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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cla4927] 쪽지 캡슐

2008-11-10 ㅣ No.8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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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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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광주에 숨겨진 검은 지휘부


                                                 강릉작전 중계방송 사건

광주사태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강릉작전에서 김동신 합참 작전본부장(전 대간첩본부장)이 보여준 의혹의 행위부터 알아보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이다. 필자는 김동신 전 국방장관을 이미 좌익으로 정의했고, 그 이유를 나열한 바 있다. 1996년 9월18일 강릉에 잠수함이 침투해서부터 합참작전본부장 김동신 중장 주도 하에 996.9.18-11.07까지 51일 간 작전을 했다. 무장간첩 26명, 사살13, 자살 11, 생포1, 도주 1이었다. 우리측 피해도 많았다, 대령 및 대위 2명. 하사관 1명, 사병 4명이 사망했고, 17명이 부상했다. 민간인 사망자도 여러 명 있었다.

이 때 김동신 중장(육사21)은 두 가지 석연치 않은 조치를 취했다. 하나는 8군단장(육사22)이 현지에서 포위망을 압축했고, 남은 간첩 3명을 잡는 일이 시간문제로 보였을 때 김동신은 아무런 이유 없이 강압적으로 포위망을 풀어주라 했다. 풀려난 간첩은 수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표일병을 죽이고 기무사 대령을 사살한 후 달아났다.

다른 하나는 작전 상황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신문에 발표하고 TV , 라디오 등에 생방송을 하도록 했다. 세계에서 이런 예는 없을 것이다, 간첩들이라면 그 방송을 듣고 아군 배치와 작전개념 및 이동사항을 파악하고 이에 따라 도주할 것이라는 상식 정도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작전상황과 내일의 계획을 방송을 통해 알려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군사기밀 유출 에 해당한다. 김동신의 중계방송 허용은 간첩들에게 알아서 빠져 나가라는 호의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언론보도는 이러했다.

1) 조선일보(1996.10.10)“10월 초 군은 돌연 합참 지시(당시 김동신 작전본부장)로 포위망을 풀고 수색병력을 훨씬 북쪽으로 재배치했다. 그래서 강릉 일원의 포위망이 풀렸다. 10월9일 민간인 3명이 강릉 일원 즉 포위망이 쳐져있던 지역에서 사살되었다.”

2) 중앙일보(1996.11.11): “작전실패의 쟁점은 강릉 칠성산 일대의 포위망 해체건이다. 군은 잔당일 10월2일 포위망 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북쪽으로 빼냈다. 잔당들에게 도주로를 열어준 셈이다. 잔당 2명이 남긴 수첩에는 포위망을 푸는 틈을 이용하여 칠성산을 벗어나 오대산에서 민간인 3명을 사살했다.”

3) 동아일보(1996.11.8): “10월3일 이후 잔당은 학교에서도 잤다. 용평 스키장, 민가침입, 3군단 사령부 촬영했다. 포위망이 풀려 가능했던 일이다.  

4) 중앙일보(1996.11.8):“무장공비 2명에서 나온 수첩은 한국군의 소탕작전이 얼마나 엉성하고 착오 투성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49일간의 이들의 도주행각을 보면 26명 중 25명을소탕한 게 우연이었을 뿐, 작전이 주효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해 해주고 있다.”  
  
위 사실들이 어느 정도 암시하듯이 김동신은 좌익이었다. 그러나 그는 6.25때 군에 간첩이 없었다며 필자에게 고소를 했다가 스스로 취하한 바 있다.(조선/동아일보 2002.5.7)
  
그의 주장대로 군에는 간첩이 없는가? 아래는 국군기무사령부의 간첩검거실적이다.  

1) 군 주요 보직자 포섭, 지하당 구축 및 군사기밀 탐지 간첩('74.9.검거)
2) 군인가족을 통해 군 장성 포섭을 기도한 간첩('77.4.검거)
3) 고교생이 사관학교 장교로 침투한 간첩('86.8.검거)
4) 해군간부인 형을 통한 군사기밀 탐지 간첩사건('84.7.검거)

                                                     군 지휘부에 들어 찬 간첩

전 외무부 장관 최덕신, 해군 참모차장 이용운이 간첩이었다. 최덕신은 정전위위원회 한국측 대표였으며 육사교장이었다.

"군번 1번의 외길 인생 이형근 회고록"(중앙일보사) 제55족-57쪽에 군수뇌부에 숨어있는 간첩을 의심하는 10대 불가사이가 기록돼 있다.(최근글에 이형근으로 검색)

1975년 패망직전의 월남정부와 군부에는 간첩들이 우글거렸다. 대통령 비서실장, 군사령관, 부통령, 대통령 출마 차점자 등 수많은 핵심부서들을 간첩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989년 동독이 패망하기 직전까지 서독정부에도 간첩들이 우글거렸다. 동독의 정보기관인 슈타지 문서가 노출되면서 ‘정권의 골키퍼가 간첩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슈타지는 고위층 인물들의 사생활을 조사해 이를 약점잡아 입을 막고 조종했다. 우리 사회에는 이보다 더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5.18 광주사태의 중계방송

사건 당시 광주에서는 KBS, MBC 방송국들이 불에 타서 방송을 하지 못했고, 시민들이나 군은 북한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5.18 시위대에는 13명의 방위병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이재춘씨는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엄분소장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역시 같은 진술을 했다. 1996.7.11. 5.18사건 제1심 21차 공판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전남 도청 안에 적색분자가 섞여 있다. 그 근거로는 북괴의 개성 통혁당 방송에서 상무관하고 도청  사이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위와 같은 사실을 방송한 것을 정보참모로부터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 밖에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장군,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 등 많은 이들이 광주작전의 실황이 북한 방송을 통해 중계됐기 때문에 광주에서의 상황전개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유능한 간첩이라 해도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 오직 자기가 위치해 있는 곳에 대한 상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수많은 간첩들이 요소 요소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평양으로 보내면 평양의 작전사령부 상황실이 이를 종합하여 간첩들에게 방송해주는 메커니즘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강릉작전 실황중계 방송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광주에 보이지 않는 북한 지휘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들

1) 수많은 이창룡들:

5.23일 06:15분, 서울역에서 간첩 이창룡(평양시, 중구역, 계림동 36번지)을 주민의 신고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검거했다. 이창용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다. 현금 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등 22종 339점을 압수했다.

광주와 서울을 연계시키기 위해 왕래했을 것이다. 김일성 명령을 하늘처럼 따르는 북한에서 김일성이 남한에 '전민봉기'를 일으키라는 명령이 떨어진 판에 노동당원 김대중의 고장에 남파된 간첩들이 어찌 이창룡 한 사람 뿐이었겠는가?

2) 5월21일, 4시간 대에 17개 시군, 38개 무기고, 광업소에서 5,403정,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

5월21일 아침 9시, 1시간 전인 오전 8시에 20사단으로부터 빼앗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다. 이는 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간다.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들은 오직 간첩이라는 것이 필자의 상식이다. 시민들이라면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에 좌표를 찍어가지고 이러 저리 방황할 시간조차 없는 4시간대에 쏜살같이 17개 시군에 널려 있는 무기고로 달려간다는 것은 간첩으로 이루어진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불과 4시간 내에 38개 무기고가 피탈되었다는 것은 38개 팀 한팀 한팀 모두가 위치를 정확히 알고 떠났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다.

3) 간첩망, 광주교도소 습격하라 지령:

5월 21일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있는 수개의 고정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해방”을 시키라는 지령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전교사는 이러한 북한의 지령에 비추어 광주교도소의 습격이 제5열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21일16시30분경에 당시 전남대에서 시위대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던 3공수여단을 광주교도소로 긴급 출동시켰던 것이다. 12시경에 APC 등 차량 9대를 앞세운 무장시위대가 총기를 난사하며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당시 광주교도소를 경비하고 있던 31사단 96연대 2대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4) 계엄분소 지휘부에도 간첩들:

군의 작전정보가 시위대에 새나간 사례들이 매우 많다. 그 중 중요한 것들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5.21.08:00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부를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지프차 14대와 M-16 4정을 포함하여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 5.21.0800 상무대에 도착한 20사단 61연대가 광주교육대학으로 이동했지만 정보가 미리 알려져 돌고개 지역에서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혀 전교사로 회군했다.

* 5.21.12:00시, 윤흥정은 21일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에게 공수부대로부터 도청 방어임무를 인수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게이트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부 간첩이 시위대에 정보를 준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 5.24일 오후 효천역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병력이 이동 중에 있던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미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켰다. 11공수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당시 교도대에는 무장시민군이 군용차량을 탈취하여 그 쪽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받아 바짝 긴장을 하고 있다가 11여단 장갑차가 모퉁이를 돌자 무반동총 4발을 발사한 것이다. 그러나 교도대가 받은 정보는 군 이동에 대한 비밀을 아는 교활한 내부 간첩이 제공한 역정보였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 전교사 사령관은 작전정부가 계속 새나가고 있음을 감지하고 광주재진입작전의 기습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 27일00시경 광주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하고 26일22시경에 열린 작전회의에서는 광주재진입작전을 무기연기 한다고 발표한 후 작전지휘관에게만 작전개시 직전에“작전개시일은 27일 새벽1시”라고 통고하는 등 기밀유지에 노력했다. 기밀을 유지했는데도 불구하고 3공수여단이 숙영지를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27일 새벽 1시경에 확성기를 단 지프차가 광주 시내를 질주하면서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는 사실을 방송함으로서 광주 진입로의 주요 목 지점에 있던 무장시위대가 준비태세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지휘본부인 도청 건물 내에 있던 무장시위대 150여명이 광주공원에 있던 무장시위대 100여명과 합세함으로써 3공수여단 특공조(80명)가 예상 밖의 수적 열세에 봉착하게 되었다. 7공수여단 특공조가 광주공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무장시위대가 계엄군이 출동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이미 떠난 뒤여서 광주공원에는 무장시위대가 한명도 없었다. 7공수여단 특공조는 광주공원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을 실시하다가 매복 중이던 무장시위대의 기습을 받아 특공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당했다.

5) 5.18 직전 4개월에 간첩남파 증가

1979년 12개월간 검거된 간첩사건은 불과 5건이었는데 반해 1980년 5월초까지 4개월간 발생한 무장간첩 침투사건은 무려 10건이나 되었다. 이 10건 중 7건이 1980년의 3월부터 5.18 발생 직전까지 2개월 반 동안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79-80의 언론보도집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들이 있다. 물론 잡힌 간첩들은 재수가 없어 잡힌 것이지 안 잡힌 간첩은 잡힌 간첩의 수십-수백 배는 될 것이다.  

1) 1980년3월1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2) 1980년3월23일, 서부전선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가 아군에 발각되어 교전하다가 도주했다. 3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했고, 소음기가 달린 기관권총, 물갈퀴 등과 암호문을 노획했다,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 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3) 1980년3월25일. 무장간첩선 1척이 포항만으로 침투하다가 해군에 의해 침몰하여 무장간첩 8명이 사살됐다.

4) 1980년3월27일, 강원도 15사단 정면에서 남하하던 공비와 교전상황이 발생했다. 모두가 도주했고, 무장공비 1명만 사살됐다.

5) 1980년5월12일, 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공비와 미군 사이에 또 교전이 발생했다.

6) 1980년5월15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국초소 전방 20m가지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미군과 교전하다가 돌아갔다.

7) 1980년5월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을 5월23일에 체포했다.

6) 수십명의 시민에게 카빈총 쏜 집단도 간첩

M1, AR, 카빈소총은 무기고에 있는 것들로 난동자들만이 가지고 있었다. 총상에 의한 사망자 117명 가운데 80%에 해당하는 88명은 난동자들의 오발, 민가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학살, 강온 양파간의 대립으로 인한 총격, 군을 모략하기 위한 학살 등으로 구성돼 있다.

타박상 사망자 18명은 탈취한 차량을 몰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했고, 수류탄 파편상 12명은 난동자들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에 의한 것이었다. 계엄군은 수류탄을 소지하지 않았다. 11명의 자상은 계엄군을 모략하여 적개심을 일으키기 위해 잔인하게 저지른 것이었고, 화상에 의한 4명의 사망자는 난동자들이 지른 불에 타죽은 것으로 파악됐다.

계엄사는 이러한 사인을 의사, 변호사, 군수사기관, 시민대표로 구성된 합동조사반에 의거 소상히 규명하여 유가족들로 하여금 확인토록 공시함으로써 136명의 사망자 유족들은 위 사실을 시인하고 인수해 갔으나 26명의 사망자에 대해서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아 공원묘지에 가매장했다.    
  
1995년 검찰 조사결과는 민간사망자 166명 중 165명에 대해 사인을 분류했다. 165명중 총상은 80%에 해당하는 131명, 자상 4, 타박사 18, 차량사 12로 단순화됐다. 총상 131명 중 74%가 M-16 총상, 나머지 26%에 해당하는 35명이 카빈총상(26명) 및 기타총상(9명)으로 분류돼 있다. 기타총들은 M1, AR, 기관총 등 시민군이 소유한 것이고 계엄군에게는 오직 M-16만 있었다. 광주에서 35명이 시민군 총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7) 여인들을 나체로 난자한 집단도 간첩:

5.18 사진들에는 나체의 여인들을 난자하고, 목을 자르고 머리를 으깬 처참한 모습의 시체들이 존재한다. 특히 광주세무서 지하에서 발견됐다는 나체의 난자된 여인은 계엄군과 무관한 시체다. 이런 모습의 살해방법은 빨치산식 살해 방법이며 광주에 퍼트린 유언비어와 일치한다.

8) 강명도의 증언:

북한에서 망명한 거물 강명도씨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240쪽에는“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다. 구태여 강명도씨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국민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이 책 241쪽에는 “나의 친구 이화섭은 5.18이 터지자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말해주었다”는 구절도 있다.
    
9) 거물간첩 출신 김용규의 증언:

거물간첩으로 전향한 김용규는 “소리 없는 전쟁”(1999.11.1일, 원민)에 김대중과 5.18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대중 집권이 만 2년 되는 시기에 그는 매우 용감한 책을 쓴 것이다. "5.18은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고, 김대중은 북이 키웠다.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10) 북한 공작원남파  

* "북한은 5.18때 정찰국 소속 정찰대원 3개조를 광주에 파견했다"(조선일보 최주활 상좌)

* "당시 정보기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북괴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으니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다"(계엄사 157쪽 6-8줄).

* "북한 최대의 대남 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명의 정예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 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서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김중린이 시기를 놓친 것이다"(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0쪽 끝줄로부터 241쪽 4줄).

11) 탈북한 북한특수군 요원들의 증언

수많은 탈북자들은 5.18을 “북한이 벌인 실패한 작전’이라고 입을 모은다. 평시에는 하루 종일 방송을 하지 않던 북한이 5.18 때에는 하루 종일 중계방송 하듯이 광주사태를 중계방송했고, 공수부대원이 칼로 임신한 여인의 배를 찢어 태아를 꺼내내는 잔악한 현상을 방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를 본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유북한군인연합 회원들은 광주사태의 당사자들도 아니고,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도 아니며, 여러 가지 진술내용과 사진들을 볼 때에 군에 오랜 동안 몸을 담고 있었던 필자에게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5.18의 공식 지휘부는 없어

5월21일까지 5.18 시위를 지휘한 지휘부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더러는 윤상원이 지휘자라고 하지만 그 한사람이 위와 같은 5월21일의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다. 김종배, 박남선, 윤상원은 5월22일부터 나타난 사람들이다. 김종배 26세 학생으로 5월22일부터 무기회수에 반기를 든 학생일 뿐이고, 윤상원은 5월22일에 결성된 학생대책위원회 대변인이었고, 화려한 휴가에서 시민군대장으로 등장한 박남선은 26세의 골재 화물차 운전수에 불과한 풋내기였다.  5.18의 일사분란한 작전을 지휘할만한 지휘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광주에 검은 지휘부가 있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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