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성

순교자들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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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숙 [hsryu] 쪽지 캡슐

2001-02-21 ㅣ No.1

 

   제목: 순교자들의 신앙

 

   이 내용은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의 일부로서 김대건 부제가 1845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서울에서 작성하여 상해에 가지고 가서 그 해 7월에 라부아 신부에게 발송한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당신들의 선교지였던 조선 땅에서 기꺼이 순교하신 모방신부님과 샤스땅 정 야고보 신부님의 삶을 묵상함으로써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 받으려는 굳센 결심을 불러 일으켜 순교자 성월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목적으로 이 글을 올립니다.

 

 

   모방 신부

 

   조선 선교지의 대목구장 직무대행인 나 베드로.

   지극히 공경하올 모방 신부님은 1834년 음력 12월 7일에 조선 선교지에 입국하였습니다. 4년 동안 선교지에서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4년 동안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영혼들을 구하려는 열정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자주 금식재를 지켜 자기 육신을 학대하였습니다. 여러 번 목마름과 굶주림에 지쳐 쓰러졌습니다. 자주 밤중에 신자들을 방문하려고 깊은 산속을 걸어갔고 어느 때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길을 갔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떤 때는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걸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신자들을 방문할 때는 한번도 말을 타지 않고 걸어다녔습니다. 그렇게 참으면서 즐거워하였고 "이것이 좋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백성들을 말과 모범으로 가르쳤고 정성을 기울여 성사로 양육하였으며 미숙한 신자들을 더욱 자주 가르쳤으며 의문 나는 것을 자상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돈과 옷을 후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박해가 심해지자 숨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먼저 샤스탕 신부님한테로 갔습니다. 두 신부님이 함께 지내는 동안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은 당신이 계시는 곳으로 즉시 오라는 기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신부님이 주교님한테 가서 2일간 함께 지냈습니다. 그 다음 두 신부님은 용당리라는 교우촌으로 갔습니다. 두 분은 도망가기보다는 죽기를 원하면서 그곳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며칠 동안 머물러 지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최베드로 복사에게 서울에 가서 소식을 듣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도망하려고 배를 탔습니다.

   그 동안 주교님이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가시고 얼마 후에는 이 토마스와 최 베드로 두 복사도 잡혔습니다. 주요한 신자들이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이러한 풍파 속에서 주교님은 두 분 신부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법이오. 속히 이리로 오시오. 그러나 신자들은 그대들을 따라오도록 허용하지 마시오.’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두 번, 세 번 보냈습니다.

  그래서 두 신부님은 포졸들한테 자진하여 나가서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주교님과 함께 같은 날 1839년 9월 21일 마태오 사도 축일에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모방 신부님은 그때 나이 35세였습니다.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공경하올 샤스탕 신부님은 천성이 유순하고 이웃 사람들에 대한 애덕이 특출하며 인내심도 적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의 고해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선말을 충분히 익히자 여러 시골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동안 목마름·굶주림·추위와 그 밖의 무수한 간난신고를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겸손·절제와 그 밖의 덕행도 감탄할 만큼 두드러졌습니다.

   신자들을 만날 때 가장 좋은 어머니와 같은 사랑으로 대하였고 좋은 아버지처럼 가르쳤습니다. 특히 비참함을 견디어 내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행복으로 여겼습니다.

   가난한 이와 비참한 신자를 보면 몸소 위로하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후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의 옷마저 그들에게 주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면서 신자들을 위로도 하고 도움도 주며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감옥에 갇힌 양들을 위하여 구호금을 모아 도와주었습니다. 나날이 하느님의 사업에 더욱 열중하였습니다. 신자들에게 성사를 받아 튼튼해지도록 더욱 배려하였습니다.

   마침내 법정으로 오라는 주교님의 명령을 받은 그는 마치 잔칫집에 가는 것처럼 보일 만큼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편지로 모든 신자들을 위로하고 체포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님도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두 분 신부님은 체포되기 전에 모든 신자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각각 썼고 동시에 두 분이 함께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들과 더불어 죽으러 가기로 결심하였으나 금지되었습니다. 그 풍파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신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법정에 나아가 순교하였습니다.

   샤스탕 신부님은 주교님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때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맺 음 말

 

   지극히 존경하온 신부님들!

   먼 먼 이국 땅에서 하느님을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그토록 많은 고초를 겪었던 신부님들의 삶 앞에서 부끄러운 이 마음을, 터져 나오는 탄식을 어찌해야 합니까! 신부님들의 순교 대가로 저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 받게되었다면 결국 저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부님들의 피로 닦여진 이 땅위에 서 있기가 부끄럽습니다. 저희들의 보잘것없는 신앙생활을 볼 때 감히 견줄 수가 없어 실망스럽고 두렵습니다.

   하오나 신부님, 당신들은 103위 성인들과 더불어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열렬히 원하셨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로 흘린 피가 천상에서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고 있으니 불쌍한 저희들을 위하여 전구하여 주십시오. 세속과 육신과 마귀가 사나운 이리떼처럼 달려드는 이 세상에서 모든 후손들이 천상에 개선하여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제발 도와 주십시오. 모든 순교자들의 대열에 함께 설 수 있도록- .

   하느님의 정원에 적의순교로 붉은 꽃을 피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들은 백의순교로 흰 꽃을 피워 더욱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습니다. 저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겪게되는 수고와 노력이, 기도와 희생이 흰 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작은 꽃송이를 만들겠지만 일생동안 충실히 노력한다면 결국 작은 꽃송이들이 무리가 되어 당신들이 피운 큰 꽃송이만큼이나 클 것입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와 순교자들의 열렬한 전구를 믿기 때문에 저희들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희망으로 건너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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