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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준 [ksj2415] 쪽지 캡슐

2009-09-24 ㅣ No.191

말씀지기 7월호 아침뜨락에 실린 본당 신부님 글을 올려봅니다!

‘보기’보다 ‘알아보기’를

김귀웅 신부

지난 봄, 새로운 본당으로 부임한지 한 달 남짓 지나서 본당의 소공동체 협의회 회장을 새로 선출해야만 했습니다. 누가 누군지 아직 신자들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어떤 분이 적절한 봉사자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사실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신자 수가 몇 천 명에 이르는 도시 본당이나 몇 백 명도 채 되지 않는 시골 본당이나 다들 바쁘게 지내기 때문에, 봉사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같이 어렵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자그마한 단체장을 선출할 때에도, 소공동체의 반장을 선출할 때에도, 레지오 마리애의 서기를 선임할 때에도 모두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손사래를 칩니다. 꼬미시움 단장도 아니고 본당의 총회장도 아닌데, 일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그 작은 봉사직을 저렇게 고사할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날도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식으로 추천받은 분을 선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회합실로 향했습니다.

이런 날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을 다시 기억에 떠올려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준비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 나귀 한 마리를 가져오라고 분부하시는 대목입니다. 분부대로 어미 옆에 매여 있는 어린 나귀를 풀자 그 주인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며 어이없어 합니다. 그때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아무 소리 없이 순순히 나귀를 내어줍니다. (루카 19,28-34 참조).

어쩌다 봉사자를 선출해야 하는 자리에 제가 참석하거나 봉사자 선출이 쉽지 않을 때면, 이런저런 이유로 부족한 사람이라며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는 사람이 있을 때면, 저는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라는 말에 군소리 없이 나귀를 내어준 그 주인을 묵상하자고 합니다. 또한 우리는 늠름한 백마가 아니라 정말 볼품없는 어린 나귀와 같은 존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어린 나귀를 타시고 인류 구원에 나서신 것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고는 신자분들이 스스로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때까지 저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있었던 소공동체 협의회 회장 선출은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가장 많은 분들에게 추천을 받은 안드레아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일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박수는 저를 끝까지 돕겠다는 약속이며, 함께 열심히 하자는 서약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새로 바뀌고, 옆 본당과 본당 구역을 조정하는 등 분위기도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렇게 기꺼이, 기쁘게 봉사직을 받아들이는 형제님의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또한 총무와 서기로 지명 받으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하는 분들의 모습까지 보니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안드레아 씨는 총무와 서기를 지명하고 동의를 얻은 후, 저에게 인사하고 인준을 받겠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총무와 서기로 지명된 두 분의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참 어려운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신부님과 회장님을 도와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봉사직을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렇게 부족한 사람이 왜 저런 직책을 맡느냐고 하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참 감당하기 어렵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며칠 사이에도 소문은 이미 퍼져서 누가 회장이다, 누가 총무가 되었다며 신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벌써 그럴싸한 하마평을 했나 봅니다. 늘 좋은 말만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폄하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특히 여러 사람 앞에 나서서 봉사해야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들었다면 기분이 안 좋을 뿐 아니라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백인백색이라고,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것을 보고 느끼고 평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고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의도로 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화를 자아내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으며, 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모두에게 다 칭찬받을 수는 없습니다. 틀림없이 누군가는 비난할 것입니다. 모두에게 다 이해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적이 되어 원수처럼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 앞에서 봉사하는 일을 일반적으로는 다들 손사래 치며 떠맡지 않으려고 도망치면서도, 막상 어렵게 그 일을 받아들여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비판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우리의 신앙에 허망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어머니 마리아였을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혼자서 애를 낳은 것이 아니었다면, 누군지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산파가 예수님을 제일 처음 본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산파를 부를 수도 없는 가난한 처지였거나 산파를 부를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아기를 낳는 바람에 아버지 요셉이 예수님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았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실상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진짜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먼지에 싸인 황금을 그냥 돌이라 생각하고 발로 걷어찬 사람이 그 실체를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제일 처음 알아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브리엘 천사에게서 잉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당황했지만 그 말씀대로 이루러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뒤 잉태 소식에 당황한 마리아는 곧장 엘리사뱃을 찾아갔습니다. 많은 나이에도 주님의 은총으로 임신한 엘리사벳을 돕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었던 놀라운 일을 알 리가 없는 엘리사벳은 아직 이 세상에도 태어나지 않은 예수님, 어머니인 마리아의 배 속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 보고’ 감격에 겨워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

이 대목에서 엘리사벳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복되신 분으로 칭송하고 있지만, 진짜로 복된 사람은 바로 엘리사벳 자신이 아닐까요?

아직 아무도 몰랐던 구세주를 알아보고 미리 경배드릴 수 있었으니, 엘리사벳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결코 보지 못했을 일을 엘리사벳은 알아보고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찬미했기에, 엘리사벳이야말로 진정 복된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미숙함, 실수와 잘못, 무능력한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해 쉽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마음으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 앞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가 우리에게 보인 모습이나 그가 한 일만으로 그를 판단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초라하고 부족해 보이더라도 그 사람 안에 있는 좋은 의도와 큰 희생을 알아보며 칭찬과 격려와 축복을 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신앙의 눈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숨어계신 예수님을 알아보며 그 사람과 그 예수님을 칭송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를 위해 앞에 나선 모든 봉사자들에게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축복이 내리길.....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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