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펌] 위기의 시대에 '꿈꾸기' -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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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용 [parkky44] 쪽지 캡슐

2008-11-15 ㅣ No.8850

  위기의 시대 '꿈꾸기'  
 
  중세 유럽인들은 꿈을 꾸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 교회는 꿈을 세 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성직자들만이 꿀 수 있는 '신의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몸에 병이 들어서 꾸게 되는 '악몽'이고, 마지막은 속인들을 나쁜 길로 꼬드기는 '악마의 유혹'이다. 따라서 성직자라면 모를까, 일반인에게 꿈을 꾼다는 것은 마음이나 몸이 병들었다는 증거가 되기에 남에게, 특히 성직자에게 꿈 얘기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종교의 도덕적 규제력이 꿈에 관한 언설을 억압했고 결과적으로 꿈꾸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던 것이다. 이런 내면적인 통제가 지배층의 헤게모니 장악을 겨냥한 것인지는 명확지 않지만, 중세의 해체가 '꿈의 민주화'를 수반했음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미래로 가는 길 막은 지식인들

  지금 우리 사회는 형태와 내용은 다르지만 마찬가지의 꿈의 봉쇄에 처해 있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이외의 다른 삶의 틀을 상상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혁명'을 운위하고 '사회구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자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열정을 불태웠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찌하여 대안 부재의 메마름에 목매게 되었을까? 현대사의 굴곡이 우리의 상상의 원천을 고갈시켰다. 분단의 현실, '조국 근대화'를 통한 산업화의 성취, 성공적인 민주화와 민주정권의 실패, 소련의 해체 및 동구혁명으로 말미암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미국의 영향력과 '세계화'의 급진전 등. 이런 사태 변화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제약조건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데는 지식인들의 무책임, 방조, 무능력이 중요한 몫을 했다. 한편에서 '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신우익(뉴라이트)'은 자본주의와 그 정치적 표현인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축성하는 '역사의 종언' 명제를 내세웠다. 사실 우파가 이념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공세를 취하기는 프랑스혁명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들은 우리가 '자본주의적 미래'라는 역사의 종착역에 도착했다는 거대담론을 제시하고 계속적인 경제성장과 팽창을 특징으로 하는 사이비 진보의 희망을 약속했다.
  다른 한편, 탈근대주의자들은 '역사 이후' 명제를 제시했다. 이들은 역사적 연속성과 기억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진보를 배제하여 현재에 드리운 역사의 닻줄을 끊어버렸다. 이들은 여러 차원의 '해방'을 약속했지만 근본적 변화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결과적으로 지배층의 헤게모니 전략에 기여했다.
  양자는 큰 차이가 있지만, 현재를 우리가 가진 유일한 미래로 그려내어 꿈꾸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한다. 역사는 있었지만 이제 역사에 미래는 없다. 현재가 미래이며, 자본의 시대는 영원하다.
  마지막으로 대안사회에 대한 전망을 이룩해내지 못하고 있는 좌파가 있다. 이들은 2세기에 걸치는 빛나는 전통의 후예지만 시대적 변화의 순발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헛손질의 복서처럼 현재를 역사화 하는 데 이르지 못해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역사적 상상력' 필요한 전환기

  위기란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것이 생겨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분명 위기의 시기에 돌입했다. 나는 위기의 시대를 사는 방식의 하나로 독자들에게 꿈꾸기, '역사적 상상력'이라는 특정한 형태의 꿈꾸기를 제안한다. 꿈꾸기란 현재를 넘어서려는 온갖 시도를 통칭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역사적 상상력은 현재를 낯설게 하여 그 횡포를 타파하는 데 약효가 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과거를 보고 그 과거를 통해 현재와는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보듬어준다. 예컨대 그것은 자본주의를 정상 상태가 아니라 역사적 형성물로 보아 그 이전의 삶을 통해 그 이후의 삶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대전환의 시기에 참으로 새로운 '꿈의 민주화'를 기대해 본다.   <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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