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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축일♬Verbum Caro Factu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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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3-05-02 ㅣ No.1137

 

축일 : 5월 2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St. Athanasius of Alexandria

알렉산드리아. 베짜는 사람의 주보

(AD 295-373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전적인 교육을 받은 아타나시오는 특히 성서와 신학이 뛰어났는데,청년 시절에 종종 광야로 은수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아름다운 표양과 유익한 말씀을 들으면서 한층 더 열렬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부제로 서품된 후, 318년경 자기 고향의 알렉산델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그의 선임자인 알렉산데르는 동방에서 새로운 운동으로 성장해 가고 있던 아리아니즘에 대하여 솔직하게 비판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니체아 제 1차 공의회에 자기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많은 박해를 겪으며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매우 지성적인 교회로 성장했지만 위험한 이단의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주교들과 귀족들의 추앙을 받았던 아리우스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본래부터 신의 아들이 아니며 단지 신성을 지닌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을 부인하였다.

 

이에 비해 AD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아타나시오는 사도들로부터 계승되어 온 교리의 충성스러운 수호자였다. 황제와 아리우스 파에 의해 수많은 박해를 받고 다섯번이나 유형에 처하면서도 결국은 진실한 믿음으로 승리를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교리와 꺼질 줄 모르는 사랑은 동방 교회로부터 위대한 교부로 인정받게 하였다.결국 아리우스의 설은 326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결되고 배척되었는데, 이에는 무엇보다도 아타나시오의 분투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으로 보는 점에서 현대의 이성주의와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은 아리우스 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느님의 아들이며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구세주이다.

 

그 이단을 주장한 아리우스는 다 같이 알렉산드리아에 있으면서 구세주이신 예수께 관하여 교회의 신앙과 위반되는 것을 가르치고, 특히 천주 성부는 영원한 분이시지만 하느님의 제2위이신 예수는 성부께 창조된 한(限)이 있는 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구세주와 그 외 점에 있어서 그가 정통 교회와 의견을 달리하게 이른 것도 또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 아리우스의 이단은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 이를 보고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도 도저히 그저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교회의 원수와 일전을 불사할 각오로 비서 아타나시오에게 협력을 구했다. 아타나시오는 곧 주교의 뜻을 받들어 분연히 일어나 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곧 이단과의 논쟁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광범하게 퍼져 나간 아리아니즘 이단에 대항한 위대한 신앙의 투사였다. 그가 저술한 책에 나타나는 열정과 힘은 그가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서거하자 아타나시오는 민중의 일치된 추천을 받아 그의 후임이 되었으나, 원수들은 그 후에도 모략을 그치지 않고 모함과 중상으로 그를 실각시키려고 애썼고, 콘스탄티노 대제는 불법적으로 하등의 심문이나 조사도 해 보지 않고 그들의 말만을 믿어 그를 파면시키고 멀리 추방했다.

 

국외로 추방당한 아타나시오는 독일의 트리엘에 가서 그 지방의 주교 막시미노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막시미노는 그를 동정하며 기꺼이 보호해 주었고 이때에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

 

그때 이단 측에서는 재빨리 아타나시오의 파면을 발표했으나 율리오 1세 교황은 그를 지지하고 사르디스에 있어서의 교회측의 집회에서 그의 파면이란 근거없는 낭설이란 것을 공포했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황제의 권력에 아첨해 무리하게도 그의 파면과 9년간의 추방 등을 실현 시켰던 것이다.

 

337년에 콘스탄티노 대제가 세상을 뜨고 황태자 콘스탄티오가 등극하자 아타나시오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아직도 강하게 그를 매장시키려고 암중비약을 계속해 2년후 또 다시 그는 추방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재차 그가 추방의 형벌이 풀어져 알레산드리아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347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후 약 10년간 그 시에서 마음껏 활약할 수가 있었고 그 사이 지금까지 동방에서만 성행하고 있던 이단이 서방 제국에도 유포되기 시작했으므로 아타나시오는 필사적으로 이를 방지하는데 분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아리우스 주의는 서방 제국에서 사를르 마누 대제 기간까지 존재하였다.

 

수많은 주교, 광야의 은수자,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은 그를 지지하며 후원해 주었다.아타나시오의 서한은 사방에서 읽게 되었고 모든 이들의 신앙을 굳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이단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괘씸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단이 점차로 쇠퇴해지는 까닭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단자들은 마침내 시리아노라는 대장에게 의뢰해 그를 살해할 것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시리아노는 부하 병정을 인솔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좌 성당으로 침입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광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광야의 은수자나 수도자들은 기꺼이 그를 숨겨 주엇다. 그는 거기서 수많은 서적을 저술했다. 원수들은 사방 팔방으로 그를 찾아다녔으나 끝까지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361년 콘스탄티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율리아노 황제가 뒤를 잇자 아타나시오를 위시해 지금까지 귀양살이르 하고 있던 주교들 일동에 대해 은사를 베풀었으므로, 그도 또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와 회의를 소집하고 다시 한 번 아리우스의 설이 이단이란 것을 단정하여 선언했다. 그 이단이 세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실로 이때부터이다.

 

그러나 율리아노 황제는 아리우스파에 빠져 교회를 박해했다. 이리하여 전에 스스로 아타나시오를 소환해 놓고도 그의 활동 특히 그가 교회를 위해 황제에게 한 충고에 대해 매우 분개하고 곧 네 번째의 추방을 단행하게 되엇다. 아타나시오는 또 광야의 은수자에게 가서 숨게 되었다. 교회의 원수들은 재차 그를 죽이려고 수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옹호하다가 다섯 번이나 귀양을 갔다. 그는 그의 일생 중 10년 동안을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며 그가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수도 생활의 이상에 따라서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을 진작시키고 독서와 저술을 하면서 지냈다.

 

그의 교의적이고 역사적인 저술들은 대부분 아리아니즘을 모든관점에서 철저하게 논박한 것이다. 그의 수덕에 관한 저술 중에는 성 안토니오의 생애에 대한 것이 있으며, 놀랄 만큼 대중화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있는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는 그 당시에는 아무도 극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던 적대 세력에 대항하여 끝까지 강하게 버틸 수 있는 은총을 받았다. 아타나시오는 주교로서의 자기 직무를 완수했다.그는 어떠한 대가가 자기에게 돌아올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양떼를 위하여 참된 신앙을 옹호하였다. 현대 세계에서 어떠한 적대 세력이 우리 앞에 가로놓일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 충실히 머물기 위해서는 이같은 소명을 체험하고 있어야 한다.

 

아타나시오가 귀양살이와 피신하기 위해 여기저기 도망다니면서 겪은 어려움은 바오로 사도가 자기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말한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자주 여행을 하며서 강물의 위험,강도의 위험,동족의 위험,이방인의 위험,도시의 위험,광야의 위험,바다의 위험,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 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다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6-28)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아타나시오는 죤 헨리 뉴만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비롯하여, 성서 주식, 시편의 주 등을 남겼다.

 

견진 성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된 신자는 자기 영혼을 위해, 신앙을 위해 노력을 다해 싸우지 않으며 안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군인과 같이 무기를 사용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학식으로, 또는 기도로, 또 박해 시에는 신앙을 선언함으로써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성 아타나시오와 같은 이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가장 용감하고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교회를 위해 봉사한 아타나시오의 생애는 파란만장하고도 헌신적인 것이었다.

 

아타나시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했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했다.

 

그는 간난 신고 중에서 교회를 위해 분투 노력하여 결국 승리를 획득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해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는 교회를 잘 다스리고 성서와 극기 수도에 관한 서적을 저술했다. 그의 세력은 위대한 것으로서 그 당시의 다마소 교황께서도 그의 충고를 들어 주셨다고 한다.공로를 담뿍 싸놓은 아타나시오는 373년 5월 2일 밤중에 고요히 선종했다. 신자들은 즉시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교회에서는 그에게 교회학자라는 칭호를 주었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딴시오 황제에 대한 항변, 수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아리우스파의 역사 등. 아타나시오가 <아타나시오 신경>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성 아타나시오는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제의 그레고리오 (축일:1월2일,게시판833번)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토모(축일:9월13일,게시판637번)와 함께 교회의 희랍박사이다.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4세기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며,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서도 오로지 교회의 정통신앙과 니체아 신경의 가르침을 수호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반아리우스주의로 요약 될 수있습니다.

이성을 앞세우면서 교회의 전통 가르침을 수호하였습니다.

이성과 철학이 학문상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는 이것을 신학과 신앙을 위한 길잡이로 생각하고,신앙과 전통의 우위성을 강조 하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 및 신성을 함께 강조하여 후대의 그리스도론 및 성삼론의 완전한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수도생활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쓰는 등 서방에 수도원 운동을 처음 소개하였습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 축일:1월17일 게시판887번

 

 

[이콘]세명의 기독교교육자.러시아19세기.(40.5x34cm)

대바실리.나지안즈에서 온 그레고리.요한크리소스토모스.만딜리온.포차엡스카야성모

 

 

 

 

성 아타나시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io de incarnatio Verbi, 8-9 PG 25, 110-111)

 

말씀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비육체적이고 부패할 수 없으며 비물질적인 하느님의 말씀께서 우리가 사는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전에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주의 어느 부분에도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분은 성부와 함께 계시면서 만물을 채우고 계셨습니다.

 

말씀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셨고 우리에게 환히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또 우리의 부패를 보시고는 마음이 움직이시어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창조된 것이 멸망하지 않고 성부께서 사람을 지어내실 때 행하신 그 업적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육신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육신을 친히 취하셨습니다. 말씀께서는 단순히 육체 안에 머무르거나 또는 육신의 모양으로만 발현하시는 것으로 그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발현만 하시기를 원하셨더라면 인간이 지닌 육신보다 더 고귀한 육신을 취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실제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동정녀 몸에서 육신의 성전을 지어내시어 그 안에서 거처하시고 그 육신을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에게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셨고, 모든 사람이 죽음의 부패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 육신을 모든 이를 위해 죽음에 내맡기시어 지극한 사랑으로 그것을 성부께 바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한편으로는 당신 안에서 죽으려 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거슬러 공포된 죽음의 법을 폐기시키셨습니다. 죽음은 주님의 육신을 너무도 강력히 공격했기에 그 힘을 잃어, 같은 육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기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부패의 법에 빠진 사람들에게 불멸을 되돌려 주시고 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이키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취하신 육신과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흡사 밀짚을 불에 태우듯 그들 안에서 죽음을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친히 죽을 수 있는 육신을 취하시고, 그 육신은 모든 이들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참여함으로써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서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 안에 거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지 않으시고 부활의 은총으로 인해 모든 이에게서 부패를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취하신 이 육신을 아무 흠도 없는 희생 제물로 죽음에 내 맡기심으로써 그 봉헌의 힘으로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죽음을 쫓아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만물들 위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모든이들을 위해 당신 육신의 성전을 바치심으로써 죽음에게 빚진 것을 갚으셨습니다. 우리 육신과 동일한 육신을 취하심으로 우리와 일치하신 부패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부활의 약속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불멸을 입을 권리를 주시고 또 실제로 입히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부패마저 이제는 사람들에게 아무 힘도 미치지 못합니다.

 

 

 

 

 

 

 

 

 

 ♬Canto Gregoriano-Verbum Caro Factu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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