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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의 역사와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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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준 [ksj2415] 쪽지 캡슐

2009-08-31 ㅣ No.188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상제례 문화는 연도의 문화이다.
예로부터 초상이 나면 “연도 났다”고 한다. 초상집에 문상을 가자고 할 때도 연도하러 가자고 한다. 또한 명절이나 제사 때 연도를 바친다. 이렇게 우리는 연도라는 말로 상제례를 대신하며, 연도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토착화된 우리의 기도이며 노래이고 봉사의 행위와 함께 하는 상제례 문화인 것이다.
연도(煉禱)란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을 위한 기도(祈禱)라는 뜻으로 연옥의 연(煉)자와 기도의 도(禱)를 합쳐 만든 것이다.
연도의 역사는 한국 교회의 초창기인 1700년대까지 올라간다. 많은 유학자들이 천주교회에 대한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구입하여 학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앙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예수회 사제인 마태오 릿찌의 천주실의 등 보유론적 서적을 탐구하여 1784년 이승훈은 중국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의 천주교회가 시작된다.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많은 서적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선비들은 성호학파의 이익 선생의 문하생인 권철신, 권일신, 이가환,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의 유학자였다. 그 당시 중국은 2000여 년이나 내려오는 유교문화를 생활신조로 하는 국가이며 이중에서도 예수회는 유교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보유론적인 방향에서 선교를 하였으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꼬회의 상륙으로 유교에 대한 상제례 문제로 갈등을 빚어 사도좌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많은 문제들을 야기 시켜 대립상태에 있었다.
1742년 7월 11일 사도좌 신앙 포교 성성은 제의 논쟁을 일절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이때 한국천주교는 신앙을 받아들여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기도와 성사를 소중히 여기고 많은 기도서를 들여오고 성직 제도를 본받아 성직자를 임명하고 각종 성사를 집행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789년 10월 윤유일 등을 중국에 보내어 성직제도와 성사집행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즉시 성직 제도를 폐하며, 또한 제사가 부당하고 미신적 행위로 금기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금장태(유학사상의 이해, 집문당, 1996, 366-367쪽).
성직제도는 폐하면 되지만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사는 전통 풍습 및 제사를 못 지내는 것은 큰 문제였다. 그러나 선조들은 이러한 신앙교리를 받아드리며 서슴없이 풍습과 전통을 포기하였다. 이와 같은 단호한 행위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발견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같은 행위는 천주교회가 사악한 종교로 지탄을 받으며 박해자들로부터 무부무군(無父無君)이니 무군멸친(無君滅親)의 생활태도를 갖는 사람으로 오해받거나 고발되었다(1791년 윤지충 박해사건).
제사가 부당하고 미신적 행위로 금지된 것을 알게 된 신자들은 자신들이 신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을 마련해야 했으며 특히 인륜에 해당되는 장례와 제사를 새로운 의식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연도가 탄생 된 원인이다. 죽은 이와 남아있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고 성인들의 통공으로 같은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신앙고백이다.(참조: 최창무, 「한국 천주교회와 조상제사 공인」,『한국교회사논문집』,1985, 153-155쪽)
이후 1864년 다블뤼 주교님의 기도문과 전례서의 대대적인 출판과 인준을 통해 연도는 체계화된다.
다블뤼 주교는 1863년경에 그의 부모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의 내용을 보낸다.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한 뒤로 많은 신자들이 외교인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을 공공연히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조선에서 대낮에 십자가를 앞세우고 참석자는 각기 촛불을 들고 성영(聖詠:시편) 을 큰소리로 외우면서 동네 길을 지나가는 장례행렬을 펼친다는 것을 상상하시겠습니까? 어떤 곳에서는 이 때문에 시비가 나고 싸움이 벌어지고 했지만 다행히도 과히 중대한 결과는 빚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곳 몇 군데에서는 외교인들이 일치해서 우리 예절이 매우 점잖고 아주 아름답다고 인정했고, 이 광경을 보고 개종한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여기서 ‘조선말’로 된 장례식 기도문과 예절을 공포했다는 것은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식 장례예절과 기도가 행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행해지던 예절을 이때에 이르러 정비했다는 의미이다. 즉 당시의 기도문은 비록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지만 완전히 우리말 뜻에 맞게 번역된 것이 아니라 한문을 한글 독음으로 옮긴것에 불과했다.
1864년에 발간된 천주성교예규에 보면 선소리(先唱)와 후소리(後昌)을 구분하여 시편을 노래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또한 반드시 시편을 노래로 받치도록 되어있다. 이미 시편기도를 위한 노래가 구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도는 기도문이며 동시에 노래로서 이전부터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연도는 위의 다블뤼 주교님의 편지에서처럼 예절이 아주 아름답고 점잖아 이 광경을 보고 개종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만큼 전통적으로 선교의 도구가 되었으며 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의 토착화정신에 의거하여 연도는 비신자들을 위해서도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공의회는 각 민족들의 전통장례문화를 인정하고 장려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락을 바탕으로 봉헌하는 공동체의 통공인 이 연도는 참으로 자랑스런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전통적 전례라고 표현할 수 있다.
(허윤석신부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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