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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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태 [cosma] 쪽지 캡슐

2008-08-27 ㅣ No.8047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 촛불인의 흥분 유도와 조중동의 여론몰이
2. 경찰 폭력 정당화 및 무차별 진압작전
3. 터무니없는 교통 통제로 일반 시민의 불만 유도
4. 고물가, 수출저하, 국정시스템 개판 등 모든 원인을 촛불인의 탓으로


조중동과 멍박의 이러한 꼼수가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촛불인들을 불법과 폭력집단으로 덧칠하려던 계략이 일반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50여일의 촛불집회를 무너뜨리려는 꼼수의 달인 멍박.
그리고 그 꼼수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단방에 날려버린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잠시 천주교 신부 이야기를 해보자.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학대학 응시자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주일학교는 물론 복사활동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다. 
복사는 신부가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드는 아이들인데 쉽게 말해서 제사장 곁의 시복이라 할 수 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생까지 지원이 가능하다.
소정의 기간 동안 따로 복사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요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미사가 있는 시간(주로 새벽6시, 저녁 7시)에 성당에 나와 그 지루한(!) 미사 전례를 신부님과 함께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본인의 의지와 부모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 교구에서 진행하는 예비신학생 프로그램에 참석한다.
이 과정에는 신학생(가톨릭 신학대학 재학생)과 신부님, 수녀님이 강사로 나와 성직자의 길에 대해 설명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아이들이 주로 신학대학에 응시하는데 입시 전형은 일반 대학과 같다.단, 본당 신부님의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대학 4년에 대학원 3년, 거기다 군대 2년 하면 보통 9-1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학생이 되어도 끝까지 낙오하지 않고 무사히 졸업해서 사제로 입문하는 확률은 10-15%에 불과하다.


* 나의 경우
 대학 3년 때 사제의 길을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은 속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주저앉음.

* 친구들의 경우:
친구1: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 하다가 다시 신학대학 입학, 현재 의정부 교구에서 사목활동.

친구 2: 소신학교(신학교 고등학교 과정, 지금은 없어졌음) 졸업하고 1년 재수 후 신학대 입학. 현재 가평에서 특수사목(사회복지 요양시설)담당. 노가다 하는 신부님으로 유명.

친구 3: 소신학교 졸업 후 신학대 입학. 5년간 일반 성당과 군종(군부대) 사목 후 옷 벗음.
        현재 결혼함.

친구 4: 축산학 전공. 직장생활 하다 수녀원 입소, 3년간 수련생활 하다가 퇴소함.
        결혼해서 호주로 이민감.

가톨릭과 별 차이가 없는 그리스 정교회나 성공회 사제는 결혼이 허용된다.
그러나 가톨릭은 아직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학교 입학자중  중도 사퇴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제도 오감을 가진 사람이기에 유혹에 대한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금욕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선택하고 이겨내는 것이다.
신학교 입학 당시부터 고민하고 다듬어온 것이며 본인이 이겨내지 못하면 나오면 된다.
이러한 결정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제는 처자식이 없으니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점도 많다. 재산도 없다.
부임한 성당은 임기가 3-5년이기에 그 기간을 넘기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디로 갈지는 교구에서 결정하니 그대로 따를 뿐이다.
사제 생활비는 각 본당마다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이고, 약간의 월급(50-100만원)이 있지만 대부분 본당의 이런저런 모임의 회식비나 술값(?)으로 들어간다.

가끔 부자동네 성당의 일부 교우들이 사제들을 지나치게 환대한 나머지 눈을 흐려놓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사제는 성당 운영의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세월이 흐르다 보면 다소 권위적으로 될 가능성도 있다.

사제들도 각자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신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갈등을 제압하려는 경우도 있고 남몰래 가슴앓이 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후자다.
사제와 신자간의 갈등 관계를 본당에서 해결하지 않고 교구로 달려가 확대하려는 열혈(?)신자가 가끔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 즉 성직자로서 주어진 소명을 다하며 그 길을 꿋꿋이 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세속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잘 보일 직장상사도 없고(사제, 주교, 추기경이라는 직책의 높낮이는 있지만 그보다는 경력을 더 알아준다), 바가지 긁을 여인도 없으며, 공부시키고 재산 물려줄 자식새끼 없으니 성직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밖에...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모든 사제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아동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은 사제가 많고, 유럽은 관광지로서의 화려한 성당은 많지만 지역에서의 사목활동은 우리처럼 활발하지 못하다. 신자수도 적고 성당운영이나 성직자 생활비도 정부의 보조를 받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가톨릭은 다른 나라에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데 가장 큰 차이는 아마도 그 도입부터가 자발적이라는 데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톨릭은 정복 전쟁이나 식민지 확대의 부산물로 끼어들어온데 비해 우리는 조선말 젊고 진보적인 실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서학이라는 것을 접하고 자발적으로 모여 공부하면서 시작했다. 그러다가 신부를 초빙하고 세례도 받고 마카오까지 가서 신학공부해서 신부를 양성한 아주 독특하면서도 극성스러운(?) 민족이었다.

그러다보니 조선말 기득권층의 경계와 탄압으로 수백 명이 순교하였고, 그들 중 103명이 1984년 5월 로마 교황청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여 한꺼번에 103명의 성인(성인이라 하면 한마디로 하늘나라의 천사로 등극했음을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인증한다는 것임)으로 인정받은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 밖에는 없는 특수한 사례인 것이다.

정약용과 정약종, 안중근 모두 자발적 신앙인이었다. 정약용이야 나중에 배교했지만 그것은 학문을 계속하기 위한 타협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의 지도층이 일제시대에 신사에 고개를 숙인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지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희년(한 마디로 예수탄생 2000년을 맞아 새롭게 가다듬고 회계하고 새 출발 하자는 것)을 맞아 2차 대전 당시 가톨릭이 나찌에 협력한 사실과 그 이전 남미나 아시아에 선교하면서 나쁜 짓 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반성했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시 대희년을 맞이하여 일제하에 가톨릭이 친일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사죄하고 반성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한국의 가톨릭은 박정희 시절의 가톨릭 농민운동과 전두환 시절의 정의구현 사제단 활동 등 독재에 굴하지 않고 그에 당당히 맞선 전통을 가지고 있다.

오원춘 사건의 두봉 주교님, 박종철 고문조작 폭로의 김승훈 신부님, 명동성당 농성의 함세웅 신부님, 임수경 방북의 문규현 신부님, 새만금과 부안 폐기장, 평택 대추리의 문정현 신부님,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받은 1년치 급여 전액을 민족문제연구소에 전달하신 노짱의 정신적 지주(?) 송기인 신부님,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삼성특검을 이끌어 내신 신부님, 신부님, 신부님들...
이러한 전통이 오늘의 정의 구현 사제단을 있게 한 것이다.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들은 매일 저녁 7시 서울광장에서 시국 미사를 집전하신다고 한다.
그리고 어제부터 단식에 들어가셨다.
뜨거운 가슴을 진정시키며 신부님들과 함께 하리라.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132722

여기있네요..  ↗  이거말고 .. 또..?  뭔 출처..??  

신윤식 (cingny) (2008/08/27) : 퍼온 글 같은데 출처를 밝혀야지요. 참 예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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