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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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1동성당 [suyu1] 쪽지 캡슐

2005-05-03 ㅣ No.435

 

 

 

외국의 어느 주교님께서 한 본당에서 강론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론의 첫마디가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합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여인을 사랑해 왔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들 모두는 깜짝 놀라서 주교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옆사람에게 고개를 돌려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성당은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찼습니다. “이게 무슨 변고인가. 우리 주교님께 여자와 아들이 있다니...” 평소에 아주 존경을 받던 주교님이었던 만큼 신자들의 충격은 그만큼 더 컸을 것입니다. 그 주교님은 신자들의 웅성거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신 다음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요, 그의 아들은 예수라고 합니다.” 그제야 신자들은 “아하!”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답니다.

이렇게 독신으로 사는 성직자들까지도 공개적으로 마음놓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인인 마리아! 우리 천주교회는 오래 전부터 그 분을 공경해왔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 5월을 성모님의 달로 정해서 그분께 존경과 사랑을 드리며, 또 매주 토요일에 복되신 성모 마리아를 기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어떤 분일까요? 잘 안다고 여겨왔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성모송을 바치면서 성모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고 찬미합니다. 그런데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님을 우리는 어떻게 상상하고 있을까요? 지존하신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모든 특권과 영광을 누리시고, 장미꽃같이 아름답고 백합같이 우화하고 화사한 분, 하느님께 선택을 받았기에 눈물이나 고통, 땀흘리는 수고도 겪지 않은 분, 세상의 어지러움과 혼탁함에서 벗어나 맑고 고상하여서 우러름의 대상이 되는 분.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성모님의 모습이 그럴까요?

성서에 나타난 성모님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분은 누구보다도 세상살이의 어려움, 고달픔을 몸소 겪으셨고, 마음 고생도 하실만큼 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 삶의 고통을 통채로 안고 달려가서 하소연하고 위로를 청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서에 나타난 그분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 성모님은 일찍이 성령의 힘으로 결혼 전에 잉태를 하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혼모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알려지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엄격한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는 무서운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너그러운 요셉의 도움으로 그 곤경에서 벗어나셨지만, 마음 조림과 정신적인 고통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유야 어떠하든지 미혼모들이 당하는 고통을 성모님께서는 충분히 이해하시고 감싸주실 것입니다.

- 잉태한 그 아이를 태어 날 때에도 남들처럼 평탄한 과정을 거치지 못하십니다. 나라에서 명하는 호구조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삭의 몸으로 길을 떠나야 했고, 객지에서 여관방도 구하지 못해서 초라한 마구간에서 몸을 풀어야 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늘날 집없는 사람들의 서러움과 쓰라림, 병원에서 병실 하나 구하지 못해 애태우는 이들의 심정을 몸소 체험하신 것입니다.

-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아기를 죽이려는 헤로데 왕의 위협에 쫒겨서 젖먹이를 데리고 부랴부랴 먼 에집트 땅으로 피신해서, 몇 년간 그곳에서 사셔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며 타향살이를 해야하는 이들의 고통 몸소 겪으신 것입니다.

- 루가 복음은 어린 시절의 예수님에 대해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로 가득차서 튼튼해지고 하느님의 총애가 그에게 내렸다”(루가 2,40)고 전합니다. 예수님이 건강하고 똑똑해서 성모님은 아들 키우는데 큰 걱정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루가 복음은 열 두살의 소년 예수께서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순례가셨다가 부모님도 모른채 홀로 그곳에 남아 계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귀향길에 올랐다가 아들이 없어진 것을 뒤늦게 아신 성모님께서 애타게 예수님을 찾아 나서십니다. 겨우 겨우 찾아내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시니, 예수님의 대답이 알송달송합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미 열 두살 때 자신의 길을 가고자하는 확고한 의식과 의지를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길,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위대한 길이었으나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이 온 땅을 두루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파해야 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의 이런 처지를 비유해서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질시와 감시의 눈초리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평탄치 않은 길을 가야하는 자식의 모습을 지켜 보아야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안타까왔을 것이입니.
오늘날 자식들 때문에 마음 조리는 부모님들, 수 없이 많습니다. 입시때문에, 직장 때문에, 가정문제 때문에,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의 마음을 성모님께서는 잘 아실 것입니다.

- 급기야는 아들이 국사범으로 몰려서 그 당시에 최대의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하는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으신 분이 성모님이십니다. 우리말에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아픈 심정을 표현하기를, 자식을 땅에 묻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성모님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찌기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으신 성모님께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릴 듯 아플 것입니다” (루가 2,35)하고 예언하였습니다. 불치의 병이나 갑작스런 사고등, 어떤 이유에서든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쓰라림과 아픔을 성모님께서는 너무도 잘 아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은총은 세상살이의 수고와 어려움을 면제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모친이 되시는 그 은총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는 더 힘든 길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성모님께서는 어머니로서, 한 신앙인으로서, 세상의 삶을 마치시고 하느님의 영광 중에 계십니다. 동시에 우리를 옆에서 지켜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체험하시고 아시는 분이기에 그 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들을 잘 감싸주실 것입니다.

실제 성모님의 얼굴은 우리의 성모상이 표현하듯이 그렇게 곱상하고 예쁘장한 아가씨의 얼굴이 아닐 것입니다. 주름투성이의, 그러나 평온함과 온화함을 전해 주는 시골 아주머니의 얼굴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분의 손은 가늘고 매끄럽기 보다는 투박하고 굳은 살이 박힌, 그러나 따뜻함과 힘을 전해주는 그런 손일 것입니다.

살아 가면서 발걸음이 무겁고, 무엇인가 바윗덩이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를 때, 그래서 주저 않고 싶거든 주름진 성모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투박한 그분의 손에 자신을 맡깁시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다독거려 주시면서 어머니다운 따뜻함과 평온함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의 의미를 다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십자가로 알고 살아가도록 일으켜주시고,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살이에서 땀과 눈물을 피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 분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 모든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부활로 연결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주실 것입니다.

세상이란 광야에서 살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조용히 기도해봅시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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