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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목빠진 아버지와 親자의 의미(사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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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칠 [mpark] 쪽지 캡슐

2004-03-24 ㅣ No.4317

사순 제 4 주일                                                           2004. 3. 21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 시기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순절이 절반이 지난 만큼 부활이라는 목적지가 가까이 다가왔으니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사순 제 4주일인 오늘을 전례적으로 ’기쁨 주일’, 혹은 ’환희주일’이라고 합니다.

 

사순절 시작하며 이 시간만큼은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사순절 복음 묵상 쓰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는 분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매 금요일 외에도 매 미사 전,후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는 분들도 많이 눈에 띕니다.

 

오늘 사순 시기 절반을 보내면서 그동안의 수고로움은 기쁨이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지 못 할 것 같았던 복음 묵상 쓰기와 여러 가지 희생도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제 남은 20일도 더 열심히 살아가자고 다짐하는 시간이 바로 사순 제 4주일인 것입니다.

 

본당 신부로서 사목 생활을 하다 보면 술자리를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또 사제관에 기다려주는 집사람도 없으니 술 한 잔 걸치고 들어갈 때도 많습니다.

그런 제가 사순절 들어서 아직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는 별로 없고 사순절을 핑계삼아 간의 평화를 위해 節酒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기도 시간이 늘었고 독서 시간이 늘었습니다.

덮어 두었던 책을 꺼내어 어학 공부를 시작했고 술 안 마시는 김에 요가도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교우분들은 제가 술을 안 마시니까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에도 제가 반주를 안 하니까 당신들도 마시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사순절은 너무 기니까 이순절이나 삼순절이 알맞다고 말씀하십니다.

 

월요일 함께 테니스 쳤던 후배 신부는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순절은 술 안 마시는 시기가 아니고 ’원수들과 술을 마시는 시기’라고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사순 시기에는 희생하는 마음으로

미워하는 사람들, 싫어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함께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사순절 동안만이 아니고 몇 달을, 몇 년을 아들 생각에 술 생각을 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버지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집 떠나간 아들이 하루 세끼는 제대로 먹을까, 밤이슬은 피하고 잠을 제대로 자기나 할까,

이런 저런 걱정에 식욕도 잃고 술맛도 잃어버린 아버지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망부석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어미는 집 떠난 지아비를 한 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돌이 되어 굳어집니다.

둘 째 아들이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아마도 아들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어 굳어져 망자석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매일 아들을 목 빠지게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비유의 이야기와 한자가 서로 만납니다.

아버지를 한자어로 부친(父親)이라고 합니다.

아비 부(父)에 친할 친(親)자를 씁니다.

친자는 어버이 친, 부모 친 이라고도 합니다.

 

이 親자를 분석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설 立(립) 밑에 나무 木(목)자가 있고 그 오른 쪽에 볼 見(견)자가 있는 것이 어버이 친자입니다.

그러니까 친자는 나무 위에 서서 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아마도 동구 밖 큰 나무 위에 올라가서

이제나 올까 저네나 돌아올까 하면서 둘째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버지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캐묻지 않습니다.

너 같은 아들을 둔 적이 없다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야단도 치고 뺨도 때려주었으면 더 시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성서 본문을 보면 여기에서 아들의 말이 끊어집니다.

아들이 더 말하려는 것을 아버지가 막은 것입니다.

 

"아들아, 괜찮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다 알고 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어서 집으로 가자꾸나."

아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다정스럽고 사랑 가득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 합니다.

 

복음의 비유 이야기에서와 같이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간문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1 베드로 4,8).

예언자라는 명작을 남긴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지른 죄보다 뉘우침이 이미 더 커진 사람을 그대는 어떻게 벌하려고 합니까?"

 

사순 시기의 절반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앞의 절반을 잘 못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아직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둘 째 아들이 정신을 차려 아버지께 돌아오듯이 이제 우리들도 다시 정신을 차려

남은 사순절 더 열심히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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