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들의 영성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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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숙 [hsryu] 쪽지 캡슐

2001-02-21 ㅣ No.4

                            예수의 데레사

      

                                                                                             (축일 10월 15일)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예수의 데레사(1515~1582)는 1536년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성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기도와 희생 그리고 높은 성덕으로써 교회 안에 새로운 위치와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르멜의 옛 나무를 쇄신하였다. 가르멜 성조들의 교의(敎義)의 영향은 완전한 신뢰와 단순성 그리고 사랑의 ’작은 길’안에 확실하게 나타났다. 가르멜의 개혁자들인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과의 변모(變貌)의 일치를 위해 자기 희생과 포기 그리고 더 나아가 만족이나 자연적인 것까지도 영혼 안에서 비워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소화 데레사는 무(無:Nada)라는 낱말을 영혼들을 위해 예수님께 꽃잎을 따서 바치기를 원한 장미들, 즉 작은 희생들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데레사는 신비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대한 체험은 신앙으로 완성을 얻게 된다. 그 생애의 성덕은 1622년 3월 12일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께서 시성을 선포 하심으로 더욱 더 부각되었다. 성녀의 교의(敎義)는 복음과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 위에 그 기초를 두고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여성으로는 최초로 교회학자 칭호를 성녀에게 수여함으로써 1970.9.27 교의(敎義)의 탁월함을 재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데레사에게 있어 교의(敎義)의 보고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그것은 의심 없이 당신의 지성에서, 문학적, 영성적 교양과 독서에서, 신학 및 영성계의 권위자들과의 접촉에서, 당신의 그 남다른 감수성에서, 끊임없고, 빈틈없는 고행생활에서, 당신의 관상적 묵상, 한마디로 기도의 실천과 경험을 위하여 마련된 풍요롭기 짝이 없는 당신의 영혼에 내려진 은총에의 응답에서 온 것이다.

성녀는 우리가 단시일에 완전한 하느님의 사랑에 이르는 비결을 묵상기도라고 가르친다. 이 기도의 스승께서는 설령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묵상기도를 그치지 말기를 간곡히 권한다. 성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하느님 사랑으로 불타 오를 것이다.

 

나는 오늘 주께 빌면서 내 대신 말씀해주소서 하고 있노라니,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영혼을 금강석이나 아니면 맑디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궁성으로 보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마치 하늘에 자리가 많듯이(요한 14,2 참조) 여러 궁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영혼 하나의 그 놀라운 아름다움, 그리고 그 놀라운 힘을 어디에 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사고력이 제아무리 날카롭다 할지라도 하느님을 꿰뚫어볼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을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모습 따라, 당신과 비슷하게 만드셨다고 친히 말씀하신 까닭입니다.(창세 1,26 참조). 이것이 잇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면 이 궁성의 아름다움을 깊이 알아내려는 마음이 권태를 느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 그럼 생각해봅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이 궁성은 여러 궁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높은 데 있는 것, 낮은 데 있는 것, 또한 옆으로 자리잡은 것들도 있는데, 그 모든 궁실 맨 한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왕실로 하느님과 영혼 사이의 그윽한 비밀이 거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를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정녕코 하느님은 이 비유를 가지고 당신께서 영혼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들이며, 그 은혜들 가운데는 등차가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여러분이 알아듣게 해주실 것입니다.

실상 많은 영혼들은 파수병이 있는 성의 원장(垣牆)에만 머물러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마음도 없고, 그렇듯 찬란한 곳에 무엇이 있는지, 어느 분이 그 안에 살고 계시는지, 그리고 궁실은 몇 채나 되는지 조금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에 관한 책들을 읽었을 터이고, 영혼은 " 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거기서 들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대학자가 내게 하시는 말씀이,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마치 손과 발이 말을 안 듣는 중풍환자 아니면 병신과 같다고 하셨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어떤 영혼들은 어찌나 병이 깊고 바깥 일에만 정신이 쏠려버렸던지 자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뿐더러 그럴 수 있는 싹수마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내 나름으로는, 기도와 생각입니다. 구태여 나는 여기서 구송기도보다 묵상기도를 더 내세우지 않습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라도 생각이 함께 있어야 하기에 말입니다. 사실 누구와 말하는지도 모르고, 비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누구에게 비는 것인지 생각지 않는 것은 아무리 입술을 많이 놀린다 해도 나는 그것을 기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이런 주의를 일일이 안 하더라도 참다운 기도가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평소에 그런 주의를 해온 결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엄위로우신 하느님과 대화를 하면서도 마치 제 종과 이야기하듯 버릇이 든 사람, 여러 번 거듭하여서 익히 기도를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대로 중얼거리느라고 말이 잘못 나오는지 생각지도 않는 사람의 기도를 나는 기도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 따위를 기도로 아는 그리스도인이 없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앞으로 이야기를 해나기 전에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 아름답고 눈부신 궁전, 이 동방의 진주,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이 바로 그 생수 가운데다 심어주신 이 생명의 나무가 대죄 하나만 지어도 어떻게 되는지 깊이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캄캄한 어둠이 없고, 그토록 시커멓고 침침한 것은 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성녀 자신을 말함 - 역주)에게 우리 주께서는 대죄를 지을 때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즉 사람들이 대죄의 상태를 안다면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 위해서 별의별 고생을 다 겪는다 치더라도 누구도 죄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타오르는 야망을 품게 되어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따님들도 그런 야망을 품게 되어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 즉 온통 어두운 존재로 그 하는 일도 시꺼멓게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간절히 빌어주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맑디맑은 물의 근원이 있으면 거기서 흐르는 실개천 물도 맑은 것처럼, 영혼이 은총 안에 있으면 거기서 나오는 일들이 하느님과 사람들 눈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위의 그분은 하느님이 내리신 은혜 중에서 두 가지 이익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배반할세라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 그러기에 무서운 벌을 보고도 떨어질세라, 언제나 주께 비는 것입니다. 둘째는 겸손의 거울… 이것을 가지고 그는 우리가 하는 좋은 일이 우리의 바탕에서 오지 않고, 오직 우리 영혼의 나무가 심어진 그 샘, 우리의 일에 열을 주시는 그 해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또 덧붙여서 말하였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는 자기가 어떤 좋은 일을 하거나 남이 하는 것을 보거나 언제나 그 바탕을 찾게 되고, 따라서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듣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 때문에 지체없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고 좋은 일을 하는 경우에도 자기 힘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안하는 것이 아주 버릇이 되어버렸다고…

그럼, 이제 궁실이 많다는 그 궁성으로 되돌아갑시다. 영혼에 관한 일이라면 항상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가지고 생각해야 됩니다. 영혼은 우리가 아무리 높이 평가 하더라도 평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과장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영혼의 구석구석을 궁성 안에 계시는 해님이 두루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일은 많든 적든 기도를 하는 어느 영혼을 한쪽에 가둬두거나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위든, 아래든, 옆이든 영혼이 제 마음대로 이 궁실들을 드나들게 버려두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마어마하게 높여주신 영혼을 오랫동안 한 궁방에만  가둬둔다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그 궁방이 자아 인식의 방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무릇 자아 인식이란 주께서 당신이 계시는 궁실 안으로 끌어들이신 그러한 영혼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제 아무리 높이 오른 영혼일지라도 자아 인식을 잊지 못할 것이고, 잊으려 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겸손은 마치 벌통에서 꿀을 빚는 벌과 같이 항상 일을 멈추지 않는 까닭이니, 일손을 멈추는 날엔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할 때, 그 꿀벌도 꽃을 찾느라 집을 나와서 날아다닐 수가 있습니다. 자아 인식을 하는 영혼도 그와 같아서 때로는 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엄위로우심을 우러러보기 위하여 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때보다 훨씬 더 스스로의 비천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어주십시오. 자기의 비참을 응시하기보다는 하느님의 힘을 우러러봄으로써 우리는 더욱더 덕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려고 힘쓰지않으면 절대 자아 인식에 도달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 합니다. 높고 높은 당신을 우러러보노라면 낮고 낮은 우리가 다가오는 것, 당신의 겸손을 익히 생각하노라면 겸손에서 아득히 먼 자신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악마는 항상 나쁜 뜻을 품고 있는 놈이라 궁방마다 그 패거리가 득실 거려서 영혼들이 이 궁방에서 다른 궁방으로 옮겨 가지 못하게 합니다. 가엾은 영혼은 그런 줄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별의별 환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싶지 않고,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영혼은 쉽사리 정복당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될 일은 되도록이면 자주자주 하느님과 전구자이신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게 빌어서 당신들이 그들 대신 싸워주시라 하는 것입니다. 영혼에 딸려 있는 그 능력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니, 바라건대 주님은 당신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를 거두시기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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