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사랑하는 나의 대자님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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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민 [mandrew] 쪽지 캡슐

2005-03-21 ㅣ No.436

부활이 다가왔습니다.

교리반을 마치고 당신이 세례를 받은 후 지구는 또 한번의 공전을 하여 제 자리로 돌아 왔군요.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찌보면 너무도 긴 시간 동안  당신을 방치(?)한 나의 잘못에 사과 드립니다.

죄송하게도 그 동안 나 역시 나 자신을 방치하고 지냈답니다. 

나는 당신과, 나의 교회를 등지고 짧고도 긴 여정의 행로를 돌아 지금에야 다시 제 자리로 들어섭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대자님,

이제 당신은 나의 신앙 선배로 자리바꿈하고 만 셈이로군요. 축하드립니다.

힘차게 굴러들어 박힌 돌을 밀어내는 오묘한 섭리의 주인공이 되신 것을..

 

사랑이란게 지겨울 때가 있다는 유행가 가사가 있었지요?

참으로 있어선 아니 되겠지만, 나의 신앙 생활에도 그런 지겨움이 찾아 들었던가 봅니다.

그것은 잘 나가던 신앙생활 중에 불현 듯 찾아든 지겨움이었다기 보다는 -

통상 느끼며 안고 살아왔던 문제들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 염증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나는,

기어이 찾고 싶었고 이해하고 싶었고 오로지 확인하고 싶었던 몇 몇 문제들을 안고 유랑하였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 어느 순간도 목표 의식을 잃고 방황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일상 속에서...

내가 찾고 확인하고 싶었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었고, 이해하고 싶었던 대상 또한 그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분의 뜻으로 실존한다는 교회, 바로 신자들이었습니다.

'무엇하는 하느님인가?'

'과연 무엇하는 교인들인가?'

단순히 표현하자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선 방치 하시는가? 그 분의 정의란 있기나 한 것인가?'

'뭐하러 교인은 신앙하는가? 과연 믿음 때문인가, 아니면 여가 선용이나 삶의 장식인가?'

 

사랑하는 나의 대자님,

제가 과연 해답을 찾았을까요?

대답은, "그래요, 찾았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입니다.

 

나는 예전에 냉담자 회두권면( 쉬는 교우 방문이라고도 하지요 )을 많이 하러 다녔었지요.

쉬는 나에게도 방문과 만남의 시간이 당연히 찾아 오더군요. 마치 욥의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대충 그 상황을 말씀 드리자면,

나는 관심과 걱정을 하는 이들에게서 (솔직히 귀찮기까지 했습니다. 별 도움 안되는 시간이라서..) 감사와 우정을 그리고 그 분을 위한 기도까지 해 드리며 안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 위로를 하기도 한다는 건 참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 듯, 어느 분의 말씀 중에 한 마디가 툭 떠올랐습니다. ' 낮은 곳에서...'

그 당시 장소가 죄송하게도 화장실 변기 위였는데, 일순 제가 앉은 자리가 너무도 높아 보여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음성을 찾아 하염없이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분은 낮은 데로 임하시는데, 나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니...'

다시 말해, 그 분은 다분히 유치한 현실 속에 실존하시는데 나는 높은 곳에서 홀로 거룩하신 거룩한 형상을 향해 분노하고 주먹질 해 대고 있었던 겁니다.

 

-------- 시간 관계상 다음에 이어가겠습니다.

 

 

(행복한 새한주를 보네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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