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성

십자가의 성요한 사제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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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숙 [hsryu] 쪽지 캡슐

2001-02-21 ㅣ No.10

                              십자가의 성요한 사제 학자

    

                                                                                   (축일 12월 14일)

 

   요한 성인은 자신의 이름 앞에 ’십자가’라는 현의를 붙여야 할 만큼 자신을 버리고 매일의 십자가를 지는 데에 영웅적인 노력을 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파스카의 신비는 개혁자로서, 신비시인으로서, 사제신학자로서의 요한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스페인의 옛 가스띨레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난 후안 데 이페스 이 알바레스는 비단 짜는 사람의 막내둥이였다. 그는 부친이 사망한 뒤에 어머니가 정착했던 메디나 델 깜포에서 교육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메디나 병원장을 위하여 일하기 시작하였다. 1563년 그는 메디나의 가르멜회에 입회하여 후안 데 산토 마시아란 이름을 받고, 살라망카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1567년에 사제로 서품 되었다. 그 후 아빌라의 데레사를 만나 그녀와 마찬가지로 가르멜의 초창기 규칙을 지키기로 허원했다. 1568년 11월28일 요한과 4명의 동료들이 두루엘로에 개혁수도원을 세우고 요한은 이 때 자신의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이라 하였다. 이것이 맨발 가르멜의 시작이다.

   요한은 개혁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1577년에 가르멜회의 총장에 의하여 똘레도에서 투옥되었고 이 때 그의 첫 번째 시가 쓰여졌다. 점점 심해지는 반대와 오해, 박해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기 위해서 - 어둡고 칙칙하고 비좁은 감방에서 오직 하느님하고만 몇 달 씩 앉아 있으면서 십자가를 뼈저리게 깨닫기에 이른다. 9개월 후에 탈출에 성공한 그는 개혁 가르멜회의 여려 직책을 맡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그의 저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화되는 승화의 체험을 묘사하고 분석한 것으로서, 영적 지도자이며 심리학자 겸 신학자로서의 역할을 뛰어나게 해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저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대가,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좁은 길, 엄격한 규율과 자아포기, 정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의 한 분으로 꼽히고,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어둔 밤」이 가장 유명하다.

   1579년 맨발의 가르멜회는 인정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가르멜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고, 1582년에는 그라나다의 원장,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의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에 가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어, 그의 반대자들이 수도회에서 쫒아 내려고 애썼다. 그는 곧 라페뉴엘라에 당도하였으나 열병에 결려 우베다 수도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운명하였다. 그는 1726년에 시성 되었고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하여 교회박사로 선언되었다.

 

맺음말 : 이제 성인이 쓰신 「어둔 밤」의 일부를 싣는다. 이 글은 어둔 밤의 의미와 감성의 어둔 밤으로 나아가는 표징을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아주 유익한 영적 길잡이가 될 것이다.

 

   첫째 노래의 첫째 구절을 밝히고 이 어두운 밤을 풀이하기 시작함

 

   어느 어두운 밤에

 

   이 밤을 우리는 관상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영성인에게 두 가지 어두움, 혹은 정화를 마련한다. 즉 인간의 두 가지 부분을 따라 감성적인 것과 영성적인 그것이다. 그 하나의 밤, 혹은 정화가 감성적인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감성을 영에 알맞게 함으로써 감성면에서 정화를 하고 또 하나 다른 것은 영성의 밤, 혹은 정화로서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영성 면에서 스스로 정화 및 무일물(無一物)이 되어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을 꾀하는 것이다. 감성의 밤은 보통 것으로 많은 사람, 말하자면 초심자들에게 있으므로 먼저 이를 다루겠고, 영성의 밤은 특수한 것으로 이미 수련을 거듭하고 나아간 이들의 것이므로 다음에 다루겠다.

   초심자들이 하느님의 길에 나아가는 법이 유치하고 아집(我執)과 자애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훨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어 하느님을 유치하게 사랑하는 법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법으로 하도록 이끄신다. 겨우겨우 옹색하게 하느님을 찾는 추리와 감성의 급 낮은 공부를 벗어나 결함에서 한껏 해방된 그들이 한껏 하느님과의 사귐을 푸지게 갖도록 영성의 공부를 치르게 하신다. 그들은 이미 한 때 수덕의 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라 기도와 묵상을 꾸준히 하면서 거기서 맛본 기쁨과 재미로 세상 것의 맛을 잃고, 하느님 안에서 영의 힘을 길렀으니 그 힘으로 피조물에 대한 욕을 제법 눌렀었다. 그러한 만큼 구태여 좋은 시절을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위함이라면 약간의 짐이나 메마름 쯤은 견딜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영성 수행 중에 맛과 기쁨을 한창 누릴 때, 그리고 하느님 은혜의 태양이 눈부시게 비친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빛을 몽땅 어둠으로 바꾸시고 전에는 마음대로 언제든지 하느님 안에서 맛볼 수 있던 영의 감로수, 그 생수 구멍을 밀폐해 버리신다. 이때까지 그들은 성 요한의 묵시록 말씀대로(3:8) 연약하기 때문에 문이 닫혀지지 않았으나 이제는 어둠 속에 버려져 상상과 추리의 감성을 가지고는 어디로 갈 바를 모르게 된다. 이제는 그전처럼 묵상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미 내관(內官)이 밤 속에 깊이 잠겨든지라 하느님은 그들을 말라비틀어지게 놓아두시니 항용 기쁘고 즐겁기만 하던 영성의  일이나 완덕 공부에서도 아무런 재미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와는 엉뚱하게 그런 일들에서 맛없음과 쓰거움을 맛볼 따름이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이 제법 자라남을 보시고 어린 티를 벗어나 굳세어지도록 그들을 젖가슴에서 떼치시고 팔에서 풀어놓으시면 제발로 걸을 줄을 익힌 그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가므로 자못 신기로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요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면 다른 사람들보다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이런 일이 있는 게 보통인데 그만치 퇴보의 기회가 적고 그만치 세염(世染)의 욕을 끊음에 재빠른 까닭이다.(사실 이 복된 감성의 밤에 들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것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작이 있은 다음 이 감성의 밤에 들자 위에서 말한 일들이 생기니 초심자들이 이런 메마름에 빠지는 것이 예사임으로 보아 모두가 이 밤에 들어간다고 믿어진다.

   감성정화(感性淨化)의 이런 양상은 이토록 보통이므로 성경의 권위, 특히 시편과 예언서의 갈피마다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말씀들을 대자면 너무나 많으리라. 나는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성경 귀절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정화에 대한 일반적 경험을 알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영성인이 이 밤과 감성정화의 길로 나아감을 알 수 있는 표징들.

 

   저 메마름이 흔히는 이 밤과 감각욕(感覺欲)의 정화로부터 오지 않고 죄와 결점, 혹은 나약과 미온(微溫), 아니면 어떤 언짢음이나 몸의 불편함에서 올 수 있으므로 여기 몇 가지 표징을 적어서 메마름이 저 정화에서 오는가, 아니면 위에서 말한 결함들에서 오는가를 가려내야 하겠는데 그 중요한 것을 댄다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느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서도 아무런 낙을 못 얻는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이 어둔 밤에 두시어서 감성욕을 씻어 닦게 하시므로 어느 것에든 빠지거나 맛들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메마름과 맛없음이 새로 지은 죄나 결점에서 오지 않음이다.

   왜냐하면 이와 반대일 경우 하느님의 일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이 이끌리거나 맛을 붙이려 하기 때문인데, 무릇 어느 차원 낮은 것을 두고 욕망의 고삐가 늦춰질 때마다 즉시 그리로 마음이 기울어짐을 느끼게 되고, 그 기울어짐이 크고 작기는 그에 대한 맛과 정붙임의 정도에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차원 높은 것이나 낮은 것이나 전혀 맛을 못 느끼는 것이 어떤 언짢음이나 우울증에서도 올 수 있는 만큼(우울증은 흔히 아무런 맛을 못 느끼게 한다) 둘째 표징과 조건을 볼 필요가 있다.

   옳은 정화를 알 수 있는 둘째 표징은 이러하니,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함이라 믿고 행여 하느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저 맛없음과 메마름은 해이(解弛)와 미온에 기인되지 않으니 미온이란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바치지 않고 마음의 열성이 없기 때문이다. 메마름(건조)과 미지근함(미온)의 두드러진 차이는, 미온은 의지와 마음이 나른하고 풀려서 하느님 섬김에 열심이 없는데, 정화적 건조(씻어내는 메마름)는 하느님을 섬기지 못함에 대한 걱정 및 시름과 함께 열심히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메마름으로 말하면 우울증이나 언짢음이 곁들여서 더러 생기고(사실 그런 수가 많지만) 그렇다 해서 욕을 씻어내는 효과가 없으면 법은 없으니 모든 맛을 여의고 관심은 오직 하느님 하나에 있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만약 이것이 다만 기분의 작용일 경우엔 본성의 모든 것이 싫어지고 처절해서 하느님을 섬기고 싶은 생각마저 안 나는 것이다. 그러나 정화의 건조에 있어서는 그 맛이 적은 까닭에 감성면의 활동이 처지고 약하고 힘이 없지만 영만은 재빠르고 굳센 것이다.

   이 메마름의 원인은 하느님께서 감각의 힘과 낙을 영 쪽으로 바꾸시기 때문인데 본성의 힘과 감각은 영의 그릇이 못 되므로 아쉽고 메마르고 텅 비우게된다. 말하자면 감각적인 부분은 순수한 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영이 낙을 누릴 제면 육은 재미를 잃고 일할 힘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영양을 섭취하면서 굳세어지고 하느님께 소홀함이 없도록 조심하는 데에 그전보다 훨씬 더 빈틈 없이 열심 하게된다.

   혹시 처음부터 대뜸 영성의 맛이나 기쁨은커녕 메마름과 맛없음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변화 대문이다. 감각의 맛에 젖은 구미가 아직도 거기에 눈을 틀어박고 있는 한편, 영의 입맛도 이 메마르고 어둔 밤을 힘입어 차츰 자리가 잡히기까지는 미처 정화되지 못하고 이렇듯 숭고한 희열에 적응이 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따라서 그 때까지 곧잘 맛보던 그 맛이 없어지므로 느끼는 것이 영의 맛이나 낙이 아니라 오직 메마름과 맛없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마름이 감성욕의 정화 과정에서 오는 경우 그 시초에 영이 비록 - 이상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 맛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내적 자양이 주는 그 본체에 있어 작용할 수 있는 힘과 세참을 느끼게 되는데 이 자양이 바로 감성에게는 어둡고 메마른 관상의 시초이다. 이 관상은 이를 하는 사람도 모르게 은밀한 것으로서 보통으로는 감성을 비우고 메마르게 하는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고요히 혼자 있으려 하고 그 길에 있기를 좋아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 사람은 어느 개별적인 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할 마음조차 없이 만든다. 그 때 안팎의 어떠한 일에도 마음을 쓰지 않고 애써 무엇을 하려는 마음이 없이 그저 고요히 있을 줄만 안다면, 바로 그 고요와 무위(無爲)속에서 내심의 진미를 은근히 맛볼 것이다. 그 진미가 얼마나 은근한지 맛보고 싶은 마음이나 느끼려는 노력이 있다가는 되려 느끼지 못하는 것… 이 진미는 영혼의 가장 큰 무위무구(無爲無垢)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대문이니, 마치 공기와 같아 손으로 움켜쥐려 하자 어느덧 빠져나가고 만다.

   그 이유는 이렇다. 즉 영혼이 추리를 벗어나서 진보한 이들의 단계로 들어갈 때, 이미 관상의 상태에 있으므로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곧 하느님이시라, 그 때문에 하느님은 영혼의 내적 능력을 묶으시어서 이성에 기댐도, 의지 안의 감미도, 기억속의 추리도, 다 불가능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런한 때에 영혼이 제힘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도리어 내심의 화평을 어지럽히고 또한 감성의 메마름 속에서도 하느님이 영 안에서 역사 하시는 일에 지장을 줄 따름이다. 이 화평은 영성적이고도 정묘한 것, 일을 해도 고요히 조용히 묘하게 알차게 또 평화스럽게 하므로 매우 감각적이고 감성적이던 처음의 모든 맛과는 아주 다르니, 이 화평이야말로 다윗이 말한대로 하느님께서 영성적인 영혼을 만드시고자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화평이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부터 셋째 표징을 보기로 하자.

   감성의 정화를 알리는 셋째 표징은 아무리 자기편에서 할 일을 다해도 그 전처럼 상상의 감각으로 묵상이나 추리를 도무지 할 수 없는 그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여기서부터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시작하시지만 그전처럼 감성을 통하지 않고 순수 영을 통하여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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