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과거 진상 청산 규명 을 외치는 분들께(보상이란 미명하에 국민들의 세금이 새어 나간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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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cla4927] 쪽지 캡슐

2008-11-10 ㅣ No.8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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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은 믿을 수 없다”는 조갑제씨의 주장에 대한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공개서한)

조갑제씨는 대한민국보수언론계에서 간판논객의 한사람으로, 사리와 판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어느 정도 세간에 알려져 있고 또한 의욕과 소신적인 면에서도 부분적인 우파진영의 인정을 받아온 사람이다. 서두에 분명히 말해둘 것은 조갑제씨의 인지도나 영향력이 어느 범위까지인지 감감 모르겠지만 우리의 입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흥미 또한 없다는 것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그러나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일개언론인의 신분을 내세워서 추측과 타산을 가지고 함부로 장난하면 나중에 그에 따른 책임을 반드시 피해가지 못한다는 것을 사전에 말해두고 싶다.

조갑제씨의 발언에 대한 답변

1. 조갑제씨는 “광주사태을 취재했던 수백 명의 기자 중 그런 의심을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며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가 없었다. 2년 전부터 한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북한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일부 애국단체에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라고 서두를 떼고 있다?

답 : 우리가 알건대 기자는 어떤 임의의 문제를 개인적인 판단이나 육감에 따라 상상력을 동원해서 언론 화하는 것이 본연의 직업이 아니라 사건과 내용에 대한 취재를 통해서 본질을 숙지하고 사실에 기초해서 기사내용을 만드는 것이 업무이고 직업이라고 알고 있다.

조갑제씨는 2년 전부터 탈북자 한사람이 등장해서 광주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한다고 했는데 2006년12월20일 서울정동세실레스토랑에서 최초로 진행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기자회견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침투했음을 고백하는 첫 기자회견이었으며 이때에 토론자는 8명으로 되어 있었지만 3명이 정부의 압력으로 나오지 못하고 5명이 나와서 양심선언을 하였다. 탈북자 한사람이 2년 전부터 말을 들고 다닌다는 소리는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갑제씨는 그때 기자회견장소에 집적 나와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는가? 우리가 알건대 당신은 기자회견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다.

또한 대대규모가 내려왔었다고 우리가 확정적으로 주장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대대규모가 내려왔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도 없으며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면 광주에 내려왔던 증인들이 자기가 소속되어 활동한 조 외에 다른 조들이 활동한 내용을 말하는 과정에서 일개대대역량을 되지 않겠느냐 의 발언을 했고, 사실이 이렇다는 우리의 양심선언이 몇 백 명이라는 숫자로 불어나서 사실인 것처럼 회자되었던 것이다.

북한특수부대 인원규모가 백 명 정도인지 아니면 그 이상 어느 숫자인지는 우리는 물론 내려왔던 당사자들도 모르게 되어 있고 또 모르고 있다는 것은 과학이다. 그러나 살았던 죽었던 몇 명이 내려왔었던 간에 광주사건과 관련된 공화국영웅 62명은 확실하다.

2.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특수부대에서 정치장교로 복무한 최중현대위의 양심선언에 대해서 개연성이나 증거가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함이 타당할 것이라고 일축하면서 몇 가지 실례로 그 이유를 들고 있다.

1). 수십만 명의 광주시민 목격자와 현장을 취재하던 수 백 명의 기자, 그 외 외국기자 다수도 북한군을 못 보았고, 또한 현장에 있던 조갑제씨의 눈에도 북한특수부대요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증거라고 하는데?

답 : 조갑제씨가 언론인이라는 특정인의 신분을 떠나서 상식이 있는 사람인지 되묻고 싶은 부분이다. 전쟁 상황에서의 특수전과 안정된 체제에 대한 전복 및 교란목적의 특수전은 사실상 완전히 다른 양상과 흐름으로 전개된다. 작전 중에 희생된 아군의 시체까지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이 특수전의 규칙이며 규정이다.

조갑제씨는 기자들의 위치를 수사관 이상으로 착각하는 것 같은데 가령 수사관이상의 투시력이 있다 해도 기자들의 눈이 가려낼 정도의 특수전이면 말 바른대로 그건 벌써 특수전이 아니다. 눈에 뜨이는 간첩이 없었다는 소위‘물증’의 부재가 북한군특수부대의 광주사태 개입을 일축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하는 조갑제씨의 논리가 참으로 불쌍해 보일 정도다.

2).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한군이 대대규모, 즉 수 백 명이라는데,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또한 전체 사망자193명, 이들 중 군인23명, 그 중 진압군끼리의 오인사격으로 13명 사망?, 무장시민들에 의한 군인사망자7명,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국군사망자가 이 정도에 그칠 리가 없다?

답 : 광주사태에 개입했던 북한군이 한명이던 수 백 명이던 그들이 애초부터 대한민국국군을 상대하려고 내려온 사람들이고, 진압군을 죽이고 광주를 해방하려는 것이 임무였다면 그것은 벌써 특수전의 개념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배후교란작전은 둘째 치고 죽으려고 광주에 내려왔다고 분석해야 된다.

조갑제씨의 말을 빌리면 수백 명의 특수부대원들이 내려왔는데 진압군의 희생자 수가 왜 그렇게 적었느냐고 순진한 아동들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특수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열심히 배우고 이런 문제에 접근하면 좋을 듯싶다.

철 없는 애들의 군사놀이 같은 상식으로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광주사태 전후부터 조성되고 전개된 남한의 정치상황과 광주사태의 발단, 진행과정의 성격, 북한군이 여기서 노릴 수 있는 여지와 방법 등을 면밀히 재 관찰하고 당시의 시대적상황과 조갑제씨의 생각에서 어떤 대조되는 모순점이 있는가를 따지고 재고할 것은 재고해야 한다.

적당히 죽여서 진압군들이 긴장을 풀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 놓으면 될 일이었고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굳이 다수의 진압군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 가치로 따진다면 진압군 열 명을 죽이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시민군 한두 명을 죽이고 현장을 조작하여 그들을 자극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었다.

북한군특수부대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소부대 전법에 능통하다고 해도 후방도 없는 고작 몇 백 명의 제한된 전투능력이 일개국가의 정규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시도하였다면 그들이 얼마동안 버틸 것이며 진압군을 죽이면 또 얼마나 죽이겠는가? 조갑제씨의 질문이 장난 같은 느낌이 든다.

3). 당시는 계엄령상태.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어떻게 침투한단 말인가? 침투병력 중 3분의2가 희생되었다는데 사실이면 이들을 섬멸한 국군이 있을 것이며 무장간첩한명만 사살해도 부대표창을 받는데 수백 명을 사살한 국군 부대가 이 자랑 스런 사실을 숨겼단 말인가?

답 : 조갑제씨의 말대로 당시 한국에 계엄령상태가 조성되고 해안과 항만이 봉쇄되고 공중감시도 철저했다고 들(남한에 와서)었다. 우리의 짐작대로라면 군사분계선도(우둔하게 군사분계선으로 오지도 않지만) 분명 2,3중으로 감시가 철저했을 것이다. 우리가 북쪽에서 파악한데 의하면 대부분이 해상경로를 통해서 침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다른 부대관계자들에게서 나온 별도의 증언에 따르면 한 팀은 해상을 이용했고 다른 한 팀은 강원도 중부전선 쪽으로 트럭을 이용애서 움직였으며 해상이 아닌 다른 경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 루트가 어떤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이상 당사자들만 아는 내용이고 땅굴을 이용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히 입증할 수 없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자신도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철저한 봉쇄로 개미 한 마리도 쉽게 들어올 수 없는 당시에 북한군이 무슨 재주로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이에 정확히 답변할 사람들은 아마 광주현장에 내려왔던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3분의2가 죽었다는 내용은 북한쪽에서 분명히 시인하고 증언하는 문제이다. 5~6백 명이 내려왔다는 설을 토대로 그 중의 3분의2의 사망수자를 계산한다면 조갑제씨가 제기하는 의문이 빗나간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지만 각기 임무사항에 따라 별도의 조에서 움직였고 자기 팀의 사망수자를 기준으로 다른 팀의 사망수자를 일괄적으로 계산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백 명이 내려와서 3분의2가 죽었는지 이백 명이 내려와서 3분의2가 죽었는지, 통일되기 전까지는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 이런 부분에서 매끄럽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북한의 대남사적관에 보관된 자료에 의하면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광주항쟁에 참가했다가 당과 수령을 위해 용감하게 전사한 영웅들이 남조선의 이름 없는 산야에 뭍혀 있다. 조국이 통일되면 영웅들의 유해를 찾아 내여 후손만대에 이름을 빛내도록 해야 한다’고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4). 전두환정권에서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이를 반드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답 : 그 질문은 우리한테 묻지 말고 전두환 전 대통령 쪽에 물으면 된다. 우리가 해명할 사안이 아니라 남쪽의 몫이다. 2006년12월20일 기자회견 당시 우리는 북한쪽의 자료에만 근거하며 남한 쪽의 자료는 확인차원에서 부차적으로 이용한다고 분명히 밝힌바 있다. 다시 말하면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광주사건 기자회견은 북쪽의 증인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한 양심선언이었지 남쪽의 자료까지 한데 버무린 기자회견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둔다.

5). 탈북자의 증언은 추측에 불과하다.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답 : 조갑제씨는 얼마 전 어느 호텔에서 나를 포함하여 지인 몇 명과 함께 광주문제로 마주앉았던 일이 있다. 그때 조갑제씨는 광주현장에 기자로 참가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북한특수부대가 절대로 올 수가 없었으며 광주에서 자기 눈으로 북한군의 개입이 없었음을 직접 확인했다고 말했었다.

그때 그 장소에서 어느 목사님이 북한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하다가 내려온 아무개를 만나보았고 광주사건자료가 통전부에 전시되어 있다는 구체적인 증인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광주에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여자들의 목을 자른 게 누구냐고 되묻자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얼버무리면서 일이 있다고 도중에 피해버렸다.

조갑제씨를 비롯한 기자들이 눈을 비비고 봐도 광주현장에서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북한군개입설을 주장하는 다수의 탈북자들은 전부 다 사기꾼이고 배후세력의 사주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보는가?

오만한 것도 어느 정도이지 사람의 지능수치를 벗어나면서 까지 이렇게 오만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한 두 사람의 탈북자가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수 천 명의 탈북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인정하고 증언하는 내용임이 분명한데도 보수논객이라는 사람이 중뿔나게 나서서 제동을 걸고 나서는 이유가 먼지 의심스럽다. 자기의 심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전에 지성인의 진지한 사고력을 가지고 사려 깊은 판단을 해볼 것을 권고한다.

6). 5월21일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철수, 외곽을 포위했다. 이때 빠져나가던 시민들이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런 상황에서 광주로 잠입했다면 국군과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을 것이다 . 정규군끼리의 충돌은 한 건도 없었다. 김일성(또는 김정일)이 5월18일 광주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그 부대가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다. 그때는 이미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도어 있을 때였다. 수백 명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는 없었다?

답 : 조갑제씨가 쓴 글을 보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선명하지 못하고 두리 뭉실하게 얼버무리는 것이 참으로 가관이고 일품이다.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어떤 목적으로 도발적으로 나서는지 내용을 봐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내용들을 무엇 때문에 두 세 번씩 앞뒤 문장도 맞지 않게 반복하는가? 앞에서 조갑제씨가 언급한 부분에서 군인사망자가 23명중에 13명은 공수부대에 대한 국군교도대의 오인사격 등 진압군끼리의 충돌에 의한 사상자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국군교도대가 정규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진압군이라면 서로 아군이 아닌가?

북한이 말하는 대로 환각제를 먹고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면 아군끼리의 교전에서 어떻게 13명씩이나 사상자를 낼 수가 있으며 그 정도의 사상자가 날 정도의 교전이라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는 소린데 쌍방이 그렇게도 서로를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했다면 광주현장의 분위기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3명씩이나 죽도록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 편끼리 맞불질을 해대면서 죽일 내기했는데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이 보일수가 있겠는가? 현장에서 혹시 보았다 해도 보았다는 그 자체가 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북한수뇌부가 5월18일 광주상황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광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라고 날짜계산을 해가면서 머리를 갸우뚱 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조갑제씨의 영특한 판단이 무색할 정도로 북한수뇌부는 5.18 벌써 이전에 광주사건이 터진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고 특수부대 개입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내용이 김일성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7). 광주 사망자가 2000명이나 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영화‘화려한 휴가’에서 나오는 학살 장면이다. 5월21일 정오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사격하여 수백 명을 다치게 하는 장면은 조작이다. 그런 학살도, 사격명령도 없었다. ,,, ,,, 이런 미신에 북한군 개입이란 또 다른 ‘미신’을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도는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

답 : 광주사건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이 광주사건에 대한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한 이후에 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알고 있다. ‘화려한 휴가’를 두리 뭉실하게 미신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북한정권의 사주를 받은 친북세력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들어낸 광주사건에 대한 날조와 조작의 산물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조갑제씨는 영화 ‘화려한 휴가’와 함께 북한특수부대의 개입도 미신이라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선전하고 있는데 본인의 의중이 정 그렇다면 광주사태 와중에 나타났던 민감한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질문을 피하지 말고 정확하게 대답을 하라.

첫째 : 광주봉기군이 교도소에 대한 습격을 6차례나 시도했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량한 시위자들이 교도소를 습격해서 죄수들을 구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조갑제씨는 이 사건을 어떤 각도에서 분석하는지 국민들 앞에서 대답하라.

둘째 : 머리가 장발(절대로 군인이 아니다)인 사람 7-8명이 군인복장을 하고 시위대 여러 명을 일 열로 꾸러 안치고 칼빈총을 들이대고 있다. 기자가 순간적으로 카메라에 담은 현장 상황이 아니라 준비된 포즈에 가까운 사진이다. 시위대가 무엇 때문에 군인복장을 하고 이런 장면을 연출해야 했는지 말해보라.

셋째 : 여성의 온 몸을 발가벗기고 두개골을 톱질하고 팔을 자른 사진과 여성의 목을 자르고 은밀한 부위가 그대로 노출된 사진이 있다. 5.18관련 단체들은 우리가 이런 사진을 공개하자 자기들은 국민들이 경악해 할까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조갑제씨의 주장대로 북한특수부대의 개입설이 미신이라면 어느 쪽이던 내부의 소행이라고 믿어야 되는데 진압군이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봉기군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는가?

넷째 : 망월동 묘지에 신원미상 자가 상당수 있다. 2002년에 몇 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고 5.18측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근거 적으로 확실하게 나와 있는 것이 없다. 이 사람들을 북한 측이 당시 현장에서 미처 회수하지 못한 시신들이라고 단정하기에도 현재까지는 무리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있어야 하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섯째 : 광주사건 사망자 중에 M16보다 칼빈에 맞아 죽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 부분은 광주에 내려왔던 북한당사자들의 증언에도 나와 있다. 북쪽의 증언과 남쪽의 자료가 서로 아귀가 맞는다고 봐야 한다. 칼빈은 봉기군이 들고 있었는데 오발사고에 의한 것이라면 제한된 인원은 벗어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정상이다. 한 둘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칼빈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하는가?

여섯째 : 1980년5월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을 당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5월23일 주민의 신고를 받고 체포한 사실이 있다. 이창룡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에 잡혔고 그의 몸에서는 현금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22종 339점이 발견되었다. 조갑제씨는 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북한쪽에서 들어올 통로가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분명히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한 명이 들어왔으면 백 명도 가능하다는 소리가 된다. 반박할만한 자신이 있는가?

광주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가 개입했던 사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며 진실이다. 광주문제를 사실에 기초해서 재조명하고 어두운 밑바닥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겨야 되는 것은 보수정권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국익의 관점에서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인 과제이다. 좌파, 우파의 개념이라든가 좌우의 이념적인 가치관역시도 어떤 형태로든 광주사태를 재평가하는 문제의 범위 안에는 절대로 개입될 수 없다. 조갑제씨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얼마나 비굴한 것인지, 그 대가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질 날이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유북한군인연합 대 표
탈북기독군인연합회 대표회장 임 천 용


(“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은 믿을 수 없다”는 조갑제씨의 주장에 대한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공개서한)

조갑제씨는 대한민국보수언론계에서 간판논객의 한사람으로, 사리와 판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어느 정도 세간에 알려져 있고 또한 의욕과 소신적인 면에서도 부분적인 우파진영의 인정을 받아온 사람이다. 서두에 분명히 말해둘 것은 조갑제씨의 인지도나 영향력이 어느 범위까지인지 감감 모르겠지만 우리의 입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흥미 또한 없다는 것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그러나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일개언론인의 신분을 내세워서 추측과 타산을 가지고 함부로 장난하면 나중에 그에 따른 책임을 반드시 피해가지 못한다는 것을 사전에 말해두고 싶다.

조갑제씨의 발언에 대한 답변

1. 조갑제씨는 “광주사태을 취재했던 수백 명의 기자 중 그런 의심을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며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가 없었다. 2년 전부터 한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북한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일부 애국단체에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라고 서두를 떼고 있다?

답 : 우리가 알건대 기자는 어떤 임의의 문제를 개인적인 판단이나 육감에 따라 상상력을 동원해서 언론 화하는 것이 본연의 직업이 아니라 사건과 내용에 대한 취재를 통해서 본질을 숙지하고 사실에 기초해서 기사내용을 만드는 것이 업무이고 직업이라고 알고 있다.

조갑제씨는 2년 전부터 탈북자 한사람이 등장해서 광주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가 개입했다고 주장한다고 했는데 2006년12월20일 서울정동세실레스토랑에서 최초로 진행된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기자회견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침투했음을 고백하는 첫 기자회견이었으며 이때에 토론자는 8명으로 되어 있었지만 3명이 정부의 압력으로 나오지 못하고 5명이 나와서 양심선언을 하였다. 탈북자 한사람이 2년 전부터 말을 들고 다닌다는 소리는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린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갑제씨는 그때 기자회견장소에 집적 나와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는가? 우리가 알건대 당신은 기자회견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사람이다.

또한 대대규모가 내려왔었다고 우리가 확정적으로 주장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대대규모가 내려왔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도 없으며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면 광주에 내려왔던 증인들이 자기가 소속되어 활동한 조 외에 다른 조들이 활동한 내용을 말하는 과정에서 일개대대역량을 되지 않겠느냐 의 발언을 했고, 사실이 이렇다는 우리의 양심선언이 몇 백 명이라는 숫자로 불어나서 사실인 것처럼 회자되었던 것이다.

북한특수부대 인원규모가 백 명 정도인지 아니면 그 이상 어느 숫자인지는 우리는 물론 내려왔던 당사자들도 모르게 되어 있고 또 모르고 있다는 것은 과학이다. 그러나 살았던 죽었던 몇 명이 내려왔었던 간에 광주사건과 관련된 공화국영웅 62명은 확실하다.

2.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특수부대에서 정치장교로 복무한 최중현대위의 양심선언에 대해서 개연성이나 증거가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함이 타당할 것이라고 일축하면서 몇 가지 실례로 그 이유를 들고 있다.

1). 수십만 명의 광주시민 목격자와 현장을 취재하던 수 백 명의 기자, 그 외 외국기자 다수도 북한군을 못 보았고, 또한 현장에 있던 조갑제씨의 눈에도 북한특수부대요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증거라고 하는데?

답 : 조갑제씨가 언론인이라는 특정인의 신분을 떠나서 상식이 있는 사람인지 되묻고 싶은 부분이다. 전쟁 상황에서의 특수전과 안정된 체제에 대한 전복 및 교란목적의 특수전은 사실상 완전히 다른 양상과 흐름으로 전개된다. 작전 중에 희생된 아군의 시체까지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것이 특수전의 규칙이며 규정이다.

조갑제씨는 기자들의 위치를 수사관 이상으로 착각하는 것 같은데 가령 수사관이상의 투시력이 있다 해도 기자들의 눈이 가려낼 정도의 특수전이면 말 바른대로 그건 벌써 특수전이 아니다. 눈에 뜨이는 간첩이 없었다는 소위‘물증’의 부재가 북한군특수부대의 광주사태 개입을 일축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하는 조갑제씨의 논리가 참으로 불쌍해 보일 정도다.

2).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한군이 대대규모, 즉 수 백 명이라는데,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또한 전체 사망자193명, 이들 중 군인23명, 그 중 진압군끼리의 오인사격으로 13명 사망?, 무장시민들에 의한 군인사망자7명,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국군사망자가 이 정도에 그칠 리가 없다?

답 : 광주사태에 개입했던 북한군이 한명이던 수 백 명이던 그들이 애초부터 대한민국국군을 상대하려고 내려온 사람들이고, 진압군을 죽이고 광주를 해방하려는 것이 임무였다면 그것은 벌써 특수전의 개념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배후교란작전은 둘째 치고 죽으려고 광주에 내려왔다고 분석해야 된다.

조갑제씨의 말을 빌리면 수백 명의 특수부대원들이 내려왔는데 진압군의 희생자 수가 왜 그렇게 적었느냐고 순진한 아동들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특수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열심히 배우고 이런 문제에 접근하면 좋을 듯싶다.

철 없는 애들의 군사놀이 같은 상식으로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광주사태 전후부터 조성되고 전개된 남한의 정치상황과 광주사태의 발단, 진행과정의 성격, 북한군이 여기서 노릴 수 있는 여지와 방법 등을 면밀히 재 관찰하고 당시의 시대적상황과 조갑제씨의 생각에서 어떤 대조되는 모순점이 있는가를 따지고 재고할 것은 재고해야 한다.

적당히 죽여서 진압군들이 긴장을 풀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 놓으면 될 일이었고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굳이 다수의 진압군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 가치로 따진다면 진압군 열 명을 죽이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시민군 한두 명을 죽이고 현장을 조작하여 그들을 자극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었다.

북한군특수부대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소부대 전법에 능통하다고 해도 후방도 없는 고작 몇 백 명의 제한된 전투능력이 일개국가의 정규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시도하였다면 그들이 얼마동안 버틸 것이며 진압군을 죽이면 또 얼마나 죽이겠는가? 조갑제씨의 질문이 장난 같은 느낌이 든다.

3). 당시는 계엄령상태.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어떻게 침투한단 말인가? 침투병력 중 3분의2가 희생되었다는데 사실이면 이들을 섬멸한 국군이 있을 것이며 무장간첩한명만 사살해도 부대표창을 받는데 수백 명을 사살한 국군 부대가 이 자랑 스런 사실을 숨겼단 말인가?

답 : 조갑제씨의 말대로 당시 한국에 계엄령상태가 조성되고 해안과 항만이 봉쇄되고 공중감시도 철저했다고 들(남한에 와서)었다. 우리의 짐작대로라면 군사분계선도(우둔하게 군사분계선으로 오지도 않지만) 분명 2,3중으로 감시가 철저했을 것이다. 우리가 북쪽에서 파악한데 의하면 대부분이 해상경로를 통해서 침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다른 부대관계자들에게서 나온 별도의 증언에 따르면 한 팀은 해상을 이용했고 다른 한 팀은 강원도 중부전선 쪽으로 트럭을 이용애서 움직였으며 해상이 아닌 다른 경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 루트가 어떤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이상 당사자들만 아는 내용이고 땅굴을 이용했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히 입증할 수 없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자신도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철저한 봉쇄로 개미 한 마리도 쉽게 들어올 수 없는 당시에 북한군이 무슨 재주로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이에 정확히 답변할 사람들은 아마 광주현장에 내려왔던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3분의2가 죽었다는 내용은 북한쪽에서 분명히 시인하고 증언하는 문제이다. 5~6백 명이 내려왔다는 설을 토대로 그 중의 3분의2의 사망수자를 계산한다면 조갑제씨가 제기하는 의문이 빗나간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지만 각기 임무사항에 따라 별도의 조에서 움직였고 자기 팀의 사망수자를 기준으로 다른 팀의 사망수자를 일괄적으로 계산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백 명이 내려와서 3분의2가 죽었는지 이백 명이 내려와서 3분의2가 죽었는지, 통일되기 전까지는 그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 이런 부분에서 매끄럽지 못한 점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북한의 대남사적관에 보관된 자료에 의하면 ‘남조선해방을 위하여 광주항쟁에 참가했다가 당과 수령을 위해 용감하게 전사한 영웅들이 남조선의 이름 없는 산야에 뭍혀 있다. 조국이 통일되면 영웅들의 유해를 찾아 내여 후손만대에 이름을 빛내도록 해야 한다’고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4). 전두환정권에서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이를 반드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답 : 그 질문은 우리한테 묻지 말고 전두환 전 대통령 쪽에 물으면 된다. 우리가 해명할 사안이 아니라 남쪽의 몫이다. 2006년12월20일 기자회견 당시 우리는 북한쪽의 자료에만 근거하며 남한 쪽의 자료는 확인차원에서 부차적으로 이용한다고 분명히 밝힌바 있다. 다시 말하면 자유북한군인연합의 광주사건 기자회견은 북쪽의 증인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한 양심선언이었지 남쪽의 자료까지 한데 버무린 기자회견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둔다.

5). 탈북자의 증언은 추측에 불과하다.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답 : 조갑제씨는 얼마 전 어느 호텔에서 나를 포함하여 지인 몇 명과 함께 광주문제로 마주앉았던 일이 있다. 그때 조갑제씨는 광주현장에 기자로 참가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북한특수부대가 절대로 올 수가 없었으며 광주에서 자기 눈으로 북한군의 개입이 없었음을 직접 확인했다고 말했었다.

그때 그 장소에서 어느 목사님이 북한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하다가 내려온 아무개를 만나보았고 광주사건자료가 통전부에 전시되어 있다는 구체적인 증인을 들었다고 말하면서 광주에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여자들의 목을 자른 게 누구냐고 되묻자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얼버무리면서 일이 있다고 도중에 피해버렸다.

조갑제씨를 비롯한 기자들이 눈을 비비고 봐도 광주현장에서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데 그렇다면 북한군개입설을 주장하는 다수의 탈북자들은 전부 다 사기꾼이고 배후세력의 사주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보는가?

오만한 것도 어느 정도이지 사람의 지능수치를 벗어나면서 까지 이렇게 오만할 수가 없는 일이다. 한 두 사람의 탈북자가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수 천 명의 탈북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인정하고 증언하는 내용임이 분명한데도 보수논객이라는 사람이 중뿔나게 나서서 제동을 걸고 나서는 이유가 먼지 의심스럽다. 자기의 심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전에 지성인의 진지한 사고력을 가지고 사려 깊은 판단을 해볼 것을 권고한다.

6). 5월21일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철수, 외곽을 포위했다. 이때 빠져나가던 시민들이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이런 상황에서 광주로 잠입했다면 국군과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을 것이다 . 정규군끼리의 충돌은 한 건도 없었다. 김일성(또는 김정일)이 5월18일 광주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그 부대가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다. 그때는 이미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도어 있을 때였다. 수백 명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는 없었다?

답 : 조갑제씨가 쓴 글을 보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선명하지 못하고 두리 뭉실하게 얼버무리는 것이 참으로 가관이고 일품이다.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어떤 목적으로 도발적으로 나서는지 내용을 봐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위에서 말한 내용들을 무엇 때문에 두 세 번씩 앞뒤 문장도 맞지 않게 반복하는가? 앞에서 조갑제씨가 언급한 부분에서 군인사망자가 23명중에 13명은 공수부대에 대한 국군교도대의 오인사격 등 진압군끼리의 충돌에 의한 사상자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국군교도대가 정규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진압군이라면 서로 아군이 아닌가?

북한이 말하는 대로 환각제를 먹고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면 아군끼리의 교전에서 어떻게 13명씩이나 사상자를 낼 수가 있으며 그 정도의 사상자가 날 정도의 교전이라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는 소린데 쌍방이 그렇게도 서로를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했다면 광주현장의 분위기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13명씩이나 죽도록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 편끼리 맞불질을 해대면서 죽일 내기했는데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이 보일수가 있겠는가? 현장에서 혹시 보았다 해도 보았다는 그 자체가 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북한수뇌부가 5월18일 광주상황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광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라고 날짜계산을 해가면서 머리를 갸우뚱 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조갑제씨의 영특한 판단이 무색할 정도로 북한수뇌부는 5.18 벌써 이전에 광주사건이 터진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고 특수부대 개입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내용이 김일성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7). 광주 사망자가 2000명이나 된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영화‘화려한 휴가’에서 나오는 학살 장면이다. 5월21일 정오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사격하여 수백 명을 다치게 하는 장면은 조작이다. 그런 학살도, 사격명령도 없었다. ,,, ,,, 이런 미신에 북한군 개입이란 또 다른 ‘미신’을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도는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

답 : 광주사건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는 자유북한군인연합이 광주사건에 대한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한 이후에 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알고 있다. ‘화려한 휴가’를 두리 뭉실하게 미신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북한정권의 사주를 받은 친북세력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들어낸 광주사건에 대한 날조와 조작의 산물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조갑제씨는 영화 ‘화려한 휴가’와 함께 북한특수부대의 개입도 미신이라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선전하고 있는데 본인의 의중이 정 그렇다면 광주사태 와중에 나타났던 민감한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질문을 피하지 말고 정확하게 대답을 하라.

첫째 : 광주봉기군이 교도소에 대한 습격을 6차례나 시도했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량한 시위자들이 교도소를 습격해서 죄수들을 구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조갑제씨는 이 사건을 어떤 각도에서 분석하는지 국민들 앞에서 대답하라.

둘째 : 머리가 장발(절대로 군인이 아니다)인 사람 7-8명이 군인복장을 하고 시위대 여러 명을 일 열로 꾸러 안치고 칼빈총을 들이대고 있다. 기자가 순간적으로 카메라에 담은 현장 상황이 아니라 준비된 포즈에 가까운 사진이다. 시위대가 무엇 때문에 군인복장을 하고 이런 장면을 연출해야 했는지 말해보라.

셋째 : 여성의 온 몸을 발가벗기고 두개골을 톱질하고 팔을 자른 사진과 여성의 목을 자르고 은밀한 부위가 그대로 노출된 사진이 있다. 5.18관련 단체들은 우리가 이런 사진을 공개하자 자기들은 국민들이 경악해 할까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조갑제씨의 주장대로 북한특수부대의 개입설이 미신이라면 어느 쪽이던 내부의 소행이라고 믿어야 되는데 진압군이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봉기군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하는가?

넷째 : 망월동 묘지에 신원미상 자가 상당수 있다. 2002년에 몇 명의 신원이 확인되었다고 5.18측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근거 적으로 확실하게 나와 있는 것이 없다. 이 사람들을 북한 측이 당시 현장에서 미처 회수하지 못한 시신들이라고 단정하기에도 현재까지는 무리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있어야 하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섯째 : 광주사건 사망자 중에 M16보다 칼빈에 맞아 죽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 부분은 광주에 내려왔던 북한당사자들의 증언에도 나와 있다. 북쪽의 증언과 남쪽의 자료가 서로 아귀가 맞는다고 봐야 한다. 칼빈은 봉기군이 들고 있었는데 오발사고에 의한 것이라면 제한된 인원은 벗어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정상이다. 한 둘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칼빈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하는가?

여섯째 : 1980년5월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을 당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5월23일 주민의 신고를 받고 체포한 사실이 있다. 이창룡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에 잡혔고 그의 몸에서는 현금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22종 339점이 발견되었다. 조갑제씨는 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북한쪽에서 들어올 통로가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분명히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한 명이 들어왔으면 백 명도 가능하다는 소리가 된다. 반박할만한 자신이 있는가?

광주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가 개입했던 사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며 진실이다. 광주문제를 사실에 기초해서 재조명하고 어두운 밑바닥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벗겨야 되는 것은 보수정권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국익의 관점에서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인 과제이다. 좌파, 우파의 개념이라든가 좌우의 이념적인 가치관역시도 어떤 형태로든 광주사태를 재평가하는 문제의 범위 안에는 절대로 개입될 수 없다. 조갑제씨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얼마나 비굴한 것인지, 그 대가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질 날이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유북한군인연합 대 표
탈북기독군인연합회 대표회장 임 천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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