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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대구교구 낙산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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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3-10-05 ㅣ No.1147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대구대교구 낙산 성당 (상)

낙동강 뱃길따라 복음 씨앗 뿌려

 

 

(사진설명)

1.108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현재의 낙산 성당은 1922~24년에 지은 고딕식 건축물로 서울 명동 성당을 설계한 박도행 신부 작품이다.

2. 낙산 성당 내부

3. 1920년대 낙산 성당 전경

 

 

경부고속도로 경북 왜관나들목을 빠져나와 낙동강변을 따라 차로 10여분 달리면 만나게 되는 낙산 성당.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낙산 성당은 108년이라는 유구한 역사가 말해주듯 자태부터 고색찬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시원스런 강바람을 등지고 언덕 위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왜 하필 낙동강 바로 앞에 성당을 지었을까’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반갑게 맞아준 본당 주임 현익현(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속) 신부의 말에서 의문은 눈녹듯 사라졌다.

 

"당시 낙동강은 가장 빠르고 편한 교통 수단이 됐지요. 본당 신부가 여기저기 사목하러 가려면 경상도 전체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서 강변에 성당을 지은 것입니다."

 

낙산 성당이 설립된 것은 지난 1895년. 당시 이름은 ’아름다운 집’이라는 뜻을 지닌 ’가실(佳室) 본당’이었지만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낙산(洛山)’으로 바뀌었다. 이 땅은 1784년 한국교회 창립 당시 창령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증손자 성순교(1860년 경신박해 때 순교)가 살았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경상도 지방 선교책임자로 부임한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 대구본당을 설립하고 선교를 박차를 가하며 경상도 북부지역 선교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고자 신설한 것이 가실본당.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가밀로 파이야스(한국명 하경조) 신부는 5칸 규모의 기와집 한채를 구입해 성당으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성주, 선산, 문경, 상주, 함창, 군위, 안동, 예천, 의성, 김천, 거창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를 아우르는 선교의 요람으로 관할 공소만 31개에 이를 정도였다.

 

낙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신수동(바오로, 66)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기록이나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본당 신부들은 말이나 배를 타고, 또 수십 수백리를 걸어 각 공소는 매년 적어도 두번 이상 돌며 순회사목을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의 뜨거운 선교 열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 덕분일까. 가실본당은 발전을 거듭해 본당 설립 6년만인 1901년 김천 본당을 분가시킨 것을 시작으로, 점촌, 퇴강(현재는 함창 본당 관할공소), 왜관 본당 등 영남 서북부 지역에 자리잡은 수많은 본당의 모태가 된다.

 

낙산 본당의 현재 건물은 1922~1924년에 지어진 고딕식 벽돌조 건물. 설계는 서울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본당은 물론 1896~1925년까지 30년간 한국 교회의 거의 모든 교회 건축물을 설계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박도행(Victor Louis Poisnel) 신부. 중국 기술자들이 벽돌을 한장씩 구워 성당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유물과 유산은 현재 옛 사제관 내 유물관에 보존돼 있다.

 

대구를 제외한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시작해 선교의 요람이 된 낙산 본당이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공업화로 인해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이농현상의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1971년 1319명에 달하던 신자수는 70년대 후반 900명 수준으로 감소했고 80년대에는 700명대로 떨어지고 만다.

 

현재 낙산 본당은 신자수는 600여명(240여 가구)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다른 시골 본당에 비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치다. 108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본당에 대한 공동체 전원의 자부심과 이를 지키기 위한 남다른 노력 덕분이다.

 

본당은 옛등걸에서 새순이 돋게 한다는 일념으로 지난 1986년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내외적 재정비에 몰입했다. 본당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레지오와 반모임, 주일학교 활성화에 박차를 가해 내적 성숙을 유도했다. 그 덕분인지 현재 낙산본당은 전체 신자 가구의 90%가 농사를 짓는 상황인데도 20~40대가 전체 신자수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

 

본당은 이와 함께 유휴공간을 적극 활용, 드넓은 잔디밭과 정원을 꾸며 성모당을 마련하고, 교육관을 건립하는 동시에 성당 정면에 순교자 성순교 가문의 신앙 유적비를 세워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은 지난 95년 봉헌했다. 또 대희년을 기념해 감실을 비롯한 성당 내부 전체를 색유리화로 단장, 성당 자체가 아름다운 현대 종교미술의 전시공간이 되도록 변모를 꾀했다.

 

그래선지 국도를 이용해 대구나 김천, 구미 지역에서 왜관을 거쳐 가는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성당에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가기도 한다.

 

현익현 신부는 "낙산 본당은 본당 공동체 전원이 예로부터 이곳에서 신앙을 이어온 교우이기에 남다른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다"면서 "작지만 아름다운 성당, 모든 교우가 가족처럼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제742호(2003년 10월 5일), 박주병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대구대교구 낙산 성당 (하)

 

 

(사진설명)

1.낙산성당 옛 사제관에 있는 유물관 전경

2. 칠보로 장식된 감실(에기노 바이너트 작)

3.낙산본당 주보성인 성 안나상

4.성체등 기름을 채워넣고 있는 현익현 신부

 

 

본당 설립 108년, 성당 건립 80여년이 지난 대구대교구 낙산성당은 그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보고(寶庫)’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22~24년 고딕식 붉은 벽돌조 건물로 지어진 성당 건물 외벽은 세월의 풍파에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흔적도 있지만 아직 건재하다. 서울 명동성당과 대구 계산동 성당 등을 지은 파리외방전교회 박도행(Victor Louis Poisnel) 신부가 설계를 하고, 중국 기술자들을 동원해 건축 현장에서 직접 벽돌을 구운 것은 물론 당시 본당주임이던 여동선(Victor Tourneux,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망치를 들고 다니며 벽돌을 한 장씩 두드리며 일일이 확인했을 정도라니 80여년 풍상을 견디고도 남은게다.

 

명동 성당을 빼닮은 성당 전경을 감상하던 기자를 본당주임 현익현(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가 성당 안으로 인도했다.

 

"이 성당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침략을 받는 아픔을 겪었지만 다행히 병원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훼손되지 않아 옛 유물과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당 안 이곳저곳을 설명하는 현 신부 손길을 따라가다 제대 오른쪽에 모셔진 한 성인상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린 성모와 나란히 서 있는 성 안나상이었다. 1924년 이전 프랑스에서 석고로 제작된 이 성상은 국내 유일의 안나상으로 성당 건축 당시 주보성인으로 모셨던 것. 북한군이 성당을 병원으로 사용하려고 급습했을 때 발사한 총탄 자국을 왼쪽 어깨에 아직도 지니고 있다. 원래는 제대 뒷벽 상단에 모셔져 있던 것이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개혁 이후 제대가 신자석 쪽으로 돌려지면서 자리가 옮겨졌다.

 

주보성인이 안나인 까닭에 성당 종탑에 있는 종도 ’안나 종’이다. 지금도 아름다운 소리를 잃지 않은 이 종에는 ’내 이름은 안나이다. 한국 사막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내가 거룩한 구세주의 성당에 설치되었다’는 뜻의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

 

또 성당 내벽 둘레에는 여느 성당처럼 14처가 걸려 있지만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현재 14처 그림은 현대적 종교미술 작품으로 바뀌었지만 14처 틀은 100여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교회에서 제작돼 전해진 것으로, 각 처를 표시하는 숫자가 한자 일(壹), 이(貳) 순으로 돼 있다.

 

성체등도 특이하다. 대부분 제대 옆에 있지만 낙산성당은 성체등이 제대 앞 천정에 매달려 있다. 아직도 기름으로 밝혀지고 있는 등은 80여년간 꺼지지 않고 있다. 한때 전구가 성체등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현 신부가 99년 부임하면서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현 신부가 등불의 기름을 채워넣으며 감실등에 얽힌 일화를 털어놓았다.

 

"예전에는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채워넣고, 그 기름 비용을 후원하고 관리하는 운영위원회가 조직돼 있었습니다. 당시 장부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이제는 그 일을 제가 하고 있는 셈이죠."

 

성당 내부에는 때묻은 옛 유산 외에 현대적 감각에 맞춘 종교미술 작품도 많다. 독일의 유명한 색유리화가 에기노 바이너트씨가 ’엠마오의 제자들’(루가 24, 13-35)을 칠보로 형상화한 감실, 예수 전생애를 묘사한 창문 색유리화 등이 성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대희년을 맞아 새롭게 성당을 단장하면서 은인의 도움으로 마련한 것이다.

 

당시 성당과 함께 지은 옛 사제관은 현재 유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돼 있다. 사제관으로 발길을 옮기자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이 눈에 띈다. 건립 당시 백두산에서 베어 압록강-황해-부산을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사제관 건축에 쓰인 것으로, 지금도 건재한 위용을 자랑한다.

 

유물관에는 공의회 이전까지 성당 제대 위에서 사용하던 십자가와 감실, 중앙 제대 왼쪽과 오른쪽에 설치돼 있던 성모성심 제대와 예수성심 제대의 감실, 촛대 등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또 본당 설립 초창기 신자들의 교적은 물론 대구교구 초대교구장 안세화 주교의 친필 공문 제1호 등 교회사의 중요한 사료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본당이 한창 번성하던 1960년대 신자들 교육용으로 사용하던 환등기(전기가 없던 시절 등불을 이용해 그림을 볼 수 있는 독일식 환등기), 성서 내용을 담은 대형 걸개 그림 등도 옛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 신부는 "한국 전쟁 중 가장 극심했던 낙동강 전투의 포화 속에서도 큰 훼손없이 성당 유물과 자산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하느님 은총이자 섭리였던 것 같다"면서 "아름다운 유산을 잘 보전하고 가꿔 순례객들이 신앙선조들의 숨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평화신문, 제743호(2003년 10월 12일), 박주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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