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성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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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숙 [hsryu] 쪽지 캡슐

2001-02-21 ㅣ No.6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축일 10. 16)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 6. 22 ~ 1690. 10. 17)의 생애와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 성심의 사도’ 였다는 것이다.  성인이란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총에 순응하여 자기 가운데 하느님의 사업을 완성한 사람이다.일상 생활에서 신앙과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곧 성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께서 일반적 순서를 따르지 않고 직접 영혼을 지도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다면, 즉 초성(超性)한 것을 말하기 꺼린다면 마르가리타 성녀의 전기는 온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녀의 사명은 순전히 초성한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성녀의 유년시절부터 특별한 사랑으로 길러 내셨다고 볼 수 있다.

 

마르가리타는 프랑스 오튕교구 샤롤레시 작은 마을 로트쿠르에서 태어났다.  알라코크 집안은 견실한 중산 계급으로, 정직하고 신심이 대단했다. 7남매 중 다섯째인 마르가리타는 서너 살 때부터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좋아했고 서원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성체 앞에서 종신 순결을 맹서했다. 또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어서 하느님 완덕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구세주의 일생에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같은 또래 아이들처럼 쾌활하고 상냥했고, 많은 시련으로 단련시키고 닦아 놓지 않으면 안 될 성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친 클로드가 세상을 떠난 후 마르가리타는 울술라회에서 경영하는 기숙사에 맡겨졌다. 12살 때부터 자나깨나 항상 뼈가 쑤시는 심한 신경통에 시달렸다.  마르가리타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정화시키려고 그런 병고를 보내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앓고있는 동안 영적 생활을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그리스도께 묵상하는 법을 직접 배운 것도 이때쯤일 것이다.

 

자신의 병이 불치의 병임을 알게되자, 마르가리타는 어머니와 함께 성모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만일 병이 완쾌되면 성모님의 딸이 되어 일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약속을 들어 허락하시듯 마르가리타의 병이 바로 완쾌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더욱 성모님을 섬기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대재를 지키고 성모 소 일과를 드렸으며,  성모칠고 축일에는 일곱번 장궤하면서 성모송을 충실히 바쳤다.  그리고 후에 성모의 딸이라는 방문회에 들어감으로써(24세) 그 약속을 완전히 수행했다. 마르가리타는 입회 전에도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많은 시련을 겪었고, 가난에 시달렸으며, 하녀처럼 일하고, 호의적으로 하는 박해도 수 차례 겪었다.  그녀가 입회한 빠레 르 모니알에 있는 방문회 수녀원에도 고통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문회는 성 잔느 프랑소아즈 샹탈이 창립하였고, 이 회의 가장 큰 특징은 ’눈에 띄지 말 ’ 으로 창립 초기부터 겸손과 단순을 회의 근본 정신으로 삼았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평범한 궤도에서 벗어나면 설령 그것이 성덕의 것이라 할지라도 방문회의 정신과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고 의아해 하는 눈초리로 보는 것이 상례였다. 특별한 사명을 받고 일반 수도자와는 다른 길을 걷도록 선택된 마르가리타가 하필 이런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성의(聖意)였음에 틀림없다. 사실 그녀가 자기 사명을 완수하는데 있어서 자매들한테 받은 박해는 너무나 심했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그 회의 창립 정신을 손상시킬까 두려워 하는 보수적 선의에서 온 것이요, 시기나 질투에서 박해한 사람은 드물었다. 이 젊고 조심성 많은 수련자는 기도와 본분을 잘하고 사람들을 친절과 인내로서 대한다고 평가되었다.

 

같은 수녀원에 있던 콤도아 수녀는 시복 조사때(1715) “존경하올 알라코크 수녀는 자매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는 애덕으로,  또는 조롱과 모욕이나 책망을 잘 참는 인내의 덕으로 수녀원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 시켰다"고 진술했다.  마르가리타는 하루 종일 자기가 만든 사랑의 노래를 혼자서 마음으로 읊으면서 한치의 분심도 없이 일하곤 했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곡조로 타오르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희생가운데서 자라나는 사랑의 개선가였다.

 

* 밤에는 어떻게 했는지 남아있는 기록을 보기로 하자(자서전) *

 

밤보다도 더 좋은 때는 없었다. 밤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담화 하는데 제일 좋은 시간이었으니까. 밤에 때때로 잠이 깨게 해달라고 수호 천사께 부탁해 두었다. 잠이 깨면 내 마음은 하느님을 온전히 보게 되고 하느님과 담화하는 신락으로 인하여 사랑 밖에는 다른 감정이나 동작도 없이 세 시간을 보낼 때도 있고 혹은 그대로 밤을 새는 일도 가끔 있었다. 숨쉬기도 힘이 들어 옆으로 누워서 편히 하려고 하니까,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른 어깨로 갈아 메고 편한 것을 취하려고 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다.f

 

17세기 프랑스에서 마르가리타가 성심의 사도로 선택된 의의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프랑스의 상태를 살펴보아야 한다.프랑스왕 루이 14세는 정치적,경제적으로 황금시대를 이루었고 문학과 예술에도  많은 발전을 낳았다. 그러나 도덕적인 면에서는 암흑시대를 이루었다. 종교계에는 얀세니즘의 이단이 좀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단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부정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십자가의 모양은 온 세상을 인자로이 감싸 주려는 듯 양팔을 벌린 모상이 아니고, 선택된 몇 사람만 구제 하신다고  암시하는 듯 양팔을 똑바로 위로 뻗치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을 내려다 보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듯이 얼굴을 뒤로 돌린 그리스도를 표현해 놓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프랑스를 버리지 않으셨다.  예수 성심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빛을 프랑스와 세상에 전할 사도로 마르가리타 수녀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의 첫번째 묵시는 1637년 12월 27일 복음사가 성 요한 사도 축일에 있었다.  병실 소임이 덜 바쁜 틈을 내어 마르가리타는 성당에 갈 허락을 받고 제대 위에 현시해 놓은 성체 가까이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에만 전념했다. 어느덧 하느님 안에 녹아버려 시간과 장소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영적 즐거움 가운데 마르가리타는 최후 만찬때의 성 요한과 같이 가까이 와서 가슴에 기대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마르가리타는 “주님 오랫동안 나를 당신 가슴에 기대게 하시고 그동안 놀라운 사랑과 형언할 수 없는 성심의 비밀을 알려주셨다.  그때까지 감추었던 것을 처음으로 열어 보여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게 알려주셨다. “라고 말했다.  그 다음에는 신비로운 “마음의 교환”이 이루어 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가슴에서 마음을 꺼내어 성심속에 넣으셨다.  이후로 일생동안 마르가리타의 가슴에는 언제나 타는 듯한 고통이 남아 있었다.

 

두번째 성심의 묵시는 1674년 봄철의 어느 금요일이었고 그때 상황은 아래와 같다.

 

성심께서는 불길 같은 옥좌 위에 태양보다도 빛나고 수정 보다도 투명하게 보이셨다.  십자가에서 받으신 상처도 보이셨고, 가시관이 성심을 둘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십자가가 서 있었다.  이 모든 수난의 도구는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 고난은 잉태되시던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 있어, 십자가가 성심에 깊이 박혀 있었다는 것과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성인이 받으신 고난과 모욕을, 또 세상 마칠 때까지 사람들을 무한히 사랑하신 나머지 성체 안에 계시면서 사람들로부터 받으시는 불경과 모욕을 무수히 감수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또한 주님은 당신을 변함없이 성실하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이 세상에 당신 사랑의 최후적 증거를 드러내시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으시려는 희망 때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또한 당신 성심 가운데 있는 사랑과 자비, 성화와 구원의 은총을 열어 주셨으며, 주님께 영광과 사랑을 바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바치도록 권유하는 사람들에게 성심에서 끝없이 넘쳐 흐르는 재보를 주시려는 거룩한 뜻이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또 주님은 육체적인 성심의 형상으로 존경받으시는 것을 특별히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완고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하여 성심성화를 공공연하게 모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성심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심의 충만한 은혜의 재보를 풍성히 내려 주시고, 성화를 모시고 공경하는 장소 또한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사랑하올 성심께서는 자신을 보여주시면서 ‘나는 성체 안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어 타오르듯이 갈망하고 있는데 내 사랑에 보답하려고 이 갈망을 풀어 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지금까지의 어떠한 고통보다도 더 격심한 고통을 느꼈다.f  

 

1674년 6월경의 세번째 묵시는 그 뜻이 일층 더 명백하다.  성심에 대한 신심- 보답치 않는 사랑을 갚아 드리는 사랑 ?은 필연적으로 보속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만일 사람들이 얼마간이라도 내 사랑에 보답해 준다면 나는 그들 때문에 맛본 모든 고통을 잊어 버리고,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의 이런 마음을 보답하기는커녕 모욕과 냉담으로 배반할 뿐이다.  그러니 너는 온 힘을 다하여 저들의 배은 망덕을 보속하여 나를 위로해다오!”

 

온 인류의 배은을 보상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위로 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큰 임무이다. 마르가리타는 자기자신을 돌아보고는,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무서워 하지말라. 내가 힘이 되어줄 것이다.  다만 내 뜻에 순종하고 내 계획에 적합하도록 하여라. 우선 허락해 주는 대로 자주 영성체를 하여라.(당시 수도원에서는 매일 영성체를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어떤 고통이나 치욕을 당할지라도 용감하게 인내하고 그 고통을 내 사랑의 표시로 알아야 한다. 또 다시 매달 첫 금요일에는 특별히 영성체 하기를 명한다.  매주 목요일 밤에는 내가 올리브 동산에서 맛본 마음의 고통을 나누어 주겠다.   

 

이 심적 고통을 너희는 이해 할 수 없겠지만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나눠 주겠다.  내가 그 고통중에서 내 성부께 바친 겸손한 기도를 나누고 밤 열한시부터 자정까지 나와 함께 엎디어, 하나는 성부의 의노를 유화케하고 죄인을 위하여 자비를 빌 것이요 , 또 하나는 사도들이 나를 버림으로 인하여 당한 내 고통을 조금이라도 유화케 해 다오. 나는 사도들에게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느냐고 질책했다. 악마가 너를 유혹할 것이니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경솔하게 행하지 말아라. 순명하는 자에게는 악마도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라고 하셨다.

 

마르가리타에게 요구하신 이 묵시는 현재 온 교회에 전파되어 ‘성 시간’과 ‘첫 금요일 신심’ 행위로 이어졌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매월 첫 금요일에 시작하여 아홉달동안 계속해서 성체를 영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통회를 할 은혜를 줄것이며, 그들이 은총을 잃은 그대로 혹은 성사를 받지 못한 채 죽는 일이 없고, 예수 성심은 그 임종때 그들의 확실한 피난처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

 

1675년 6월 성체 축일 후 네번째 묵시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음을 보아라. 사람들을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스스로 다 타버리도록 아낌없이 준 마음을 보아라. 그러나 내가 받은 것은 이 사랑의 성사 안에 있는 나를 모욕하고 무례함과 무관심으로 배은 망더한 것뿐이다.  특히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은 내게 봉헌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나를 천대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게 바라노니, 성체 축일 주간 금요일을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정하여, 그날 영성체하고 제대 위에 성체를 현시한 다음 배은망덕을 배상하기 위하여 엄숙히 배상 행위를 하여라. 성심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줄 것을 약속한다.”

 

마르가리타는 교회력에 큰 축일을  하나 첨가하는 대사업을 맡았다. 이 축일을 수도원 안에서 지키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희생은 결실을 가져왔다.  이 축일을 1856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예수 성심 축일’로 라틴 교회 전례력에 도입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예수 성심 신심은 소책자와 성심성화와 함께 놀랍도록 주변에 전파되었고 프랑스 왕에게도 전해졌다. 그후 2세기가 지나 프랑크 왕국(지금의 프랑스)은 국가를 예수 성심께 봉헌했다.

 

1864년 9월 18일 교황 비오 9세가 마르가리타를 복녀로 선언함과 19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도 15세의 성인 반열에 올림은  ’그녀가 성심 사도로의 불림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모든 시련과 박해를 뛰어 넘어 거둔 승리와 영광을 말해 주고 있다.

 

                                        참고문헌 : 성심의사도(마르가리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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