- Jean-Georges Rhem - domenicano (21/4/1752 - 11/8/1794)
- Claude Richard – benedettino (19/5/1741 - 9/8/1794)
- Jean Hunot – canonico (21/9/1742 - 7/10/1794)
- Sébastien-Loup Hunot - canonico (7/8/1745 - 17/11/1794)
- François Hunot – canonico (12/2/1753 - 6/10/1794)
- Georges Edme Rene – sacerdote (16/11/1748 - 2/10/1794)
- Lazare Tiersot - certosino (29/3/1733 - 10/8/1794)
- Scipion Jérome Brigeat Lambert – decano capitolo cattedrale (9/6/1733 - 4/9/1794)
93224 - Jean-Nicolas Cordier – gesuita, professore (3/12/1710 - 30/9/1794)
- Charles-Arnould Hanus – parroco e decano (18/10/1723 - 28/8/1794)
- Nicolas Tabouillot – parroco (16/2/1745 - 23/2/1795)
- Antoine, detto Constant, Auriel – vicario (19/4/1764 - 16/6/1794)
- Elie Leymarie de Laroche – priore (8/1/1758 - 22/8/1794)
- François Mayaudon – canonico (4/5/1739 - 11/9/1794)
- Claude Dumonet – sacerdote, professore di collegio (2/2/1747 - 13/9/1794)
- Jean-Baptiste Laborie du Vivier – canonico (19/9/1734 - 27/9/1794)
93213 - Gabriel Pergaud – canonico regolare di s. Agostino, priore – (29/10/1752 - 21/7/1794)
91355 - Michel-Louis Brulard – carmelitano scalzo (11/6/1758 - 25/7/1794)
- Charles-René Collas du Bignon – sulpiziano, superiore seminario (25/8/1743 - 3/6/1794)
- Jacques-Morelle Dupas – vicario (10/11/1754 - 21/6/1794)
- Jean-Baptiste Munestrel – canonico (5/12/1748 - 16/8/1794)

Autore: Antonio Borrelli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200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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