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7월호_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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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06-23 ㅣ No.10

[제네시 일기]


헨리 나웬은 심리학을 전공한 네덜란드 출신 가톨릭 사제로 미국의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 생활을 하며 많은 책을 남긴 저술가이다. 그는 제1세계 선진국에 사는 자신의 물질적 풍요로움에 죄책감을 느끼고 페루의 빈민촌에 들어가 살기도 했으며, 죽기 전 10년은 캐나다의 장애인 공동체에서 살았다. 분도출판사 홈페이지 첫화면에 늘 변치 않고 나오는 인기 작가 몇 사람의 이름이 있는데, 나웬 신부도 거기에 들어 있다.
제네시 일기는 나웬 신부가 1970년대 중반 미국 뉴욕 주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인 제네시 수도원에서 7개월간 지내며 쓴 일기이다. 몇 년 전 친구가 권해서 읽었는데 이번 달 책 소개로 이 책을 쓰기로 정한 뒤에 시부모님이 차례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그래서 주로 병원에 앉아 있는 동안 책을 읽다 보니 하루에 며칠치 일기밖에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좋은 점도 있었다. 그날 읽은 내용이 적어도 하루 동안은 머리에서 맴돌아 마치 일일피정처럼 한 가지 주제를 놓고 묵상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 사람의 아주 개인적인 고백을 소설 읽듯 주루룩 읽어서야 예의가 아닌 것도 같다.
책을 읽고 마음에 들면 그 작가가 쓴 책을 더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보통인데, <제네시 일기>는 무척 마음에 남았고 이 저자가 쓴 책이 우리말로 나와 있는 게 10권도 넘는다는 걸 아는데도 다른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그 점이 이상해서 왜 그럴까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글이 창작품인 작가나 연예인 같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을 경우엔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어지는 반면 마음의 스승으로 다가온 분에 대해선 그 사람의 모든 면을 다 알고 싶어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이 계시다면, 아마 나는 그분이 주무실 때 이불을 차내고 자는지, 세수 먼저 하고 이를 닦는지 그 반대인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나웬 신부의 다른 책들을 읽고 나서, 이 사람이 무슨 책이든 잘 쓰는 또 한 사람의 직업적 저술가로 느껴질까봐, 내밀하고 솔직한 고백과 묵상의 글로 읽은 <제네시 일기>가 저자의 또 하나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 글로 보이게 될까봐 거리껴졌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웬 신부가 지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봉쇄 수도원이어서 그 수도원에 한 번 들어가면 평생을 그곳에서 살고, 죽어서도 그 안에 묻히는 그런 곳이다. 요즘엔 봉쇄 수도원에 계신 분들도 가끔은 가족도 만날 수 있고 꼭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잠시 밖에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지만, 이 일기가 쓰인 1970년대는 지금부터 30여 년 전이라 봉쇄 규칙이 여전히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게 엿보인다. 나웬 신부는 그런 곳에 특별 허락을 받아 들어가 성령 강림 대축일인 6월 1일부터 성탄 대축일인 12월 25일까지 그곳 수도자들과 똑같이 노동하고 기도하고 원장 신부와 규칙적인 영성상담을 받는다. 그래서 전례 시기에 따른 독서 구절이 묵상 소재가 되는 일도 많은데, 그것을 읽으면서 평소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각 전례 시기의 의미를 새삼 느끼기도 했다.
머리말에서 나웬 신부는 자신이 수도원에서 살아볼 욕심을 낸 이유를, 고독과 내적 자유, 마음의 평화가 중요함을 가르치고 글로 펴내는 자신의 생활이 하나의 직업이 되어버려 하느님과 함께 있기보다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도에 관해 글을 쓰느라 기도하는 생활에서 떠나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보다 인간의 찬사에 더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네시로 온 나웬 신부는 일하고 기도할 때 드는 잡념과 분심 때문에 고민하고, 사랑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너무나 불완전하고 나약한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일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면서도 일이 하나도 없으면 불편해 하고, 편지 써야 한다는 부담이 싫으면서도 우편함이 비면 서글프고, 강의 일정이 많아 불만이면서도 강의 초청이 하나도 없으면 실망하고, 홀로 있기를 갈망하면서도 홀로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주인공 자리 욕구’에 매어 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런 모순되는 욕구들이 공존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분열되어 있다고 느끼고, 동료 수도자나 수도원장과의 대화에서 답을 얻곤 한다. 일반 신자인 우리가 보기엔 영성도 한참 깊고 조화로운 인격을 갖춘 이런 분이 뭐 더 배울 게 있을까 싶은데, 마치 등산할 때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더 높은 봉우리가 있듯이 기준이 높아지면 자신에게 모자라는 점이 또 보이고, 그렇게 해서 한 단계 올라가면 또 올라갈 곳이 보이고… 그래서 신앙인은 완성이 없고 계속 ‘되어가는’ 존재이고 ‘자라가는’ 존재라고 하는 모양이다.
나웬 신부는 수도원 생활을 끝내고 몇 개월 뒤 일기를 펴내면서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가장 은밀하고 가장 심각했던 망상은 7개월간의 트라피스트 생활을 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져서 한결 원만하고, 한결 고결하고, 훨씬 영적이며, 한결 자비롭고, 한결 온유하고… 한결 이해력 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내 여러 가지 애매모호하고 이중성격적인 요소들이 하느님을 향한 일관된 투신으로 변화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들, 결실들… 어느 것 하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1년, 2년, 아니 평생을 트라피스트 수도자로 지내도 결코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알고 있다. 왜냐하면 수도원이란 문제점들을 해결해주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라 문제점들을 안은 상태로 주님을 찬미하기 위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으려다 보니 1989년에 초판이 나와 2001년에 13쇄를 찍었다. 그 후에도 새로 나왔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2004년에 14쇄를 찍은 것으로 되어 있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재쇄를 찍었다는 소린데, 대번에 눈길을 끄는 제목도 아니고 그런 종류의 책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찾았고 읽었다는 사실이 반갑다. 서로 얼굴을 모른다뿐이지 세상에 친구가, 동료 수도자가 아주 많은 느낌이다.
_이혜정/바올리나.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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