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성당 게시판

쉼 그리고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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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섭 [wansub69] 쪽지 캡슐

2000-08-16 ㅣ No.2279

빈 방

 

                      

 

민주네 집은 방이 세 개 있습니다. 큰방, 중간 방, 그리고 구석방이 있지요.

 

민주네 가족은 할머니, 아빠, 엄마, 오빠 민식이, 그리고 민주까지 다섯입니다.

 

큰방은 아빠 엄마가 쓰고, 중간 방은 공부하는 중학생 오빠가 혼자 쓰고,

 

구석방은 할머니와 민주가 함께 쓰고 있답니다.

 

"큼, 크음…."

 

할머니는 기침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정 못 참으면 일어나 앉았습니다.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기침을 했습니다.

 

"쿨룩 쿨룩…."

 

그때도 되도록 소리를 안으로 삼켰습니다.

 

옆자리에서 잠이 들락말락하던 민주가 눈을 뜨며 물었어요.

 

"할머니, 약 안 드셨어요?"

 

"왜, 먹었지."

 

"그런데 기침이 계속 나와?"

 

"여름 고뿔은 개도 안 앓는다는데… 늙으면 약도 안 듣는다니까. 이 할미 때문에 깼지?"

 

"아니."

 

민주는 도로 눈을 감았습니다.

 

조금 뒤, 할머니가 먼저 잠이 들었습니다. 아기처럼 새근새근 숨소리를 냈습니다.

 

’내 잠을 깨울까 봐 기침도 마음대로 못 하시고….’

 

민주는 할머니가 안쓰러웠어요. 민주는 살며시 일어나 이불과 베개를 둘둘 말았습니다.

 

그것을 안고 거실로 나와 피아노 앞에다 이불을 펴고 누웠습니다.

 

얼마 지나서였어요. 깜박 잠들었던 할머니가 깨어났습니다. 또 목이 간질간질했습니다.

 

’안 되겠다. 기침을 하면 민주가 깰 테니…. 늙은 할미 때문에 잠을 설쳐서는 안 되지.’

 

할머니는 이불을 주섬주섬 들고 거실로 나왔습니다.

 

저쪽 창가에 가서 이부자리를 폈습니다.

 

마음을 놓으니 기침이 안 나오고 잠도 잘 왔습니다.

 

아침에 일찍 깬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어찌 된 일이야?"

 

민주도 거실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으니까요.

 

"얘, 민주야. 너 왜 여기서 자니?"

 

눈을 비비며 일어난 민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할머니는?"

 

둘은 마주보았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훤히 읽을 수 있었어요.

 

잠시 뒤 민주와 할머니의 입가에 똑같은 웃음이 피어올랐습니다.

 

이럴 때 보면, 다른 사람들이 민주와 할머니가 웃는 모습이

 

판에 박은 듯이 닮았다고 하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거예요.

 

민주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빈방에서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신비가 가득했습니다.

 

민주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빠와 엄마는 친척의 결혼식에 갔습니다.

 

할머니는 노인정에서 새로 사귄 고향 분한테 놀러 갔고요.

 

오빠 민식이는 오랜만에 마을 친구들과 축구 시합이 있대요.

 

이렇게 민주 혼자 집을 보는 일은 흔치 않지요.

 

’아, 내 세상이다.’

 

제 세상을 만난 민주는 거실 한가운데 두 다리와 두 팔을 쭉 뻗고 누웠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심심했어요. 큰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중간 방과 구석방도 차례로 들여다보았습니다. 큰방에서는 아빠 엄마 냄새가 섞여 나고,

 

중간 방에서는 오빠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구석방에서는 할머니 냄새뿐이었습니다.

 

’내 냄새는 어디서 맡지?’

 

민주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다시 큰방으로 갔습니다.

 

"아빠 엄마, 사랑해요."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중간 방의 문을 벌쭉 열고 고개만 쑥 들이밀었습니다.

 

"오빤 미워!"

 

목소리가 아까보다 컸습니다. 이번엔 구석방을 열고 코를 발름거려 보았습니다.

 

할머니와 민주가 함께 쓰는 방입니다.

 

"할머닌 좋다가 싫다가 그래요."

 

혼자 멋쩍었는지 민주는 얼굴을 붉혔어요.

 

아직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은 멀었습니다. 민주는 책을 읽다가 덮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껐습니다. 괜히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았습니다. 심심했던 것이지요.

 

또 큰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빠 엄마, 진짜 좋아요."

 

중간 방으로 옮겨갔습니다.

 

"오빠, 미안해! 아깐 일부러 그랬어. 사실은 오빠가 좋아."

 

마지막으로 구석방으로 건너갔습니다.

 

"할머니, 섭섭했죠? 진짜로는 할머니가 싫지 않아요. 제가 괜히 투정 부린 거 아시지요?"

 

웬일일까요? 민주의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어요.

 

그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민주는 손등으로 쓱 눈물을 훔쳤습니다. 드디어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모두들 어서 돌아와요. 보고 싶단 말이에요. 빈방은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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