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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필독] 3자들 사이의 자연적 사랑 dilectio 에만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이 가능하다 773_love divine_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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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8 ㅣ No.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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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질문: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의 배경/전제는 무엇인지요?

 

1. 들어가면서

1-1. 다음에 있는 최근의 글에서,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인성(人性)적 사랑(human love)의 차이점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였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꼭 필독권고

 

따라서, 본글은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졸고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1-2. 그런데, 한편으로, 속(屬)적(generic) 사랑(amor)에는 크게 네 개의 종(種)적(special) 사랑들, 사욕편정(에 기인하는) 사랑(amor, love of concupiscence), 우의(에 기인하는) 사랑(love of friendship), 편애/애모(dilectio), 까리따스(caritas, agape)이 있으며, 이들  네 종류의 사랑들 중에서 특히 종(種)적(special) "amor (love of concupiscence)"와 종(種)적(special) "dilectio"가 언제 동일(the same)한지에 대한 서술은,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26, a3 에 주어져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4.htm <----- 필독권고

 

1-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글에서, "사랑하다(to love, amo)"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또한 함께 고찰하였는데, 특히 이 글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사용되고 있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사랑"에 대응하는 라틴어 단어가 "dilectio"이고 그리고 이 라틴어 단어의 의미/정의(definition)가, "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질문 4를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 필독권고 

 

2.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연역적으로(deductively) 추론합니다:

 

2-0. (이 글의 결론) 자연적인(natural),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인, 즉, 자연적 윤리덕(natural human virtue)인 "piety"를 그 속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dilectio" 의 여건[즉, 사고의 틀(the frame of thought), 즉, 마음의 틀(the frame of mind)] 아래에서만 오로지 다음의 제2-1항제2-2항이 가능합니다:

 

2-1. 그리스도교 세례에 의하여 현실태화/형상화 되는, 따라서 초자연적인(supernatural), "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인 "dilectio"라는 여건[즉, 사고의 틀(the frame of thought), 즉, 마음의 틀(the frame of mind)]이, (i) 형성되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를 하느님께서 먼저 항상 욕망하시는(desires) 바인 "당신의 피조물인 나를 항상 부르고 계심"에 화답하는, 망덕/희망(hope)이라는 하느님과 당사자(subject)인 나(I) 사이의 욕망(desire)이라는 관계의 경우에는, 피조물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을 위한(for) 하느님에 대한 사랑(the love of God)임이 자명하고, 그리고 (ii) 우리들 쪽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에 화답하여, 바로 이 사랑이라는 관계의 방향성(directionality)이 우리들에 의하여 하느님 쪽으로 향하게 될 경우에는 [즉, 하느님을 위할(for God) 때에], "하느님을 위한(for) 하느님에 대한 사랑(the love of God)"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2-2. 그리고 또한, (iii) "바로 위의 제2-1항의 여건[즉, 사고의 틀(the frame of thought), 즉, 마음의 틀(the frame of mind)] 아래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the love of neighbor)"은, "하느님을 위한(for)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 될 수 없음에 반드시 주묵하십시오. 그리고 그 역은 당연히 성립합니다.

 

2-3. (iv) 더 나아가, "바로 위의 제2-1항의 여건[즉, 사고의 틀(the frame of thought), 즉, 마음의 틀(the frame of mind)] 아래에 있는 자로서 "하느님을 위한(for)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행하는 자는,

 

왜냐하면, 예를 들어, 원수마저도 사랑하여야 하는 바로 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말 번역본이 아닌]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에 명기된, 신성적 사랑(divine love)에 있어서의 초자연적(supernatural) 표준(standard)/ 규범(precept)을, 은총(grace)의 한 결과인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은총(grace)을 수여받지 못하고, 그 결과로, 신성적 사랑(divine love)에 있어서의 초자연적(supernatural) 표준(standard)/ 규범(precept)을, 은총(grace)의 한 결과인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으로서, 결코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요한 복음서 14,15; 14,21; 14,23; 14,24),

 

한 개의 필요 조건(a necessary condition)으로서, "하느님을 위한(for) 하느님에 대한 사랑(the love of God)"전건(前件)적으로 그리고 우선(于先)적으로 만족시켜야 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3.

3-1. 바로 위의 제2-1항에서 말씀드린 바는, 마태오 복음서 22,37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라"에 대응하는 한 표현이고, 그리고 바로 위의 제2-2항에서 말씀드린 바는, 마태오 복음서 22,39에서 말하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에 대응하는 한 표현임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3-2. 따라서,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이,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위의 제2-1항사랑(dilectio)과 위의 제2-2항사랑(dilectio)으로 구성됨을 확인하였습니다.

 

3-3. 다른 한편으로, "애덕(caritas, charity)"신성적 사랑(divine love)에 포함되고, 그리고 그 역이 일반적으로 성립되지 않음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꼭 필독 권고 

 

4.

4-1. 위의 제1항, 제2항, 그리고 제3항에 서술된 바는, 예를 들어, 갈라티아서 5,14(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구현됩니다(is fulfilled)(*).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랴." 하신 계명입니다)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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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여기서, 예를 들어 "구현됩니다" 혹은 "성취됩니다" 대신에, "요약됩니다"로 번역된 "새 번역 성경"의 해당 표현은 번역 오류가 분명하다. 이 지적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6.htm <----- 필독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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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의 다음의 가르침의 신학적 근거를 대단히 분명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제시함에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13.htm

(발췌 시작)

14-15. To prepare the way for the coming of the Redeemer, God revealed to the chosen people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the natural law, because, as a result of original sin and personal sins, mankind's knowledge of these principles have been obscured and weakened. The ten commandments which he revealed to Moses (Ex 20:1-21; Deut 5:6-22) traced out very clearly the way to follow to please God and be saved (cf. Lev 18:5; Neh 9:29; etc.).

 

14-15. 구속주(Redeemer)의 오심을 위한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백성에게 자연법(the natural law)의 근본 원리들을 계시하셨는데, 왜냐하면, 원죄(original sin)와 본죄(personal sins)들의 한 결과로서, 이들 원리들에 대한 인류의 지식이 이미 모호하게 되고 그리하여 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모세에게 드러내셨던 십계명들(탈출 20,1-21; 신명 5,6-22)은 하느님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구함을 받기 위하여 뒤따라야 하는 길(the way)을 매우 분명하게 그렸습니다(traced out)(레위 18,5; 느헤미야 9,29 등을 참조하라).

When the Savior came, the Decalogue continued in force, because it was part of the natural law. Indeed, Christ reinforced it and showed that the key to and essence of the ten commandments is Love--love of God, which necessarily brings with it love of neighbor (cf. notes on Mt 22: 34-40 and Jn 13:34-35).

 

이 구속주께서 오셨을 때에, 십계명은 계속 구속력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법의 일부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께서 이 법을 강화하셨고 그리고 이 십계명 쪽으로 열쇠(key)는 그리고 이 십계명의 본질(essence)은, 그것과 함께 이웃에 대한 사랑(love of neighbor)을 필연적으로 가져다 주는하느님에 대한 사랑(love of God)을 말하는, 사랑(Love)입니다(마태오 복음서 제22장 및 요한 복음서 13,34-35에 대한 주석들을 참조하라)..

"It might also be asked", St Augustine comments, "why the Apostle here speaks only of love of neighbor, saying that this way the whole Law is fulfilled [...], when in fact charity is perfect only if one practices the two precepts of love of God and love of neighbor [...]. But who can love his neighbor, that is, all men, as himself, if he does not love God, since it is only by God's precept and gift that one can love one's neighbor? So, since neither precept can be kept unless the other be kept, it is enough to mention one of them" ("Exp. in Gal.", 45). See also the note on Rom 13:8-10.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왜 이 사도가 여기서, 비록 사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두 개의 규범들을 실천할 때에만 오로지 애덕(charity)이 완미하게 될(is perfect)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율법 전체가 구현된다고 말함으로써 [...], 단지 이웃에 대한 사랑만을 말하는지가 또한 질의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가, 왜냐하면 어떤 자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규범(precept)과 선물(gift)에 의하여서만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웃을, 즉, 모든 사람들을,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할 수 있겠는지요? 그래서, 왜냐하면 만약에 다른 규범이 준수되지 않으면, 어느 규범도 준수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은 충분합니"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Exp. in Gal.", 45]. 또한 로마서 13,8-10에 대한 주석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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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왜냐하면, 애덕(charity)이 신성적 사랑(divine love)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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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4-2. 사실, 갈라티아서 5,14[(졸번역)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구현됩니다(is fulfilled).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랴." 하신 계명입니다]중요성은, 1요한 4,12ㄴ[(졸번역)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들 안에 머무르시고 그리하여 그분 사랑(charity)이 우리들 안에서 완미하게 됩니다(is perfected)]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4-3. 그리고 1요한 4,12ㄴ[(졸번역)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들 안에 머무르시고 그리하여 그분 사랑(charity)이 우리들 안에서 완미하게 됩니다(is perfectd)]이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Ubi caritas et amor 혹은 Ubi caritas est vera?]에 있으니,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읽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 필독 권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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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작: 약 100시간 (여기에는 이어지는 유관 글들의 작성에 소요된 시간도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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