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보릿고개와 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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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종 [lkj0550] 쪽지 캡슐

2008-08-19 ㅣ No.7646

아마도 50중반 이상 아니면 보릿고개의 의미를 정확히 알기 어려울 것이다.
언젠가 젊은이들에게 물었더니 고개 위에 보리밭이 있어 그렇게 불렀을 것. 또는 배고파 고갯길이 힘들어 보리를 씹으며 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 말하는 엉터리도 있었지만 봄철 춘궁기에 먹을 것 없어 힘들고 어려웠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어느 정도 맞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두 정답 아니다.
 
정답은 그 시절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사람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고 그들이 바로 50대 중반 이후 세대들이며 원래는 6,25를 겪은 60세 이상들이지만 지방 사정에 따라 50대 중반 일부도 극심한 배고픔을 경험한 이들이 있을 수 있어 5년쯤 낮추었다.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어도 초근목피를 먹지 않은 형편이 나앗던 사람들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 그래서 그들이 당대를 살았다며 책을 쓰고 보릿고개를 대충 말한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읽고 그게 전부라 알고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한심하여 이 글을 올린다. 
 
나도 몇 사람의 책에서 보릿고개 이야기를 읽었지만 당시를 그렇듯 겉만 보고 쓴 것은 그들이 훗날 책을 쓸 정도로 당시에 배울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관계로 그 지독한 가난을 직접 체험이 아닌 눈으로 간접 경험한 것 뿐이라 실상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그것을 읽고 대략적으로 알거나 피부로 마음으로 실감하지 못하게 된 것 아닌가 란 생각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다른 목적 때문에 의도적으로 간략히 썼는지도 모를 일 그래서 오늘 보릿고개를 자세히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기성세대들이 왜 그토록 박통을 잊지 못해 하는지 그것을 정확히 이해함에 다소라도 도움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보릿고개와 박통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면 절대 기성세대들을 이해 못한다. 즉 오늘날 대다수 기성세대들이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잊지 못함은 충분히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이 왜 가혹했던 군부독제의 대명사 박통을 30년 넘어 계속 지지하고 있는가? 아니 자신들의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 하는가? 기성세대라 하여 독제가 뭔지도 모르는 형편없이 무식한 무지랭이 인간들이 아니다.  그 원인과 이유를 알고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토론다운 토론이 불가능하여 시간 낭비일 뿐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로 5,16 혁명 당시 전 국민의 약 70%가 농어민이었고 20%가 도시 빈민들이었다. 즉 국민들 절대 다수가 농투성이와 어부 그리고 도시에 떠돌며 막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던 최저층 빈민들이었다. 그래도 도시는 쬐끔 더 나았을까? 농촌은 자신의 땅이라곤 한평 없이 오직 극소수 지주와 부잣집들 일을 해 주며 온 식구가 매달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식들 학교? 겨우 꼬딱지 떨어지거나 떨어지기도 전에 딸은 남의집 식모로 아들은 머슴으로 나가 살기 일쑤였고 물론 보수는 받을 엄두도 또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잘 사는 집에 가서 굶지나 말라는 막연한 그 한가지였고 그게 가난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난 지금도 서울에 살던 어떤 이가 꾀재재하여 거지나 다름없는 여아를 멀리 앞 세우고 동네를 나서던 광경이 선하다. 멀리 앞 세운 것은 물론 같이 동행하기 창피해서다. 그리고 아랫동네 부잣집 악독한 연주사에게 밥값을 못한다며 맨날 얻어 맞으며 노예처럼 지내던 우리 앞집 박서방 12살짜리 아들 역시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는 흔했으며 그래도 좋으니 제발 우리 아들과 딸을 데려가 밥만 먹여달라 애원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운이 좋아 보내게 되면 철없는 자식을 떠나 보낸 아픔과 슬픔에 온종일 띄약볕 속 밭고랑을 엉금엉금 기면서 한숨을 푹푹 쉬던 그들 심정과 마음을 누가 제대로 알아 필설로 옮기겠는가?
 
1901년생이신 선친께 듣기로 일제 강점기의 왜놈들 공출.. 말이 좋아 공출이지 한해동안 죽어라 농사진 모두를 빼앗아 간 강탈이었다. 즉 배부르면 말 안듣고 엉뚱한 생각 한다며 잠시 먹을 것만 남기고 깡그리 공출하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허용한 식량이 음력설까지도 어렵거나 간신히 비틸 수 있는 정도라 그 추운 엄동설한부터 햇보리가 나는 4~5월까지 너 댓달을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밥술깨나 먹는 몇 안 되는 집 얘기고 땅 한평없이 오직 몸으로 벌어 먹고 살던 대다수 일꾼? 노예?들 처지는 당연히 그들과 달랐다. 
 
농사철에 일해 주는 조건으로 부자들에게 양식을 선 차용하여 먹고 살았는데......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그러한 양식을 장래미 또는 꼬지쌀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 부자집이 와서 일하라 부르는 날에 무조건 가야 하고 부모가 죽어도 약속을 지켜야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더 비싸게 주어 대신 보내는 것이지만.....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가을부터 이듬해 햇보리 날 떄까지 꼬지쌀로 먹고 살면 이듬해 1년 내내 그집 일을 공짜?로 해 주어야 하는 게 문제였다.  부부는 일하는 집에서 먹지만 주렁주렁한 아이들 끼니는? 그래서 가능한 꼬지쌀이 적어야 했지만 결국 남편은 그 집 일에 묶여 거의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아내가 몸이 아파 다른 일 하여 벌지 못하면 아이들은 속절없이 굶어야 했다.
 
게다가 여자는 아무리 일을 잘해도 품삯이 적어 몸만 고달픈데다 많이 낳은 아이들 산후조리가 시원찮아 몸이 성치 않아도 변변한 약 한번 먹을 엄두도 하지 못했다. 밤에 호롱불 기름을 아껴 초저녁부터 잠자던가 달 밝은 밤이라야 이웃들과 잠시 담소하는 게 고작. 또 주된 대화도 어떻게 안 죽고 햇보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것이 전부였다. 그 추운 겨울에 먹을 것이 어디 있겠는가. 먹을 게 생기는 일이면 몸이 부서져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낮이면 산에 올라 나무 껍질을 벗겨 양식을 보태고 술 좋아 하는 이는 밤마다 부잣집 사랑방에 가서 가마니와 새끼를 꼬아 주고 막걸리 몇사발 얻어 먹는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더러는 먼 산까지 가서 나무를 하여 읍내에 내다 팔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자칫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위험한 일이었다. 당시 산감(산림감독관)이 얼마나 무섭게 설쳤는지 요즘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지 필력이 약해 난감하기만 하다. 힘센 장정 지게로 잔뜩 한짐 나무에 손가락만한 생나무라도 섞였다간 그날 일한 건 헛일이 된다. 그리고 나무를 하다 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그들에게 텟깔 잡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냐면 힘없는 그들을 등쳐 먹고 사는 것들이 산감들이었고 그들은 한번 걸렸거나 의심스런 이들 집을 수시로 검색하면서 숨겨 놓은 나무를 찾아 내곤 했다. 그리고 들키면 사정을 봐 주지 않아 아예 나무 팔기를 포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대개 설(구정)무렵이 입춘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새싹들이 올라 온다. 그럼 아낙네들은 부지런히 온 들판과 산을 누비며 먹을만한 나물들과 산나물을 캐고 훑어 먹거리를 보태는데 억척스런 여자들은 좀 나은 나물들을 챙길 수 있지만 몸이 약한 여자들은 항상 뒷북치기 바빠 남들이 캐고 난 찌꺼기 아니면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잡초 뿌리 따위를 캘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대로 먹을 수 없으니 방아간(정미소) 영감에게 부탁하여 소 돼지 먹이인 딩겨를 조금 얻어와 섞어 개떡을 만들었다. 사실 초근목피는 짐승들도 좋아 하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이어야 먹는다던데 당시 사람들도 오직 죽지 않기 위해 짐승들처럼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4~5개월이 어찌 짧은 기간인가.....비록 자식들을 식모와 머슴으로 내 보냈다 하지만 한 가정에 보통 예닐곱씩 되었으니 남은 자식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디 보낼 수도 없는 어리디 어린 것들이다. 발이 부르트도록 산야를 헤맸어도 싹이 너무 자라 캐고 훑어 온 량이 얼마 안 되는데 그것을 먹을 것이라고 달겨드는 두 눈이 휑 들어 가고 바짝 마른 자식들을 보는 부모들 마음이 어떠했을까....그래도 그들이 그렇게라도 먹을 것이라곤 들과 산에 나는 초목 밖에 없었다. 장래미나 꼬지쌀은 더 이상 주지 않는다는데 어쩔 것인가? 부자들은 자신들 농사에 필요한 만큼만 주었고 빈민 구제하듯이 달라는대로 주지 않았다. 
 
시골은 당연히 일할 수 있는 공사판이 없다. 그래서 햇보리 날 때까지 그 긴긴 날들을 굶어 죽지 않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니까 4~5개월을 걸려야 간신히 넘을 수 있는 고개... 어렵고 힘들고 지긋지긋하다는 말은 사치스럽다. 어쩜 넘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두렵고도 무서운 죽음의 보릿고개인 것이다. 그런 것을 뭐 그립다거나 향수를 자아 내는 보릿고개라고? 그럴 것이다. 그 따위 글을 쓴 사람들은 그러한 혹독한 배고픔을 직접 겪지 않은 당시 부유했거나 형편이 괜찮았던 집 태생일테니까....그 때는 초등학교도 월사금을 내야 했고 얼마 안 되는데도 그것도 감당을 못해 다니지 못한 아이들이 동네마다 수두룩했다.
 
요즘 친일파 운운하는 이들이 많던데 그 기준이 참으로 모호하다는 생각이다. 내 알기로 일제 강점기는 말할 것 없고 6,25 직후까지 일본 미국 등 외국 유학 또는 국내 유수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부잣집이라야 가능했다. 따라서 일제 시대에 부자로 잘 산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왜놈들에게 협조했음을 의미하고 위에 말한 보릿고개를 넘던 가난한 이들 노동을 착취한 부자들 역시 그다지 떳떳할 것 없어 보인다. 더구나 강점기 시대 왜놈들에게 협조치 않으면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고 하니 그래서 난 친일파는 물론 정계든 사회든 많이 배워 훌륭한 척 흔들던 사람들 집안 내력이 의심스럽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확실치 않으므로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 가 그 당시 두 눈 휑하니 들어 가고 뱃가죽인지 등짝인지 알아 보기 어려운 몰꼴로 부모들이 벗겨 온 나무껍질과 산야를 헤매며 캐온 나물 풀뿌리를 반기던 어린 것들이 바로 오늘의 50대 중반 이후 일부들과 60대들인 것이다. 이 게시판에서 왜 독제자 박통을 그토록 잊지 못하는가 하는 이들은 이제 그 이유를 알았으리라 믿는다. 절대 잘못일 수 없다. 부모들이 어떻게든 새끼들을 굶겨 죽여선 안 된다는 처절한 몸부림 덕분에 겨우 굶어 죽지 않고 살아 오늘에 이른 우리 세대들인데 그 보다 민주화와 인권이 우선이란 주장에 "옳습니다" 할 수 있겠는가?
 
박통의 독제는 없어야 했고 분명 우리 근세 역사의 비극이었다. 그렇더라도 무조건적 비판도 문제란 생각이다. 당시 70%의 극빈 농어민과 20% 도시 빈민들은 독제라도 좋으니 제발 굶지 않게 해달라는 입장이었으며 그는 그러한 가난한 국민들 소망을 들어 주고자 골치 아파 하면서 온갖 지혜를 짜느라 골몰했다.  그러면서 그 때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정책을 추진하는 터라 온 국민이 협조해도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누가 봐도 최 우선 정책일 수 없는 인권 신장과 민주화가 더 급하다며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 소위 민주화 세력들이 얼마나 미웠겠는가? 당시 우리 세대들도 배고픈 고생을 하지 않아 그런다며 못마땅해 했고 실제로 그들은 우리 같은 고생을 하지 않은 여유있는 계층들로서 데모 참여자 대부분이 당시 가난한 이들은 꿈도 못 꾸는 대학생과 지식인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보릿고개를 넘던 대다수 가난한 민초들과 전혀 다른 계층들이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라고 비웃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떄의 지식인들이 책을 쓰고 보릿고개를 말한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읽고 별것 아닌 양 말하면서 박통을 잊지 못하는 가난했던 세대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물론 비웃는 것은 그대들의 자유다. 다만 당시 실상을 제대로 알고 비웃든가 욕을 하려거든 하라는 것이다. 난 사람 사는 일에 제일 중요한 것이 먹는 일이고 배 고픈 것 보다 더 고통스럽고 참혹한 일은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인권도 민주화도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굶주림 해결 보다 앞 설 수는 없다. 짐승들도 잘 안 먹는 초근목피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면 더 말할 나위 없다.
 
바로 그 굶주림을 박통이 해결해 주었으며 그래서 잊지 못해 하는 것이 무어 그리 잘못인가? 혹자들은 당시 장면 정부가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고 성공했을 것이라고.. 그야말로 소가 웃고 개가 웃을 망발...그게 왜 망발인가..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라 망발인 것이다. 우선 장면은 부잣집 중에도 지주급에 고생의 고짜도 모르는 사람인데다 미국에서 오랜기간 살며 유학한 사람이다. 일제 시대에 미국 유학했다는 것만으로도 극성스런 비토세력들의 먹잇감으로 충분하고 또 그 시대에 부자였던 집안 내력도 모른체 하지 읺았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그는 험악한 당시 정국을 이끌만한 카리스마도 없고 온유한 성품의 양반일 뿐인 그가 어려운 가난 탈출 정책을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세대들의 부모들은 거의 떠나고 없다. 참으로 천만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신의 자식들이 당신들 같은 고생을 하지 않고 잘 살기를 바랐던 부모들이 그것을 확인하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편히 눈 감고 갔으니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런 일인가? 그게 뭐 그리 대수냐 하면 안 되는 것이 우리 세대들의 부모에 대한 마음과 효성이 오늘 젊은이들 그것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자식들에게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드린 것을 후회하는 이들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잣대가 우리 세대들의 것과 크게 다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게시판이 항상 시끄러운 원인이 바로 그에 있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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