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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근 [bosco99] 쪽지 캡슐

2000-05-28 ㅣ No.776

비극의 도시 광주에서 탈출(27일)

 

 

 

짚차를 타고 공업단지 입구까지 와서 내렸다. 시외도로가 통하도록 파헤쳐졌던 길이 정리되어 있었다. 시민이 주의깊게 왕래하고 있었으며 택시까지 눈에 띈다. 시민이 야채를 구입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분명히 군의 작전을 위하여 취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수습위원을 돌려보내고 농성동 본당을 향하여 급히 걸었다. 사제관은 굳게 닫혀져 있었으며 천 신부는 외출한 모양이다. 수녀들이 놀란 모습으로 나를 본다. 공포와 긴장 속에 밤을 세우고 사령부에서 4 시간 반이나 회담을 하고 돌아왔으니 피곤에 지친 내 얼굴이 무섭게 보였을 것이다.

 

 

 

윤 대주교님께 전화로 보고하고 세수를 했다. 몇번 얼굴을 씻어도 마찬가지다. 친절한 수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빵 한 조각과 토마토를 먹었다. 이것이 아침 겸 점심이었다. 이미 오후 3시이다. 밤 12시까지는 수습해야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교우의 집을 찾았다. 민심을 알고 싶었다. 분노에 찬 시민, 무장한 시민군과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4시에 겨우 가톨릭센터에 도착했다. 많은 시민이 모여 있었으며 또 모이고 있었다. 시민 속을 헤치고 도청에 갔다. 총을 가지고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10대의 젊은이가 신부인 줄 알고 통과시켜 주었다. 부지사실에는 외국인 기자까지 합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가 대변인이던 나를 보고 몰려든다. 어떻게 말을 끄집어 내야 하느냐, 우선 시간을 끌기 위하여 수습대책위원 전원이 모인 다음에 이야기하고 싶다고 보고서와 호소문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때였다. YWCA에서 젊은이가 와서 곧 서울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전언이 도착했다. 잠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를 뜨면 도망하는 것이 아닌가. 시민은 어떻게 생각할까. 비겁한 신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교회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을 알리는 것도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군가가 탈출을 해야 한다. 옆에 앉은 조 신부에게 조언을 구했다.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결단을 내리고 일어섰다.

 

 

 

YWCA로 가는 도중 도지사가 시체안치소에 가는 것이 보였다. 원한과 분노가 가슴 속에서 동시에 끓어올랐다. 80만 광주 시민과 생사를 같이 해야 할 도지사가 가족과 같이 자취를 감추었다가 지금와서야 나타나다니 철면피가 아니가. 그는 그대로의 이유가 있었겠으나......

 

 

 

시민 앞에서 규탄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보다 큰 사명을 다해야 한다. 왜곡된 실상, 공수단의 만행과 계엄군의 무차별 사살을 세상에 폭로해야 한다. 진신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받은 신부가 아니냐. 그래야 비로소 80만 광주 시민의 피의 대가를 찾을 수 있다. 무장폭도, 난동분자, 불순분자라는 오명을 씻고 자랑스러운 민주시민임이 인정되어야 한다. 서울에 가자, 추기경님에게 알려야 한다.

 

 

 

주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도움, 그리고 형제들의 따뜻한 헌신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다음날(27) 밤 10시경에 무사히 명동에 도착했다. 9번이나 엄한 검문을 통과했으나 잘못하면 그들에게 화를 미칠까봐 탈출경위는 밝히지 못한다. 비극의 도시 광주에서 탈출했다.

 

 

 

* 일부러 '탈출'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죄를 범하고 도망한 것이 아니고 살아나려고 빠져나온 것도 아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의 능력과 섭리에 의해서 굴욕적인 에굽에서 탈출한 것과 같은 의미이고 싶다.

 

 

 

 

 

피의 값은 어디에 (27일)

 

 

 

피의 맛을 본 정권은 드디어 무력으로 광주를 짓밟았다. 계엄 당국은 17인이 죽었다고 보도하고 정부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진압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27일 오전 2시경 행동을 개시한 계엄군은 6시경에 도청을 접수했다고 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렸을 것인가. 하느님만이 아는 사망자의 수를 발표했으니 돼지같은 인간들이나 믿을까? 국민의 피를 빤 정권은 책임을 통감하고 응분의 결단을 하여야 한다. 성경의 말씀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고하였다. 응분의 속죄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아모스가 말했다.

 

야훼,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니,

 

양떼 풀 뜯던 목장이 탄다.

 

가르멜 산마루의 풀이 시든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

 

다마스커스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다마스커스를 벌하고야 말리라.

 

나 야훼가 선고한다.

 

가자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가자를 벌하고야 말리라.

 

나 야훼가 선고한다.

 

띠로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띠로를 벌하고야 말리라."

 

 

 

하늘이 울고 땅이 피를 삼킨 이 무서운 죄를 짓고서 어찌 야훼의 진노를 면할 수 있으랴? 주님,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신 주님! 광주시민이 흘린 피의 부르짖음도 들어주소서! 무죄한 피를 흘리고도 폭도요, 난동분자로 몰리고 불순분자의 유언비어에 놀아난 어리석은 자들로 몰려 고통받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이 흘린 피는 누가 보상할 것이며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 피의 값은 어디에...!!

 

 

 

 

 

분노보다는 슬픔이 (31일)

 

 

 

공포와 긴장이 가시고 세월은 무참히 흘러가고 있다.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는 가슴 속에는 분노보다 슬픔이 가슴을 짓누른다. 말을 같이하는 같은 민족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 나라에 이 무슨 비극인가! 긴 세월의 시련과 모욕 중에도 인내와 영지로 살아온 이 민족이 아니었던가...! 6,25의 상처가 아직도 슬픔을 이루고 있는데 왜 다시 상처를 찌르는가...! 학생들을 구속 연행하고 많은 민주인사를 빨갱이로 모는 상투수단을 계속하고 있다.

 

 

 

25일에는 김의기라는 서강대생이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함으로서 불의에 항거했으나 반응은 없다. 언제부터 이 민족은 비굴해졌는가? 의연금을 받기 위하여 피를 흘렸는가? 80만 광주 시민의 피가 스며든 한과 쌓이는 슬픔은 어느 날 씻겨질 것인가.

 

 

 

끊일 줄 모르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이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아, ... 분노보다도 슬픔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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