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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제1강(서언&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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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성 [lhopeter] 쪽지 캡슐

2010-09-29 ㅣ No.2112

제1강: 서언, 로마서 1장

 

<서언: 로마서 읽기를 시작하며>


2004년 1월에 한국갤럽이라는 곳에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1984년, 1989년, 1997년에 이어 네 번째임). 이에 따르면, 종교를 믿는 이유가, 천주교 신자의 78%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하였다고 합니다(다른 답변으로는 ‘복을 받기 위해서’, ‘죽은 다음 영원한 삶을 위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가 있었음). 어떤 주교님은 이 조사 결과를 두고 몹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주교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믿음의 목적치고는 그 깊이가 너무 얕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믿음은 오히려 아픔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껍질을 깨는 아픔을 겪도록 인도합니다. 내 삶의 부족한 점, 잘못된 점을 환하게 드러내고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합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단지 죽음으로 끝나는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보장하는 죽음입니다. 부활을 보장하는 죽음이기에, 우리 선조들은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자의 믿음은 우리 믿음의 모범입니다.


저와 함께 하나의 목표를 세우시기를 권고합니다. 우리도 성인(聖人)이 됩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천당에 간다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닐 만한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그 시작은 ‘결심’하는 것입니다. 좋은 결심은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성인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고 성인이 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세우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시작하는 로마서 읽기는 우리 목표를 달성하는 데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의 저자인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갑작스럽게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의 신비를 깨우치고 위대한 사도가 된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깨달음과 권고와 가르침을 기록한 책들이 신약 성경의 여러 서간들입니다(신약 성경의 21개 서간 가운데 13개 정도를 집필). 바오로 사도는 20년 이상 선교활동을 하면서 여러 공동체 구성원들의 구체적 상황을 목격하였고, 각각의 상황에 알맞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로마서는 지금으로부터 1950여 년 전에 로마 신자들을 위하여 그리스어로 쓰였습니다만, 여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믿음의 핵심과 구원의 정도를 제시하는 하느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로마서를 읽는 것은 성경 지식을 높이고 넓히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삶을 철저히 되돌아보고 꿰뚫어보고 근본적인 회심과 새로 나는 체험을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시간은 로마서에 대해서 무언가 알아가는 기쁨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는 고통이 더 따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는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죄를 드러내는 목적은 물론 은총을 충만히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제대로 이해할수록,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더욱 감사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 읽기를 통하여, 자신에게 아픔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통회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사랑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내게 맡기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 번째 선교 여행 말기에, 코린토에서 겨울을 나던 중에, 로마서를 썼습니다. 아마도 기원후 57년에서 5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의 끝 무렵에 편지를 완성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봄이 되어 뱃길이 열렸을 때 그 편지를 포이베라는 여신도의 손을 통하여 보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손으로 쓴 것은 아니고, 테르티우스를 불러서 받아쓰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50대의 나이인데도 눈이 좋지 않았던 듯합니다.


이 편지가 우리 손에 전해진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지기 전에 이미 수많은 사람이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오리게네스를 비롯해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아우구스티노, 토마스 데 아퀴노 등 쟁쟁한 사람들이 로마서를 읽고 해설서를 썼습니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루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하고 편향적 태도를 보이기까지 합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로마서모든 책의 심장이며 정수(精髓)”라고 하였고, 칼뱅도 “로마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이에게는 성경의 가장 비밀스러운 보고(寶庫)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린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대단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나왔고, 이 책에서 종교개혁자 루터가 나왔습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에게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됩니다. 사실 두렵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노와 루터가 받았던 충격을 견디어 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성령의 인도를 바라며 사랑의 하느님과 함께 그 길을 걷고자 합니다.


<로마 1,1-7>


로마서의 첫 부분을 보면,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예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로마 1,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첫마디부터 충격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종’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둘로스’라고 하는데, 노예라는 뜻입니다. 로마 인구의 상당수는 노예였다고 합니다.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생산 수단이었습니다. 노예와 당나귀의 차이는 말을 할 줄 아는 것과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는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노예 시장에 가서 반나체가 되어서 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사서 집에 데리고 가서 이미 뚫린 귀에 주인 이름이 새겨진 귀걸이를 달아 줍니다. 노예는 자기 의지도, 생각도, 꿈도 없습니다. 오직 주인을 위한 도구입니다. 아무도 자기는 노예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를 노예라고 소개하는 사람 없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주님의 종’은 자부심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오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분은 대략 기원후 7-10년에 태어나 62-68년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두 가지입니다. ‘사울’은 유다식 이름이고, ‘요청받은’(asked for)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이름도 ‘사울’). ‘바울로스’는 그리스식 이름인데, ‘작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율법에 정통한 바리사이였습니다.


- 사도 23,6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 필리피서 3,5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또한 그는 당대의 지식인이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로마 제국 인구 5천만 명 중에 50만 명만 로마 시민이었다고 함. 그야말로 로마 제국 1%에 속하는 사람.). 그러한 바오로가 자신을 노예로 소개한 것은 충격적입니다(로마 인구의 1/3이 노예). 바오로는 기꺼이 종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오로에게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나타나셔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 사도 9,1-9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바오로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사도로서 그 믿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사도 9,18-20

18 ......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바오로는 좀 더 공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성경은 바오로가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에 돌아왔고, 그러고 나서 3년 뒤에야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 갈라티아서 1,17-19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아마 그 3년 동안 바오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하나하나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로마 1,2),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로마 1,3)을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다마스쿠스에 가는 길에서 만나 뵌 예수님이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마 1,3-4)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어떤 예언들이 있을까요?


- 창세 3,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 이사 7,14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 이사 11,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 이사 49,6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이사 61,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이사 53,4-7

4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바오로가 얼마나 울었을까요? 특히 이사야서 53장 5절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니, 오 주님, 나 같은 놈을 위하여 죽으신 주님, 바오로는 성경을 붙들고 울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를 향하여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사도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는 감사하고 감격에 벅차서, 자진해서 예수님의 종으로 살기로 거듭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사도의 길이 어떠한 길인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 사도 9,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 1코린 4,9-13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명예를 누리고 우리는 멸시를 받습니다. 

11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12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 사람들이 욕을 하면 축복해 주고 박해를 하면 견디어 내고 

13 중상을 하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처럼,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 2코린 12,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 루카 6,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래도 바오로는 기꺼이 그 길을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모욕당할 각오, 죽을 각오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의 의미입니다. 1장 1절을 가볍게 넘어가면 안 됩니다.


바오로의 이 말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선교사나 성직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생각은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바오로 사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같은 점이 있습니다. 바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로마 1,5).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로마 1,6)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로마 신자들이고, “그들”은 5절의 “모든 민족들”입니다. 로마 신자들이 모두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면, 한국 신자들도 모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부르심은 예수님의 주도적 부르심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바오로가 무슨 공덕이 있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뒤에는 응답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바오로는 그 응답을 제대로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엉터리 신앙인입니다.


로마서 1장 5절의 “믿음의 순종”은 로마서 12장 1절(“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몸’뿐 아니라 ‘영’도 함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믿음의 마음을 몸의 순종으로 표현’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믿음의 순종”(로마 1,5)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8).


신앙인은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맘대로 살면 안 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생활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습니다.


- 1코린 6,19-20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 로마 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입니다(로마 14,8 참조).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사치하거나 과소비할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다가 궁핍해져도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장사를 해도 폭리를 취하면 안 되고, 자기가 사장이라고 노동자를 착취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왜 돈 잘 벌는 직업, 존경받는 직업을 갖지 못하고 막노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불평하기에 앞서, 지금 나의 삶이 주님 뜻에 맞는 삶인가를 고민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한 종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어떤 신자는 회사 사장이었는데 자기 사무실에 예수님 의자를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그 회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랍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성 신자들도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뜻이어야 하겠습니다. 또 자동차에 자신이 신자임을 밝히는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단지 교통사고를 면하게 해 달라는 바람만이 아니라, 자동차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믿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종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합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면 함께 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시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낳으신 자비로운 아버지시고, 동생들을 죽을 위험에서 구하고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맏형이며,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면 평안함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주님이지만, 우리는 또한 진노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로마 1,18).]


억지로 종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생명을 기꺼이 주셨으므로, 주님도 우리에게서 기꺼이 종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삼종 기도 때에 고백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예수님도 성모님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바오로처럼 우리도 기꺼이 예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로마 1,8-17>


1장 15절은 특별히 관심을 끄는 구절입니다.

- 로마 1,15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보통 복음은 안 믿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믿는 사람에게 전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바오로 사도에게는 복음 전하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남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집을 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로마 15,20). 1장 8절에 보면 로마 신자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왜 로마 신자들한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을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습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를 통하여 또 로마 신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다른 한 편, 로마 신자들이 고난과 시련과 박해 속에서 복음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예방적 차원에서 가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를 집필하던 당시, 로마에 신자가 생긴 지 대략 20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 열정이 사그라지는 신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열정이 사그라지는 현상은 단지 로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어디나 그러한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고, 감사의 마음이 식습니다. 주님의 종이요 사도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약해집니다. 복음의 힘을 느끼지도 전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여도, 아니 오래되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심각한 병을 앓기도 합니다. 예컨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덕분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라고 건성으로 듣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교회 밖에도 있지만, 안에도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에 그런 사람이 있었듯이, 지금 이 자리에도 있습니다.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교회 안에 95% 이상이 엉터리 신자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해 들으면 거부 반응 일으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하거나,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면, 얼굴이 굳어집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며, “하느님의 힘”(16절)입니다. 복음을 다시 들을 때에 우리는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또 지속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란 감사요 기쁨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구원받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입니다. 내 영혼을 짓누르던 죄의 무게가 사라지고, 용서받은 기쁨이 홍수처럼 범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격과 기쁨은 언덕길의 수레와 비슷합니다. 애써 붙들지 않으면, 아래로 아래로 굴러 내려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립니다. 죄를 범하면 구원의 감격은 모조리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힘을 북돋아주고 격려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 로마 1,11 “여러분과 함께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려는 것입니다.”

- 로마 1,12 “내가 여러분과 같이 지내면서 여러분의 믿음과 나의 믿음을 통하여 다 함께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은 놀랍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불타오르는 분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로마 1,14). 여기에서 ‘그리스인’(v$Ellhn)은 헬라(그리스) 사람, 헬라어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특히 유다인이 아니면서 헬라 문명을 향유하는 문화인을 가리킵니다. 또 ‘비그리스인’은 헬라인이 아닌 사람, 특히 ‘야만인’(bavrbaro")을 가리킵니다. 지혜로운 이방인이건 어리석은 이방인이건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물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제로 하면서,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노력이나 공덕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은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이사 55,1) 얻어먹은 사람입니다. 생명수를 거저 받은 사람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 22,17). 거저 받은 생명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전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복음의 힘은 놀랍습니다. 아니, 복음은 곧 능력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듣고, 그날 예루살렘에서 삼천 명가량이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구자를 일어나 걷게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 사도 2,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 사도 3,6-8

6 베드로가 말하였다.“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 사도 16,18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은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1월 3일에 ‘예수 성명(聖名)’을 기념합니다. 이 기념 미사의 독서는 필리피서 2장 1-11절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높은 이름이 된 것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 죽음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 필리 2,6-11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구원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아무리 지독한 죄인이라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 덕분에 어떠한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구원은 아득히 멀기만 합니다.


- 로마 1,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 로마 1,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7절의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신교식 해석이 있는가 하면, ‘단순한 지성적 동의에서 실천적 사랑으로 전개되는 믿음으로’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야고 2,26)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구원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구원이란 죄를 용서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하느님께 용서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죽게 된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구원은 내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병들어서 생겼던 온갖 정신적 육체적 질병이 사라집니다. 불안해하던 사람이 평안을 되찾습니다. 고독과 소외와 허무에서 벗어나고, 원한에 사무쳤던 마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게을렀던 사람이 부지런해집니다. 헛된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던 사람이 이웃을 위해 봉사합니다. 건강해집니다. 일도 잘 됩니다. 가정이 안정됩니다.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구원을 누가 주십니까? 바로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로마 1,18-32>


로마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하느님’입니다. 161개 절에 180번 이상이 나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비극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하느님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 치명적 잘못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당신 무서워 벌벌 떨기를 바라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 내키는 대로, 자기 욕망대로 살다가 불행해지기를 바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4,7).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는 믿는 이들과 함께 모태에서 창조되었다”(집회 1,14). 하느님 무서운 줄 아는 것은 크나큰 지혜요 은혜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불안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고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대로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최민순 신부님 역, 󰡔고백록󰡕, 성바오로출판사, 1984, 1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의 역사는 어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고(창세 4,8 참조), 노아 시대에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찼습니다(창세 6,11 참조).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6). 하느님을 떠난 사람은 자신을 노리는 죄악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로 사도는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로마 1,18)를 경고합니다.


- 로마 1,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 진노하시는가? 실감나지는 않지만, 바로 지금 진노하십니다. 18절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는 현재진행 동사입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느님은 의로우신 심판자, 날마다 위협하시는 하느님이시다”(시편 7,12).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날마다 죄인에게 진노하신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러한 증거가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배격하는 불경한 자에게 하느님께서 진노를 퍼붓는 증거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경한 자들은 건재하고, 오히려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독재자, 학살자가 외국 망명해서 사치스럽게 살며, 사이비 이단 종교 지도자가 많은 돈을 벌며 호화 생활을 합니다. 반면에,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은 40%가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굶어죽고 전쟁으로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천재지변도 못 사는 나라에서 크게 터집니다. 소돔과 고모라 못지않게 타락하였지만 그렇게 심판받는 도시가 있습니까? 헤로데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서 벌레들에게 먹혀 죽었지만, 오늘날 그런 일이 있습니까?


- 사도 12,21-23

21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22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23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가 헌금을 잘못 해서 죽었지만(사도 5장 참조), 지금도 그랬다가는 본당마다 영안실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죽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장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진노하시지만 당장 매를 들지는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생겨나는 나쁜 생각 하나하나에도 하느님은 진노하십니다. 사랑하는 자가 잘못되면 진노하십니다. 진노하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버릇없는 손자처럼 할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단지 기다려 주시는 자비를 베푸는 것인데, 하느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하느님의 진노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냥 내버려 두실 때’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과 28절에 나와 있는 대로입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불경은 하느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고 감사를 드리지 않는 자도 또한 불경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타락하여 불의를 일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 마음속으로 ‘하느님은 없다.’ 말하네. 모두 타락하여 불의를 일삼고 착한 일 하는 이가 없구나”(시편 53,2). 우리 마음에 하느님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타락과 불의가 들어옵니다. 악마가 들어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와 더불어 거듭 하느님을 찾고 불러야 합니다. 하느님을 외치고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알고 그분께서 준비하신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되기를 염원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 자리를 마련하여 드리고 우리 삶의 중심으로 모시면, 그분의 영광과 생명을, 온갖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 에페 1,15-19

15 그래서 나도 주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전해 듣고, 

16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17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 자신을 알도록 섭리해 주셨습니다.


* 로마 1,19-20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몰라서 안 믿었다고, 몰라서 감사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변명은 하느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본능적으로 엄마를 찾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우주 만물에 하느님의 힘과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신비롭습니다. 하느님의 솜씨를 우리 몸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지혜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이 없다고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으니, 그러한 불경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 로마 1,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불경죄를 범하는 사람은 교만한 자입니다. 타락한 천사가 그러하였고, 인류의 첫 조상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서(창세 3,5 참조), 하느님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욕망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허망한 생각과 우둔한 마음이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똑똑한 척하였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자, 바보였습니다.


- 로마 1,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하느님께 불경한 자들이 찾아가는 곳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란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로마서 1,23-25절은 우상숭배에 관하여 하느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 로마 1,23-25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우상숭배의 첫 번째 특성은 마음의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데에는 많은 요구 사항들이 따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을 길을 걷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릇된 길로 가면 잘못을 지적하시고 회개하라고 하시며, 벌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상은 인간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우상 앞에서 눈물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상숭배는 인간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대신에 죽음을 줍니다.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불경한 자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우상숭배의 두 번째 특성은 인간의 마음을 욕망으로 더럽히고 몸을 수치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성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 나오는 “마음의 욕망”이란 금지된 쾌락의 추구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무시하는 자들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한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시간과 재능을 허비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드높은 품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파멸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대신에 지옥 불구덩이를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섬깁니다. 망상을 갖게 합니다. 잠재력을 개발하면 행복해진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지성인이 여기에 빠져 있는데, 이 운동은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기는 교만이 담겨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께서 매우 미워하십니다.


비참한 인생을 사는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내 자신에 관해서만 생각하라.’ ‘내 자신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라.’ ‘되도록 '나'라는 말만 사용하라.’ ‘칭찬받기를 기대하라.’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 우리도 하느님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적 생활로 비참한 인생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로마서 1장 18절로 갑니다.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불경에 관해서는 살펴보았고, 이제 불의를 다룰 차례입니다. 불경이 하느님을 배격하는 죄라면, 불의는 인간을 공격하는 죄입니다. 그 내용인 로마 1,26-31에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1코린 6,9-10도 참조).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하느님의 법입니다(로마 1,32 참조). 특히, 26절과 27절의 죄는 24절 우상숭배의 성적 타락과 연관되며, 동성연애를 가리킵니다.


- 로마 1,26-32

26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7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29 그들은 온갖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으로 그득합니다. 그들은 험담꾼이고 

30 중상꾼이며,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고, 불손하고 오만한 자며, 허풍쟁이고 모략꾼이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며, 

31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입니다. 

32 이와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 1코린 6,9-10

9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도 비역하는 자도,

10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불의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불의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만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 의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의로움은 믿음에서 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 사람은 그분 안에서만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방패로 죄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 6,16).


로마서 1장을 마무리하면서, 진노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임을 깨닫고 마음속 뼛속까지 새겨 주시도록 간청합시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두려워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서는 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 루카 12,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성령께서 이 순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왜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렸니? 너 나 때문에 기뻐 춤춘 적 있니?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우리는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이 가득 차서, 땅의 것으로 울고 웃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엉터리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메말라 있고 식어 있습니다. 다시 복음의 힘으로 십자가를 보는 눈을 열어 주시고,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모 마리아처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놉니다.” 하고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성전에서 솟아 흐르는 생명의 물을 받아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 에제 47,9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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